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영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손가락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허우정을 바라보았다.“허씨 일가에서 약물 연구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지금까지 선우 일가의 의술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연구가 한계에 다다라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이죠? 물론 우정 씨도 제가 선우 일가의 후계자로 지명받기 전에 이미 제갈 일가의 맹독을 해독하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전 선우 일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의술을 뛰어넘는 건 몰라도 최소한 뒤지지 않는 의술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해요.”백아영은 컵을 내려놓았다.“허씨 일가가 원하는 약을 2년 안에 개발해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건 어때요? 만약 실패한다면 5조의 10배인 50조를 배상해드릴게요.”투자를 아무리 잘해도 2년 동안 10배로 불어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사실 두 가지 제안은 모두 허우정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아영 씨 본인을 팔아넘기겠다는 거예요?”허우정은 의미심장하게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약혼자분과 상의하고 내린 결론 맞아요?”백아영이 성무열을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은 뻔하므로 이성준이 반대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그녀가 여기까지 온 이상 이성준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다만 허우정은 왜 그를 언급한단 말인지?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아영 씨가 제안한 조건과 우리의 협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영 씨이죠.”허우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커피가 참 맛있네요. 잘 마셨습니다.”멀어져가는 허우정의 뒷모습을 보며 백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이게 당최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허우정이 이성준을 언급한 이상 어쩌면 그에게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곧이어 이씨 가문 본가로 향한 그녀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도우미에게 이성준이 돌아왔는지 물었다.두 사람이 다툰 이후
“할머니, 혹시 제경의 허씨 일가인가요?”백아영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순간 김경옥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씩씩거렸다.“당연하지! 아니면 감히 우리 집안에 도전장을 내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아영아, 넌 허씨 일가와 오씨 일가가 얼마나 원한이 깊은지 모를 거야.”김경옥은 백아영의 손을 잡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네 외할아버지와 허씨 일가 어르신 허용재는 젊었을 때부터 라이벌 관계였어. 허용재는 항상 비열한 수법으로 외할아버지를 모함했고, 사업을 가로채는 일은 부지기수였지.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심지어 한 번은 약품 대행 사업을 손에 넣으려고 사람을 고용해 교통사고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 결국...”김경옥이 왼쪽 바짓가랑이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싸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의족이 드러났다.“대행 프로젝트를 빼앗아 간 덕분에 허씨 일가는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했고, 우리 가문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 알아? 비록 나중에 성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오씨 일가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허씨 일가를 따라잡았지만, 의약 면에서는 훨씬 뒤처졌어. 여태껏 억압받아 날개를 펼칠 수가 없었지.”이씨 가문은 거의 모든 분야를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쩐지 유독 의약 산업에만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제경은 무려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허씨 일가에서 의약 산업을 꽉 잡고 있으니 이씨 가문이 얼마나 많은 제약과 탄압을 받는지 안 봐도 뻔했다. 아마 발전하고 성장하고 싶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할머니를 다치게 한 범인은 붙잡혔나요?”김경옥은 고개를 저으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사주받은 증거를 찾지 못해서 애꿎은 사람만 대신 감옥에 갔어.”백아영의 손가락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아영아.”김경옥은 백아영의 손을 다시 잡아당기며 자상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괜히 부담 갖지 마. 할머니는 너한테 오씨 일가를 대신하여 의약 산업을 발전시켜달라는 뜻이 아니야. 단지 너무 기뻐서
백아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기어코 외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릴 거야?”쌀쌀맞은 이성준의 모습은 마치 얼음 같았다.“외할머니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너 아니야? 백아영, 넌 이미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랑 사이가 틀어졌는데 외할머니 가족과도 담을 쌓고 싶어?”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사뭇 강압적이었다.“이쯤에서 물러나 이 일에 더는 관여하지 말고, 내 신부가 될 준비나 제대로 해.”“넌 왜 물러서지 않는데?!”백아영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이성준이 돌아온 이후로 줄곧 양보한 사람은 그녀였다. 설령 본인이 손해를 볼지언정 절대로 양심을 속이고 성무열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다른 일은 양보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절대 안 돼. 이성준! 나도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마지노선이 있어.”백아영은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이상 그냥 원칙적으로 처리하자. 누구의 능력이 더 뛰어난지에 따라 승패를 결정해.”이성준은 입을 꾹 닫았다.이내 주변에 서서히 냉기가 감돌더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런 결혼 생활이 과연 행복할 거로 생각해?”끊임없는 불만과 분쟁, 갈등...사람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동물이라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백아영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나랑 결혼한 거 후회하는 거야?”이성준은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긍정도 부정도 없었지만, 이 침묵의 순간은 백아영의 마음에 마치 비수를 꽂은 듯 묵직한 통증을 안겨주었다....백아영은 약속을 잡고 허우정을 다시 만났다.허우정은 계약서 내용을 훑어내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아영 씨, 정말 저희랑 협력하기로 한 거예요? 행여나 파혼이라도 당할까 봐 두렵지 않아요?”백아영은 주먹을 꽉 쥐고 이내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약혼자분도 아영 씨와 같은 생각이길 바랄게요.”허우정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성준이 마침 이 광경을 목격했다.백아영의 이마가 찢겨 하얀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는 선혈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이내 안색이 돌변하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그는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었지만, 다리를 옮기는 찰나 발밑에 마치 초강력 접착제라도 바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폭주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이성준의 뒤를 따라 나온 위정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사장님! 아영 씨 이마에서 피가 나요.”이성준은 화가 나면서도 가슴이 아픈 나머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지만 겉으로는 매정한 척 싸늘한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자업자득이야.”이 말을 듣자 백아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했다.이성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이마를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지?그녀를 감싸주기는커녕 걱정하는 티도 없었다.그렇다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죄인처럼 거실에 무릎을 꿇고 모두의 심문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그만해.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조카며느리에게 손찌검하면 쓰겠어? 혹시라도 소문이 돈다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김경옥은 오태식을 붙잡더니 앞으로 나서면서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외할머니는 아영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알아. 잘못은 저질러도 바로 잡을 수 있잖아? 당장 계약을 파기하고 허씨 일가와 더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없던 일로 치고 외손자 며느리로서 인정해줄게.”백아영은 뒤돌아보는 대신 이성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계단에 서 있는 남자는 여전히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우아한 기품과 완벽한 비율은 몇 번을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왠지 모르게 낯설고 소외감이 느껴졌다.분명 그의 예비 신부이자 사랑하는 여자로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마땅한데, 지금 이 순간 나 홀로 외로이 거실에 서서 아무한테도 환대받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허씨 일가에서 2년 동안 오씨 일가
“성준아, 이제 저 사람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지? 이참에 결혼도 없던 일로 하고 그냥 파혼해.”김경옥도 눈살을 찌푸리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백아영도 결국 백채영과 같은 부류인가 봐. 둘 다 좋은 사람은 아닌 듯싶은데 굳이 결혼해야 하겠어?”이 말을 듣자 백아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반면 두려움도 몰려와 불안한 눈빛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대로 파혼하는 건가?‘아니, 아닐 거야.’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성준은 자신의 안위와 목숨까지 안중에도 없었다.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고작 이런 일로 파혼하고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아마도 지금은 화가 났을 뿐, 나중에 잘만 달래준다면...“참 웃기는 사람들이네요. 멀쩡한 혼사를 왜 당신들이 무르는 거죠?”선우경진은 백아영을 끌어안고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파혼해도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지 않겠어요?”“아영아, 가자! 오빠랑 같이 집에 돌아가자. 성준 씨가 직접 사과하러 찾아오지 않은 한 이 결혼은 없던 거로 해.”말을 마친 그는 씩씩거리며 백아영을 끌고 나갔다.강제로 끌려간 백아영은 심란한 마음으로 이성준을 돌아봤지만, 싸늘하면서 무심한 눈동자를 마주쳤다.그동안 애틋하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차가운 분노만 가득했다.백아영은 문득 두 사람의 사이가 아득히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선우경진이 백아영을 끌고 가고 나서도 오태식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이내 노기등등한 얼굴로 말했다.“봐봐, 성준아, 정녕 저런 여자랑 결혼할 거야? 이런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서는 절대로 안 돼.”이성준의 서늘한 시선은 마치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오태식에게 향했다.“저희 집안일에 외삼촌이 끼어들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오태식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분명 우호적인 태도였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만약 다음번에도 백아영을 다치게 한다면 삼촌을...”이성준의 말투가 얼음장처
화면을 가리기 위해 휴대폰을 뺏어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백아영은 통화 내역을 터치했다. 제일 위에는 7분 전에 뚱보 아줌마한테서 걸려 온 전화가 있었다.‘뚱보 아줌마?’“나한테 알려준 사람은 뚱보 아줌마였어. 요즘 현무를 돌보기 위해 다시 본가로 돌아오셨잖아. 네가 괴롭힘당하는 걸 발견하고 결국 보다 못해 나한테 연락해서 얼른 오라고 했거든.”선우경진은 본인의 잔머리에 몰래 혀를 내둘렀다. 이성준의 연락처를 뚱보 아줌마라고 저장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백아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 선우경진에게 전화를 다시 건네며 부루퉁하게 말했다.“전 파혼하지 않을 거예요.”사실 선우경진은 방금 백아영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일부러 집으로 데려갈 테니까 이성준이 직접 찾아와 사과하지 않은 이상 선우 일가에서 먼저 파혼하겠다고 말을 가로챈 것이다.즉, 이성준이 데리러 올 때까지 백아영의 발목을 잡아놓을 심산이었다.하지만 이성준은 절대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결혼식 날까지 버틴다면 두 사람의 혼사가 정말 무산될지도 모르기에 백아영도 단념할 거로 생각했다.“아영아, 잘 생각해. 이번에 일어난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다만 이성준은 가족 편에 서서 적개심에 눈이 멀어 널 마구 몰아세웠잖아. 이성준과 결혼하게 된다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끊이질 않을 텐데, 정녕 감당할 수 있겠어? 자기 아내마저 지키지 못하는 남편과 결혼하는 건 절대 금물이야.”선우경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백아영의 가슴을 찔렀다.이런 남편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다만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머릿속에는 이성준의 자상함과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만이 가득했다.결국 이성준이 단지 이번에 실수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게 되었다....다음 날, 이성준은 백아영을 찾아오지 않았다.셋째 날은 물론,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넷째 날에도 그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백아영의 기분이 점점 가라앉더니 초조함이 스멀스멀 피어
선우경진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분출할 방법이 없었다.“이제 와서 재촉해봤자 무슨 소용 있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설득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영은 성준 씨 좋은 점만 기억하고 결혼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는데 제가 무슨 수로 말리겠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아영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이나 하지 말지 그랬어요?”...제경에 도착한 백아영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결혼 날짜가 멀지 않았기에 그녀는 단지 업무 파악을 위해 제경을 찾았고, 허씨 일가의 연구실을 남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왜냐하면 예전과 달리 더는 의지할 곳 없는 열혈 단신이 아니라 이성준의 예비 신부이자 이현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이제 그녀에게도 온전한 집이 생겼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샤워를 마친 백아영은 침대에 누워 이현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이내 오동통한 아이의 얼굴이 화면이 나타나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현무야, 오늘 유치원에서 재밌게 놀았어?”“네! 선생님께서 상도 주셨어요.”이현무는 뿌듯한 얼굴로 가슴에 매달린 작은 빨간 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이 일어서는 순간 백아영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이성준을 발견했다.그는 물 받으러 컵을 들고 이현무의 뒤를 걸어 지나갔다.이를 보자 백아영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큰 소리로 불렀다.“성준아!”이성준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무시하고 물을 받은 뒤 자리를 떠났다.백아영은 무심하게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성준아! 이성준!”이성준은 아예 못 들은 척했다.이현무도 아빠라고 불렀지만, 똑같이 무시당했다.화면에서 사라진 이성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백아영의 기분은 마치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화가 났단 말인가?“엄마, 아빠랑 싸웠어요?”이현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울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
이씨 가문 본가.이성준은 창가에 서서 차에서 내리는 백아영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불륜 기사를 본 게 확실해?”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성준은 크게 심호흡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아영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제야 의자로 걸어가 앉아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마치 피바람이 부는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위정은 전전긍긍하며 서재를 나섰고, 무기력한 상황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백아영이 단념할 수 있도록 스스로 명예 훼손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은 사장님이 딱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고작 백아영 씨의 오해를 사기 위해서라니...’보아하니 이따가 대판 싸움이 벌어져 한바탕 난리 날 게 뻔했다.백아영이 본가에 들어서는 순간 도우미들은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는데, 불륜 기사 때문인 듯싶었다.그녀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 없이 짐을 자기 방에 놓고 서재를 찾아갔다.위정과 뚱보 아줌마는 복도에 서서 기웃거렸는데, 걱정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영 씨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요.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도련님이랑 다투시려나요?”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요.”사장님이 일부러 불륜 기사를 터뜨린 것도 사실 백아영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돋우어 결국은 실망하게 하기 위해서인지라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뚱보 아줌마는 초조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아니면 들어가서 말려볼까요?”“손찌검만 하지 않는다면 저희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위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비록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현재 사장님에게 필요한 상황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다. 백아영이 서재에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성준을 발견했다.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지만, 이제 서류를 뒤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듯싶었다.이를 본 백아영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상처는 다 나았어?”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성준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속으로 약간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