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은 다시 차를 향해 걸어가더니 트렁크를 열고 안에서 검은색 가죽 가방을 꺼내 침대 의자 위에 쿵 하고 올려놓았다.가방이 열리는 순간 지폐 뭉치가 떡하니 나타났다.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충분해요?”돈 가방을 내려다보는 간형준의 눈빛에 탐욕이 서서히 드러났고, 입술만 달싹였을 뿐 찍소리도 못 냈다.이는 누가 봐도 망설이는 표정이다.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코웃음을 치던 이성준이 또 다른 가죽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순간 만면의 웃음을 띤 간형준은 벌떡 일어나 지폐 뭉치를 몇 개 챙겨서 세어 보더니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입을 헤 벌리고 웃는 모습은 마치 시궁창에서 키득거리는 쥐를 연상케 했다.“보조 역할로 들여보낼 수는 있지만 고분고분 행동하겠다고 약속해요. 아니면 쫓겨난다 한들 한 푼도 못 돌려받을 줄 알아요.”팻말 뒤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진흙탕 길이 이어졌고, 어젯밤에 비가 내려서 길이 질퍽질퍽하고 미끄러웠다.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간형준은 이미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반면 백아영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뒤따라갔다.그녀가 다시 휘청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어깨를 덥석 붙잡더니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다.남자의 건장한 몸집이 등 뒤로 다가오자 익숙한 향기가 오감을 자극했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퍼졌다.이성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내가 뒤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네...”백아영은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내 남자의 부축을 받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위에서 돌아본 간형준은 상기된 얼굴의 백아영을 발견하고 몰래 입맛을 다셨다.‘참 예쁘게 생겼단 말이야, 얼른 맛보고 싶군.’1시간 남짓 걸어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산길을 겨우 지나서야 그들은 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산속에 지은 허름한 대나무 집인데,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여기가 그쪽이 묵을 곳입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20대 초반의 여성이
“저기요, 시트를 새로 갈았는데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네요. 만약 별로라면 다른 거로 바꿔줄게요.”얼굴을 가린 채 옆에 서서 바라보는 홍미주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이성준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녀가 마침 이곳에서 기다릴 일은 없었기에 아마도 자신이 몰래 따라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려고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비록 뻔히 알면서도 그는 모른 척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산길은 안 그래도 걷기 힘들었는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힘까지 빠졌다. 게다가 뒤에서 밀어주던 이성준도 없는지라 백아영은 어렵게 발걸음을 옮겼고, 거의 한 걸음 걷다가 미끄러지는 식으로 조금씩 나아갔다.“부축해줄까요?”몇 번이나 휘청거리는 백아영을 보고 간형준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잡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한결 걷기 수월할 테지만, 백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고마워요,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간형준은 멋쩍게 손을 내렸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백아영한테서 떠날 줄 몰랐고, 산을 타는 바람에 살짝 풀어헤쳐진 그녀의 옷깃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더 은밀한 곳까지 탐닉하고 싶었다.이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여기까지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꽤 많은데 대부분 입문 전형 시험에서 떨어져 자리를 박차고 돌아갔죠. 아영 씨는 한약 치료에 능통한 것 같은데 정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예요.”백아영은 힘겹게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최선을 다할게요.”“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죠.”간형준은 일부러 안타까운 척 한숨을 내쉬었다.“아영 씨를 후배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이대로 시험 보러 가면 떨어질 확률이 99.99%에요.”백아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죠?”간형준이 히죽 웃었다.“나름대로 방법이 다 있다는 뜻이죠.”말을 마친 그는 대나무 집이 줄지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총 서너 채가 되었는데, 그중 한 집에 백아영을 데려갔다.안
산 정상은 공사를 진행한 듯 평지로 된 구역이 나타났고, 그 위로 대나무 집이 늘어섰는데 하나같이 넓고 큼직했으며 환경까지 깔끔했다.그러나 문은 모두 닫혀 있는 상태였다.이때, 정중앙에 있는 집에서 쿵쿵거리는 소음과 함께 쪼르륵하는 물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마침 정제 작업을 하는 듯싶었다.백아영이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간형준에게 제지당했다.한껏 일그러진 간형준의 얍삽한 얼굴은 한 마리의 이를 바득바득 가는 쥐를 연상케 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협박했다.“다시 잘 생각해봐요. 일단 시험이 시작되면 물러설 곳이 없어요. 불합격하는 순간 고도의 정제 기술을 배우는 건 하늘의 별 따기죠. 게다가 아영 씨 신약 연구도 물거품이 될 거예요. 50조도 평생 못 갚는다고요.”간형준은 방금 산을 오르는 동안 백아영의 정보를 낱낱이 조사했다.“무려 50조예요! 나랑 하룻밤만 자면 무조건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왜 싫어요? 테크닉은 걱정하지 마요. 극락이 무엇인지 제대로 체험하게 해줄 테니까.”뻔뻔스러운 음담패설에 백아영은 귀까지 오염되는 느낌이 들었다.결국 역겨움에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지석 님, 저는 백아영이라고 합니다. 한 수 배우러 왔습니다.”아무런 대답이 없자 백아영은 문 앞에 서서 차분하게 기다렸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사람인지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처해야 할뿐더러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한참을 기다리자 옆집 문이 갑자기 열렸다.안에는 텅 비었지만, 정제를 위한 도구와 재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1시간 안에 튜토리얼에 따라 스파클 플라워를 만들 거라.”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집 밖에 놓인 모래시계가 뒤집히더니 모래가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스파클 플라워를 처음 들어본 백아영은 현장에서 배우며 바로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미흡하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도전이라는 뜻이기에 단 1분 1초도 허비하기 아까웠다.곧이어 문이 열린 집으로 걸어갔
정제 작업 중에서 폭발이 여러 번 일어난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백아영은 체력이 바닥을 쳤다.고개를 들어 간형준을 바라볼 힘조차 없어 아주 느린 걸음으로 지석의 집 문 앞에 다가가 살며시 노크했다.“지석 씨, 스파클 플라워를 완성했습니다.”“뭐?! 말도 안 돼!”간형준은 펄쩍 뛰면서 노발대발했다.“지금 거짓말하는 거죠?”그와 동시에 안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감히 날 속이면 뱀에게 먹이로 주겠다!”이내 문이 끼익 열렸다.안에 등이 구부정한 노인이 서 있었는데, 허리를 숙인 키는 고작 1m 20cm에 불과했다. 백발에 주름까지 자글자글해서 나이가 꽤 많아 보였고, 얼굴은 검버섯으로 뒤덮이다시피 했으며 검푸른 반점이 군데군데 났다.사람을 올려다볼 때는 눈알만 움직여 흰자위만 남았는데 마치 눈동자가 없는 것처럼 섬뜩했다.백아영은 기겁하더니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지석은 콧방귀를 뀌더니 시커멓게 물든 이빨을 드러낸 채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스파클 플라워 내놔.”백아영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정중하게 스파클 플라워를 건넸다.지석은 스파클 플라워를 들고 대충 훑어보더니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이내 벽까지 데굴데굴 굴러가 멈췄는데 으슥한 코너에서 십여 마리의 독사가 튀어나와 게걸스럽게 갉아 먹기 시작했다.빈틈없이 서로 얽히고설킨 뱀들이 꿈틀거리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백아영은 머리털이 쭈뼛 서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하지만...코앞에서 지석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들어와.”백아영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고개를 들자 지석은 이미 실험대로 걸어갔고, 손을 뻗어 물건을 집으려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뱀이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지석 !”백아영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외쳤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이런, 말을 참 안 듣네? 아직 밥 먹
백아영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돈은 단지 사부님께 드리는 선물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뱀은 인공적으로 사육하거나 독성이 약해서 최상품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산에 올라가서 뱀을 잡아 사부님께 바치려고 했죠.”말을 마친 백아영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석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비록 사부로 모시기 위해 정해진 선물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지만, 뱀을 대하는 지석의 태도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질러본 것이다.다행히 그녀의 추측이 들어맞았다.지석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검푸른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그나마 배짱은 있군. 그렇다면 뒷산에 가서 잡아 와. 거기 있는 뱀이 가장 독이 강하거든.”산에서 뱀을 잡는다는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지 않은가?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백아영에게 물러설 길은 없었다.지석의 집에서 나온 백아영은 간형준을 따라 제자 숙소로 향했다. 즉, 간형준도 사는 대나무 집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여기서 지내면 돼요.”간형준은 옆 숙소를 가리키며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지금까지 봤던 여자 중에서 제일 똑똑한 것 같네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이제 같은 제자로서 난처하게 하지 않을게요. 깨끗이 씻고 내 방에 와서 뒷산 지도를 가져가요.”뜬금없이 샤워하라니?이 말을 간형준의 입에서 듣게 되자 저도 모르게 경각심이 든 백아영은 더러움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선 지도부터 주세요. 내 몸이 먼지투성이라 신경 쓰인다면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간형준은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시궁창에서 뒹굴다 나온 사람보다 더 더러운데, 내가 관심이 생길 리 있겠어요? 지도는 여기 둘 테니까 가져가든지 말든지 해요.”간형준은 자기 숙소로 들어가더니 지도를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테이블은 문에서 5~6m 떨어진 곳에 있기에 지도를 챙기려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간형준의 의도를 알아챈 이후로 백아영은 줄곧 경각심을 늦추
계속되는 헛구역질에 위액마저 토해낼 것 같은 고통에 백아영은 손톱으로 간형준을 마구 할퀴기 시작했고, 이내 끔찍한 흉터들이 하나둘씩 생기더니 피가 배어 나왔다.간형준은 상처를 입게 되자 되레 점점 더 흥분했다.“오늘 날 죽이지 못하기만 해봐요. 내가 아영 씨를 죽여버릴 테니까.”‘죽여?’백아영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어금니에 숨겨둔 독약을 혀로 살짝 핥았다.‘죽으려면 같이 죽자!’이내 독한 마음 먹고 깨물려는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밖에서 문을 걷어찼는지 활짝 열렸다.차가운 달빛 아래 커다란 몸집이 입구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이성준이었다. 그는 신발이 진흙 범벅이 된 채 서 있었고, 싸늘한 시선은 한겨울의 찬바람보다 더 스산해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느껴지는 듯싶었다.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 때문에 환각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살인적인 눈빛만큼은 실감이 나서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간형준은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당신이 여기 왜 왔죠?”“그 손 놓지 못해요?!”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무시무시한 아우라에 간형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지옥 같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두려움 따위 잊은 지 오래되었다.이내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손가락을 우두둑하며 풀었다.“홍미주, 이 쓰레기 같은 년! 고작 남자 한 명도 처리하지 못하고 내가 직접 나서게 하다니. 제 발로 찾아온 이상 꼼짝 못 하게 묶어 놓고 백아영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주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성준을 향해 주먹을 뻗었는데, 속도가 빠른 건 물론 치명타만 노린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설령 무술을 익힌 남자라고 해도 쉽게 상대하지는 못할 것이다.3초 뒤, 집 안에 갑자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성준은 발로 간형준을 밟고 있었고, 백아영을 만진 두 팔은 그대로 부러졌는데 부서진 뼈가 살갗을 뚫고 나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악!”이내 처참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남자를 내려
백아영은 옆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뒷산 지도 챙겨야 해요.”이성준이 한 손으로 지도를 집어 들자 백아영은 그제야 소위 지도라는 종이가 백지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지도는 단지 간형준의 속임수에 불과했다.“지도는 어디 있죠?”온몸이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간형준은 이성준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겁을 먹고 잽싸게 대답했다.“서랍 안에 있어요.”서랍을 열고 뒷산 지도를 찾은 이성준은 백아영을 안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옆 숙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팽팽하게 당겨졌던 간형준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졌고, 드디어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눈빛은 순식간에 다시 음흉하고 악랄하게 변했다.비록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꾹 참고 바닥을 한참 동안 기어가서 휴대폰을 꺼내 혀로 화면을 터치하여 전화를 걸었다.통화 연결음이 한동안 울리고 나서야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이내 홍미주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희한하네, 이 시간에 나한테 왜 연락했어?”지금쯤이면 간형준은 백아영과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간형준이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못난 년! 대체 뭐 하는 거야? 한태윤이 벌써 올라와서 날 반쯤 죽여놓고 갔어.”“뭐? 그럴 리가! 식당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홍미주가 재빨리 식당으로 뛰어가 보니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그제야 한태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만든 요리를 먹더니 남자는 입맛에 맞지 않은 듯 표정에서 티가 났다. 결국, 추궁한 끝에 귀하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갑자기 전복구이를 먹고 싶다는 바람에 홍미주는 주방에 가서 요리하던 중이었다.이제 와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전복구이를 보고 있자니 마치 우스갯거리처럼 느껴졌다.“이 멍청이야! 고작 남자 한 명도 처리하지 못하고, 똑바로 안 할래?”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홍미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극도의 분노 속에서도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하하하! 흥미롭군.
백아영은 이성준에게 안겨 자기 숙소로 돌아왔고, 조심조심 내려놓은 손길을 느끼며 침대에 살포시 누웠다.비록 이성준의 외투를 걸쳐서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맴돌았지만, 간형준이 만진 곳은 차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역겨웠다.머릿속으로는 오로지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몸이 먼지투성이라서 우선 씻어야 하겠는데요? 목욕물 받아놓을까요?”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이성준은 그녀가 난감하지 않게 자칫 간형준에게 해코지당할 뻔했던 상황은 쏙 빼놓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목욕하는 동안 이성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백아영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간형준이 만진 부위를 바디 워시로 박박 닦았다. 결국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까질 때까지 문지르고 나서야 남아 있던 촉감이 완전히 사라진 듯싶었다.그 사이 이성준은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지석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하산한 사람을 찾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산속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내도록 해.」간형준이 백아영에게 한 짓은 결코 예외가 아닐 것이다.백아영은 그의 손에 피가 묻는 걸 원치 않았기에 간형준을 직접 죽일 생각은 없지만,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도록 마음먹었다.끼익!욕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뜨거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백아영이 파자마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이성준은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동공이 커지더니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왜 허락도 없이 자기 몸을 혹사하는 거죠?”목이 라운드로 되어 있는 파자마를 입은 탓에 까진 피부를 가리기엔 역부족이라서 그녀는 허둥지둥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숨겼다.“그게... 단지 부주의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성준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이내 빨갛게 까진 피부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말지. 정 역겹다면 깨끗이 씻으면 되잖아요.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