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아는 요 며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 자다 깨니 5시가 넘어있었다. 마침 한가했던 강지아에게 같이 밥을 먹고 놀자고 연락이 온 것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와 약속을 잡은 사람은 어떤 잡지사의 편집장인데 필명이 화령이었다. 그녀가 소속해있는 잡지사가 전에 강지찬은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화령은 정유진에게 인터뷰 신청을 하려고 먼저 강지아를 불러 약속을 잡았다. 만나서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스탠드바로 향했다. 이 바는 전에 강지아가 소희와 함께 왔다가 온유한과 주유정을 만났던 곳이다. “여기 꽤 인기 많나 보네요? 전에 친구가 저를 데리고 온 적이 있어요.”댄스 플로어에서 멀리 떨어진 비교적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은 화령은 웨이터를 부르며 말했다. “네, 작년에 개업했는데 인기 많아요. 저도 친구들이랑 자주 놀러와요.”화령은 술을 잘 마실 것 같아 보였다. “지아 씨는 뭐 마실래요?”“저는 블러디 메리요.”화령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두 사람은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라 술을 많이 마실 계획은 없었다.강지아는 주량이 워낙 약했고 친한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끔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유진 언니에게 물어봐 드릴 수밖에 없어요.”“지아 씨가 물어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만약 실패하면 제가 기회를 찾아 직접 정 대표님께 말씀드리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잡지사는 그런 삼류 잡지가 아니에요. 진심으로 정 대표님을 인터뷰하고 싶고 개인적으로도 그녀를 매우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훤칠한 젊은이 두 명이 와서 춤을 추자고 초대했다.강지아는 별로 춤을 추고 싶지 않아 거절했지만 화령은 이런 곳에 오니 온몸의 세포가 모두 살아난 것 같아 그 제안이 매우 설렜다. “갑시다, 뛰어서 땀 좀 내는 것도 좋은데요.”강지아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 등이 떠밀려 댄스 플로어에 들어갔다. 한 번
“지아 씨, 이곳에서 당장 떠나야 해요.”화령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바닥난 상태였다. 강지아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얼른 주소록 가장 윗부분에 있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좀 전에 식사할 때 서원준이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어서 통화가 되자마자 연락처를 보지도 않고 부탁했다. “원준 씨, 리츠에 저 좀 데리러 오면 안 돼요? 저 몸이 좀 이상해요.”강지아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기를 띠고 있었으며 매우 부드럽고 달콤했다.그러자 휴대전화 너머 사람의 숨소리가 잠깐 끊기더니 마치 의자가 바닥에서 마찰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갑자기 이어졌다.“전화 끊지 말고 기다려. 내가 지금 갈 테니까.”서원준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지금의 강지아는 이미 흐리멍텅한 상태여서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령을 꼭 껴안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화령 씨, 저희 춤추러 가요.”그 말을 들은 화령 마저 뜬금없이 신나고 춤을 추고 싶었다. 화령은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강지아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아 씨, 어서 이곳에서 떠나서 지아 씨 친구 찾으러 가요.”안타깝게도 이미 늦었다. 부하들에게 두식 형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쫓아왔다. 여자 두 명이 그 남자들의 적수가 될 리가 없었기에 어떤 방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방 안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이 가득했다.강지아와 화령이 나쁜 사람들에게 밀려서 방안에 들어선 뒤 방 속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남녀들은 분명히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하나같이 옷을 적게 입고 있었고 두 쌍은 심지어 이미 함께 굴러있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강지아는 이 장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아직 정신이 말짱한 사람들도 두 사람을 보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언짢은 말투로 물었다. “두식아, 요즘에는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잖아. 이 두 미인은 어디서 데려온 거냐?
화령이 남자에게 맞은 얼굴은 화끈거리며 아파 났다. 화령은 죽도록 후회됐고 무서웠다.강지아는 현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끌어안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히 남자에게 붙어 있었을 것이다. 두식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만족해서 웃으며 말했다. “요물이 따로 없군.”이 가장 안쪽 칸은 매우 크고 은밀했다. 밖에는 몇 명의 남녀가 술을 마시고 있고, 안에 별천지가 있었다.화령은 의식이 점점 모호해지고 몸이 뜬금없이 흥분하며 평소에 없었던 욕망이 방출되는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 느낌은 아주 낯설고 무서웠지만 동시에 점점 타락되며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두식이라는 남자가 룸 안의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들었다.“사장님, 보스, 오늘 가게에 아주 괜찮은 여자 두 명이 왔어요.”그 말을 듣는 보스가 큰소리로 욕했다.“내가 요즘에는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랬지? 귀가 먹었냐, 재들 데리고 당장 꺼져.” 두식은 상사가 이렇게 그의 체면을 구길 줄 몰랐기에 조금 달갑지 않았다. “진짜 예쁜 애들이에요. 제가 직접 보스께 보여 주려고 데려온 거에요.”룸 안의 빛은 매우 어두웠고 두식이가 말하는 사장님은 가장 안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장님은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얼굴 전체가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이때 강지아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중얼거렸다. “온유한, 난 정말로 널 엄청나게 좋아해, 히히.”강지아의 목소리를 들은 사장님이 멈칫하더니 옆에 있던 여자를 밀어내고 걸어왔다. “불 켜.”방안의 불이 켜지고 눈이 휘둥그레진 강원훈은 벽에 기대어 넋이 나간 듯한 강지아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지금 강지아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강원훈은 강지아를 알아보고 겁에 질려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두식은 강원훈이 강지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로 알고 치근덕거렸다. “사장님, 이 여자애는 아주 깨끗해요. 첫눈을 봤을 때
급히 달려온 온유한 곁에 주유정이 붙어있었다. 인근 경찰서에서 파견된 두 여경이 강지아와 화령을 경찰차에 태우고 있었다. 온유한이 자기 외투를 벗어서 강지아에게 씌워주고는 그대로 끌어안고 차에 올랐다. “온유한.”기어코 따라온 주유정은 온유한의 안중에 강지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출발해요.”온유한은 밖에 있던 박이진을 불러 차에 태웠다. 주유정은 온유한의 차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강지아는 이미 정신을 잃은 지 오래고, 마치 뱀처럼 온유한 품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그녀는 정신이 매우 흥분되어 영문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그 웃음을 뭐라고 표현하자면, 마치 어떤 즐거운 분위기에 젖은 것처럼 요염하고 섹시했다. “같이 놀자, 재밌어.”“너무 좋아.”온유한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손으로 강자아의 입을 막았다. 앞에서 차를 몰고 있던 박이진은 익숙한 모양인지 백미러로 힐끔 보더니 말했다. “이상한 것을 먹어서 이러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주사 맞으면 돼요.”강지아의 입을 막고 있던 온유한은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강지아가 입을 막고 있던 손바닥을 혀로 핥았기 때문이다. 강지아는 눈을 감고 아주 행복한 표정을 한 채 칭얼거렸다. “가만히 있어.”온유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손을 놓았다가 강지아 입에서 어떤 무서운 말이 나올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에 온유한은 손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강지아의 온몸이 온유한 품에 안겨 있었는데 그녀는 뱀처럼 몸을 온유한에게 붙이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온유한은 힘들었지만,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강지아의 반쪽 얼굴을 바라보며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아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 요염한 자태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중얼거림은 그에게 한때 영원히 자라지 못했던 그 여자아이가 정말로 성장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했다.다행히 박이진이 이내 경찰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까지 따라온
강지아가 화장실이 급해서 깨어났을 때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병실의 커튼이 쳐져 있었고 방 안의 빛이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집인 줄 알고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서 한참 동안 스위치를 만졌지만 만져지지 않았다.이때 “탁”하고 불이 켜졌다.자신도 모르게 팔로 눈을 가린 강지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물 마시려고?”강지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놀란 얼굴로 온유한을 보다가 또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보며 기억은 점점 떠올렸다. 리츠에서 나온 뒤 서원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뒤에 발생한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서원준은 어디 있지? “네가 왜 여기 있어?”“그러게 내가 왜 여기 있을까?”강지아는 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온유한이 여기 있으니 그녀가 전화를 잘못 걸었을 것이 분명하다. 처음 겪는 일이지만, 그녀는 어젯밤에 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셨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그녀가 무엇을 마셨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온유한이 무엇을 보았는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구조요청 전화 한 통을 한 것 말고는 그녀들이 나쁜 놈들에 의해 어떤 방으로 끌려들어 갔던 장면만 기억하는데 방안의 광경에 매우 놀랐다.강지아는 조심스레 온유한의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 일의 엄중한 정도로 봐서 강지찬이 알게 되었다간 매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강지아는 현재 가장 긴박한 임무가 생각나서 화장실로 행했다. 어떻게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 수 있지? 지금 강지아가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온유한 이다. 느릿느릿하게 손을 씻고 세수하며 십여 분 정도 낭비했다. 온유한이 걱정되는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지아야, 아직이야?”강지아는 지금 변기에서 익사하는 것이 나가서 온유한을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온유한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강지아는 순간 놀란 기색으로 화내며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
강지아는 오빠에게 이런 큰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풀이 죽었다. 순간 자기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겨졌다. 강지아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물었다. “많이 놀랐어?”어제 강지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온유한은 계속 그녀와 통화 중이였고 박이진이 제때 도착했기 때문에 강지아가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 때문에 강지아에게 트라우마가 남을까 봐 두려웠다. 강지아는 기가 죽어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다들 나를 아직 애로 보는 거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내가 어려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거야?”온유한은 강지아의 물음에 강지찬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이건 원래 아는 사람이 적어. 그리고 이 일은 너희 오빠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너하고 말해봤자 근심하는 사람만 늘어나지.”강지아는 온유한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특히 온유한 셔츠 칼라의 립스틱 자국을 보자 더욱 슬퍼졌다.온유한은 그녀의 시선이 그의 옷깃을 스치고 기분이 나빠졌음을 눈치채자 렌즈 뒤의 눈동자가 번쩍였다.잠시 우울해하던 강지아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밖은 이미 밝았다.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피를 한 대 뽑았다.강지아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온유한의 그림자초차 보이지 않았다.간호사가 주변을 살피던 강지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남자친구 찾으세요? 그분은 지아 씨 아침 사러 나가셨어요.”강지아는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에요.”간호사가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남자친구분 정말 지아 씨를 아끼세요. 어제 지아 씨를 안고 들어오던데 지아 씨가 갑작스럽게 키스를 해대서 정말 놀랐거든요. 진짜 멋지신 분이세요.”“뭐라고요? 그 립스틱 자국들이 제가 한 짓이라고요?”“지아 씨 아니면 누구겠어요. 오는 내내 키스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다 봤어요.”온유한 셔츠 칼라만 해도 립스틱 자국이
“밥 먹어.”온유한이 아침을 꺼내고 작은 탁자 위에 열어놓았다. “나, 나는 먼저 양치하러 갈게.”강지아는 온유한을 쳐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새벽부터 지금까지 여분의 표정이 없었다. 어색한 건 강지아 뿐이었다. 씻고 나오니 따뜻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온유한이 어색한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지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강지아는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기 시작했다. “너희 오빠와 유진 씨가 좀 이따가 도착할거야.”“나 언제 퇴원해?”“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오면 퇴원할 수 있어.”“응.”두 사람이 요즘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강지아는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 먹고 있는데 갑자기 서원준이 전화 와서 그가 참가할 활동에 참여 하겠냐고 물었다. “제가 원준 씨 회사 연예인도 아니고 거기 가서 뭐해요?”강지아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랑 같이 있어 줘. 패션 이벤트도 하고, 제품 전시도 하니까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사줄게.”강지아는 지금 놀러 갈 생각이 없었기에 단칼에 거절했다. “그냥 다음에 봬요.”맞은편에 앉아있던 온유한이 통화내용을 전부 들었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지아는 그릇에 담긴 죽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강지찬과 정유진 대신 주유정이 먼저 도착했다. “지아 씨, 몸은 좀 어때요?”주유정도 아침을 준비해와서는 이미 아침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아침 먹고 있었네요? 여기 더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더 먹으세요.”말하면서 준비해온 아침을 꺼내놓았다. 강지아는 온유한이 주유정을 불러온 줄 알고 차가운 표정으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숟가락을 놓고 말했다. “다 먹었어.”온유한은 아직 반쯤 남은 죽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 먹어.”“배불러, 안 먹어.”“죽이라도 다 먹어.”강지아는 온유한을 째려보며 화를 내려고 했는데 주유정이 나서서 말렸다. “지아 씨가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세요. 여자아이들이 원
강지찬과 정유진도 얼마 안 돼 병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강지아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강지찬은 경찰청으로 발길을 옮겼고 정유진은 병원에 남아 병간호를 하기로 했다. “저 괜찮아요. 후유증도 없고, 당장 퇴원할 수 있어요.”강지아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특히 온유한과 주유정이 같이 있으니 더욱 어색하고 짜증 났다. 어젯밤 일은 어찌 됐든 좋은 일이 아니었고,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다. 중요한 것은 주유정과 온유한에게 딱 발견되었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벽에 부딪혀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언니, 저 퇴원하고 싶어요.”정유진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직 안돼, 검사결과가 나온 뒤에 결정하자.”정유진은 강지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유한과 주유정에게 말했다. “온 선생님과 주유정 씨도 얼른 일 보세요. 제가 지아와 같이 있으면 돼요. 그리고 어젯밤에 정말 고마웠어요.”“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온유한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강지아를 힐끔 쳐다보고 주유정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강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온 선생님께서 병간호를 해주셨던 거야?”정유진이 강지아에게 물었다. “맞아요.”강지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채 대답했다. “저를 동생이라고 생각하니까 오빠라는 사람이 저를 혼자 놓아둘 수 없었나 봐요.”“온 선생님과 주유정 씨 아직 사귀지 않았다는데 정말 손 놓을 생각이야? 더 노력해볼 생각 없어?”“?”“좋으면 쫓아가야지 무서워하지 말고.”강지아는 전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저 못해요.”정유진은 강지아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었기에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얼마 뒤 화령이 찾아왔길래 강지아는 정유진에게 인터뷰에 관해 물었다. 정유진은 강지아의 부탁 때문에 화령에게 인터뷰를 두 시간 내주겠다고 약속하고 화령더러 임우연과 일정을 맞추라고 했다. 화령은 성공적인 섭외에 너무 기뻐 날아갈 것 같았다. 검사결과 두 사람 모두 문
최신애는 반평생 살면서 오늘 처음으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고고한 이미지를 다 내려놓은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싸워봤다.그리고 온유한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더욱 흥분해서 그에게 물었다.“봐봐, 네가 좋아한다던 여자가 지금 어떤 꼴인지. 더 할 말이 있어?”온유한은 그저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는데 침대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된 채 바닥에는 뜯긴 콘돔이 널려져 있었다.그러나 그는 아주 덤덤하게 현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샤워 가운을 다시 입혀준 뒤 머리도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 없어요?”현채영은 재빨리 답했다.“아니요.”“그럼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온유한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최신애는 자기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온유한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끄, 끝이야?”그리고 온유한을 잡고 헝클어진 침대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보이냐고! 현장까지 잡은 마당에 넌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나 온유한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이건 저랑 채영 씨 사이의 문제니까 상관하지 마세요.”“온유한!”최신애는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변했어?”온유한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답했다.“지태주 씨와의 일은 채영 씨가 나중에 해명할 겁니다. 저는 저 사람을 믿거든요.”“아직도 믿는다고?”최신애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두 눈으로 직접 다른 남자랑 침대에서 뒹군 꼴을 보고도 믿을 수 있어?”“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죠.”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태주는 히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온 대표님은 정말 좋은 남자의 표본인 것 같네요.”그의 말에 온유한이 그를 힐끔 쳐다보자 지태주도 같이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이 상황이 그저 답답해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미쳤어, 진짜 미쳤어.”계획대로라면 오늘 밤 현채영을 바로 쫒아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안에서 나왔다.제일 앞에 서 있던 강지찬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뒤따라오던 최의현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저 사람 현채영 아니야? 저 남자는 누가야? 낯이 익네.”한규진은 호텔 로비에 막 들어선 최신애를 보고 한마디 했다.“쯧쯧, 볼거리가 생겼네.”현채영은 그 남자와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최신애가 뒤따라가자 최의현 일행도 따라갔다.“미친, 생각났어.”최의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저 자식, 그 지씨 가문 셋째 아니야? 추호와 친하던 애 있잖아. 지씨 가문에서 꽤 총애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지씨 가문 셋째?”한규진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서울에서 지씨 가문은 명성이 높은 집안은 아니지만 구설수는 꽤 많다.예전에 지씨 집안의 막내아들이 밖에서 데려왔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사생아이지만 정실 마누라가 낳은 아들보다 더 총애를 받고 있다고 했다.틀림없이 지씨 가문 셋째 아들 지태주일 것이다.지태주와 현채영이 만난다고?생각보다 재미있는 관계가 될 것 같다.최의현은 당당한 모습으로 최신애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스위트룸 방문 앞에 멈춰선 최신애는 노크를 하는 대신 손목시계만 계속 들여다봤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20여 분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온유한은 강지찬 일행과 마주쳤다.온유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지찬을 슬쩍 쳐다봤다.강지찬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온유한을 시크하게 흘겨보았다. 화가 난 건지 짜증 난 건지 알 수 없었다.옆에 있던 최의현이 온유한 앞에 다가가더니 턱으로 스위트룸 방향을 가리켰다.“어떻게 된 일이야? 현채영이 왜 지태주와...”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온유한의 말에 강지찬 일행은 온유한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남자와 여자가 한밤중에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서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설마 철학 토론이라도 하겠는가?하지만 온유한은 그들의 생각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인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