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타났다.이성준과 10m 정도 떨어진 백아영은 다른 입구에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 바라보았다. 몸에는 가운을 걸치고 얼굴에는 반쪽짜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물론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반쪽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싸늘했다.아무리 추악하고 불결한 환경일지라도 그는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고결하고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가슴이 조마조마하던 백아영도 비로소 한시름을 놓았다. 이때, 같은 디자인의 실크 가운을 입은 안가연이 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얼굴에는 봄비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고, 이성준과 함께 인파를 지나쳐 VIP석을 향해 걸어갔는데 이내 병풍에 가려졌다.시야가 차단되자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두 사람의 인영뿐이었다.그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백아영은 서둘러 VIP석을 향해 다가갔다.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노출이 심한 비키니 차림의 몇몇 여자들에게 가로막혔다.다들 한 미모를 자랑하는지라 공들인 메이크업까지 더해 예쁜 편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같이 고개를 치켜들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백아영을 내려다보았다.“그런 얼굴로 감히 VIP석에 가려고? 제 분수도 모르는 거야?”분장한 백아영은 외모가 수수한 편에 속하지만, VIP석에 출입하는 것과 생김새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이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안가연의 손님이야.”“가연 씨 손님이라고?”여자들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짓말이라고 단정 짓더니 백아영을 향한 적의와 비웃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눈치가 꽝일뿐더러 대놓고 거짓말까지 해? 어떻게 가연 씨를 끌어들일 생각하지? 못생긴 주제에 꼴값 떠네.”“VIP 구역은 당신 같은 흔녀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 얼굴이면 저쪽이나 가서 놀아.”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 반대 구역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살이 피둥피둥 찌고 머리가 듬성듬성한 중년 아저씨들이 수두룩했다.양팔에 이미 여자를 한 명씩 끼고 있으면서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다른 비키니녀를 물색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성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마침 병풍에 가려진 그림자가 보였다.남자는 움찔했지만, 남녀의 팔이 곧 한데 겹치더니 더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이내 제자리에 앉아 멀리서 이 해프닝을 지켜보기만 했다.심지어 그녀인 거 뻔히 알면서도 다가오지 않았다.단지 가운을 챙겨 자신을 감싸고 물 밖으로 나가면 되는데 말이다.백아영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외모는 별 보잘것없는데 꽤 대담한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수중 스트립쇼라니? 성격이 화끈한 편인가 본데, 혹시 마음에 드는 분 있으신가요? 얼른 대시하세요!”“내 스타일이야! 정말 혹하는데? 다들 건드리지 마.”대머리 뚱보 아저씨가 커다란 배를 내밀며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백아영을 향해 헤엄쳐갔다.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고, 온천탕 옆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대머리 아저씨는 백아영의 상대가 안 되는지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몸싸움을 벌이는 순간 노출 범위가 늘어나기 마련이다.물론 이는 풀장 밖에 서 있는 여자들이 제일 보고 싶은 장면이기도 했다.또한...병풍에 가려진 가녀린 그림자를 보자 백아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안가연의 목적도 이것이란 말인가?그녀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수모를 당하게 하려고 리조트까지 유인한 다음 이성준에게 온갖 더러운 꼴을 지켜보게 하려는 심산인가?만약 사실이라면 그 어떤 남자도 견디기 힘들 것이며 두 사람의 관계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겠는가!꽤 지독한 수법이었다.하지만 백아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눈빛은 싸늘함을 넘어서 냉랭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설령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라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그녀는 더 이상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면 옴짝달싹 못하는 백아영이 아니었다.“다들 심심한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제대로 놀아봐?”이내 가장자리로 헤엄쳐가더니 물속에
백아영은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더니 가운 끈을 질끈 묶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비록 싸움으로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손쉽게 제압당할 생각도 없었다.그녀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공격해!”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사내들이 일제히 백아영을 향해 돌진했다.병풍 뒤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움직이려는 찰나 가녀린 그림자가 잽싸게 앞을 가로막았다.이때, 능글거리는 경박한 목소리가 문득 울려 퍼졌다.“이런 곳에도 절세미인이 있다니?”북적이는 인파 틈으로 건장한 사내들이 길을 터주었다.이내 빨간 실크 가운을 걸친 사람이 제일 끝에 나타났는데, 끈을 느슨하게 묶은 탓에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고,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복근까지 더해 섹시한 남자가 무슨 말인지 가감 없이 보여줬다.또한, 외모도 출중했고 길게 뻗은 눈꼬리는 매력적이면서도 요염했다. 핑크빛이 감도는 입술은 예쁜 호를 그렸는데 마치 만개한 벚꽃처럼 화사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역대급 미모를 자랑하는 남자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와장창 깨졌고, 감탄하기 급급한 여자들은 그를 쳐다보느라 눈을 떼지 못했다.“뭐야? 너무 잘생겼잖아. 완전 요물 같아.”“제이슨 백작님이셔! 세상에, 이 분이 여긴 어쩐 일이지? 백작님께서 오실 줄 알았더라면 노출이 제일 심한 비키니를 입었는데!”“백작님께서 누구한테 절세미인이라고 한 거야? 대체 어떤 행운아가 백작님의 눈에 들었단 말이지? 이건 완전히 벼락출세할 수 있는 기회잖아.”백작 제이슨은 여왕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로서 진정한 2인자였다.뛰어난 정치적 업적은 물론 항상 국민을 위해 애를 쓰고 있기에 뭇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고상함과 거리가 먼 취미를 가졌다.그는 예쁜 여자만 좋아했다.안가연의 미남 수집벽과 달리 여러 명을 건드리는 대신 오로지 외모에 집착했다.그동안 단 두 명의 미인을 찾아냈는데, 둘 다 전 세계를 뒤흔들 만한 절세
사람들의 안색은 제각각 달랐다. 비록 이해도 안 가고, 화도 났지만 하나같이 입을 꾹 닫고 찍소리도 못 냈다.제이슨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입가에 웃음꽃을 피웠다.이내 젠틀하게 한 손을 내밀며 물었다.“아름다운 아가씨, 혹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영광을 저한테 주실 수 있으신가요?”백아영은 착잡한 눈빛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아무리 분장한 얼굴이라고 해도 제 분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실물이 예쁜 편에 속하긴 했으나 절대로 세계 3대 미인에 속할 정도는 아니었다.대체 뭐 하자는 거지? 혹시 지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건가?“백작님, 도와주셔서 감사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가운을 걸치고 이성준이 있는 병풍으로 다가갔다.이번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두 눈을 부라리던 여자들도 감히 막아서지는 못했다.풀리지 않은 의혹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이성준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헐레벌떡 뛰어간 게 무색하도록 병풍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갔다고?좀처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그녀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볼일 끝났나 봐요?”제이슨은 싱글벙글 웃으며 백아영의 곁으로 다가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유혹적인 미소와 우아한 몸짓,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며 저도 모르게 빠져들 지경이었다.비록 절세미인을 찾아 헤맨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어디 하나 뒤지지 않았다.도움을 받아 고마운 것과 별개로 백아영은 단호하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두었다.“백작님, 전 애 엄마예요. 올해 5살이 되었거든요.”제이슨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죄송해요.”백아영은 미련 없이 온천 리조트를 나섰고, 제이슨은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밖으로 나오자 안가희의 차를 발견했는데 아직 안 간 듯싶었다.차창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안가희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다정하게 위로했다.“인성이란 원래 그런 거예요. 유혹을 뿌리치는 사람
온천 리조트 스위트룸.안가연의 예쁘장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언뜻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진짜 안 간대?”부하가 대답했다.“네, 둘째 아가씨께서 얘기하길 아무런 타격이 없었대요. 마치 별장에서 성준 씨를 끝까지 기다릴 기세였다고...”“골치 아프네.”안가연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짜증 난 듯 투덜거렸다.“어쩜 하나같이 성가시게 구는지... 어차피 본인이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일단 내버려 둬. 서로 마주치게만 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되돌릴 수는 없을 거야.”그때가 되면 이성준과 백아영도 감정의 골 때문에 언젠간 등을 돌리게 되어 있다.반면 이성준은...자신만만한 표정의 안가연은 호시탐탐 노리는 눈빛으로 푹신한 슬리퍼를 끌고 다른 방으로 걸어갔다.안가희는 똑똑한 여자였다. 비록 외모는 여성스럽고 착해 보였지만, 목적의식만큼은 명확했다.백아영이 떠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돌아가는 내내 침묵을 유지하며 더는 무의미한 설득을 늘어놓지 않았다.결국, 차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점점 가까워지는 호화로운 별장을 바라보며 차에서 내리려고 준비하는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이내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구슬 같은 땀방울을 뻘뻘 흘리는 안가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감싼 그녀는 아픈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질끈 깨문 입술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했다.“가희 씨? 다리가 또 아파요?”김범준이 아연실색했다.“약은요? 어서 약 드세요.”이내 능숙하게 차에 비치된 상비약을 꺼냈지만, 안가희가 탁 쳐서 떨어뜨렸다.그녀는 힘든지 목소리마저 떨렸다.“소용없어.”이 약은 이미 거의 효력을 잃었다.김범준이 초조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또? 그럼 어떡하죠? 죽을 듯이 아프잖아요.”땀은 금세 옷깃을 적셨고,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손대면 마치 깨질 것 같은 유리 인형처럼 나약해 보였다.백아영은 의사로서 무의식중으로 맥박을 확인하고 싶었
그러고 나서 다음 날도 발코니에 앉아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머리가 살짝 어지러우며 관절도 쑤셨다.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본채를 바라보았다.이내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에 내려갔다.사람이 100명 가까이 사는 저택은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7성급 호텔에 버금갈 정도였다. 게다가 식사할 수 있는 깔끔한 다이닝룸도 있고, 방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물론 이런 귀한 대접은 백아영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식사가 필요한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다.따라서 밥때가 되면 알아서 다이닝룸으로 가서 먹어야만 했다.다들 일찍 일어난 편은 아닌지라 다이닝룸에 사람이 적었다. 백아영은 일부러 구석진 곳을 찾아 앉았다.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맞은편에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그는 손에 사과 하나를 들고 느긋하게 한입 베어 물더니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그쪽 오빠 어제 돌아왔던데요?”어젯밤에 이미 알고 있었는지라 백아영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안 했다.에릭은 사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여유로운 어조로 놀리는 듯 비꼬는 듯 말했다.“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자체가 마음이 변했다는 뜻이 아닐까요?”백아영은 입맛이 뚝 떨어진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룸을 나섰다. 그러나 다시 방에 돌아가는 대신 밖으로 걸어갔다.에릭은 먹다 남은 사과를 들고 별채 대문 기둥에 기대어 서서 비아냥거렸다.“가게요?”백아영은 그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등 뒤에서 에릭의 충고가 들려왔다.“다시는 돌아오지 마요. 누나의 남자를 빼앗아 간 여자는 여태껏 없었으니까.”본채.안가연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분이 좋게 말했다.“이제 갔어. 성준아, 너희 둘 사이도 고작 별거 아니네.”이성준이 창가에 서 있었다. 비스듬히 내리쬐는 아침햇살이 커튼에 가려져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분위기 또한 눈에 띄게 어두웠지만, 말투만큼은 싸늘할 정도로 무심했다.“난 지금 우리 거래밖에 관심 없어.
이는 백아영이 하지연에게 쓴 편지였다.방시운은 편지를 대충 훑어보더니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서원이 눈살을 찌푸렸다.“도련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지연 씨가 알게 된다면 화를 낼지도 몰라요.”“그럼 모르게 해.”그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얼마나 어렵게 하지연을 곁에 붙잡아두었는데, 이대로 백아영에게 빼앗길 리가 있겠는가?그리고 백아영 따위는 알 게 뭐람? 이참에 안가연에게 당하면 더 좋았다.도시락통을 다시 정리하고 나서 서원은 하지연의 방을 찾아갔다.그녀를 강제로 데려온 이후 방시운은 태교를 운운하며 방씨 일가 별장에 거의 감금하다시피 했다. 혹시라도 움직임을 보인다면 귀신같이 튀어나와 방해했다.매번 시도할 때마다 덜미를 붙잡혔는데, 하지연은 이제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하게 눈치 싸움하는 것도 귀찮아 아예 손을 놓고 여기서 백아영과 이성준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하지만 약속된 시간이 지났지만,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아줌마도 최근에는 잠잠했기에 도시락을 보는 순간 그녀에게 주는 사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이내 도시락통을 열고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단서를 눈치채지 못했다.하지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원을 쏘아보았다.“내 물건에 손댔어?”서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제 발 저린 듯 동공이 흔들렸다. 들통이 나도 어찌 이렇게 빨리 날 수 있는가? 게다가 범인은 자신도 아닌 도련님인데 말이다.서원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당장 서재로 달려갔다.“내 물건 내놔!”뒤따라온 서원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열심히 눈짓으로 방시운에게 사인을 주었다.펜을 쥔 방시운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무슨 물건?”“모른 척하지 마. 도시락통에 들어있던 물건 말이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놓인 재떨이에 있는 잿더미를 발견했는데, 화가 나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설마 태웠어?!”테이블이 흔들리며 잿가루가 폴폴 날렸다.방시운은 먼지 때
그녀가 정말 떠난다면 그는 얼마나 무너져 버릴지, 또 얼마나 미쳐버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시운 도련님, 지연 씨를 붙잡을 수 있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서원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그는 방시운 곁을 따라다니며 방시운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다.방시운의 성격은 매우 고집이 세고 베베 꼬여 있으며 절대 하지연을 놓아주도록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그 어떤 수단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말이다.방시운이 고개를 돌려 서원을 바라보았다.서원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오늘 밤 지연 씨께 약을 먹이고 임신 테스트 기간을 다시 한번 기다리세요.”...하지연의 동네를 떠나 백아영은 골목 입구에 서서 번화하지만 낯설기만 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하지연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다.게다가 하지연에게 언제 그녀를 만나러 와줄 시간이 있을지 모르기에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아름다운 아가씨, 이런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우린 운명인가 봐요.”그때 레드 컬러의 최고급 로드스터 한 대가 그녀의 눈앞에 멈춰 섰고 제이슨이 운전석에 앉아 기분 좋은 듯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온 거리의 시끌벅적함을 모두 더해도 그의 미소만큼 찬란하지 않았다.백아영은 잠깐 그의 찬란함에 매혹되었다가 곧이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백작님.”정말 딱딱하기 그지없었다.제이슨은 투덜거리며 입맛을 다셨지만, 그녀의 쌀쌀함은 백아영에 대한 그의 열광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제이슨은 줄곧 절세미인에 대해 세계 최대의 관용을 베풀었다.“어디에 가는 겁니까? 데려다줄게요.”백아영은 더는 제이슨 백작과 엮이기 싫었고 그의 질척임을 받아줄 생각도 없었다.“제 아들이 이제 벌써 5살이에요. 화목한 가정도 이미 이루었고요.”“네. 믿어요.”비록 백아영의 말에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지만 절세미인에 대한 제이슨의 관용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수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