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란 위정은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사장님이 백아영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지?차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패닉에 빠진 그의 귓가에 문득 두 사람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를 데리고 먼저 도망쳐, 나중에 따라갈 테니까.”위정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회장님의 비밀 경호원은 피도 눈물도 없다. 만약 빈소에서 맞서 싸우게 된다면 이성준이 목숨을 걸더라도 백아영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러나 백아영을 데리고 나온 이상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친다면 남아서 경호원의 발목을 붙잡는 이성준이 있기에 아직 한 줄기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역시 사장님은 백아영 씨를 버린 게 아니었다.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고 나서 백아영에게 다가가는 순간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곧장 백아영을 들이받으려고 했다.“백아영 씨!”위정은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별장 입구 서 있는 이영철의 표정은 극도로 싸늘했다. 그녀가 어디서 죽든 관심이 없고, 머릿속으로 오직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죽일 방법만 생각했다.그는 백아영을 저승길로 보내 아내한테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게 할 작정이다.땅바닥에서 허둥지둥 기어 일어난 백아영은 도망가기에 너무 늦었는지라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범퍼를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했다.그러나 위기일발의 순간, 조수석 차 문밖에 힘겹게 매달린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는 차량의 가속도에 힘입어 점프한 뒤 그녀의 앞에 착지하여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옆으로 확 밀쳤다.그리고 본인은 차량에 부딪혀 저 멀리 날아갔다.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싶었고, 백아영은 뼈만 앙상한 남자가 차에 부딪혀 높이 튕겨 올라 땅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땅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깨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하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에도 그녀가 무사한 걸 보자 피 묻은 입술을 힘겹게 끌어올리며
비밀 경호원이 뛰어갔을 때, 땅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을 제외하고 온유성과 박아영은 온데간데없었다....“아빠...”움직이는 도중 몸이 흔들거리는 느낌에 백아영은 서서히 눈을 떴다.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고통 따위 안중에도 없이 당황한 눈빛으로 두리번댔다.“아빠?”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온유성은 얼굴이 창백했고 핏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호흡마저 멈춘 것처럼 그녀의 옆에 있는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는데 생사가 가늠이 안 되었다.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급하게 외치면서 온유성을 수술실로 밀고 갔다.그와 동시에 백아영도 옆 수술실로 이동했다.온유성이 수술실로 사라지는 순간 서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백아영은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여 병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바닥에 착지할 때 등에 난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수술실 문을 향해 뛰어갔다.“아빠!”“아영아, 진정해!”선우경진이 서둘러 달려와 백아영을 붙잡았다.“고모부한테 이미 응급처치해 드려서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무사할 거야. 수술을 마치고 살아서 수술실에서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비록 그렇다 하지만 백아영은 대부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안 그래도 갖은 고문을 받아 뼈만 앙상한 사람인지라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교통사고까지 당했으니 살아갈 확률은 극히 낮았다.백아영은 괴로운 듯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이게 다 제 탓이에요. 저 때문이에요! 만약 날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빠도 차에 치이는 일이 없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치일걸... 목표는 나였는데...”선우경진은 안쓰러운 마음에 백아영을 끌어안았다.갑자기 선우 일가에서 뛰쳐나온 온유성을 발견하고 따라간 곳이 바로 이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한발 늦어서 차량이 백아영을 들이받는 광경을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었다.그나마 가까이 있던 온유성이 질주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우경진은 이성준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당장 뛰쳐나가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싶었다.그러나 이성을 잃고 날뛰는 대신 성질을 꾹 참았다. 어쨌거나 백아영의 원한이자 감정싸움인지라 결정권은 그녀한테 있었다.이내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성준 씨를 만날 거야?”백아영의 머릿속에 이성준이 한 말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자신을 의심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결국은 그녀의 탓이라며 원망도 했다.심지어 죽이라고 명령까지 하지 않았는가?온유성이 그녀를 구하려고 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진 것도 결국은 이성준 때문이었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백아영은 더는 이성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벽에 기댔다. 곧이어 갈라진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울려 퍼졌다.“아니요.”...병원 밖.이성준은 1층에 서서 눈살을 찌푸린 채 앞에 있는 건물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위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 쳐들어갈까요?”이성준과 백아영 사이에 너무나도 큰 오해가 생겨버렸다. 그녀를 구해주려는 좋은 의도였지만, 온유성이 연루되어 다치게 되었으니 얼른 해명해야만 했다.다만 선우 일가 사람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병원을 몸싸움 없이 뚫고 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이영철의 비밀 경호원도 호시탐탐 노리는 와중에 선우 일가까지 상대한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하기 마련이므로 비밀 경호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성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방법 찾아봐.”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씨 가문 집사가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뛰어왔다.“도련님, 할머님 장례식이 곧 시작되오니 회장님께서 얼른 복귀하라고 합니다.”집사는 머뭇거리며 한마디 보탰다.“도련님이 장손이라서 할머님 장례식에 불참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네요.”예절은 둘째 치더라도 할머니와 각별한 정이 있는 이성준이 참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그러나 백아영은...이성준은
“알았어요.”이성준은 곧장 영정 사진 앞에 걸어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향을 피웠다.이영철은 싸늘한 시선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원래는 그와 함께 복수심을 불태워 백아영을 죽이려고 작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손자를 과대평가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이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제외하면 그만이다.이영철이 고개를 들어 집사에게 눈짓하자 즉시 알아차린 집사는 조용히 빈소를 빠져나와 비밀 경호원에게 선우 일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백아영이 선우 일가로 돌아가서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수년간 정성을 들여 키운 비밀 경호원과 비교하면 선우 일가 따위는 적수가 되지 않았다.선우 일가에게 앞날은 없고, 모조리 매장당할 것이다!병원.백아영은 수술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지만, 수술실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온유성은 아직도 수술받고 있다.시간이 길어질수록 생존 가능성은 작아지고 목숨이 더 위태롭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초조함이 극에 달한 백아영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쪼그려 앉으려고 할 때마다 휘청거리며 옆으로 픽 쓰러졌다.선우경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아영아, 무리하지 마. 몸이 이미 한계치에 달해서 쉬어야 한다고.”“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백아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핏발이 선 두 눈은 더없이 확고했고 끝까지 버티겠다는 고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여기에서 온유성이 무사히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다.“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고모부가 나오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질 거야.”선우경진은 가슴이 찢어졌다. 더 이상 백아영이 제멋대로 하게 놔둘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를 기절시키려고 몰래 은침을 꺼냈다.백아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분노와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입맛 벙긋했을 뿐 아무 말도 못 하고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선우경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병실로 데려갔다.침대로 걸어가 창문을 여는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건
그녀는 눈앞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전화가 걸려왔고 곧바로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좋은 소식이 있어요. 온유성이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기억력 저하가 왔는데,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대요.”절망에 빠진 심은아는 드디어 일말의 희망을 되찾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이내 서늘하고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심유미, 장난해?”“그럴 리가요? 다름 아닌 우리 가문을 이끄시는 대단한 분인데.”심유미의 나긋한 목소리는 미안함은커녕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대단한 분이라고 했지만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그래서 말인데 온유성은 단기 기억상실증이라 의술이 뛰어난 선우 일가의 치료를 받게 된다면 언제 기억을 다시 회복할지 몰라요. 그때 가면 아마 또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요? 계획을 빨리 마무리하는 게 좋을 텐데...”얼핏 듣기에는 걱정하는 듯싶지만, 말뜻을 곰곰이 새겨보면 비아냥거림뿐이었다.심은아는 차가운 눈초리로 피식 비웃었다.“언니,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쨌거나 내가 잘못되면 언니도 심씨 일가 주인이 될 자격이 없잖아?”심씨 일가의 관습에 따르면 쌍둥이는 어려서부터 대결을 거쳐 승패를 가른 후 승자는 주인으로, 패자는 노예가 된다. 이러한 신분 차이는 일생 바뀌지 않는다.다만 그때 승리를 쟁취한 사람은 심유미가 아니라 심은아였다.심은아는 겉보기에 연약하지만, 사실상 성격이 교활하기 그지없다. 능력, 수단, 계략 등 전부 심유미를 훨씬 뛰어넘는다.비록 대결에서 이겼지만, 그녀는 가문을 이끄는 대신 심유미에게 떠넘기고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다.차마 밝힐 수 없는 많은 일은 그녀가 절대적인 권리를 앞세워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다.심유미는 겉으로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상 노예이자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물론 본인도 이런 생활이 지긋지긋했고, 심은아를 죽도록 미워했다. 심은아가 죽기를 오매불망 바라지만 한편으로 명령에 따라 하라는 대
“정현... 왜 이러지? 가슴이 너무 아파... 정현아, 어디 있어? 왜!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괴로워하는 온유성의 모습을 보자 백아영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선우정현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온유성이 이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일 줄이야!그만큼 선우정현은 온유성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그녀를 건드리는 순간 송두리째 흔들리는 모습이라니!“아빠, 진정하시고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마세요.”백아영은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엄마가 해외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서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정말?”온유성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도 붙잡은 듯 두 눈에 기대로 차올랐다.반면, 백아영은 마음이 쓰라렸다....백아영은 병실로 돌아가는 대신 남아서 온유성을 보살폈다.워낙 심하게 다쳐서 몸 상태까지 안 좋은 탓에 그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다.따라서 백아영은 침상 옆에 앉아 묵묵히 수발을 들기로 했다.창밖은 어둑어둑해졌고, 달마저 먹구름에 가려졌다. 반면, 불이 켜져 있는 병실 안은 유난히 포근하고 평화로워 보였다.백아영은 온유성의 손을 잡고 침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고요하고 평온한 내부와 달리, 병원 밖에서는 이영철의 비밀 경호원이 벌써 이틀 밤 연속 공격을 개시했다.그러나 병원 근처에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한참이나 떨어진 외곽에 이성준이 배치한 부하들에 의해 발목을 붙잡혔다.이씨 가문 본가.이영철은 부하가 전해온 소식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이성준 앞에 있는 향로를 발로 걷어찼다.불이 채 꺼지지 않은 향과 잿가루가 사방에 흩날렸다.이성준의 검은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잿가루 때문에 머리는 군데군데 은회색으로 변했고, 분위기가 한 층 더 가라앉았다.그는 안색이 살짝 돌변하더니 경고했다.“여긴 할머니 빈소입니다.”아무리 이영철이라고 해도 때를 가려야 하지 않은가?“그래도 네 할머니 빈소에서 장례를 치르는 건 알고 있나 보네?”이영철은 그를
그 뒤로 백아영은 온유성을 케어하는데 온 신경을 다했고, 덕분에 점차 컨디션을 회복해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부녀의 관계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돈독해졌다.여태껏 기억을 되돌려 봐도 가족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지라 백아영은 온유성과 지내는 며칠 동안 가족애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이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이라니!백아영은 현재의 기분을 만끽하며 모처럼 찾아온 만족감과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선우정현을 꼭 되찾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세 식구, 아니 아들까지 찾아내서 네 식구가 한데 모이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다만 온유성이 잠들고 나서 혼자 조용히 있을 때면 마음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가끔 이성준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는데 괜스레 가슴을 바늘로 꼭꼭 쑤시는 듯 괴로웠다.그날 이후로 이성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쩌면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를 뼛속까지 증오해서일 지도 모른다.“웅웅!”이때,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선우경진한테서 결려온 전화였다.온유성의 병세가 안정되자 그는 선우 일가로 돌아가 가짜 약 사건을 조사했다.“어때요?”백아영은 휴대폰을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물었다.선우경진의 말투가 사뭇 진지했다.“집에 상자 하나가 사라진 걸 확인했어. 다만 원래 비어 있는 상자라서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거든? 아마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짜 약을 넣었을 텐데 범인이 누구인지, 언제 범행을 저질렀는지 전혀 단서를 찾을 수가 없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할 줄 아는 것처럼 말이야. 젠장!”기대감으로 벅차오르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단서가 없다는 건 진상과 증거를 하루아침에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즉, 이영철의 부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계속해서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다.비록 기분이 씁쓸했지만 백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급한 건 아니까 천천히 조사해요. 이영철도 아직 손을 쓰기
선우경진은 경호원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가요. 901호 병실에 있어요.”“고마워요.”이성준이 병원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한편, 이씨 가문 본가.장례식이 끝나자 이씨 가문 친척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본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복귀했다.그러나 고요할수록 이영철은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다.이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용머리 지팡이를 꽉 움켜쥐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성준 어디 갔어?”3일이 지나자 ‘착한 손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집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병원에 갔습니다.”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백아영을 찾아갔을 것이다.“못난 놈!”이영철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땅을 내리치며 연신 기침했다.3일 동안 비밀 경호원이 몇 번이고 공격을 개시했지만, 백아영을 죽이기는커녕 이성준의 수비대를 뚫는 것조차 실패하고 병원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이제 병원까지 직접 찾아갔으니 손을 쓸 기회가 더더욱 희박했다.아내를 죽인 범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듯싶다.“할아버지, 제가 대신 백아영을 죽여드릴게요.”여자의 간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하이힐을 신은 백채영이 또각또각 걸어왔다.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그녀는 이현무의 엄마이자 이성준의 예비 아내 신분으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소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강제로 방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결국 장례식이 끝나서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영철의 무심한 눈빛은 경멸이 가득했다. 원래 수중에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제 무덤을 파버렸으니 그런 지능으로 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는 말이다.그는 애초에 무능한 사람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쫓아내.”집사는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즉시 앞으로 나갔다.백채영은 다급하게 외쳤다.“백아영이 선우 일가와 성준 씨의 보호를 받는 이상 무턱대고 죽이는 건 절대 불가능해요. 다만 그녀를 보호해주는 존재가 사라지고 길거리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