정유진은 그가 얼마나 마셨는지, 그의 주량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도 몰랐다.다만 강지찬은 걸음걸이가 꽤 안정적이었다.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위압적인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술에 취했어도 여전히 CEO의 기품은 유지하고 있었다.정유진은 그가 취한 척하며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차에 타자, 강지찬은 익숙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댔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꽤 아픈 듯 보였지만 참을성 있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그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나왔다.“지아는 괜찮아요?”강지찬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지아는 앞으로 날아 부경원에서 살 거예요.”유진은 화들짝 놀랐다.이 말은 가족들과 다퉜다는 뜻일까?강지찬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 경호원은 아마 소식을 듣고 도망쳤을 거에요. 나는 지아가 직접 나서지 않기를 원해요. 문제를 해결하기 워낙 어려워서 형준을 시켜 천천히 사람을 찾게 했어요.”그의 뜻은 지아가 김주환의 추문을 고발하는 데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증인과 증거가 없으면 이 사건을 경찰에게 맡기기 쉽지 않았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강지찬은 불쾌한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벙어리가 된 거에요?”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당신 말이 맞아요.”강지찬의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뜨겁게 응시하며 말했다.“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요.”“...” 그녀가 차에 탄 것은 인도주의적 생각으로, 더군다나 지아를 위해서였다.정유진은 그가 자신의 상처에 관해 묻길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점점 불꽃이 튀었고 두 사람 모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부경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슬아슬한 대치를 계속했다.강지찬은 얼굴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렸고 오랜 분노에 술기운에서 거의 깨어나고 있었다.그는 집 앞에 서 있으면서 정유진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깨닫고 돌아섰다.그가 돌아보자 정유진은 마당에 서 있었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
유진은 손에 든 약주 병을 잡고 결국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고 강지찬 앞에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약주를 바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에도 명자가 팔이 아플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약주를 바르고 마사지를 해주곤 했다.약주를 손바닥에 부어서 문지른 다음 손바닥이 약간 따뜻해지면 그것을 강지찬의 등에 발랐다.이런 상처는 힘을 줘서 문질러야 약효가 있었다.정유진은 손에 힘을 준 채 강하게 문질렀고 이에 강지찬이 등을 꼿꼿하게 펴며 아파했다.“편하게 힘 푸세요.”정유진이 말하며 형준에게 부탁했다.“쿠션을 가져와서 지찬 씨를 소파에 엎드리게 하세요.”형준은 서둘러 뛰어갔고 강지찬이 금방 눕자마자 유진이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지찬은 아파서 거의 소리 지르기 일보 직전이었다.“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죠?”유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마사지를 멈추지 않았다.“날 믿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던가요.”“...”지찬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얻어맞는 것보다 아픈 고통이었다. 매를 맞는 건 두어 번이면 버틸 만 했지만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정유진의 작은 손이 칼날처럼 아프게 한번, 또 한 번 상처를 파고들었다.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은 아니지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강지찬은 좋으면서도 아픔이 밀려왔고 함부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그는 아직 유진에게 속죄도 못 한 죄인 입장이라 너무 많이 까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아플수록 몸이 점차 익숙해졌는지 슬슬 아픔에 무감각해졌고 나중에 가서는 따뜻한 느낌만 느껴질 뿐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부드러운 손이 그의 등을 타고 올라가자 강지찬은 눈을 감고 다시 술기운이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유진 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유진은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떠나고 싶었다.“몰라요.”“...”잠시 시간이 지나자 유진은 그가 더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찬이 우울한
유진이 예원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고,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에 빠졌고 예원이 깨울 때까지 잠을 잤다.예원은 이미 아침을 사 왔고 걱정스러운 유진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어젯밤에 어디 간 거야?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네가 나가는 걸 봤어.”정유진은 바로 말하기 싫었지만, 예원은 바로 알아채 버렸다.“또 강지찬 때문이야?”정유진은 눈을 감은 채로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히 세수했다.“응.”차가운 물로 세수를 마친 뒤 그녀는 어젯밤 일을 간단히 알려줬다.예원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아가야, 넌 끝났어!”정유진은 조용히 죽을 마시며 물었다.“뭐가 끝났는데?”예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강지찬이 어떤 남자인지 생각해봐. 기침 한꺼번에 서울 전체가 흔들리는 대단한 존재야. 예전에 한빈을 나락에 빠트리는 것도 그저 한마디면 해결됐었잖아.”유진은 ‘그래서?’라는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이 대단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당연히 상관이 있지!” 예원은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생각해봐. 그런 남자가 자신의 모든 약점과 아픔을 네 앞에서 드러내고 있잖아. 그 사람 진심인 거야!”“,,,” 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아 계속 죽을 마시며 말했다.“생각이 너무 지나쳐. 최근에 뭔 만화책이라도 봤어?”그녀가 믿지 않자 예원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됐어, 어쩌면 강지찬도 갑자기 털어놓고 싶어졌을수도 있지, 마침 네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모든 사람에게는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게 재벌이라고 해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얼른 밥 먹어, 일하러 가야지.”정유진은 죽을 마시며 계속해서 강지찬의 상처 난 등을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집을 정리하고 회사로 향했다.차를 세우자마자 옆집 부동산 중개인 장은진이 다가왔다.“아이고 미
강지찬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다소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뭐 하고 있어요?”정유진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일하고 있어요.”이 재벌을 감히 건드릴 수 없었으니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강지찬은 아마 방금 일어난 것 같았고, 아직 비몽사몽 잠에서 깨는 중인 것 같았다.“어젯밤에 그렇게 그냥 간 거에요? 당신이란 여자, 왜 이렇게 잔인하죠? 하룻밤 머무는 게 뭐 어때서요, 그렇게 취한 사람이 당신한테 뭘 할 수 있다고 그래요?”정유진은 막 잠에서 깬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강 대표님, 벌써 낮이에요.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얼른 하세요. 혈당이 낮을 때 기분이 나빠지기 쉽거든요. 그리고, 전 당신의 화풀이 대상이 아니라고요.”어제 조금 연민을 느꼈지만, 그의 나쁜 성질머리 때문에 단번에 사라져버렸다.강지찬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번호를 차단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이번엔 강지찬 쪽에서 말문이 막혔다.“아무도 당신을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요.”“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전 일 해야 하니깐요.”유진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예원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강 대표님이야?”“응.” 유진은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다음 날 전액을 지급하기로 했다.유진은 일 처리가 신속한 사람이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 돈을 준비하고, 다음날 바로 값을 치른 다음 등기 이전을 하고 집을 사버렸다.다음날 퇴근 후 키키와 예원이 그녀의 이사를 도와줬고 정명학과 명자는 특별히 새집에서 요리를 해 동료들에게 집들이 겸 음식을 대접했다.명자는 심각한 수면 장애를 앓았기에 유진을 도와 주방을 청소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예원은 소파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 집이 내 집보다 좋아. 더 가까워서 차도 안 타고 출근해도 되잖아.”유진이 대답했다.“그러면 여기로 이사 와. 같이 살자고.”예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거절했다.“그래도 싫어. 점쟁이가 올해 나한테 좋은 인연이 올 거라고
강지찬은 정말 바빴다. 원래 그날 밤 정유진에게 이야기해야 할 일들을 잠이 드는 바람에 지금까지 질질 끌었던 것이었다.지아가 고세연을 오해하는 것처럼, 정유진도 오해하고 있지 않을까?비록 유진은 오해해도 질투하지 않을 여자지만, 강 대표는 오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는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나와 고세연 사이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약혼도 아니고, 내 여자친구도 아니에요. 이 점 기억해둬요.”쭉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던 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고세연이 그의 여자친구인지 아닌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강지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유진 씨, 할 말 없어요?”정유진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켰다.“있어요.”유진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지아는 안정감이 몹시 부족한 아이예요. 강 대표님 시간 날 때마다 지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세요. 아이가 너무 이해심이 깊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주변의 가족에게 더 마음을 쓰는 게 좋겠어요.”강지찬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마지막 말이 핵심이겠죠?”“...” 유진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알면 됐다고 외쳤다.강지찬이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당신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아닌걸요. 당신은 내 여자예요.”유진의 손이 그대로 멈춰버렸고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그녀가 채 화를 내기도 전에 전화 반대편에서 먼저 화 난 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내 여자가 되는 게 그렇게 싫어요? 뭐가 그렇게 싫은 거죠?”유진이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이런 일은 서로 동의가 필요한 게 당연하지 않나요?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요. 제가 왜 좋아해야 하죠?”이 기회에 그녀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그리고, 앞으로 당신 일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마세요. 전 아무 관심도 없
강지현은 이른 시간에 도착해 모두를 위해 아침밥을 가져왔고 예원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강 사장님, 너무 친절하세요. 우리도 막 밖에서 먹으려고 했던 참인데요.”강지현이 웃으며 말했다.“여러분이 좋아할진 모르지만, 그냥 대충 사 왔으니 어서 드세요. 전 급하지 않아요.”예원은 서둘러 모두를 불러 밥을 나눠 가졌고 유진은 딱 커피 두 잔을 내려 한 잔을 강지현에게 내밀었다.“우린 캡슐 커피만 있어서요, 지현 씨가 드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요.”강지현은 신사적으로 커피를 받았다.그의 말투는 항상 차분했고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방금 저한테 친절하다고 하셨는데, 여러분들도 이렇게 격을 차릴 필요 없어요. 저는 까다롭지 않아서요, 물만 있어도 돼요.”유진과 예원은 그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당연히 격을 차려야죠. 지금 지현 씨가 저희의 큰 고객이니깐요.”강지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하지 않았고 예원은 유진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강 사장님께서 격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그러지 않을게요. 고객과도 친구가 될 수 있죠!”강지현은 “예원 씨 말이 맞아요.”라며 맞장구를 쳤다.정유진이 제시한 방안에 대해 강지현은 몇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했고 완전히 이해했는지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방안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데요, 그대로 하죠.”정유진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도면을 작성할 때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모든 세부 사항이 완벽해지도록 노력했다.하지만 강지현의 결정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심지어 몇백억짜리 고급 별장인데 말이다!“강 사장님, 아직 시간이 이르니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유진이 참을 수 없어 말을 꺼냈고 옆에 있던 예원은 말이 없었다.얘 왜 이러지? 설계도가 한 번에 통과하는 것도 싫은 모양인가?”“유진아, 이건 강 사장님이 네 디자인 방안에 매우 만족한다는 뜻이야. 넌 네 능력을 좀 믿을 필요가 있어. 작년에 너 별장 인테리어 디자인 대상도 받았잖아.”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유진
“강 대표님, 어떻게 오셨어요?”예원이 깜짝 놀라 물었고 강지찬은 유진의 사무실로 향하며 말했다“둘러보러 왔어요.”“유진이 지금 없어요.”예원의 다급한 대답에 지찬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없다고요?”그는 당연히 믿지 않았고 예원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채 정유진의 사무실로 향했다.당연하게도 사무실에는 정유진은 없었다.강지찬은 출장에서 돌아와 바로 이곳으로 향했고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강지찬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유진 씨는 어디 갔어요?”예원은 그의 차가운 얼굴에 겁을 먹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어디 갔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강지찬이 눈썹을 찌푸렸다.“언제 돌아온다고 했어요?”“말 안 해서 모르겠네요.”그때 형준이 손에 봉지를 든 형준이 들어왔다.강지찬은 봉지를 받아들고 다시 정유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여기서 기다리려는 걸까?예원은 강지찬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기에 형준에게 물었다.“저기, 대표님이 출장에서 막 돌아오셨나요?”“네, 강 대표님은 비행기에서 내리고 그 길로 바로 여기로 오셨어요.”예원은 조용히 침을 삼키며 유진에게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깍듯하게 물 한 컵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전화 통화를 하는 강지찬이 보였다.당연히 유진에게 건 전화였다.“어디에요?”마치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집에 없는 아내에게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유진은 점점 더 독단적인 지찬의 태도에 화가 났다.“밖에서 밥 먹고 있어요.”강지찬은 밥 먹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유진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물었다.“내가 보낸 꽃은 어디 있죠?”전화기 너머의 정유진은 왜 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더군다나 강지현과 함께 있었던 터라 계속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만약 강지찬에게 꽃을 버리고 키키가 내다 팔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강지찬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예원은 강지찬이 꽃에 관해 묻자 큰일이 날
오늘은 시작부터 기분 좋은 날이었다.디자인 초안을 고객에게 보여줬을 때,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고 곧 큰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스튜디오나 정유진 개인에게도 축하할만한 경사였다.그런데 좋았던 기분은 강지찬의 전화 한통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강지찬 씨, 당신이야말로 미쳤어요?”정유진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숨이 막혔다.“당신 정말 쓰레기 같은 거 알아요?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해요? 내가 선보는 거랑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당신 정말 짜증 나는 거 알아요?”“난 강지찬 씨 정말 싫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그 말을 끝으로 정유진은 전화를 끊고 강지찬을 블랙리스트에 넣었다.너무 화가 나서 속이 쓰리고 경련이 찾아왔다.한사람한테 화가 나서 위 경련까지 일으킨 건 처음이었다.“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나오지 않자 강지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닥에 배를 끌어안고 있는 정유진을 보자 다급히 달려왔다.“괜찮아요.”정유진은 그에게 힘없이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눈앞이 새카매지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 시각, 스튜디오.강지찬은 정유진에게 한소리 들은 뒤로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아버지를 제외하고 그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사람은 정유진이 처음이었다.화가 나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가고 연락이 닿지 않았다.그는 정유진이 자신의 연락처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조예원은 옆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워낙 정유진의 목소리가 커서 옆에 있던 사람의 귀에까지 무슨 내용인지 다 들렸다.그녀는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강 대표님, 유진이 걔 선 보러 나가지 않았어요.”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예원도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유진이는 강지현 씨랑 점심 먹으러 나갔어요. 지난번에 강지현 씨가 흉터 치료제를 갖다줬거든요. 유진이가 그 일로 계속 강지현 씨에게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