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층에 있는 임미연은 근무시간 내내 땡땡이를 부리지 못했다. 정유진의 방에는 잠시 어슬렁거리다가 돌아갔다.“정 대표님, 저 여자 누구예요. 강 대표님의 친척이에요?”정유진은 ‘응’이라고 대답한 후, 시간을 보더니 강지찬을 찾으러 올라가기로 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옆 탕비실에서 누군가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서류를 전달하러 내려갔는데 19층에 있는 임미연이 사모님과 함께 있더라고. 말끝마다 형수님 형수님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었어.”“그 여자 연기는 정말 잘하네. 말끝마다 지찬 오빠, 지찬 오빠. 강 대표를 당장이라도 눈에 넣을 기세였어. 나는 왜 강 대표의 사촌 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 눈빛이 이상해.”“사촌 동생이라고? 순진하긴. 19층 동료가 그러는데 집안이 강 대표 댁과 친척 관계일 뿐이지 아무런 관계가 없대.”“그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강 대표님이 사모님과 곧 결혼할 예정인데 설마 그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건 아니겠지?”“누가 알겠어. 그런데 본인이 사모님과 비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 무미건조한 얼굴은 사모님 앞에서는 감히 고개도 쳐들지 못할 거야.”“우리가 괜히 넘겨짚은 것일 수도 있잖아. 강 대표를 진짜 사촌오빠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매번 올라갈 때마다 2분도 안 돼서 다시 내려갔어.”강지찬은 지금 외국인 바이어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유진이 들어가자 먼저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정유진은 예전에 이 사람이 일하는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번 보고 어리둥절해졌다.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두 손은 깍지를 끼고 있었다. 느긋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자세였다.러시아어로 얘기를 하고 있어 정유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통역 없이 거래처와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고 태도로 보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 것 같다.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했던가, 지금의 강지찬이 바로 그렇다.듬직하고, 예지적이며, 마음가짐이 확고하다. K그룹은 절대 손에서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이런 성숙하고 돈이
강지찬은 임우연을 호텔로 보내 임미연의 일을 처리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일이 좀 심각해지자 임미연은 너무 놀라 계속 울기만 했다.임우연은 어린 소녀를 상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 그 전에 유일하게 대표님이 시킨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강지찬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강지찬은 굳은 얼굴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지배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계속 사과만 했다.“강 대표님, 죄송했다. 임미연 씨가 친척인 줄 몰랐어요. 진작 알았더라면 그 사람들이 임미연 씨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잘 모셨을 텐데...”“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찬이 임우연에게 묻자 임우연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미연 씨가 양아치에게 찍혀서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요.”강지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사람은?”임우연은 그게 누구인지 묻는 것임을 알았다.“그 사람은 경찰이 데려갔어요. 그쪽은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아마 한동안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임미연 씨는 아직 방에 있습니다.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에요.”강지찬은 짜증이 났지만 인내심을 갖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호텔 지배인이 뒤에서 작은 소리로 임우연에게 물었다.“그 아가씨가 진짜로 강 대표님의 사촌 동생이에요?”임우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아니면요?”호텔 지배인은 가십을 좋아한다.“아주 예쁘던데 진짜로 강 대표님이 밖에서 데리고 다니는... 호텔이 K그룹에서 가까우니까 강 대표님이 일하시다가 힘드시면 좀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임 비서님, 사실대로 말해봐요. 임미연이 강 대표님의 사람이라면 제가 바로 스위트룸으로 옮길게요. 매일 경호원을 보내 지키고 있을게요. 어때요?”임우연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똑똑한 척하지 마세요. 경고하는데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 임미연은 진짜로 강 대표님의 고향 친척이에요. K그룹에서 일하고 있고요. 당분간 숙소가 없어서 여기 호텔에 묵는 거예요.”호텔 지배인은 임우연의 말
강씨 본가.임미연의 방은 강홍식의 집안에 배치되었다.고세연은 비아냥거렸다. 자기가 십여 년을 계획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계집애가 감히 부경원으로 이사 가려고 망상하다니, 허허.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다독이는 척했다.“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의도가 드러나면 강지찬의 반감만 살 겁니다.”임미연은 고세연이 눈에 거슬렸다. 너무 역겨웠다.나이가 어린 탓에 무슨 생각이든 얼굴에 조금 드러났다.“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나는 사촌 동생이에요. 사촌 동생이 오빠 집에 가서 살려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요?”강지찬은 돈이 많으면서도 그녀에게 집을 사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현거에 들어가서 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비어 있는 집인데 들어가서 사는 게 어떻단 말인가?졸업 후 강씨 집안의 친척들과 접촉하고 나서야 진짜 부자들이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강지찬이 적어도 어느 정도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에게 한 달 월급이 백만 원인 일을 주었다.백만 원? 정유진의 피어싱 한 쌍 정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 멍청한 사람은 없어요.”고세연은 일부러 그녀를 위로했다. 강지찬과 정유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좋았다.“미연 씨, 조심해요. 두 사람 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임미연은 짜증이 났다.“이렇게 쫓겨났는데 나더러 어떡하라고요.”고세연도 방법이 없다. 사실 강지찬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임미연이 좀 멍청한 것 같다. 만약 이 사이에 자신이 끼어든 걸 알면 강지찬은 분명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고세연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지난번에 지현 오빠와 정유진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지찬 오빠가 아무 반응이 없어요.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해요?”임미연은 이를 갈았다.정유진이 K그룹에 출근한 이후부터 임미연과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졌다.매번 임미연이 먼저 와서 그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강지찬도 반드시 가지고
강지찬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강지현이 정자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하면 믿겠어?”정유진은 순간 멈칫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날 임미연이 강지현을 미리 만났어. 정자로 가자고 한 게 임미연이 제안한 것이지?”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줄 알았어.”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앞으로 좀 똑바로 보고 다녀.”정유진은 강지찬을 보며 말했다.“그날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하지만 이상한 쪽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러는 거야. 지난번에 나 대신 칼을 맞은 것으로 이미 자극받았어. 우리의 결혼은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것과 다름없고. 앞으로 혼자서 강지현을 만나지 마. 다른 사람 같이 만나.”정유진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 때문에 강씨 본가로 가기 싫었다.임미연은 강지찬의 휴식실에 잠깐 들른 것 때문에 서울에서 쫓겨났다.임우연은 그녀의 창백한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공적인 태도로 말했다.“임미연 씨, 승진한 것과 다름없어요. 월급이 두 배로 오르고 매달 수당도 있고요. 비행기 표는 이미 예약했으니 정리하고 나서 알려 주세요.”임우연은 상대방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듣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임미연은 멍해졌다.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얼른 외할머니께 전화했다.어르신은 저쪽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런 사소한 일도 참지 못하면 가망이 없어. 강지찬 그 자식은 친아버지도 안중에도 없는데 너는 더더욱 보지 않을 거야.”임미연은 멍해졌다.“외숙 할머니, 전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잖아요...”“그전은 그전이고. 너 자신이 무능한 것인데 누구를 탓하겠니?”어르신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최근 아들의 비즈니스에 문제가 생기자 가족들은 강지찬이 꿍꿍이를 부렸을 것이라 의심했다. 임미연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임미연은 할 수 없이 강지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너머의 강지현은 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형이 내린 결정은 아무
강지찬이 곧 결혼을 하기 때문에 강씨 저택도 조금 손을 봤다. 마당이 많이 새로워졌다.요즘 강지찬과 정유진은 휴가를 내고 결혼식에 전념하고 있다.모든 준비는 완료되었고 웨딩사진과 맞춤 제작한 웨딩드레스 등도 이미 저택에 도착했다.정유진은 집안에 가득 찬 물건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예복만 10여 벌이다. 한 시간에 한 벌씩 바꿔입으라는 뜻인가?강지찬은 결혼반지를 집어 들고 그녀에게 끼어보라고 했다. 사이즈가 조금 컸다.사이즈는 예전 사이즈에 맞춰 제작됐다. 하지만 정유진은 부상 후 살이 많이 빠졌고 그동안 일에 매달려 몸조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강지찬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다이아몬드가 좀 작네.”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작지 않아요. 결혼반지이고 앞으로 매일 끼고 다닐 텐데 딱 좋아요.”예전의 비둘기 알 다이아몬드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사실 이 사이즈여도 정유진은 평소 착용하는 데 번거롭다고 생각했다.“엄마, 아빠, 나의 예쁜 치마도 여기 많아요!”연우는 너무 기뻐서 공주 치마를 품에 안고 놓지 못했다.방경숙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녀석을 보더니 이내 드레스로 바꿔 입혔다.강지찬은 한쪽 팔로 딸을 안으며 연우의 코끝을 쳤다.“우리 아가도 주인공이니까 잘해야지.”연우는 즉시 가슴을 펴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당연하죠. 할머니와 리허설까지 했어요.”내일 부모님의 결혼에 녀석은 유일한 화동이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자신감 있는 녀석의 모습은 누군가와 정말 닮았다.둘째 집안의 강홍택과 송지윤도 돌아왔다. 강지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에 방학이 없다.송지윤은 정유진의 손을 잡고 강지혁 대신 사과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또 선물을 줬다.“외국에서 특별히 유진 씨와 연우를 위해 골랐어요. 지아 것도 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송지윤은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그러다가 신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둘째 숙부가 말했어요. 류선이와 곧 이혼한다고요.”정유진은 그 말뜻을 바로 알
결혼식 장소는 남쪽의 아주 아름다운 해변 도시에서 진행되었다. 정씨 어르신 부부와 강씨 가문 사람들은 이틀 일찍 갔다.강지찬은 그쪽에도 집이 있었다. 정씨 어르신 부부는 그 집에 살고 강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호텔에 묵었다.결혼식은 전담팀이 맡고 있어 정유진과 강지찬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놀러 다녔다.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정유진은 조금 긴장했다.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 후 항구로 달려가 유람선을 탔다.분장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적인 유람선을 잠시 바라볼 틈도 없이 정유진은 분장실로 안내됐다.“새언니, 결혼하는 기분이 어때요?”강지아가 물었다.정유진은 눈을 감고 화장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유한 씨와 결혼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강지아는 뭔가 찔린 듯 펄쩍 뛰었다.“새언니, 헛소리하지 마세요. 저와 온유한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정유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강지아는 정유진이 오해할까 봐 또 말했다.“진짜로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친한 사이일 뿐이에요.”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보아하니 우리 온 선생의 행동이 너무 느리네. 나중에 오빠더러 혼 좀 내주라고 해야겠어.”“싫어요!”강지아는 격동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새언니, 내 일에 절대 상관하지 마세요.”정유진은 강지아를 힐끗 보고 말했다.“알았어. 하지만 속상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강지아는 참지 못하고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새언니, 역시 언니가 제일 좋아요.”두 시간 동안 앉아 화장한 후에야 메이크업이 완성됐다.웨딩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연우와 강지아는 동시에 외쳤다.“와!”“엄마 너무 예뻐!”“새언니, 너무 아름다워요!”정유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원래 조금 화려한 얼굴인 정유진은 최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 아래 화장 후 사람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어쩐지 여자들이 신부가 되는 순간을 그렇게 기대하더라니.강지찬은
하객들은 어리둥절했다. 특히 강씨 집안의 친지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서울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강지현의 어머니는 강지찬이 감옥에 넣었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강지찬은 강지현의 회사까지 인수했다. 두 형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지금 강지현이 소란을 피우는 것은 강지찬에게 폐를 끼치려는 것이 분명했다.반면 강지찬과 정유진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강지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죽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다면 그가 나타나지 못하게 할 방법을 진작 생각해 냈어야 했다.정유진은 옆에 있는 남자가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결혼은 이 남자가 몇 년 동안 기다려온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강지현에게 중지되었다. 당장이라도 강지현을 죽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정유진은 조용히 강지찬의 손을 잡았다. 상대방을 향해 웃음을 보이자 강지찬의 눈에 비친 한기가 금세 반쯤 가셨다.오늘은 그와 정유진의 결혼식이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이 결혼식은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강지찬이 임우연에게 손짓을 하자 임우연이 달려가 사회자에게 몇 마디 설명했다.사회자가 듣고 주례에게 또 뭐라고 속삭였다.정유진은 강지현 옆에서 부케를 들고 있는 조예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가 왜 여기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강지현을 떠난 것 아니었던가?결혼식은 계속되었다. 사회자는 강지현과 조예원에게 강지찬과 정유진과 함께 결혼식을 올릴 것을 요청했다.진행자의 재치 있는 칭찬에 기존의 해프닝은 단번에 겹경사가 되었다.강지현도 더 이상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조예원을 이끌고 갔다.두 사람이 앞으로 다가와 서자 강지찬이 주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례는 곧바로 결혼 서약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강지찬과 정유진이 대답했다.“좋아요”그 후 반지를 교환하며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강지현과 조예원의 차례이다.강지현은 맞은편 정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좋아요’라고 말
정유진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을 때, 조예원은 이미 밖에 앉아 있었다.“자...”순간 조예원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멈칫하다가 스타일리스트에게 말했다.“조예원 씨의 머리도 좀 고쳐주세요.”조예원은 지금 단발머리이다. 조금 전, 머리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그냥 대충 얹고 잡혀 와 결혼했다.스타일리스트가 최대한 빨리 그녀의 드레스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만들어줬다. 사람이 아주 시원해 보였다.조예원의 스타일을 수정한 후, 스타일리스트는 정유진에게 향했다.정유진은 한참이나 메이크업을 수정했다.빨간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정유진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사람이 많아서 두 사람 모두 별로 말이 없었다. 정유진은 조예원이 계속 남아 있자 자기에게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해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강지아 등을 먼저 내보냈다.조예원이 말했다.“너 오늘 너무 예뻐. 너의 결혼식이 우리가 상상했던 결혼식이네.”정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상록수 별장을 떠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오늘 여기 왜 왔어?”조예원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왜냐하면... 얹혀서 하는 결혼식일지라도 축복하는 사람이 없어도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서... 호적상의 부부라 할지라도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까. 내가 우습고 불쌍하지? 그런데 어떡하겠어. 이미 임신했는데...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고 싶어.”“뭐라고?”정유진은 조예원의 배를 바라봤다. 기가 막혔다.“4개월 되었어.”조예원이 말했다.정유진은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대학교 때 순진했던 두 사람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서로 아이의 양어머니가 되겠다고 말했다.그때 조예원은 평생 좋은 자매로 지내자고 했다.“하지만 그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정유진이 말했다.조예원은 어리둥절했다. 예전의 정유진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강지현을 반대하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정유진은 격동된 얼굴로 말했다.“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만약 정말 이 아이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