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교수는 또 강지현이 그들의 상표를 디자인한 일을 언급하기 시작했다.정유진도 그때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처음으로 사례금으로 천만 원 넘게 받았기 때문이다. “2학년 때 받은 사례금 덕분에 온종일 갤러리에 틀어박혀 있어야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이 생겼어요.”서정호는 웃으며 물었다.“그때 그 돈 어떻게 했어? 나는 전부 우리 어머니께 드렸어.”“엄마에게 안마의자를 사드렸어.”안마의자로 2백만 원 정도 쓰고 나머지는 모두 한빈에게 주었다.그때 한빈의 프로젝트에 돈이 부족해 그녀는 두말없이 그에게 가져다주었다.물론 나중에 한빈은 그 프로젝트로 돈을 벌었기에 전부 돌려받았다.그래서 서로 빚진 것도 없었다.강지현은 말없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정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강지현에게 물었다.“강 선생, 상표는 왜 만들어요?”강지찬은 자연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친구가 만들어 달라고 해서요.”그러자 옆에 있던 서정호가 재빨리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선배님, 앞으로 자주 연락해요.”강지현이 강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서정호의 마음은 금세 활기를 띠었다.도 교수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녀석, 요 몇 년 사이에 많이 컸네? 야심도 생기고 말이야.”강지현은 서정호의 명함을 받아 코트 주머니에 넣은 뒤 웃으며 말했다. “시간 날 때 한 번 봐요.”그들은 한동안 계속 이야기를 나눴지만 조예원은 계속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정유진은 강지현에게 한 마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강지현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녀의 허리 근처에 대며 당부했다.“조심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시고요.”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서정호는 순간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고 정유진이 자리를 나서자마자 그는 바로 물었다.“선배님, 유진이 잘 아세요?”강지현은 건성으로 ‘응’이라고 대답했다.멀어지는 정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
정유진은 바깥에 있는 베란다에서 발견한 조예원을 발견했다.“왜 혼자 숨어서 술 마시고 있어?”조예원은 정유진을 돌아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안에 사람이 많아서. 서로 다 굽신거리는 얘기들뿐이라 듣다 보니 너무 짜증 났어.”그 말에 정유진이 물었다.“다들 안에서 강 선생과 인사하느라 난리인데 너는 안 들어갈 거야?”조예원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거길 왜 가? 며칠이면 만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지. 나도 거기에 껴서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정유진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하긴. 도 교수님이 불렀으니까 도 교수님과도 분명 할 말이 많을 거야.”조예원은 고개를 들어 잔을 비우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7년 전 개교기념일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적이 있어?”그녀의 물음에 정유진이 대답했다.“잘 기억이 안 나. 만난 적 없을걸? 그렇지 않으면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강지현과 같은 잘생긴 얼굴과 아우라는 한 번 보면 분명 인상이 있을 것이다. 조예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대신 화제를 돌렸다.“우리 맞혀볼까? 나수빈 걔네들 지금 강지현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을지 없을지.”정유진은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글쎄... 우리 빨리 들어가자.”조예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네가 누구에게 전화할지 아니까 방해하지 않을게. 통화 끝나고 들어와.”한편 휴대전화 너머의 강지찬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지겨워 미칠 지경이었다.말이 아주 많은 영감이 오후 내내 수다를 떨고 있으니 강지찬의 인내심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상대방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다행히 때마침 정유진의 전화가 걸려와 그는 최의현의 어깨를 툭 치며 옆에 있던 영감에게 말했다.“전 대표님. 죄송해요. 마누라가 계속 재촉하네요. 우리 최 부사장과 좀 더 마시면서 얘기 나누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그는 전
정유진은 전화를 끊은 뒤 강지찬에게 자신의 위치를 보냈다. 잠시 후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돌아서는 순간 강지현과 마주쳤다. “강 선생님, 왜 여기 계세요?”강지현은 웃으며 대답했다.“유진 씨는 저를 볼 때마다 이 대사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유진 씨 앞에 나타나서 많이 놀랐나요?”“아니요. 저는 그저 쟤네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강지현이 다가와 난간에 기대어 먼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 씨와 예원 씨, 그리고 도 교수님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제가 말솜씨가 좀 없어서 사람들과 말을 잘 못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그 말에 정유진이 한마디 했다. “강 선생님은 말주변이 없는 게 아니라 레벨이 다른 우리 같은 속물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강지현은 처음 들어보는 이런 평가에 꽤 흥미로운 얼굴을 보였다.“유진 씨 눈에는 제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정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예원이는 선생님이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거라 했고요.”그 말에 강지현이 웃으며 대답했다.“다들 내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평범하고 촌스러운 사람이에요.”정유진은 그저 강지현이 겸손해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예원도 강지현을 찾고 있다고 생각해 그를 보며 말했다. “저희 들어가요. 안 들어가면 예원이가 또 찾을 거예요.”하지만 강지현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정유진을 바라보았다.정유진도 그만 남겨두고 떠나기 난감했다. 그때 강지현이 물었다.“우리 형님하고 약혼하신 건 아이 때문이에요?”정유진은 강지현이 갑자기 이런 것을 물어볼 줄 몰랐다.사실 이것은 조예원도 물어봤고 이명자도 그녀에게 물어봤었다.그리고 그에 대한 정유진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맞아요.”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저야말로 진정한 속물이죠. 지찬 씨가 돈도 있고 능력도
강지찬은 장형준과 함께 꽤 빨리 이곳에 도착했다.검은 정장을 입고 셔츠 깃을 열어젖힌 강지찬은 구릿빛 가슴을 살짝 드러내 패기 넘치면서도 야성이 있어 보였다.차가운 목소리와 더욱 차가워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의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는 훤칠한 외모의 강지찬은 정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강지찬이 화난 이유가 아마 이곳에 강지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유진도 알고 있었지만 이게 그녀 탓은 아니지 않은가?“유진아, 저 잘생긴 남자는 누구야?”정유진이 일어서자 강지찬이 다가와 강제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저는 유진 씨 약혼자예요.”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와이프의 간통죄 현장을 잡으러 온 것 같았다.정유진은 그를 밀치며 놓으라는 듯 행동했지만 강지찬은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나지막이 경고했다.“각오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두 사람의 대화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정유진이 주눅 든 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나수빈은 깜짝 놀라 말했다. “유진아, 너의 약혼자가 강씨 집안 사람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상남자야?”강지현의 무덤덤한 표정을 본 미나도 한마디 물었다.“유진아, 설마 양다리를 걸쳤던 거야?”조예원은 여유롭게 술을 마시며 말했다.“밖에 바람이 많이 부는데 그 입 좀 관리하는 게 어때? 괜히 혀 잘릴라.”강지찬은 정유진을 흘겨보며 말했다.“상남자? 양다리? 다른 한 놈은 어디 있는데?”그때 강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찬을 불렀다.“형.”그 사이 정유진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내 약혼자 강지찬 씨야.”그리고 이내 강지현과 조예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우리 먼저 갈게요. 강 선생님, 예원이가 술 많이 마셨으니 이따가 배웅해 주세요.”조예원은 그들을 등진 채 손만 흔들었고 강지현은 정유진의 말에 한마디 대꾸했다.“알겠어요.”그리고 정유진과 강지찬은 도 교수와 서정호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정유진이 돌아간 후 조예원은 그 안에서 한동안 즐기다가 자리를 떠났다.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는 그 세 명의 여자들 말고는 조예원의 이런 성격은 반에서 꽤 인기가 많다.그녀는 끝까지 그들과 함께했고 결국 마지막에 취한 사람은 강지현이었다.서정호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우리가 술을 별로 권하지도 않았어. 강 선배도 얼마 안 마셨는데 이렇게 취하네...”몇몇 친구들의 도움으로 강지현은 가까스로 조예원의 차에 타자 강지현은 친구들에게 한마디 했다.“강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서 평소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것 같아.”서정호는 조예원을 보며 물었다.“예원아, 내가 도와줄까?”조예원은 강지현의 차 열쇠를 대리운전 기사에게 주었고 자신의 차 열쇠도 다른 대리운전 기사에게 주며 서정호에게 말했다.“괜찮아, 강 선생도 우리 스튜디오 고객이야. 내가 바래다주면 돼.”이번에도 그녀는 서정호를 거절했다. 서정호는 멋쩍은 듯 허허 웃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강 대표가 한턱낸 거니까 네가 우리를 대신해서 감사 인사 전해줘. 나중에 또 시간이 나면 다시 모이자.”조예원은 다시 모이자는 제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강지현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갔고 두 명의 대리운전기사가 그녀를 도와 침대 위로 눕혔다.대리비용을 건네고 기사들을 보낸 조예원은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용기를 내어 침실로 들어갔다.강지현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조예원은 그를 도와 신발과 코트를 벗겼다.그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댄 조예원은 순간 망설여졌다.강지현은 워낙 마른 체형인 데다가 키까지 커서 정말 긴 막대기 같았다. 만약 이 남자와 자버리면...여기까지 생각한 조예원은 다시 손을 움츠렸고 채 끝내 셔츠에 손을 대지 않고 이불을 잡아당겨 그에게 덮어줬다.그녀는 정유진이 전에 살던 방에 들어가서 잤다.다음날 일어났을 때 강지현은 이미 떠났다.문에는 포스트잇 한 장이 붙여져 있었는데 그 위에 네 글자가 쓰여 있었
회의가 끝난 후 강지현은 강지찬의 사무실로 갔다.강지찬은 그의 손에 든 서류를 힐끗 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강지현은 서류를 펼쳐 강지찬에게 내밀며 말했다.“이 돈은 결제할 수 없을 것 같아요.”강지찬이 살펴보니 서류에 빨간 펜으로 체크된 항목이 있었고 그것은 강원훈이 청구한 업무비용이었다.강지현이 알고 있는 계좌 리스트는 이미 각급 품의를 거쳤고 재무와 업무를 총괄하는 최의현도 모두 서명을 한 상태였다.“강 부장 의견은 뭔데?”강지찬이 물었다.사실 이 리스트에 있는 돈은 적은 편이 아니었다. 4천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회사에 취직했지만 일을 안 하고 아무런 실권이 없는 강원훈이 이런 비용을 청구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아빠 오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청구한 업무비용이 프로젝트 매니저나 대표님보다 더 많아요. 지난달에는 3천6백만 원, 이번 달에는 5천 6백만 원이에요. 저는 이게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강지찬은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그럼 왜 지난달에는 말하지 않았어?”“지난달에 재무팀 일을 인수인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확인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최 부사장 서명이 이미 있어서 별 생각하지 않았고요.”강지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인펜을 가져다 강원훈이 요청한 업무비용에 칸을 긋고는 다시 서류를 강지현에게 던졌다.“더 할 일 있어?”강지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형, 유진 씨와 올해 만난 거예요?”유진 씨, 유진 씨, 약혼자보다 더 다정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꽤 귀에 거슬렸다.강지찬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의 형수님이야.”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서로 눈을 마주쳤고 잠시 후 강지현은 아무 말 없이 서류를 가지고 대표실을 나갔다.최의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강지현이 나오는 바람에 두 사람이 바로 마주치게 되었다.“하하, 강 부장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강지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냥 가버렸다.최의
장형준은 이내 동창회 날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확실한 것은 그날 정유진 씨와 둘째 도련님이 같은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마주쳤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들 가면을 쓰거나 화장을 해서 만나봤자 얼굴도 몰랐을 테고 누군지는 더더욱 몰랐을 겁니다.”강지찬은 강지현의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서울 대학교 가면무도회, 대체 뭐 하는 거야? 춤추는 거야?”그의 물음에 장형준이 대답했다.“정유진 씨가 그때 학교 퀸카여서 개교기념일에 공연했습니다. 저녁에 있는 가면무도회에서도 피아노를 쳤다고 합니다. 참, 대표님. 가면무도회가 의외로 재미있는 구석도 있더라고요. 조명이 무작위로 파트너를 선택하고 같은 색의 조명이 비친 사람이 같이 춤을 춰야 한대요.”순간 강지찬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장형준은 강지찬의 기색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그런 우연이?’ 강지찬은 진짜로 그 우연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동안 강지현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정유진은 강지현에게 확실히 임팩트를 준 것은 분명해 보였다.다만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강지현이 정유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그리고 지난 동창회에서 강지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게 틀림없었고 그제야 그는 정유진이 그해 개교기념일 가면무도회에서 만났던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이다.원래부터 눈썰미가 좋은 강지찬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참, 대표님. 어르신께서 본가에 다녀오시라고 하셨습니다.”순간 강지찬은 얼굴을 찌푸렸다. 곧 추석이 다가오고 있어 강씨 집안 식구들이 고향에 가서 조상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니 4시가 다 되어갔다.강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고 대표이사실을 나오며 말했다.“유진 씨에게 가.”장형준은 가는 이유에 대해 감히 더 묻지 못했다.한창 디자인에 몰입하고 있던 정유진은 강지찬이 오는 것을 보고 컴
외출 한 번에 정유진은 미혼에서 기혼으로 변했다.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그저 어이없게만 느껴졌다.하지만 강지찬은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결혼식도 성대히 치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솔직히 결혼식이니 뭐니 정유진은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이 오늘 갑자기 혼인신고서를 한 것에 많이 놀랐다. 어떤 집에서는 애들은 여러 명 낳고도 혼인 신고를 안 하고 산다는데 자기는...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런 상황이 너무 의외라 그녀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또 어디 가요?”차가 한참을 달려서야 그녀는 지금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강지찬은 그녀의 손을 꾹꾹 주무르며 말했다.“이제 봤어요? 그러다 내가 유진 씨 납치라도 해서 밖에 내다 팔면 어쩌려고.”그 말에 정유진이 대답했다.“파세요. 나중에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K그룹 대표이사가 아내 팔았다고 나오게.”강지찬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한마디 했다.“굿 아이디어. 그 생각 계속 유지하고요. 유진 씨는 강지찬의 마누라라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돼요.”“지찬 씨 마누라를 뺏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요.”그때 익숙한 길인 것을 발견한 정유진이 물었다.“본가로 가는 거예요?”“역시 내 아내는 똑똑하다니까.”이틀 뒤에 곧 제사를 지낼거라 장남인 강지찬은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그래서 그가 급하게 혼인 신고를 한 목적이 자기를 정정당당하게 그의 본가에 데려가려고? 여기까지 생각한 정유진은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정유진은 이 남자가 항상 자기보다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 그녀에게 난처한 일이 없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어쩌면 사랑받는 느낌이 아닐까?누군가가 당신의 근심을 덜어주고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묵묵히 해준다정유진은 7년 동안 연애를 했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강지찬이 저녁에 본가로 갈 거라고 미리 본가에 연락하는 바람에 강씨 집안 사람들은 저녁을 같이 먹기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