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은 일부로 정유진더러 들으라는 듯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정유진은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온미정이 우유를 많이 마시면 태아에게도 좋고 살도 안 찐다고 해서 그녀는 매일 오후나 저녁에 한 컵씩 따뜻한 우유를 마시곤 했다.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한 모금씩 여유롭게 들이켰다.우유를 다 마셔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지 않은 것을 보니 일부러 정유진을 찾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정유진은 화장을 조금 수정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입구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고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중에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와’하고 감탄했다.바로 안이 침실인지라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어오란 말은 안 하고 그저 입구에서 그들을 향해 물었다.“혹시 저를 찾으셨나요?”이때 한 젊은 남자가 건들건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에요. 저희는 형수님이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특별히 보러 왔어요.”정유진은 웃으며 대꾸했다.“고마워요. 안으로 들어오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아래층에 디저트랑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편하게 계시다 가세요.”그때 누군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무슨 내숭을 그렇게 떨어요. 우아한 척은! 부잣집 도련님 품에 한 번 안겨서 인생 역전한 주제에!”말하는 여자는 화장도 화려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꽤 예쁜 여자였다. 정유진이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녀도 도발하듯 정유진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정유진은 이제 이런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예전에 한빈의 회사에도 갓 입사한 소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한빈에게 빠져 있어 정유진이 매번 회사로 갈 때마다 그 소녀는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강지찬은 여기서도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많은 것 같다.하지만 옆에 있던 방씨 아주머니는 그 여자의 말에 매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어린 아가씨가 왜 이렇게 교양 없이 말해요? 누구 집 자식이에요?”“내가 누구 집 자식이든 당신 같은 가정부
강지찬의 입맞춤에 정유진은 잠에서 깼다.그를 발견한 정유진은 퉁명스럽게 물었다.“아래층에 있는 그 일곱째 고모인지 여덟째 숙모인지 그분들과 얘기 계속 하시지, 왜 저를 괴롭혀요?”옅은 화장을 한 채 자고 있던 그녀의 뾰로통한 얼굴에 강지찬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화났어요?”해가 정오를 지난 후에야 정유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몇 시예요?”“저녁 먹을 시간이에요.”강지찬이 또다시 다가와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생각보다 아주 편안하게 주무시네요.”그 말에 정유진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그럼 내려가서 그 여자애들과 질투하면서 치고받고 할까요?”강지찬은 그녀를 꼭 껴안고 입술을 맞췄다.“질투한 거로 알게요.”저녁 연회는 마당에 큰 원형 테이블을 여러 개 놓고 가족과 가까운 몇 집을 초대했다.정유진과 강지찬이 아래층에 내려가자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류선과 고세연의 모습이 보였다.류선은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보고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우리 집안 사모님이 드디어 내려오시네요. 다들 흉보지 마세요. 두 사람이 아직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라 새댁이 사람 보기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사실 류선의 말뜻인즉 정유진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물론 아직 정식으로 이 집에 시집온 게 아니라는 점을 빗댄 것이었다.오후 내내 류선과 고세연은 이들에게 두 사람의 얘기를 한 게 틀림없었다.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더니 아래위로 훑는 사람들도 있었고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나무라거나 비아냥거리기도 했다.그 임미연이라는 여자도 그 속에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를 본 강지찬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정유진 옆에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정유진의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변화도 없었고 류선의 말은 아예 듣지도 못한 듯 웃으며 말했다. “둘째 숙모와 세연 아가씨가 저 대신 손님 접대하느라 고생하시네요.”그녀도 강씨 집안 친척들에게 인사하지
“당신, 미친 거 아니야!”강홍택은 류선을 뿌리치더니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화를 냈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염치가 없는 거야 뭐야? 당신이 뒤에서 그깟 수작을 부린다고 걔가 눈이라도 하나 깜빡해? 지찬이를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거야?”류선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외쳤다. “내가 미친 거예요? 아니면 쟤네들이 미친 거예요? 쟤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요?”강홍택은 류선과 말싸움을 하기 싫어 그저 한마디 내뱉었다. “좀 그만해! 체면이라는 게 없어? 나와 지현이 체면도 봐줘야 하잖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나와 지현이는 이제 당신 상관 안 할 테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 누가 손해 보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말을 마친 강홍택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류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강홍택의 말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강지현은 비록 몸이 좋지 않지만 어쨌든 그녀의 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이다.자기 친아들을 생각한 류선도 어느 정도 냉정함을 찾을 수 있었다.그때 강지현이 식판을 들고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류선은 아들을 보자 다소 어색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왜 네가 갖고 와? 그 빌어먹을 하인들은 이제 나에게 밥도 주지 않는 거야?”강지현 음식을 상에 놓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전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서 그래?”“내가 뭐? 다 사실이잖아!”류선은 기분 나쁜 얼굴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너는 또 왜 그래? 너도 너의 아빠처럼 팔이 밖으로 굽는 거야? 엄마가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알아?”강지현은 도저히 이런 엄마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사줄게. 그냥 나에게 말해.”“그런 거와 달라!”류선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오늘 밤 한꺼번에 세 사람이 족보에 오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앞으로 K그룹에서 번 돈 모두 세 사람 몫
“우리 마누라, 진짜 대단해요. 웃는 얼굴에 칼을 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정유진이 양치를 하고 있는데 강지찬이 다가와 그녀의 목에 사정없이 키스해댔다.가족 연회가 끝난 후, 강지찬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치를 다 한 정유진은 강지찬의 머리를 살짝 밀어젖혔다.“가만히 있어요. 나 조금만 유진 씨 안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강지찬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한마디 물었다.“샤워했어요? 냄새가 너무 좋네요.”두 사람은 한참이나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나마 정유진이 임신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지찬이 절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그다음 날은 정식으로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강지찬은 강씨 집안의 현재 주인으로서 강씨 가족들을 데리고 먼저 사당에 가서 족보를 꺼냈고 족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정유진, 강원훈, 강지혁의 이름을 족보에 추가했다.그러고는 이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정유진은 오후 성묘에 가지 않았다. 강씨 집안의 산소가 산속이라 임신한 그녀가 그곳까지 가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강지찬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미 출발한 후였다.방씨 아주머니가 우유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아도 뒤에서 몰래 그녀를 따라왔다.정유진이 강지아에게 물었다.“왜 오빠와 산에 안 갔어?”강지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가기 싫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이 가는데 저 한 명 정도 안 가는 건 조상님도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비록 이 마을의 많은 사람이 강지찬과는 이제 먼 친척 관계라고는 하지만 근본을 따지면 조상은 한 사람인 셈이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이 제사에 참여하게 된다.방씨 아주머니도 강지아에게 우유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이 다 마신 후, 강지아는 정유진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졸랐다.“새언니, 우리 좀 나가서 돌아다녀요.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요.”방씨 아주머니도 한마디
정유진과 방씨 아주머니, 강지아는 비구니를 따라 선실로 들어갔다.부적 만드는 도구가 모두 선실에 있다고 한 말에 정유진도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의식을 잃기 전에 그녀는 분명 그 비구니가 노란 부적을 그려 놓은 것을 보았다.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들은 선실에서 손발이 묶인 채 꼼짝달싹을 할 수 없었다.비구니는 보이지 않았고 입구 쪽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순간 정유진은 가슴이 철렁했다.재빨리 선실을 한 바퀴 휘둘러본 정유진은 방씨 아주머니와 강지아도 결박당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같이 왔던 그 두 명의 경호원은 보이지 않았다.같이 선실에 들어왔는데 시야에서 사라진 걸 보면 분명 그 두 경호원도 기절해서 다른 곳에 갇혀있었을 것이다.기절해 있던 강지아도 곧 깰 것 같았다. 순간 안 좋은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강지아가 아직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만약 이런 일이 다시 한번 더 발생하면 분명 병이 더 심해질 수 있다.“당신들 누구예요?”그녀의 앞에는 온몸이 구질구질한 30, 40대 되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그들은 정유진이 말을 걸어오자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이 노란 이빨을 드러내며 ‘헤헤’ 웃더니 더러운 말을 내뱉었다. “아가씨는 목소리마저 이렇게 달콤하네? 내 뼈가 다 간지러워.”또 다른 한 사람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저도 그래요, 빨리, 먼저 하세요.”이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챈 정유진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들! 당신들 우리가 누구인지 아세요?”“미친년, 네가 누군지 모르면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겠어? 이년아, 똑똑히 알려줄게! 오늘 우리가 노리는 건 강지찬의 여자야!”정유진의 가슴은 다시 한번 철렁 내려앉았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강지찬의 원수였던 것이다.움직일 수 없는 정유진은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두려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이전에 폭행하려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두려워할수록 더 흥분한다는 심리분석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정유진은 자신이 얼마나 기절해 있는지 알
고세연은 뭔가에 홀린 듯 이상한 얼굴로 정유진과 강지아를 번갈아 보더니 외쳤다. “너희 둘! 오늘 여기를 나갈 생각 하지도 마!”정유진은 고세연이 이렇게 악랄할 줄 몰랐다.감히 강지찬의 코앞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고세연!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마! 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지찬 씨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정유진은 자기를 언급하면 또 고세연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일부러 지아에게 초점을 맞췄다.“지아가 지찬 씨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 몸도 안 좋은데 또 자극을 받으면 정말 미칠지 모른다고. 고세연, 제발 지아를 놓아줘, 빨리!”순간 고세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사실 고세연은 강지아에게 그 어떤 원한도 없었다. 그리고 강지아가 강지찬에게 목숨과 같은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유진은 예상대로 망설이는 고세연을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아는 지찬 씨의 가장 중요한 가족이야. 나는 그저 그 사람 여자일 뿐이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으면 지찬 씨는 다른 여자 찾으면 돼. 하지만 지아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야. 안 그래? 고세연, 잘 생각해봐!”옆에 있던 김주환은 순간 조바심이 난 듯 고세연을 보며 말했다.“세연 씨, 약속한 거 번복하시면 안 돼요. 강지찬 때문에 내가 밖에서 거지보다 못한 생활을 했어요. 나는 이 원수를 꼭 갚고 말 거예요.”철썩!순간 고세연은 김주환의 뺨을 후려갈겼다. “닥쳐, 네까짓게 뭔데 함부로 지껄여!”맞은 얼굴을 손으로 움켜쥔 김주환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고세연을 노려보았지만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방씨 아주머니 옆에 결박된 채 웅크리고 있던 강지아는 뺨 때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는 움직이려다가 결박이 된 걸 알고 괴로워 신음소리를 냈다.“엄마...”정유진은 당장이라도 깰 것 같은 강지아를 보고 다급히 고세연을 향해 소리쳤다.“거기 멍하니 서서 뭐해! 지아와 방씨 아주머니를 풀어주고 데리고 나가, 빨리!”한
김주환은 고세연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살인을 하라고?김주환은 아무 능력이 없는 루저이다. 인간 자체가 쓰레기이다. 하지만 찌질한 그는 도저히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감히 할 수 없었다.“세연 씨, 농담이죠? 늙은 아주머니는 그냥 버리면 그만이지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옆에 있던 두 사람도 죽인다는 말에 깜짝 놀란 듯했다.그들은 단지 화를 풀러 왔을 뿐,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그중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일이 끝나면 사람들 모두 산속에 버리면 그만이에요. 이 뒤의 산이 워낙 인적이 드무니까 살든 죽든 알아서 하게 하면 되죠.”김주환이 방씨 아주머니와 강지아의 입을 틀어막자 강지아는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몸을 뒤틀며 손과 발목의 밧줄을 풀려고 했다.그녀는 피부가 부드러워 손목이 금방 끈에 긁혀 피가 줄줄 흘렀다.몇 마디 하는 사이 그녀는 이미 온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다.조금 전, 김주환이 강지아의 입에 헝겊을 쑤셔 넣을 때 강지아가 심하게 무는 바람에 화가 난 김주환은 손을 뿌리치며 강지아의 얼굴을 향해 뺨을 한 대 때렸다.그 순간 강지아는 바로 뒤로 넘어지며 기절해 버렸다.“시x, 계집애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김주환이 발을 들어 강지아를 걷어차려 하자 방씨 아주머니가 강지아를 막아 나섰고 김주환의 발은 방씨 아주머니의 허리를 강타했다.방씨 아주머니는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강지아의 옆으로 쓰러졌고 헝겊으로 막힌 입은 ‘웅웅’ 앓는 소리만 났다.정유진도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배 속에 있는 아기는 그녀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평소에 별로 움직이지 않던 아기가 불안한지 계속 움직여 태동이 선명히 느껴졌다.여자가 임신하면 숨이 자주 차기에 정유진은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심장도 더 빨리 쿵쾅쿵쾅 뛰었다.“고세연, 정신 좀 차려.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절대 네 탓 하지 않을게. 지찬 씨에게도 누구도 추궁하지 말라고 할게.”하지만 더 이상 정유진의 말을 듣
“아가씨, 미워하고 싶으면 강지찬을 미워해. 그 자식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잖아.”남자의 더러운 손이 정유진의 민소매를 잡고 찢어버리려 했다.하지만 민소매의 품질이 워낙 좋아 맨손으로 찢기지 않았다.정유진 깜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제발 살려주세요. 저 임신 4개월이에요, 제발요!”두 남자는 어리둥절해 하며 고세연에게 고개를 돌렸다.“임신했어?”고세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임신했는데 뭐? 이 여자, 몸매가 좋아서 임신해도 티가 나지 않아.”순간 두 남자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그러자 정유진이 바로 말했다.“아이가 지금 불안정한 상태예요. 의사가 너무 낮게 있다고 유산하기 쉽다고 했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예요.”정유진은 여기에 결박된 후부터 줄곧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옷을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았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는 배 속의 아이를 다칠까 두려워서였다.“이씨!”나이 많은 남자가 머리를 잡으며 짜증을 내자 고세연이 벌컥 화를 냈다.“무서워? 너희들 꼬락서니 좀 봐. 평생 장가갈 생각 못 하게 만든 게 누구 탓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길옆에 있는 집으로 배정받았는데 너희들은? 너희들, 원래 집은 다 거리 한복판에 있었잖아. 그런데 결국 가장 외진 곳으로 분배되었어. 강지찬만 아니었다면 너희 형제는 진작 장가가고 아이를 낳아 큰돈을 벌었겠지.”자기들의 원한이 생각난 두 남자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다시 정유진에게 달려들었다.정유진은 속으로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순간, 누군가가 발로 선실 문을 힘껏 찼다. 그리고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안으로 들이닥쳤다.“지찬 씨!”정유진은 기쁨에 겨워 소리 질렀다. 정유진의 목소리에 쓱 고개를 돌린 사람은 강지찬이 아니라 강지현이었다.강지현과 조금 전 같이 온 두 경호원이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강지찬의 경호원들은 모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프로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고세연을 때려 기절시킨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