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이 되자 마침내 방 안의 울음소리가 점차 그쳤다.온유한은 낮에 시내를 다녀왔다.“장형준은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내일쯤이면 깨어날 것 같아요.”정유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찾아가 볼게요.”구조 팀장은 손에 가방을 들고 황급히 들어왔다.“정유진 씨, 이것 좀 확인해 주세요. 혹시 강지찬 씨의 신발인가요?”정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방 안에는 물에 푹 젖은 검은 구두가 있었다.하지만 신발 브랜드는 아주 익숙하다. 강지찬이 신던 브랜드이다.신발을 움켜쥐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강지아도 달려왔다. 신발을 보는 순간 바로 무너져 버렸다.“오빠 신발이에요. 그런데 우리 오빠는요. 어디 있어요?”구조 팀장은 미안한 듯 말했다.“하류에서 60여㎞ 떨어진 곳에서 신발을 찾았어요. 강지찬 씨는...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어요.”신발을 강에서 찾았다는 것은 강지찬이 물에 빠졌다는 뜻이다.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60시간이 지났다. 모두 강지찬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생각했다.정유진은 신발을 꼭 껴안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깨어나 보니 강지아가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새언니, 우리 오빠가 정말로 죽었을까요?”그 말에 정유진의 가슴은 또 한 번 지끈지끈 아팠다.강지아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인생의 의미를 잃은 듯한 정유진의 모습에 당황했다.“새언니, 언니는 절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요. 유한 오빠가 그러는데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요? 잠도 안 자고.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요?”말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비는 또다시 내리기 시작했다.비는 절망적으로 많이 내리고 있었다.“새언니, 일어나서 뭐 좀 드세요.”강지아는 울면서 말했다.“우리 오빠가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새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연우는 어떻게 해요?”
온유한과 강지아가 달려왔을 때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는 정유진을 발견했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 울먹이며 말했다.“새언니가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온유한이 강지아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다가와 정유진을 잡아당겼다.호텔에 돌아와 샤워하고 나온 정유진을 본 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요 며칠 살이 많이 빠졌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은 이미 시뻘게져 있었다.“새언니, 왜 이렇게 변한 거예요? 우리 오빠가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며칠 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던 정유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젖은 머리카락을 잡고 몸을 돌려 다시 욕실로 갔다.20분 정도 지난 후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화장하고 파운데이션으로 다크서클을 감췄다. 사람도 많이 생기 있어 보였다.머리도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옷도 갈아입어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지아 말이 맞아, 네 오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게으르고 지저분한 내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지.”“새언니, 우리 오빠...”강지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딱 벌렸다.정유진은 진지하게 말했다.“네 오빠 안 죽었어!”때마침 온유한이 아침을 갖고 온 것을 보고 정유진은 힘을 내 먹기 시작했다.강지아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유한 오빠, 우리 새언니가 충격을 너무 많이 받은 거 아니야?”온유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정유진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기다린 온유한은 진지한 얼굴로 마주 앉아 말했다.“임우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지찬이 형 일을 K그룹 임직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수님, 이만 돌아가서 봐야 할 것 같아요.”“안 갈래요. 여기 남아서 지찬 씨를 찾아야 해요.”“지찬이 형은...”골든 타임이 지났기에 강지찬이 살아있을 리가 없었지만 온유한은 강지찬이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형수님, K그룹에도 아이에게도 형수님이 필요했다.”정유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지찬 씨에게도 제가 필요해요.”정유진과는 얘기를 많이 나눈 적이 별로 없던
강씨 저택.강지찬이 교통사고로 실종된 지 며칠이 지났다는 소식을 들은 강홍식은 멍해졌다.“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집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어르신, 헛소리 아니에요. 며칠 전, 사고가 나서 사모님이 급히 달려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K그룹의 주주들도 모두 알고 있어요. 오늘 둘째 도련님이 회장 직무대행을 선출하기 위해 주주총회를 소집했어요. 어르신, 이제 어떻게 하죠?”강홍식은 연이은 소식에 넋이 나갔다.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K그룹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지찬아, 지찬아 너 진짜...”고세연은 강홍식을 부축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어르신, 빨리 회사에 가야죠.”한평생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강홍식은 순간 넋이 나갔다.“회사에 가서 뭐 해?”“회사에 가서 큰 틀을 잡아야죠. 잘 생각해봐요. 만약 지찬이가 돌아오지 못하면 회사는 남의 손에 넘어갈 거 아니에요? 그건 우리 집안 회사라고요.”“닥쳐!”강홍식은 고세연의 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감히 내 아들을 저주해? 지찬이가 왜 못 돌아오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단지 실종되었을 뿐이야. 분명 돌아올 거야.”하지만 고세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비가 많이 오고 있는데 강지찬을 찾았다면 진작 찾았어야 했다. 정유진과 강지아, 그리고 온유한도 그쪽에서 찾고 있는데 소식이 없는 것은 강지찬이 죽었다는 뜻이다.잘 죽었다!고세연은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이내 슬픈 얼굴을 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을 얘기하는 거잖아요.”“만약이라는 것은 없어!”강지찬이 죽으면 어떻게 할지, 이 집안은 어떻게 이어나갈지 강홍식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못난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고세연은 너무 미웠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어르신, 정말 오해예요. 빨리 회사에 가서 지찬이 회사를 지켜줘야죠. 잊지 마세요. K그룹은 지찬이와 강지현이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
상당히 긴장된 회의 분위기 때문에 최의현은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다.강원훈은 평소의 건들거리는 모습을 감추고 아무 표정 없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다른 주주들은 모두 모여서 뭐라고 말하고 있다.강지현은 원래 강지찬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강지현이 대표이사 대행을 지원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지지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했다.최의현이 그의 직접 멱살을 잡고 사람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네가 그런 거 아니야?”강지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 찻물이 바닥에 쏟아졌다.“무슨 말이죠?”“이 자식, 바보 같은 척하지 마!”최의현이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냈다.“네가 지찬이 해코지한 거 아니냐고, 말해봐!”강지현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천재지변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강지찬에게 일이 생긴 것을 들은 사람들은 강지찬을 걱정하거나 회사를 걱정하거나 어쨌든 걱정하고 있었다. 오직 강지현만이 걱정은커녕 이 기회를 틈타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다.이런 모습에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수중의 주식이 매우 수상했다.“너와 상관이 없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니까!”최이현은 강지현을 홱 던지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그 위협에도 강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훑으며 웃었다.“우리 K그룹처럼 이렇게 큰 회사에 계속 리더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들은 말에 의하면 형이 실종된 지 80시간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날씨를 생각해보세요. 절대 좋은 소식이 없을 거예요.”최의현은 테이블을 ‘펑’하고 내리쳤다.“너 이 자식! 지금 사고 나기를 바라는 거야?”그러자 강지현을 지지하는 주주들이 말했다.“최 부사장님, 진정하세요. 강 대표님 대행일 뿐이에요.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자리에 앉으시면 되잖아요?”말은 그럴 듯하지만 강지찬이 진짜 돌아올 수 있을까?정말 못 돌아오면? K그룹의 리더 자리가 계속 공석일 수는 없지 않은가.원래 강지찬의
마음을 굳힌 최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강지현과 고세연에게 전쟁 같은 현장을 맡겼다. 물고 물어뜯는 사이 시간을 좀 벌 수 있다.고세연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지찬이는 잠시 실종됐을 뿐이에요. 경찰들도 아직 사람을 찾고 있고요. 그런데 다들 여기에 모여 강 대표의 권한을 나눠 가지려고 하다니요. 여러분, 사람이 이 정도로 양심이 없으면 안 되죠? 요 몇 년 동안 지찬이 덕에 다들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데요.”이 말에 조금 전까지 흔들렸던 사람들의 얼굴이 빨개졌다.최의현은 그런 모습이 우스웠다. 이 사람들에게 바로 말들을 대꾸하고 싶었지만 한 회사에 있는 이상 결코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강지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마디 했다.“우리는 권한을 나누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강 대표님이 안 계시잖아요. 그래서 단지 대표이사 권한 대행을 찾아서 일을 맡기려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권한을 나누는 것입니까?”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맞아요.”그러자 고세연이 말했다.“그렇다면 우리 어르신이 적임자 아닌가요? 지찬이의 친아버지이니까요. 친아버지가 아들 대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모두들 깜짝 놀랐다.“그럴 수는 없죠. 어르신은 회사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맞아요. 어르신은 집에서 쉬면서 여생을 보내세요. 회사는 우리가 할 테니.”“왜 안 되는데요? 배의 방향을 정할 지휘자가 필요한 거잖아요. 회사에 다들 계시는데 같이 운영하면 되지 않나요?”고세연은 시선을 돌려 강원훈을 향해 말했다.“셋째 도련님, 어떻게 생각하세요?”강원훈은 계속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위해 족보에 올리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고세연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회사 일에 진심을 다하면 대표이사 직무대행은 누가 해도 찬성이죠.”강원훈은 능구렁이처럼 난처한 상황을 매끄럽게 빠져나갔다.화가 치민 고세연을 본 강지현 그제야 입을 열었다.“큰아버지가 나서서 큰형을 보호하는 것
참석한 사람들은 강원훈이 10%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강지현의 절반에 불과하다.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이때 서류 봉투를 연 누군가가 안에 있는 서류를 보고 멍해졌다.이 사람은 강지현을 편들던 사람으로 서류와 강지현을 번갈아 보더니 강원훈을 향해 피식 웃었다.“셋째 어르신, 주식이 22%가 되셨어요?”모두가 일제히 강원훈을 쳐다보았다.최의현도 놀랐다. 강원훈이 K그룹의 주식을 이렇게 많이 모아놓고도 깊이 감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오늘 주주총회에 소액주주 두 명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니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아니나 다를까 강원훈이 대답했다.“김 회장과 조 회장은 이미 나이가 많죠. 한 분은 개인 사정 때문에 지분을 넘겨줬고 다른 한 분은 지난번에 K그룹이 큰 여론에 휘말렸을 때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을 모두 팔았어요. 어차피 K그룹 주식이기에 조금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많이 모인 것 같네요.”두 손을 펼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말은 그럴듯하지만 늑대의 야심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강지찬에게 일이 생기자 이 집안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서기 시작한 것을 보며 최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생각 밖으로 강원훈이 끼어들자 강지현의 눈빛은 싸늘해졌다.고세연이 코웃음을 쳤다.“어떤 사람들은 진작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네요. 이렇게 만단의 준비까지 다 해놓고 있었다니.”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강원훈은 당연히 기회를 잡아야 했다.강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지현아, 이견 없지?”강지현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그저 웃으며 한마디만 했다.“숙부, 패배를 인정할게요.”결국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내민 강원훈의 펀치에 그대로 당했다.강원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지현이도 반대하지 않으니 여러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죠?”최의현은 반대하고 싶었지만 강원훈의 손에 있는 주식은 강지찬이 준 것이었기에 반대할 수 없었다.임우연을 쳐다보자 임우연은 그에게 몰래 OK 손짓을 했다.강원훈은
강지찬이 유언장을 작성한 사실은 임우연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그가 직접 가서 처리했기 때문이다.임우연이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지난번 정 대표님이 다쳐 병원에 입원한 뒤 강 대표님이 유언장을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이 일도 마무리가 됐고요. 유언장에는 K그룹에서의 강 대표의 모든 지분을 정 대표님에게 상속하겠다고 적혀있습니다.”“말도 안 돼!”고세연이 제일 먼저 일어섰다.“지찬이가 어떻게 모든 지분을 한 사람에게 줄 수 있어! 여기 친아버지도 있는데!”정유진은 유언장에 충격을 받은 듯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찬은 왜...임우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유언장은 이미 공증까지 마쳤고 증인으로 변호사까지 있으니 다들 의심이 되면 이 서류를 확인하세요. 게다가 정 대표는 남이 아니라 강 대표의 아내입니다.”고세연은 서류를 낚아채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럴 리가...”유언장에는 주식 외에도 강지찬 명의의 부동산은 연우와 강지아에게 준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지만 서류를 아무리 뒤져도 강홍식의 이름은 없었다.“말도 안 돼! 이 유언장은 가짜야!”고세연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고 강홍식도 화가 난 듯했다. 친아들의 눈에 아버지의 자리가 이토록 없을 줄은 정말 몰랐다.물론 강홍식의 수중에도 평생을 다 쓰지는 못할 정도로 많은 자산이 있다.하지만 이건 다르다.강홍식은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아버지로서 실패했다고 느꼈다.다가와 고세연의 손에 있던 서류를 빼앗아 본 강원훈도 어리둥절했다.유언장을 본 다른 주주들도 이 유언장이 진짜라는 것을 확신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최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정유진, 정 대표가 K그룹 회장 직무대행을 제안합니다. 다들 이견 없으시죠?”강지현이 제일 먼저 나서서 말했다.“전적으로 동의합니다.”강지현이 동의하자 그의 편에 섰던 주주들도 당연히 이견이 없었고 결국 강원훈 한 명만 남게 되었다.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모
K그룹 내부는 안정되었지만 그에 따라 강지찬의 실종 소식도 숨길 수 없었다.언론은 소식을 듣고 몰려와 K그룹의 문 앞을 꽉 메웠다.K그룹 계열의 크고 작은 회사들도 소란을 피웠고 K그룹과 협력하고 있는 기업들도 회장실에 계속 전화했다.정유진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지만 겉으로는 아주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분명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이때 강지현이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기자회견을 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최이현과 임우연이 눈을 마주쳤다. 비록 강지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K그룹의 위아래 협력업체들뿐만 아니라 여론도 통제해야 했다.게다가 새로운 프로젝트는 강지찬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기에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비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정유진은 최의현과 임우연의 의견을 묻고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정 대표님만 준비되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어차피 기자들은 아래층에 있으니까 바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준비해 주세요.”그 말에 임우연이 대답했다.“대답할 질문들도 모두 준비해 놓겠습니다.”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라 임우연은 서둘러 안배했다.강지현이 말했다.“좀 이따 최의현 씨가 옆에 있을 테니 긴장하지 마세요. 기자회견에 온 기자들은 모두 K그룹과 협력했던 기자들이라 난처한 질문은 하지 않을 거예요.”하지만 정유진은 지금 강지현을 상대할 기분이 아닙니다.반면 갑작스럽게 자기 이름이 언급된 최의현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최의현은 아주 바쁘다. 성원을 인수한 후 더 바빠졌지만 그렇다고 강지현이 정유진과 함께 있게 할 수는 없었다.설령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같이 있는 강지현까지 데리고 나가야 했다.“강지현 씨, 형수님이 좀 피곤한 것 같으니까 푹 쉬실 수 있게 우리가 나갈까요?”강지현도 굳이 남아서 남의 미움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지찬은 죽었고 이제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그렇다 보니 정유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