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자가 당신을 왜 찾아?”강지찬은 조예원에게 좋은 인상이 없었다. 늘 조예원이 정유진을 배신한 것을 기억했지만 그 당시 본인도 정유진에게 나쁜 놈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정유진은 화장대 앞에 앉아 귀걸이를 정리하며 말했다.“강지현에게 해외치료를 권유하래요.”강지찬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결국 삼켰다.정유진이 액세서리를 치우자 그는 곧장 욕실로 사람을 메고 들어갔다.“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강지찬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잊었어? 연우에게 남동생을 낳아주기로 했잖아.”정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남동생을 낳는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죠. 요즘 고객 접대가 많아서 술도 많이 마셨는데.”하지만 이런 것을 신경 쓸 강지찬이 아니었다. 이내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넣더니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다음날 정유진은 태안 병원을 찾았다.봄옷으로 멋을 낸 그녀는 얇은 베이지색 모직 코트 차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검사를 마친 강지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멍해졌다.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불지 않은 날씨라 두 사람은 병원 정원의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강원훈 쪽에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장형준이 아직 계속 파는 중인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정유진의 말에 강지현이 대꾸했다.“강원훈이 투자한 술집은 알아봤어요?”정유진이 대답했다.“사람 시켜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요즘 강원훈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어요.”햇볕이 약간 눈이 부시는지 강지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형은 항상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이라 잘 조사하면 조만간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정유진은 그의 말에 비아냥거림이 없는 것을 느끼고 진심 어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이때 강지현이 말했다.“내가 죽게 된 게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죠?”“해외에 폐암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있다고 하니 한번 가봐요.”강지현이 물었다.“예원 씨가 부탁한 거죠?”“지현 씨 아직 젊잖아요.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되죠. 자기 자신을
“유진이가 오늘 나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눴어요.”강지현이 조예원에게 물컵을 건넸다.이 남자의 생각을 모르는 조예원은 남자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앞으로 혼자 결정하지 말아요.”강지현의 목소리는 기복이 없었지만 분명 경고의 의미였다.조예원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요?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을까요?”강지현의 얼굴에는 점점 냉기가 돌았다.“내 병은 악화되지 않았어요. 치료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요. 감기처럼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게 아니잖아요.”“하지만 외국에 더 좋은 약과 치료방법이...”“안 간다니까요!”강지현이 콜록거렸다.“외국 의사가 폐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요?”“국내보다는 효과가 좋을 거예요.”강지현은 조예원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난 조만간 죽을 거예요. 나 같은 사람이 하루빨리 죽든 하루 늦게 죽든 뭐가 문제인데요?”조예원은 눈물을 흘렸다.“차이가 있죠. 원하는 사람 곁에 못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으면 그만큼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죠?”강지현은 그녀의 눈물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에 동요한 셈이다.그렇다.평생 정유진을 얻지 못한 그는 자신이 폐암 말기라는 소식에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말이다.단지 정유진에게 가증스러운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려놓기로 했다.조예원이 그의 정곡을 찔러도 강지찬은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그녀에 대해 그 어떤 애정도 없었다.그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냉정하게 말했다.“그만 울어요. 싸 보이니까.”조예원은 강지현의 서재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른다. 팔다리가 마비된 듯했고 심장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마비된 지 오래다.이날 정유진은 휴가를 내고 연우와 함께 마당에서 놀았다.잠시 후 조예원도 강형원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왔다“동생, 동생.”연우는 얼른 달려가 유
두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고 정유진과 강지아도 초대장을 받았다.올케와 시누이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낯익은 지인을 마주쳤다.“형수님, 저 여자 전태연 아니에요?”“맞아.”전태연은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남자는 키가 180cm가 넘는 데다 인상도 바르고 딱 봐도 괜찮아 보였다.두 사람은 웃으며 차에서 내리더니 정유진을 보자 전태연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못 본 척하며 그 남자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건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지아가 의아해하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전태연이 왜 잠잠한지 궁금했는데 그사이에 새 목표가 생긴 거였군요. 전에 누군가가 전 씨 가문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던데, 아마 저 남자가 그 결혼 상대겠죠?”“그럴 거야.” 사실 이 일은 정유진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앞서가던 전태연은 좀 당황한 듯했다. 아무리 봐도 정유진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지난해에 강지찬이 여러 사람을 줄줄이 감옥에 처넣었고 전태연도 부모에게 한동안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고세연의 최후에 관해 들은 후 서서히 깨달았다.자기 존재감을 줄이기 위해 전태연은 잠시 외국에 나갔다가, 강 씨 가문 쪽 상황이 차츰 잠잠해지자 다시 돌아왔다. 집에서는 전태연에게 멋지고 바른 청년을 소개해 주었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다.강지찬도 좋은 건 확실하지만 필경 다른 여자의 남자였다. 지금 함께 있는 이 남자야말로 완전히 전태연의 것이었다.전태연은 정유진을 보고 싶지 않아 회장에 들어가자마자 친구들을 찾으러 갔다.“우리 전 아가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네. 이것 봐, 사랑의 힘이란 참 대단한 거야. 갈수록 매력적으로 번지네.”“태연아, 너 그 가방 언제 샀어? 난 본 적이 없는데?”전태연은 손에 들고 있던 베이지색 핸드백을 테이블에 놓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당연히 못 봤겠지, 이건 우리 약혼자가 해외에서 사 온 거니까. 막 출시된 한정판인데, 국내에서는 살 수
파티에서 정유진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누가 와서 술을 권해도 전부 물로 대신했다.한 바퀴 인사를 돌고 나서야 정유진은 온미정과 함께 한쪽으로 빠져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평소에는 다들 바쁘다 보니 이런 자리에서나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온미정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지아는 어디 갔어?”“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갔어요.” 정유진이 일부러 온미정을 놀리며 말했다. “주유정도 왔더라고요. 고모님, 봤어요?”온미정은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애는 정말 변하지 않았더라. 그 애들 학창 시절에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예의 바르고 상냥하고 웃음 많았던 좋은 여자애였지.”“보아하니 고모님 집안은 그 애에 대한 인상이 꽤 좋은가 보네요?”“그렇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예의 바르고 상냥하단 말이야.”온미정이 말을 이었다. “내가 괜히 그 애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넌 이런 사람이 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대로라니. 해외에서 10년을 살면서 남자친구만 최소 세 명은 바꿨다고 들었는데 돌아와서는 여전히 순진한 소녀라는 게 참...”정유진은 주유정을 잘 몰라 뭐라고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웠지만 온 씨 가문 사람들의 태도가 궁금했다.온미정도 정유진이 주유정을 왜 언급했는지 알아채고 혀를 차며 말했다.“우리 형수는 그 애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그 한 마디로 정유진은 모든 걸 이해했다.주유정은 어쨌든 학벌이나 학식도 좋고 해외에서는 꽤 유명한 보석 디자이너였다. 이제 곧 국내에서 자기 스튜디오도 열 예정이었다.주 씨 가문은 강 씨 가문처럼 명문대가는 아니지만 강 씨 가문의 복잡한 상황을 잘 아는 온 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강 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둘째 치고 강지아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쭉 병을 앓았고 18살이 될 때까지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강지아는 변변한 학벌이 없었다. 어릴 적에 병을 치료하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초등학교조
온미정은 진주가 달린 정교한 목걸이를 받고는 마음에 들어 하며 말했다. “괜찮네, 이 목걸이 평소에 출근할 때도 잘 어울리겠어.”주유정이 또 다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진주 팔찌가 들어 있었다.“마음에 드시면 다행이에요. 이건 지아에게 주는 거예요. 정 대표님께서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번 아기 생일 파티에서 제가 지아 씨 기분 상하게 한 것 같아서요. 지아 씨가 저에게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정유진은 그 일에 대해선 몰랐지만 모른다는 내색을 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지아는 워낙 마음이 넓어서 그런 건 금방 잊어버려요. 이 선물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유정 씨가 신경 많이 써주셨네요. 나중에 스튜디오 개업하면 꼭 찾아가서 축하할게요.”주유정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 바로 그거였다. 기다리던 말을 듣고 나자 주유정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하러 갔다.하지만 주유정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정유진, 강지아, 그리고 온미정뿐이었다.정유진과 온미정은 주유정이 꼭 잘 보이고 싶은 인물들이었고 둘은 또 절친한 사이였다. 이 작전은 확실히 잘 짠 작전이었다.“봤지? 빈틈이 없어.” 온미정이 목걸이를 목에 착용하지 않고 다시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주유정은 우리 형수가 정말 좋아할 타입이야. 우리 형수는 이런 스타일에 꽂히거든. 귀국하자마자 한 일이 유한을 만나러 간 게 아니라 우리 형수를 먼저 만나서 밥을 산 거라니, 수완이 있는 애야.”정유진은 온미정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설마 형수님이 중매를 서시는 건가요?”온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유한도 너희 강지찬보다 겨우 한 살 어리거든. 그러니 우리 형수는 진작부터 속이 탔지.”그러니 요즘 주유정이 있는 곳마다 온유한이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었다.오늘 밤에도 온유한이 왔고 강지아는 온유한을 피하려고 파티에 들어오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제가 가서 지아를 찾아볼게요.”하지만 온미정이 정유진을 말렸다. “그럴
온유한은 다가오는 붉은 입술을 보고 살짝 고개를 돌렸고 막 말을 꺼내려 할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허겁지겁 떠나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지아인 것 같아.” 주유정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아가 분명 봤을 거야.”온유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무심하게 말했다. “우린 지금 그냥 친구 사이야.”주유정은 온유한의 표정을 살피며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 유한아. 나 술을 좀 마셨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술김에 그만... 방금은 순간적인 실수였어.”온유한의 안경 너머 눈동자에서 주유정에게 낯선 차가운 빛이 뿜어 나왔고 주유정은 그 차가운 시선에 마음이 무거워졌다.“걱정 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어. 너 기억 나지? 내 18살 생일 파티에서... 그때 우리가 처음으로 키스했던 거.”“기억 안 나.” 온유한은 차갑게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떠났다.주유정은 말없이 온유한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한편, 서원준은 강지아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발코니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강지아는 난간에 기댄 채 창문 커튼에 가려져 있었다. 서원준의 시선이 날카롭지 않았다면 그의 눈에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네가 웨이터에게 부탁한 따뜻한 물은 벌써 다 마셨어. 내가 부탁한 음식은 다 어디에...” 서원준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지아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너 정말 죽고 싶어? 이렇게 추운 날에 외투도 안 입고 여기서 멍하니 있으면 재밌어?”강지아는 얇은 민소매 드레스만 입고 있어서 팔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안으로 들어가!” 서원준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명령했다.“안 들어가요.” 강지아는 서원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얼어 죽으면 또 어때요?”서원준은 투정을 부리는 강지아를 보며 말이 턱 막혔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자기 재킷을 벗어 강지아에게 덮어주었다.“또 상처받았어?” 서원준은 강지아가 측은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답
“진짜 본가로 안 돌아가?”강지아는 풀이 죽어 말했다. “요 며칠 혼자 있을래요. 연우도 개학했는데 집에 혼자 있자니 재미없네요.”그 말에 정유진은 서원준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그럼 서 대표님, 우리 지아를 부탁드릴게요.”서원준은 차 문을 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 대표님, 걱정 마세요. 지아 씨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하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정유진은 더 이상 서원준과 장난칠 기분이 아니어서 머리를 돌려 강지아에게 당부했다.“며칠 있다가 꼭 돌아와. 아니면 내가 방 씨 아주머니에게 사람 몇 명을 보내라고 할게.”“아니에요.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어쨌든 밥은 잘 챙겨 먹어.”차가 길을 나서자 서원준은 웃으며 말했다. “정 대표님은 나보다 나이도 조금만 더 많은 것 같던데 널 엄마처럼 잘 챙기네.”강지아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멍하니 있었다.서원준은 강지아를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강지아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강지아는 집에 도착하자 집안의 모든 불을 켰다.사실 강지아는 혼자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었으니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했다.강지아는 기분이 우울해 잠도 오지 않아 불을 켜놓고 밤새 게임을 했다.엉덩이가 아파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바깥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고 해도 한참이나 떠 있었다.밤새 게임을 하느라 목도 아프고 배까지 고픈 강지아는 대충 세수를 하고 아래층에서 아침을 먹고 돌아와 자려고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문손잡이에 아침 식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안에는 강지아가 자주 가는 집 주변 식당에서 주문한 죽과 딤섬이 들어 있었다. 죽은 달콤한 옥수수와 새우가 들어간 죽이었고 커스터드 번과 투명한 딤섬, 그리고 강지아가 매번 주문하는 밑반찬도 함께 있었다.배는 고팠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음식이었기에 강지아는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그 식당의 직원은 강지아에게 종종
클럽에 새로운 지프차들이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코스도 개발되었다. 코스를 한 바퀴 뛰어 보니 몇 명의 남자들 중 한규진만이 흥분에 젖어있었다. “다들 왜 이래? 너희들은 정말 여자 없이 안 되냐?”최의현이 차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나른한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원래 사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혼자 오니까 눈치 보여서 나도 혼자 온 거야. 옆에서 환호해주는 사람도 없고 진짜 재미없네.”한규진은 아직 흥을 다하지 못했는지 내기를 제안하며 투덜거렸다. “옆에 여자들이 있으면 귀찮기만 하지. 자 우리 한 바퀴 다시 달려보자, 누가 지면 누가 쏘기 어때?”“싫어, 판이 작아서 재미없어.”“그럼 너는 뭐 걸고 싶은데?”“만약 네가 진다면 소송 한번 무료로 걸어줘, 내가 지면 네 맘대로 조건을 제기하고.”“그래, 콜.”두 사람은 다시 출발선에 서서 경기를 시작했다. 강지찬은 자기에게 물을 가져다준 온유한을 보며 물었다. “프라임 홀로 이사했다며?”“응.”온유한은 이 사실이 강지찬에게 들통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거리로 따지면 온 씨 가문보다 프라임 홀에서 병원까지 차로 30분 정도 더 걸린다. 강지찬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온유한도 설명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지금 온유한은 어머니 때문에 해명할 방법이 없었고 해명할 수도 없는 신세였다. 온 씨 가문.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온 주유정을 보고 최신애는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 “오늘 유한이 휴식하는 날이라 친구들이랑 자동차 클럽 갔는데. 너희 같이 갔던 거 아니었어?”주유정은 온유한이 보내온 [오늘은 바빠.] 라는 문자를 생각하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온유한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지만 주유정을 데리고 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온유한이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온유한이 친한 친구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그녀를 소개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유정은 슬픈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웃으며 대답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