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손님이 왔나 봐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러자 강지찬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라고 했어?”정유진은 이런 강지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이 인간은 늘 이렇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이니 말이다.“그럼 뭘 더 도와드릴까요?”“잊지 마, 당신은 아직도 내 호적상의 아내이고 여기는 당신 집이야.”그 말에 정유진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당신은 나를 한 번도 아내로서 존중해 준 적이 있는지. 나는 이곳을 한 번도 내 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강지찬 씨,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지난번에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 때문이지 내가 천해서 당신이 나를 모욕하는 말을 듣기 위해 온 게 아니에요.”순간 강지찬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내 아내라고 하는 게 당신을 모욕하는 거야?”“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문밖에서 강지아도 결국에는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지 못했다.전태연은 강지아에게 액세서리 상자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새언니가 주는 거니까 받아요. 사양하지 말고.”강지아는 그 상자를 옆으로 내팽개쳤다.“누가 그런 거 원한대요? 그리고 나의 새언니는 따로 있어요. 그렇게 함부로 자기를 부풀려 말하지 마세요. 이만 가보세요. 이 집은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니까!”“환영하는지 안 하는지는 지아 씨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방으로 들어온 전태연은 정유진을 본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이보세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전태연과 같이 들어온 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꼭 껴안으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내 새언니에요. 여기는 우리 집이고요. 새언니가 집에 안 있으면 어디 있겠어요?”정유진을 보고 있던 전태연은 다시 침대에 기대어 있는 강지찬에게 눈길을 돌렸다.“지찬 오빠,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있어요? 이혼하기로 한 거 아니에요? 예전부터 별거하고
해외에 있는 동안, 강지현은 정유진의 이웃에 살면서 그녀의 집에 자주 드나들곤 했다. 그러면서 강지현도 정명학과 이명자에게서 요리를 좀 배웠다.하지만 딸인 정유진은 부모님의 요리 솜씨를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한편,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정유진의 집에 온 조예원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강지현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정유진은 강지현의 옆에서 요리하는 것을 거들 뿐이었다.강지현이 가스 불을 끄며 말했다.“다 됐어요.”정유진이 접시를 건네자 강지현이 우선 먼저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그녀의 입안에 넣어줬다.“간이 잘 됐는지 한번 먹어봐요.”사실 해외에 있을 때도 자주 있었던 일이라 정유진은 별생각 없이 강지현의 손을 잡고 한입 먹었다.그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무 맛있어요. 예원이도 싱겁게 먹는 편이라 이 정도면 딱 좋은 거 같아요. 지현 씨의 요리 솜씨가 우리 엄마를 거의 따라잡았어요.”강지현은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유진 씨의 어머니에게서 이렇게 오래 배웠는데 따라잡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해야겠네요.”접시에 옮겨 담은 음식을 들고 뒤돌아선 정유진은 그제야 조예원이 이미 집에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조예원은 냉장고에 기대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깜짝이야! 환풍기를 켜놓는 바람에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 깜짝 놀랐잖아.”정유진은 조예원에게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와서 지현 씨의 요리 솜씨 좀 맛봐, 아직 못 먹어봤지?”조예원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지현 오빠가 요리에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강지현은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벗으며 조금 전보다는 살짝 옅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 씨의 어머니 옆에서 요리 몇 개 좀 배웠을 뿐이에요. 조예원 씨, 앉으세요. 여기 주방 정리만 마치고 나갈게요.”주방에서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강지현의 모습은 마치 그가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조예원은 마음이 좀 답답했다.밥상
정유진은 한 번도 조예원과 싸운 적이 없다.조예원도 방금 자기가 그렇게 말한 후 깜짝 놀랐는지 멍해졌다.하지만 이미 꺼낸 말, 회수할 수도 없다.조예원은 더 이상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자리에 얼어붙은 정유진은 한참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기분 나쁘게 헤어진 탓에 그 후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만나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도 절친인 두 사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누나, 조 대표와 싸웠어요?”키키와는 4년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늘 정유진을 따랐다. 정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의견이 좀 갈린 것뿐이야. 별일 아니야.”두 사람과 몇 년 동안 함께 지내온 키키는 두 사람의 사이가 보통의 친자매들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상대조차 하지 않는 거로 봐서 분명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조 대표님이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여리다는 거 알잖아요. 조 대표님과 똑같이 행동하지 마세요.”정유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나가서 일 봐.”강지아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기에 정유진은 오전 근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조예원이 키키를 보며 물었다.“너의 누나가 어디 간대?”“누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대요.”조예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엉뚱한 표정을 지었다.회사 맞은편의 레스토랑에서 강지아가 한창 정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유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강지아가 강지찬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새언니, 우리 오빠 진짜 너무해요!”메뉴판을 집어 든 정유진은 강지아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대부분 주문했다.조금 전까지 뾰로통한 얼굴로 강지찬의 흉을 보던 강지아는 이내 애교를 부렸다.“역시 우리 새언니밖에 없다니까. 내 입맛까지 다 기억해주고.”정유진은 그런 강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비행기 좀 그만 태워. 말해봐, 무슨 일 있는 거지?”강지아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강지아는 저녁에 퇴근한 정유진과 같이 그녀의 집까지 따라갔다. “새언니,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아요?”강지아는 자기 집처럼 집안 아래 위층을 뛰어다녔다. 사실 그녀의 목적은 집안에 남자와 관련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강지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강지찬과 정유진 사이에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진은 그녀를 3층 객실로 안내했다.강지아는 2층에 묵고 싶었지만 그 방은 전에 조예원이 묵었던 곳이었고 또 방 안에 그녀의 물건이 남아 있었다.“목이 마르면 알아서 내려가 마셔. 나는 운동 좀 하고 올게.”정유진은 어느새 요가복으로 갈아입었다. 3층에는 운동할 수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강지아는 그녀를 따라가 휴대전화로 몰래 영상을 찍었다.하얀색 요가복을 입고 있는 정유진의 몸매는 그녀의 각선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촬영을 마친 강지아는 바로 그 영상을 강지찬에게 보냈다.이내 강지찬에게서 답장이 왔다.[새언니에게 간 거야? 그럼 다시 오지 마.]강지아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 강지찬에게 답장했다.[안 갈 거야, 안 간다고!]강지찬이 타고 있는 차는 이미 멈춰 섰지만 그는 내릴 생각이 없는 듯 정유진의 요가 영상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두 사람이 함께 있을 그때 당시, 정유진은 임신 중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영상 속의 정유진은 유연하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그 누구든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강지찬은 한참을 보고 난 후에야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 밤, 그는 여자 파트너 안나와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하러 왔다. 한편 집에서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본 강지아는 어이가 없어 핸드폰을 옆으로 내던졌다.“강지찬,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새언니가 오빠를 싫어하지!”때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정유진이 그녀의 핸드폰을 주워주다가 밝은 화면에 뜬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다.정유진이
깊은 잠이 들었던 정유진은 갑자기 침대 옆 협탁에서 울린 휴대전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정유진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익숙한 목소리에 정유진은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강지찬?”늦은 밤, 귓가에 들리는 강지찬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순간 잠이 확 깬 정유진은 휴대폰 위에 뜬 시간을 봤다. 거의 한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이 인간은 왜 한밤중에 전화하는 거지? “문 열어.”정유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강지찬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정유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문이요?”“지금 대문 밖이야.”그 말에 정유진은 깜짝 놀랐다. 졸음이 완전히 가신 정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여기는 왜 왔어요? 지아 데리러 왔어요? 지아는 내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정유진 앞에만 서면 늘 인내심을 잃는 강지찬은 바로 말했다.“나더러 계속 밖에서 기다리라고? 다친 곳 아직 다 안 나았어.”강지찬의 말에 정유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예쁜 여자와 저녁 술자리까지 같이 가놓고 인제 와서 연약한 척은?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러 온 거 아니면 이만 가요. 나도 자야 하니까.”그러자 강지찬은 바로 협박하기 시작했다.“안 나오면 장형준더러 여기에서 계속 경적을 울리라고 할 거야. 셋 셀게. 하나, 둘...”“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잠시만요. 정말 당신! 너무 못됐어!”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강지찬의 입꼬리는 이미 귀에 걸려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차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정유진은 대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긴 그림자를 발견했다.강지찬이 집안에 들어가자 정유진이 현관 앞에 그가 갈아신을 슬리퍼를 놓았다.새것처럼 보이는 남자 슬리퍼였지만 강지찬은 분명 누군가가 한 번 신었을 거라 의심했다.그는 슬리퍼를 쳐다보기만 할 뿐 갈아신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정유진은 그제야 그의 버릇
에이프릴 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바로 한 룸으로 안내되었다.매우 큰 룸 안에는 남녀노소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예원아, 대체 누구를 만나러 온 거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유진은 사람들 속에 있는 강지찬을 발견했다.다른 사람과 같이 앉는 것을 싫어하는 강지찬이었지만 오늘은 안나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한창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정유진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정유진이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조예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유진아, 너와 이번 프로젝트, 둘 중 강지찬에게 어떤 게 더 중요한지 알고 싶다고 했잖아?”정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조예원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그럼 알고 싶지 않은 거야?”정유진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응, 알고 싶지 않아.”“연우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알고 싶지 않아?”딸 연우만 언급하면 정유진의 마음은 한없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연우는 자기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정유진의 주위 사람들이 연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연우는 한 번도 자기 아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철이 많이 든 연우는 그녀 앞에서 아빠를 내놓으라며 떼쓰지도 않았다. “내가 연우를 두 배로 사랑해 줄 수 있어.”“네가 아빠 사랑까지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정유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조예원은 저 멀리 있는 강지찬을 가리키며 말했다.“너의 남편이고 아이 아빠야. 강지찬이 너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아?”정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예원은 그녀의 팔을 이끌고 강지찬 앞으로 갔다.갑자기 나타난 두 여자에 같이 떠들던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정유진을 보고 있는 강지찬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무표정이었다.“강 대표님, 이쪽에 계셨네요. 술 한 잔 따라 드리러 왔어요.”조예원의 말에 정유진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녀가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이런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
“강 대표님께 술을 권하는 태도가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 되겠어요? 일단 벌주 석 잔부터 마시고 얘기하시죠.”눈치 빠른 사람들은 강지찬이 정유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는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그 사람들의 말에 강지찬은 가만히 있었다. 그 말들을 묵인한 것과 다름없었다.화가 울컥 치밀어 오른 정유진은 바로 잔 세 개를 갖고 와 술을 전부 따랐다.술을 따르는 게 뭐가 대수라고? “강 대표님, 제가 이 바닥의 상황을 잘 몰라서요. 벌주는 제가 마시겠습니다.”말을 마친 정유진은 바로 도수 높은 술 세 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그러고는 다시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강 대표님께도 한잔 드리지요.”주위 사람들은 정유진을 바라보는 강지찬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이때 안나가 옆에서 말했다.“강 대표님, 저기 어여쁜 여자가 술 한잔 따르겠다는데 받으셔야죠?”그제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정유진 씨, 이 술은 제가 마실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진짜로 마시기를 바라나요?”가만히 있던 주위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강 대표님과 아는 사이였군요?”강지찬과 정유진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안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알고 말고요. 그것도 아주 잘 알죠.”사실 정유진은 강지찬이 마시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친구 조예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술잔을 든 것일 뿐이었으니까...강지찬은 차가운 말투로 한마디 했다.“정유진 씨, 술 한 잔으로 저와 남교 프로젝트를 바꾸려는 것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네?”주위 사람들은 강지찬의 말에 깜짝 놀랐다.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온 비즈니스 얘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잠자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여전히 잔을 들고 있던 정유진은 강제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강 대표님과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을 뿐,
정유진은 눈앞에 있는 조예원이 자기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정유진이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조예원도 살짝 당황한 듯했다.“별다른 뜻은 없어. 하지만 우리에게 이번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강지찬 씨가 아직도 너를 못 잊고 있다는 거, 몰랐어?”정유진은 속상한 얼굴로 대답했다.“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야? 지난번에 이혼 합의서에 사인 받으려고 저 사람을 찾아갔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인할 수 있대, 대신 자기와 자재. 예원아, 지금 일부러 나 모욕하려고 그러는 게 안 보여?”조예원은 정유진이 자기 말을 믿지 않자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강지찬같이 비즈니스에 빠삭한 사람이 너를 모욕하기 위해 몇조 원짜리 프로젝트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너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고 생각해? 정유진, 왜 강지찬이 너에 대한 마음을 계속 피하려는 건데? 아니면, 너의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 거야?”정유진은 다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예원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잠시 가만히 있던 조예원은 표정이 점점 더 안 좋게 변했다.“어쨌든 남교 프로젝트는 우리가 꼭 따야 해. 네가 안 하면 나라도 직접 강지찬 씨를 만나서 얘기할 거야.”정유진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지찬 씨를 만나서 무슨 얘기할 건데?”“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이미 예상한 거 아니었어?”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조예원과 정유진의 우정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예담 스튜디오를 위해서, 그리고 강지현을 위해서 조예원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했다.“물론 강지찬 씨가 아직은 연우의 존재를 모르지만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기 딸이 외국에 있다는 거 알면 뭐라고 할지 너무 궁금하네.”정유진은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말을 서슴지 않게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지금 연우로 나를 협박하는 거야? 예원아, 연우는 너의 수양딸이나 마찬가지야. 연우는 너를 엄마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