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민우진은 공장으로 들어섰다.선우 일가 사람들은 그의 도움을 고맙게 여겨 딱히 경계하지 않았고, 모든 공정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민우진이 무심코 훑어보고는 바로 기억했다.그러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은 별도로 떨어진 작은 방에서 진행했는데 당장은 확인이 불가능했다.“마지막 프로세스는 수작업으로 진행하죠. 기계 인증을 구실로 염탐하는 게 과연 소용이 있을까요?”심유미가 기둥에 기대면서 비아냥거렸다.민우진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그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긴 했다.순수 수작업과 별도의 방, 그곳을 드나들 명분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심유미는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새빨간 입술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우진 씨,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같은 방법을 반복하는 거죠. 제가 사람을 보내 공장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할 테니 대부분 사람의 주의를 이끈 틈을 타서 우진 씨는 방에 들어가서 조제법을 염탐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민우진을 바라보았다.“다만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정체가 폭로될 가능성이 크겠죠? 만약 우진 씨라는 사실을 들킨다면 백아영과 유지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이어가기 힘들겠죠.”민우진은 백아영한테서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이지만, 자기가 한 짓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결국 큰마음 먹고 결정을 내렸다.“오늘 밤 움직이죠.”현재 선우 일가에서는 공장에 더 많은 인력을 배치한 상황이다. 특수한 시기인 만큼 2교대를 실시하면서 야간 근무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백아영은 낮에만 공장에 있고, 매일 저녁 7시가 땡하면 성무열이 그녀를 데리고 퇴근했다.따라서 밤에 움직이면 실수로 그녀를 다치게 하거나 제지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민우진은 나름 주도면밀하게 계획했지만, 예상 밖의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성태오 때문에 발목이 잡힌 성무열은 백아영에게 연락해서 오늘 저녁 데리러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집에
“우진 씨?”백아영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지금 뭐 하는 거죠?”민우진이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아영과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숨기려고 했으나 손발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는 이 지경이 된 이상 아무리 변명해도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도 결코 변명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민우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씁쓸하게 웃었다.“우린 어쩌면 인연도 이리 얄팍할 수가 있죠?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딱 아영 씨에게 들키다니.”아직도 믿기지 않아 괴로워하던 백아영은 민우진의 자조적인 말에 마치 사형을 선고받은 듯싶었다.이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더니 고개를 연신 저었다.“왜...”민우진은 가족을 제외하고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동안 민우진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백아영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충격을 감추지 못했고, 더욱이 터무니없는 악몽 같았다.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우진 씨, 혹시 누가 억지로 시켰어요?”이는 백아영이 머리를 쥐어짜 내서 생각한 결론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는 민우진의 됨됨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백아영의 모습을 본 민우진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단지 찰나에 불과했을 뿐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비장한 얼굴로 백아영을 향한 집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은 다름 아닌 아영 씨에요.”그러고 나서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벌써 몇 년째인데 그동안 아영 씨의 마음에는 항상 다른 사람만 있을 뿐, 여태껏 저한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나요? 제가 아영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죠? 그거 알아요? 사실 전 4년 전부터 아영 씨가 좋았어요. 민씨 가문의 모든 걸 포기하고 아영 씨와 남원을 떠나고 싶을 만큼 사랑했다고요. 제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둘이서 여생을 함께하기로 했으면 뭐해요? 아영 씨의 인연에 저라는 사람이 나타난 적이 없는데.
백아영은 마음이 괴로운 탓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했다.민우진에게 결코 상처를 안겨 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함과 자책, 고통이 밀려왔지만 어떻게 해야 만회할 수 있을지 몰라서 속수무책이었다.“하, 죄책감 때문이라도 안 되겠어요?”민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변의 공기가 점점 싸늘해졌고, 마치 지워지지 않은 그림자에 휩싸인 듯 스산했다.“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나중에 괜히 저를 탓하지 마세요.”그의 손에 마지막 프로세스에 필요한 데이터 시트가 들려 있었다.“선우 일가 회복약의 조제법은 이미 제 손에 있어요. 만약 외부로 누설한다면 선우 일가는 큰 타격을 입겠죠? 물론 약까지 생산한다면 선우 일가 회복약의 명예도 실추될 거예요. 어쨌거나 선우 일가에게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겠죠. 아영 씨는 당연히 선우 일가를 지키고 싶겠죠? 그렇다면 지금 선택권을 줄 테니까 저랑 함께한다면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백아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앞의 민우진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낯설었다.그동안 친한 줄 알았던 친구가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 같았다.그녀는 고통에 목이 메었다.“우진 씨, 왜 그래요? 정녕 거래로 감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이유 불문하고 억지로 함께한다고 해도 행복하기는커녕 오로지 고통뿐이죠. 우린 친구잖아요? 우진 씨에게 상처 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우선 진정해볼래요?”그를 배려하는 백아영의 모습을 보자 민우진은 왠지 모르게 더 화가 났다.성무열도 협박해서 그녀를 얻게 된 셈인데 왜 자신과 함께하면 오로지 고통뿐이라고 하는 거지?결국은 그녀에게 너무 잘해줘서 마음이 약한 본인 탓이지 않은가!“싫다는 거네요. 그렇다면 저도 행동을 개시할 수밖에 없어요.”민우진은 굳은 얼굴로 손을 뻗어 백아영을 붙잡으려고 했다.이 지경이 된 이상 만약 백아영이 함께하기로 한다면 그는 모든 걸 포기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한다면 무력을 행사해야만 했다.눈앞의 남자는 점점 더 낯
“백아영, 네가 화를 자초한 탓에 선우 일가는 큰코다치게 되었어!”백아영의 당숙 뻘인 선우광범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거실에 선우 일가 사람이 가득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안색이 어둡고 수심에 잠겼다.선우광범이 백아영에게 화살을 돌리자 다들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회복약은 선우 일가에게 침술을 제외하고 두 번째로 중요한 보물인데, 조제법을 유출했으니 막대한 영향을 줄 거야! 선우 일가의 생존 여부와 직결된 일이라고!”이번에는 선우 일가가 파산을 신청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의약 명문가는 재산이 없을지언정 처방전과 의술만큼은 지켜야만 했다. 이는 또한 가문이 존재하고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백아영은 거실 중앙에 서서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이내 어렵사리 입을 뗐다.“최대한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어떻게든 영향을 덜 받게 노력할게요.”“만회한다고? 네가 무슨 수로 만회해?!”선우광범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물었다.이때, 위층에서 도우미의 비명이 들려왔다.“큰일 났어요! 어르신께서 피를 토하시더니 쓰러지셨어요.”깜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침대에 누워 요양 중일 텐데, 갑자기 왜 복도에 쓰러져 있단 말인가?주름이 자글자글한 선우소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입가에 묻은 핏자국이 유난히 빨갰다.“할아버지!”백아영은 서둘러 맥박을 확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당황함과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은 그가 치솟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원래 앓고 있던 병을 자극해 무너져버린 댐처럼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심지어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침 놔드릴게요!”백아영은 선우소훈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서둘러 침을 놓았다.그녀의 손놀림은 매우 빨랐고,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옆에 있던 사람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그런데 왜 갑자기 쓰러지신 거죠?”“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심은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
만약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백아영은 평생 일반인 신세로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선우 일가에서 쫓겨나는 순간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 어디를 가든 무시당하고 환대를 받지 못하는 죄인이 된다.이는 배은망덕을 넘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밟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선우경진은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주먹을 쥔 손가락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작은아버지, 작작 하세요!”그가 웃어른만 아니었다면 벌써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치고도 남았다.만약 선우광범이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선우광범은 물러서기는커녕 당당하게 말했다.“나도 선우 일가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백아영은 재앙이자 불길한...”“그만 하세요!”선우경진이 버럭 화를 내면서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번쩍 들었다.옆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그를 뜯어말리면서 현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백아영도 침을 내려놓았다. 비록 죽음의 문턱에서 선우소훈을 살려냈지만, 워낙 몸이 약한데 화병까지 더해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진이 빠져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이내 혼자서 조심스레 선우소훈을 부축하여 방으로 걸어갔다.“아영 씨, 제가 도와줄게요.”심은아가 손을 뻗었지만, 백아영은 살짝 피했다.심은아를 바라보는 백아영의 서늘한 눈빛은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그녀는 선우소훈의 귀에 이런 말이 ‘무심코’ 흘러 들어가게 한 심은아를 용서할 정도로 관대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과연 우연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심마저 들었다.“은아 씨, 도하 도련님은 제가 사람을 보내서 계속 수소문할게요. 은아 씨도 이제 컨디션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계속 선우 일가에 남아있는 것도 좀 그렇네요. 조만간 시간을 봐서 이만 나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선우소훈을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갔다.제 자리에 얼
“나한테 화난 거 아니야?”백아영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거나 그날 바다 위에서 한 짓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었으니까.심지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이성준이 열 받아서 아예 자신을 무시하거나, 다시 만나면 목을 졸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날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이성준의 표정이 문득 굳어졌다. 이내 눈물을 닦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러고 나서 짐짓 화난 척 말했다.“만약 내가 화가 났다면 용서를 구하고 기분을 달래줄 거야?”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사실 그녀는 이미 한 달 뒤에 석고대죄하고 불평불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백아영은 죄책감에 그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아파...”대답도 변명도 없지만, 애교만큼은 잘 부렸다.이성준은 화가 나고 짜증도 밀려왔지만, 그녀 앞에서는 또 속수무책이었다.“아픈 건 아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해 봐. 대체 어쩌자는 거야? 날 좋아하면서 왜 성무열과 헤어지지 않은 거지?”비록 말투는 거칠었으나 어느새 손에 힘이 다 빠져서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백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차마 시선을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른 화제를 바꿨다.“당신한테 제약 기계가 왜 있지?”“선우 일가 제약 공장 사건 이후로 해외로 사람을 보내 구매했어. 며칠 전에 막 도착했거든.”해외에서 이런 대형 기계를 대량으로 구매하면 전용기로 운송한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따라서 백아영이 민우진의 도움을 받자 이성준은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그러나 민우진이 사람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건 예상 밖이었다.이런 제약 기계는 한 대만이라도 금액이 만만치 않았고, 하물며 대량으로 구매했으니 이성준은 거금을 들였을 것이다.심지어 아무도 몰래 돈을 쓰지 않았는가?백아영은 속으로 감동을 금치 못했다. 금세 또 기운이 생겨난 듯 투지가 불타올랐다.“기계 좀 보여줘.”이성준은 기분이 좋아진 듯 입매가 살짝 풀어졌다. 그
혹시라도 서로의 기계를 부숴버려 불필요한 손실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재빨리 끼어들었다.“납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기계가 많을수록 좋아. 두 사람 기계 다 필요하니까 지금 사람 보내서 옮겨갈게.”말을 마친 백아영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돌아서서 선우 일가로 향해 이 소식을 전했다.새로운 기계가 생겼다는 말에 선우 일가 사람은 즉시 의욕이 불타올랐다.한편, 선우광범도 위층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 기뻐하는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심은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탄식했다.“백아영은 운도 좋네요. 민우진과 틀어졌더니 이성준과 성무열이 나타나고...”선우광범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며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기계를 구하면 대수인가? 나중에 누가 가서 또 깡판 칠지도 모르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무슨 자격으로 선우 일가를 다스린다는 거지?”선우광범의 눈빛에는 야망이 활활 타올랐다.그동안 제갈 일가의 위협을 받아온 선우 일가에서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선우 일가의 아가씨였기에 백아영이 가문을 이끄는 후계자인 건 사실이다.그러나 제갈 일가가 무너지면서 위협도 사라졌고, 그 누구든 백아영의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이 생겼다.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굳이 이렇게 큰 가문을 지탱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고,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에게 맡기는 게 훨씬 좋지 않겠는가?“가서 여섯째랑 일곱째랑 여덟째를 불러와.”선우광범이 부하에게 말했다. 그들도 백아영에게 불만이 있는지라 바람 조금만 넣고 부채질한다면 그의 편에 설 것이다.이번 기회를 틈타 그는 백아영을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릴 작정이다.이성준과 성무열이 구한 기계는 새 제품이라서 전부 선우 일가 제약 공장에 바로 옮겼다.게다가 공장은 선우 일가 별장 안에 있으므로 보안 등급도 보장할 수 있다.기계와 약재가 준비되자 백아영은 선우 일가 사람한테 즉시 공장으로 복귀해 생산에 돌입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전처럼 순조롭지 않았다.절
그렇다고 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고작 몇 마디 말로 그녀의 공로를 가로챌 수 없는 법이다.“아영아, 선우 일가를 위해서라도 후계자 자리를 내놓는 게 좋지 않겠어?”여섯째 작은아버지가 온화한 얼굴로 타일렀다.여덟째 작은아버지도 맞장구를 쳤다.“넷째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야. 네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한다고 해도 선우 일가 사람인 건 변함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일곱째 작은아버지는 성격이 불같아서 단도직입적으로 거의 명령하다시피 말했다.“납품 기한을 맞추는 게 최우선이니까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백아영, 얼른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 넌 선우 일가를 책임질 자격이 없어, 물론 그럴 만한 능력도 안 되고.”“다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작은아버지라는 사람들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기 조카를 몰아붙이는 게 어딨어요?”화가 난 온유성이 뛰쳐나와 깡마른 몸으로 백아영 앞에 막아섰다.선우광범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온유성 씨, 이건 우리 집안일이니까 당신 같은 외부인은 낄 자격이 없어요. 마침 이 기회에 백아영을 당신 집으로 데려가요.”온유성은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비록 기억은 잃었지만,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원래는 선우정현이 시집오는 입장이지만, 능력이 뛰어난 백아영을 낳았다는 이유로 제갈 일가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게 되자 그는 데릴사위로 선우 일가에 합류하여 족보상 백아영은 선우 일가 사람이다.그러나 이제는 제갈 일가를 무너뜨렸다고 백아영을 쪽쪽 빨아먹고는 필요 없다고 쫓아낸다는 건가?“다들 의사의 사명감을 운운하며 성인군자인 척할 때는 언제고, 이처럼 배은망덕한 짓을 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군요. 오늘 내가 여기 있는 한 우리 딸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줄 알아요!”선우광범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선우소훈이 인사불성이 되어 선우경진의 보살핌을 받고 있기에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진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백아영을 후계자 자리에서 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