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경찰을 따라 사고가 난 곳으로 간 정유진은 다시 다리가 풀렸다.“며칠 내린 비로 강 선생의 차가 이곳을 지나갈 때 산사태가 났습니다. 국도 아래가 또 절벽이고 강이라...”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말을 하던 구조팀장은 얼굴의 빗물을 닦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이런 날씨에 이곳을 지나가는 차량도 드물어요. 신고가 들어온 것도 사고가 난 후 30분 정도 지난 후이고요. 우리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강지찬 씨의 차가 절벽 아래로 전복되었어요. 운전기사는 운전석에 끼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산 중턱에서 찾았어요.”산사태로 국도가 막혔다. 이때 차량이 지나가면 매몰되기 마련이다.정유진은 산 아래로 망가진 차를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지찬 씨는 묻히지 않았을 겁니다.”정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온유한은 우산을 받쳐주며 말을 잇지 못했다.강지찬이 살아있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비록 산사태에 묻히지 않았더라도 강에 빠지면 똑같이 위험하다.벌써 열몇 시간이나 지났고 비도 계속 내리고 있다.산 아래로 수시로 돌멩이가 굴러떨어졌다. 구조팀장은 다급하게 계속 재촉했다.“여러분,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산이 계속 무너질 것 같습니다. 이곳은 이미 완전히 통제되었어요. 오래 머무르면 안 됩니다.”떠난다는 말에 정유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런데... 지찬 씨가 밑에 있으면요?”이 말에 온유한은 견디기 힘들었다. 함께 자란 강지찬이 이렇게 사라졌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형수님, 구조대 말 들어요.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안 돼요. 만약 진짜 밑에 있으면 그러면...”구조팀장은 얼굴의 빗물을 또 한 번 닦았다.“어제 우리가 수색해봤습니다. 근처에 살아있는 생명체 징후가...”“하지만 방금 말했잖아요. 묻혔는지 확실하지 않다고요.”“그건, 그건...”가족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완곡히 표현한 것이다.구조팀장은 마음이 급했다. 이때
또 하루가 지났지만 구조대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정유진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뒤쫓아 다녔지만 소득이 없었다.강지찬의 신분 때문에 사고 소식은 잠시 봉쇄되었다. 경찰 측에서도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 수색 작업도 실명을 거론하며 하지 않았다.밤이 되자 비가 그쳤지만 정유진은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졸음이 전혀 쏟아지지 않았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평소 강인하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밖에서 온유한이 구조팀장과 이야기하고 있다.“그 구간은 예전에 붕괴한 적이 있었어요. 강에 돌도 많고요. 온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년간의 구조 경험에 따라 보면 강 대표님은 강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수로를 따라 몇십 킬로미터를 찾아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요.”온유한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다른 가능성은 없나요? 이제 막 결혼했어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인데… 회사와 가족 모두가 이 사람을 필요로 해요. 이렇게 죽을 수 없다고요.”구조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운이 좋길 바랄 뿐이에요. 그런데 이런 날씨에...”이때 문이 열렸다. 정유진이 창백한 얼굴로 입구에 서 있었다.온유한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형수님 안 주무셨어요?”정유진이 구조팀장을 보고 물었다.“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정유진은 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분명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싶었다.“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세요. 내일 계속하죠.”구조팀장은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수고하셨습니다.”정유진이 다시 문을 닫았다.잠시 후 온유한은 그녀에게 야식을 가져다주었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먹고 싶지 않다.’라는 말만 했다.주위에 위로해줄 만한 여자 한 명이 없기에 온유한은 어쩔 수 없이 강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다음날 강지아는 울면서 왔다.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본 온유한은 그녀를 부른 것을 후회했다.그런데 이미 여기까지
저녁 무렵이 되자 마침내 방 안의 울음소리가 점차 그쳤다.온유한은 낮에 시내를 다녀왔다.“장형준은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내일쯤이면 깨어날 것 같아요.”정유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찾아가 볼게요.”구조 팀장은 손에 가방을 들고 황급히 들어왔다.“정유진 씨, 이것 좀 확인해 주세요. 혹시 강지찬 씨의 신발인가요?”정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방 안에는 물에 푹 젖은 검은 구두가 있었다.하지만 신발 브랜드는 아주 익숙하다. 강지찬이 신던 브랜드이다.신발을 움켜쥐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강지아도 달려왔다. 신발을 보는 순간 바로 무너져 버렸다.“오빠 신발이에요. 그런데 우리 오빠는요. 어디 있어요?”구조 팀장은 미안한 듯 말했다.“하류에서 60여㎞ 떨어진 곳에서 신발을 찾았어요. 강지찬 씨는...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어요.”신발을 강에서 찾았다는 것은 강지찬이 물에 빠졌다는 뜻이다.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60시간이 지났다. 모두 강지찬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생각했다.정유진은 신발을 꼭 껴안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깨어나 보니 강지아가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새언니, 우리 오빠가 정말로 죽었을까요?”그 말에 정유진의 가슴은 또 한 번 지끈지끈 아팠다.강지아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인생의 의미를 잃은 듯한 정유진의 모습에 당황했다.“새언니, 언니는 절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 유한 오빠가 그러는데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요? 잠도 안 자고.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요?”말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비는 또다시 내리기 시작했다.비는 절망적으로 많이 내리고 있었다.“새언니, 일어나서 뭐 좀 드세요.”강지아는 울면서 말했다.“우리 오빠가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새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연우는 어떻게 해요?”
온유한과 강지아가 달려왔을 때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는 정유진을 발견했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 울먹이며 말했다.“새언니가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온유한이 강지아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다가와 정유진을 잡아당겼다.호텔에 돌아와 샤워하고 나온 정유진을 본 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요 며칠 살이 많이 빠졌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은 이미 시뻘게져 있었다.“새언니, 왜 이렇게 변한 거예요? 우리 오빠가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며칠 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던 정유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젖은 머리카락을 잡고 몸을 돌려 다시 욕실로 갔다.20분 정도 지난 후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화장하고 파운데이션으로 다크서클을 감췄다. 사람도 많이 생기 있어 보였다.머리도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옷도 갈아입어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지아 말이 맞아, 네 오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게으르고 지저분한 내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지.”“새언니, 우리 오빠...”강지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딱 벌렸다.정유진은 진지하게 말했다.“네 오빠 안 죽었어!”때마침 온유한이 아침을 갖고 온 것을 보고 정유진은 힘을 내 먹기 시작했다.강지아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유한 오빠, 우리 새언니가 충격을 너무 많이 받은 거 아니야?”온유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정유진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기다린 온유한은 진지한 얼굴로 마주 앉아 말했다.“임우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지찬이 형 일을 K그룹 임직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수님, 이만 돌아가서 봐야 할 것 같아요.”“안 갈래요. 여기 남아서 지찬 씨를 찾아야 해요.”“지찬이 형은...”골든 타임이 지났기에 강지찬이 살아있을 리가 없었지만 온유한은 강지찬이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형수님, K그룹에도 아이에게도 형수님이 필요했다.”정유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지찬 씨에게도 제가 필요해요.”정유진과는 얘기를 많이 나눈 적이 별로 없던
강씨 저택.강지찬이 교통사고로 실종된 지 며칠이 지났다는 소식을 들은 강홍식은 멍해졌다.“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집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어르신, 헛소리 아니에요. 며칠 전, 사고가 나서 사모님이 급히 달려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K그룹의 주주들도 모두 알고 있어요. 오늘 둘째 도련님이 회장 직무대행을 선출하기 위해 주주총회를 소집했어요. 어르신, 이제 어떻게 하죠?”강홍식은 연이은 소식에 넋이 나갔다.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K그룹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지찬아, 지찬아 너 진짜...”고세연은 강홍식을 부축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어르신, 빨리 회사에 가야죠.”한평생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강홍식은 순간 넋이 나갔다.“회사에 가서 뭐 해?”“회사에 가서 큰 틀을 잡아야죠. 잘 생각해봐요. 만약 지찬이가 돌아오지 못하면 회사는 남의 손에 넘어갈 거 아니에요? 그건 우리 집안 회사라고요.”“닥쳐!”강홍식은 고세연의 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감히 내 아들을 저주해? 지찬이가 왜 못 돌아오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단지 실종되었을 뿐이야. 분명 돌아올 거야.”하지만 고세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비가 많이 오고 있는데 강지찬을 찾았다면 진작 찾았어야 했다. 정유진과 강지아, 그리고 온유한도 그쪽에서 찾고 있는데 소식이 없는 것은 강지찬이 죽었다는 뜻이다.잘 죽었다!고세연은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이내 슬픈 얼굴을 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을 얘기하는 거잖아요.”“만약이라는 것은 없어!”강지찬이 죽으면 어떻게 할지, 이 집안은 어떻게 이어나갈지 강홍식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못난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고세연은 너무 미웠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어르신, 정말 오해예요. 빨리 회사에 가서 지찬이 회사를 지켜줘야죠. 잊지 마세요. K그룹은 지찬이와 강지현이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
상당히 긴장된 회의 분위기 때문에 최의현은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다.강원훈은 평소의 건들거리는 모습을 감추고 아무 표정 없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다른 주주들은 모두 모여서 뭐라고 말하고 있다.강지현은 원래 강지찬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강지현이 대표이사 대행을 지원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지지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했다.최의현이 그의 직접 멱살을 잡고 사람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네가 그런 거 아니야?”강지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 찻물이 바닥에 쏟아졌다.“무슨 말이죠?”“이 자식, 바보 같은 척하지 마!”최의현이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냈다.“네가 지찬이 해코지한 거 아니냐고, 말해봐!”강지현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천재지변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강지찬에게 일이 생긴 것을 들은 사람들은 강지찬을 걱정하거나 회사를 걱정하거나 어쨌든 걱정하고 있었다. 오직 강지현만이 걱정은커녕 이 기회를 틈타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다.이런 모습에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수중의 주식이 매우 수상했다.“너와 상관이 없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니까!”최이현은 강지현을 홱 던지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그 위협에도 강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훑으며 웃었다.“우리 K그룹처럼 이렇게 큰 회사에 계속 리더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들은 말에 의하면 형이 실종된 지 80시간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날씨를 생각해보세요. 절대 좋은 소식이 없을 거예요.”최의현은 테이블을 ‘펑’하고 내리쳤다.“너 이 자식! 지금 사고 나기를 바라는 거야?”그러자 강지현을 지지하는 주주들이 말했다.“최 부사장님, 진정하세요. 강 대표님 대행일 뿐이에요.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자리에 앉으시면 되잖아요?”말은 그럴 듯하지만 강지찬이 진짜 돌아올 수 있을까?정말 못 돌아오면? K그룹의 리더 자리가 계속 공석일 수는 없지 않은가.원래 강지찬의
마음을 굳힌 최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강지현과 고세연에게 전쟁 같은 현장을 맡겼다. 물고 물어뜯는 사이 시간을 좀 벌 수 있다.고세연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지찬이는 잠시 실종됐을 뿐이에요. 경찰들도 아직 사람을 찾고 있고요. 그런데 다들 여기에 모여 강 대표의 권한을 나눠 가지려고 하다니요. 여러분, 사람이 이 정도로 양심이 없으면 안 되죠? 요 몇 년 동안 지찬이 덕에 다들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데요.”이 말에 조금 전까지 흔들렸던 사람들의 얼굴이 빨개졌다.최의현은 그런 모습이 우스웠다. 이 사람들에게 바로 말들을 대꾸하고 싶었지만 한 회사에 있는 이상 결코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강지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마디 했다.“우리는 권한을 나누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강 대표님이 안 계시잖아요. 그래서 단지 대표이사 권한 대행을 찾아서 일을 맡기려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권한을 나누는 것입니까?”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맞아요.”그러자 고세연이 말했다.“그렇다면 우리 어르신이 적임자 아닌가요? 지찬이의 친아버지이니까요. 친아버지가 아들 대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모두들 깜짝 놀랐다.“그럴 수는 없죠. 어르신은 회사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맞아요. 어르신은 집에서 쉬면서 여생을 보내세요. 회사는 우리가 할 테니.”“왜 안 되는데요? 배의 방향을 정할 지휘자가 필요한 거잖아요. 회사에 다들 계시는데 같이 운영하면 되지 않나요?”고세연은 시선을 돌려 강원훈을 향해 말했다.“셋째 도련님, 어떻게 생각하세요?”강원훈은 계속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위해 족보에 올리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고세연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회사 일에 진심을 다하면 대표이사 직무대행은 누가 해도 찬성이죠.”강원훈은 능구렁이처럼 난처한 상황을 매끄럽게 빠져나갔다.화가 치민 고세연을 본 강지현 그제야 입을 열었다.“큰아버지가 나서서 큰형을 보호하는 것
참석한 사람들은 강원훈이 10%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강지현의 절반에 불과하다.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이때 서류 봉투를 연 누군가가 안에 있는 서류를 보고 멍해졌다.이 사람은 강지현을 편들던 사람으로 서류와 강지현을 번갈아 보더니 강원훈을 향해 피식 웃었다.“셋째 어르신, 주식이 22%가 되셨어요?”모두가 일제히 강원훈을 쳐다보았다.최의현도 놀랐다. 강원훈이 K그룹의 주식을 이렇게 많이 모아놓고도 깊이 감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오늘 주주총회에 소액주주 두 명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니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아니나 다를까 강원훈이 대답했다.“김 회장과 조 회장은 이미 나이가 많죠. 한 분은 개인 사정 때문에 지분을 넘겨줬고 다른 한 분은 지난번에 K그룹이 큰 여론에 휘말렸을 때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을 모두 팔았어요. 어차피 K그룹 주식이기에 조금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많이 모인 것 같네요.”두 손을 펼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말은 그럴듯하지만 늑대의 야심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강지찬에게 일이 생기자 이 집안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서기 시작한 것을 보며 최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생각 밖으로 강원훈이 끼어들자 강지현의 눈빛은 싸늘해졌다.고세연이 코웃음을 쳤다.“어떤 사람들은 진작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네요. 이렇게 만단의 준비까지 다 해놓고 있었다니.”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강원훈은 당연히 기회를 잡아야 했다.강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지현아, 이견 없지?”강지현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그저 웃으며 한마디만 했다.“숙부, 패배를 인정할게요.”결국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내민 강원훈의 펀치에 그대로 당했다.강원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지현이도 반대하지 않으니 여러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죠?”최의현은 반대하고 싶었지만 강원훈의 손에 있는 주식은 강지찬이 준 것이었기에 반대할 수 없었다.임우연을 쳐다보자 임우연은 그에게 몰래 OK 손짓을 했다.강원훈은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