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던 앤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런 거 몰랐고 전 그냥 이뻐서 입어본 것뿐이에요. 옷 한 벌가지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는 게 너무 억울하네요.”어이없는 상황에 백아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화를 낸 사람은 분명 앤니인데 오히려 그녀가 울자 백아영이 괴롭힌 것처럼 흘러갔다.“무슨 일이야?”이성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눈물 범벅된 앤니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앤니, 왜 울어?”“성준 오빠... 흑흑...”앤니는 구세주를 만난 듯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상황을 지켜보던 오미란은 객관적으로 설명했다.이성준은 앤니가 입은 웨딩드레스를 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백아영을 보며 말했다.“앤니는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 거 모르잖아. 옷 한 벌 가지고 꼭 그렇게 따지면서 애를 울려야 속이 시원해?”믿을 수 없는 말에 분노한 백아영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를 악물었다.“이성준, 이건 내 웨딩드레스야!”웨딩드레스는 그 자체로 남다른 의미를 상징할뿐더러 이건 이성준이 직접 그녀를 위해 고른 커플 웨딩드레스다.그런데 이게 고작 옷 한 벌에 불과하다니?“그렇게 신경 쓰이면 새로 한 벌 사면 되잖아.”“그거랑 같아?”이성준은 짜증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백아영, 제발 트집 좀 잡지 마.”이성준 옆에 서 있는 앤니를 보며 백아영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그녀는 갑자기 이성준과의 거리가 예전과 달리 멀게 느껴졌다.“이성준.”백아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너한테 난 어떤 사람이야? 정말로 좋아하긴 해? 왜 나는 네가 날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것 같지?”가까스로 재회한 상황에 서로에 대한 애틋함은커녕 남은 건 갈등과 다툼뿐이다.이성준은 주머니 속에 숨긴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여전히 싸늘한 태도로 무덤덤하게 말했다.“엉뚱한 생각 그만해.”전혀 흔들림 없는 이성준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벽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씨 가문에서 나온 백아영은 넋을 잃은 채 절망에 빠져 거리를 걸으며 그동안 일었던 일을 되새겼다.이성준이 돌아온 후로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었지만 슬픈 게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마치 둘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았고 백아영이 그걸 밀어낼 수도, 이성준이 다가올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에 잠겨 길을 걷던 중 갑자기 어떤 여자와 부딪혔고 그 사람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험상궂은 표정으로 백아영의 팔을 힘껏 꼬집으며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천한년! 감히 내 남편을 꼬셔? 죽어! 죽으란 말이야!”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자 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떨쳐내려고 했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이거 놔요!”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백아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욕했고 거리에서 난동을 피우는 모습은 보기 흉했다.“본처가 내연녀 때리고 있어요. 얼른 와서 구경해요.”“솔직히 내연녀는 맞아 죽어도 싸지!”“저렇게 이쁘고 어린애가 내연녀라니,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네요. 요즘 여자애들은 왜 저렇게 삐뚤어졌는지 몰라.”구경하러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백아영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고 착잡하던 기분은 더 최악에 달했다. 일이 안 풀리니 길 가다가 정신병자도 만나고 참 기이한 경험이다.정신병? 순간 생각이 번쩍인 백아영은 재빨리 그녀의 맥을 짚었고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정신병자였다!정신병은 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기에 지금으로선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백아영은 더 이상 맞서지 않고 기회를 틈타 그녀를 따돌리고 도망쳤다.“야! 뻔뻔한 내연녀 주제에 감히 도망쳐? 거기 서!”여자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끈질기게 뒤쫓았다.백아영은 있는 힘껏 뛰면서 경찰에 신고했고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강둑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완전히 따돌렸다.그녀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운이 안 좋으니까 정신병자도 만나네.”백아영을 놓친 후 미친 여자는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그때
백아영을 지키기 위해 이성준은 열세 번의 칼을 맞았다.이런 좋은 남자와 어찌 싸울 수 있단 말인가?“앞으로 다시는 트집 안 잡을게. 모든 걸 네 성격에 다 맞출게.”백아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성준의 손을 꽉 잡았다.“네가 정한 날짜에 맞춰서 결혼하자. 다음 달 8일.”이성준은 멈칫 놀라더니 눈빛이 흔들렸다.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었고 오직 걱정스러운 기색만 역력했다.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는데 용서하다니...“표정이 왜 그래? 나랑 결혼하는 거 후회해?”백아영이 노려보자 이성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야? 난 성격도 안 좋고, 나랑 결혼하면 엄청 고생할거야.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가 안 맞을 수도 있어. 나랑 같이 있으면 서럽고 억울한 일도 많을 텐데 괜찮겠어?”마치 바람피운 남자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려고 온갖 핑계를 찾는듯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예전 같으면 버럭버럭 화를 냈겠지만...“괜찮아.”백아영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이성준이 목숨 걸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순간부터 마음속에 있던 모든 응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졌고, 모든 게 제멋대로인 성격도 ‘내가 있는 한 넌 다치지 않을 거야’라는 말 한마디에 납득이 갔다.이번 일을 통해 백아영은 자신을 향한 이성준의 사랑과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이성준을 사랑한다면 그의 단점마저도 받아들여야 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성준, 나 결심했어. 네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든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너의 단점까지 사랑할 거야. 난 이제 너랑 평생을 함께할 준비가 되었어.”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이성준의 눈이 반짝 빛났지만 곧바로 감정을 숨겼다.그는 감춘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백아영, 정말 널 어떡하면 좋지?”그날 밤 이성준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백아영도 자연스럽게 함께 뒤따라가 그를 보살폈다.이성준은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못한 채 말을 삼켰다.그렇게 결
이성준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선 자리를 떴고 그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무기력함이 느껴졌다.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위정은 그의 손이 되어주었다.그때 백아영이 손에 과일을 든 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왔다.“이제 좀 쉬어.”백아영은 포크로 수박 한 조각을 찍어 자연스레 이성준의 입가로 가져갔다.그는 흠칫 놀라더니 곧이어 입을 벌려 먹었고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성씨 일가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남아있는 거지?”사과를 건네주려던 백아영의 손은 허공에 멈췄다.“뭐라고?”백아영은 깜짝 놀라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고 위에는 전문적인 자료로 가득했지만 이성그룹을 장악하면서 조금은 배워뒀던 터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하지만 내용은 청천벽력이 따로없었다.이성그룹은 일방적으로 성씨 일가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했다.그중 몇 개는 투자 규모가 컸고 매우 광범위한 프로젝트라서 성씨 일가가 남원으로 돌아와 자리 잡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지금 중단한다면 성씨 가문은 큰 치명타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이성그룹도 득 볼 일이 전혀 없었기에 둘 다 손해 보는 상황이다.“왜 갑자기 중단한 거야?”백아영은 다급하게 물었다. 역시나 성무열이 요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성무열이 거론되자 이성준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나쁜 의도로 너한테 접근했으니까.”실행이 늦었을 뿐 진작에 계획했던 일이다.백아영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이성준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성그룹과 성씨 일가는 비즈니스 파트너야. 여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섞으면 안 되지. 그리고 지금 중단하는 건 이성그룹과 성씨 일가 모두에게 큰 손해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선택을 할 필요는 없잖아.”백아영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나랑 성무열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고 얘기했잖아. 괜한 일로 화풀이하지 마.”“아무 사이 아닌 거면 성씨 일가가 어떻게 되든 너
이성준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성씨 일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성무열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집에 아무도 없자 백아영은 그의 회사로 향했다.1초 전까지 미간을 찌푸린 채 엄숙한 표정으로 비서에게 말을 건네던 성무열은 백아영을 보자마자 표정이 바뀌더니 기쁨에 겨워 히죽거렸다.“해가 서쪽에서 떴나? 웬일로 우리 아영이가 직접 찾아왔지?”성무열은 손에 든 두꺼운 폴더를 비서에게 던져주고는 재빨리 백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며칠 동안 찾아가지 않으니까 갑자기 내가 보고 싶었어? 나 없으면 안 되겠지?”성씨 일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찾아왔더라면 아예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반응이 너무 자연스러웠다.백아영은 진지하게 그의 손을 밀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성그룹이 모든 협력을 중단했다고 들었어. 큰 타격 받았을 텐데 괜찮아?”숨기고 싶었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찾아온 백아영을 마주하자 마지못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괜찮아. 조금 손해 봤을 뿐이야. 성씨 일가가 워낙 규모가 커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감당할 수 있다고?”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오피스룩을 입은 젊은 여자가 걸어왔고 성무열과 조금 닮은 듯한 생김새는 매우 이뻤다. 그러나 햇살처럼 밝은 성무열과 달리 그녀에게선 왠지 모를 각박함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백아영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성씨 일가는 5조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어요! 이 적자를 메우지 못한다면 파산 신청해야 하고 망하는 거라고요!”성무열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며 호통쳤다.“성윤지, 헛소리하지 마!”“이게 왜 헛소리죠? 전부 다 사실이잖아요. 오빠, 언제까지 저 여자한테 숨길 거예요? 혼자 이걸 감당한다고 알아줄 것 같아요? 어이가 없네.”성윤지는 비꼬며 말했다.“저 여자만 아니었다면 성씨 일가가 이 지경에 이르는 일도 없었다고요!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도와줘서 얻은 게 뭐죠? 결국엔 이성준 씨에게 내쳐지는 신세가 됐잖아요.”
“백아영 씨, 정말 이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고요?”성윤지는 건방진 태도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가식 떠는 건 아니겠죠?”“그런 거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겠죠.”성윤지는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었다.“찾아온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제 예상이 맞다면 이성준 씨한테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죠? 선우 일가의 자산으로는 5조를 내놓을 수 없을 텐데, 여기저기 빌린다고 해도 이성준 씨의 말 한마디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할 수 없었던 백아영은 그저 이를 악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래도 시도해 봐야죠...”“시도? 성씨 일가가 거친 풍파를 맞고 있는데 시도한다고 되겠어요?”성윤지는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었다.“정말로 성무열의 은혜에 보답하고 성씨 일가를 돕고 싶은 거면 제경의 허씨 일가를 찾아가 봐요. 선우 일가의 의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그걸 내놓는 대가로 도와줄 수도 있어요.”의술은 선우 일가의 생존과 연관된 일급 비밀이기에 이걸 내놓는 건 선우 일가를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다!“왜요? 못하겠죠?”성윤지는 비꼬며 말했다.“역시 성무열이 잘해주니까 그걸 이용한 게 맞았네요. 덕분에 성씨 일가는 나락으로 떨어졌어요!”백아영은 착잡한 심정으로 회사를 나와 선우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혹시 제경 허씨 일가 알아요?”“알지, 제경에서 잘나가는 재벌 가문이야. 수년 전 선우 일가의 처방전을 높은 가격에 사겠다면서 의술을 배우려고 사람까지 보냈는데 거절했어.”“그 사람들은 왜 선우 일가의 의술에 집착하는 거죠?”“무슨 연구에 전념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어.”선우 일가는 줄곧 의술의 전설로 여겨져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연구할 때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필히 선우 일가를 떠올리게 될 텐데 도움을 청해 함께 연구하는 게 아니라 처방전을 사서 의술을 배우려고 하니 뭔가 수상쩍었다.그래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다는 느낌에 백아영은 두 눈이 반짝였다.
“백아영, 또 나랑 싸우고 싶어? 넌 내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하는데 제발 가만히 있으면 안 돼?”성질부리며 화를 내는 이성준을 마주하니 가슴이 미어졌다.“네 말이 맞아. 성무열은 나 때문에 이성그룹과 손잡은 거야. 너는 나 몰라라 하며 내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그럴 수 없어. 능력이 없어도 최선을 다해 성씨 일가를 도울 거야.”이성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성무열 도와주면 내 체면은 뭐가 돼?”백아영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물러서지 않았다.“네가 그 사람 다치게 할 때 내 체면도 말이 아니었어.”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이성준은 약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검은색의 한약이 바닥에 쏟아졌다.이성준은 험상궂은 얼굴로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고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위정은 벌벌 떨며 서류를 들고 이성준의 뒤를 따랐다.바닥에 쏟아진 한약을 보자 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성준의 나쁜 성격을 받아들이고 그와 싸우지 않으면서 모든 걸 감당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불합리한 상황에서 화내며 억지를 부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다.밖으로 나온 이성준은 걸으면서 명령했다.“지금부터 백아영의 모든 계획을 방해해. 티 나게!”‘티 나게? 사장님이 한 일이라고 소문이라도 내라는 건가?’위정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사장님, 이렇게 해서 성무열 씨를 무너뜨리게 되더라도 아영 씨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겁니다.”이성준은 걸음을 멈추더니 창가에 서서 크고 오래된 집 전체를 바라봤고 눈에서는 슬픔과 쓸쓸함이 느껴졌다.“이씨 가문은 너무 강력한 존재야. 내가 없으면 아영이랑 현무도 버티지 못할 텐데 백아영 성격상 어떤 상황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울 거야.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 상처받으며 고통스럽게 사는 걸 원치 않아. 성무열이 곁에 있다면 적어도...”이성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행복할 거야.”위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악했다.“지금 일부러 아영 씨를 성무열 씨한
백아영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손가락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허우정을 바라보았다.“허씨 일가에서 약물 연구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지금까지 선우 일가의 의술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연구가 한계에 다다라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이죠? 물론 우정 씨도 제가 선우 일가의 후계자로 지명받기 전에 이미 제갈 일가의 맹독을 해독하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전 선우 일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의술을 뛰어넘는 건 몰라도 최소한 뒤지지 않는 의술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해요.”백아영은 컵을 내려놓았다.“허씨 일가가 원하는 약을 2년 안에 개발해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건 어때요? 만약 실패한다면 5조의 10배인 50조를 배상해드릴게요.”투자를 아무리 잘해도 2년 동안 10배로 불어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사실 두 가지 제안은 모두 허우정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아영 씨 본인을 팔아넘기겠다는 거예요?”허우정은 의미심장하게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약혼자분과 상의하고 내린 결론 맞아요?”백아영이 성무열을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은 뻔하므로 이성준이 반대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그녀가 여기까지 온 이상 이성준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다만 허우정은 왜 그를 언급한단 말인지?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아영 씨가 제안한 조건과 우리의 협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영 씨이죠.”허우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커피가 참 맛있네요. 잘 마셨습니다.”멀어져가는 허우정의 뒷모습을 보며 백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이게 당최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허우정이 이성준을 언급한 이상 어쩌면 그에게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곧이어 이씨 가문 본가로 향한 그녀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도우미에게 이성준이 돌아왔는지 물었다.두 사람이 다툰 이후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