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오로지 백아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이 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한참이 지나도 입구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백아영은 문 앞에 서서 새빨간 입술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미안, 그쪽 사람들이 너무 걸리적거려서 내가 대신 손 좀 봤거든?”반면, 복도 바닥에는 위정을 포함한 검은색 옷차림의 보디가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다들 중독된 채 깊은 잠에 빠졌다.“이성준, 이번 라운드의 승자는 나야.”그녀는 비아냥거리며 대담하게 손 키스를 날리면서 도발했다.이성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백아영의 미소가 환해질수록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기운을 점점 잃어가는 이현무 생각이 났다.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1m 90cm에 육박하는 키 때문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을 형성했다. 이내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백아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승자라니? 날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지만, 항복하는 대신 독가루를 손에 꼭 쥐었다.그러고 나서 이성준이 다가오는 순간 갑자기 공중으로 던졌다.눈앞이 자욱하게 변하면서 가루가 폴폴 흩날리더니 이성준의 몸에 사뿐히 내려앉았다.이 독가루는 독성이 아주 강해서 마시게 되는 순간 호랑이마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게 되며, 이성준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독가루가 바닥에 내려앉을 때까지 남자는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이성준은 손으로 어깨에 쌓인 가루를 툭툭 털더니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싸늘하게 말했다.“다른 수작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부려 봐.”경악을 금치 못한 백아영은 제 자리에 굳어버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심지어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어떻게, 어떻게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지?”이성준이 친절하게 설명해줄 리가 있겠는가?이내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쭉 뻗었다.비록 충격의 도가니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지만, 백아영은 타고난 반
남원 교외.리사는 제갈연준과 함께 소파에 앉아 빔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실시간 모니터링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방금 백아영과 이성준 사이에 일어난 일을 두 사람도 동시에 확인했다.리사는 옆으로 돌아앉아 제갈연준을 바라보았고,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도련님, 아무리 봐도 백아영이 일부러 이성준에게 붙잡힌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죠?”제갈연준은 마치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이현무를 구하려나 봐.”일부러 붙잡혀서 협박당하는 것도 전부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의 아들에게 벌을 내릴 명분도 없을 테니까.게다가 ‘강요에 못 이겨’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은가?고작 이런 얕은 수법을 어찌 모른단 말이지?“다른 의도가 있는 게 확실해요. 도련님, 절대로 그녀의 목적을 이루게 해서는 안 돼요. 지금 당장 가서 붙잡아 올게요.”리사가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백아영을 붙잡으러 가려고 했지만, 제갈연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제갈연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모니터링 화면을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좋은 일 하고 싶다는데 그냥 놔둬. 다만 좋은 일이 지나고 나면 결국 악몽으로 변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리사는 즉시 깨달은 듯 말했다.“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가요? 이미 계획을 다 마쳤나 본데요?”제갈연준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모니터링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그 먹잇감은 바로 백아영이며, 그녀에게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백아영은 이씨 가문 본가로 끌려갔다.4년이 지난 지금, 설마 이런 일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울적함과 씁쓸함으로 가득했다.다만 표정만큼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만방자한 모습으로 태연한 척 이성준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이현무의 방에 도착하자 오미란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이 여자가 현무에게 독약을 먹인 사람이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백
물론 이런 기회를 만들 생각조차 없었다.“경진 씨 도착했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가 까치집이 된 채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선우경진이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왔다.“여기요, 저 여자가 현무를 건드리지 않게 내가 해독해줄게요.”네 사람은 그제야 방으로 들어섰다.침대가 커서 그런지 이현무는 유난히 작아 보였다. 잠자코 누워있는 아이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백아영은 마치 돌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 가슴이 먹먹했다.이현무를 내려다본 이성준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더니 목소리마저 쌀쌀맞았다.“어떻게 침질할 건데? 말해!”백아영은 제갈연준의 사람인지라 그녀가 직접 이현무에게 침을 놓게 해줄 수는 없기에 단지 침질하는 방법만 알아내면 끝이다.안 그래도 이현무가 고통받기를 원치 않던 백아양은 침질하는 방법을 술술 털어놓았다.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 이성준은 선우경진을 바라보았다.“맞아요?”선우경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네, 며칠 동안 머리를 쥐어짜 냈는데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제갈 일가는 독에 능할뿐더러 해독술도 훌륭하네요.”역시 독을 다루는 데 있어서 선우 일가가 제갈 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선우경진을 보자 이성준은 어이없는 듯 말했다.“그래서 알 것 같아요?”선우경진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니요?”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침술은 문제없는데, 침을 놓는 수법이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당장은 확신이 안 서요.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현무의 목숨이 위험할 거예요. 능숙하게 다루려면 적어도 일주일이란 연습 기간이 필요해요.”이현무의 컨디션으로 일주일까지 버틸 리가 없었다.이는 백아영이 예상했던 상황이다. 어쨌거나 난이도가 있는 침술은 장시간의 연습을 거쳐야만 환자한테 직접 시도할 수 있다.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는 오늘을 위해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했다. “독성이 억제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사모님, 방금 이성준이 얘기했다시피 감히 꼼수를 부리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저예요. 전 살고 싶지, 사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손자와 함께 죽을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백아영은 빨간색 입술로 호를 그리며 이성준을 도발적으로 바라보았다.“이성준, 나랑 거래할래? 저 자식을 해독해주면 날 풀어주는 거야, 어때?”“왜? 이제 와서 겁을 먹은 건가? 내기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성준아, 저년이 일부러 널 자극하는 거야. 그냥 무시해!”오미란은 백아영의 말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현무의 건강에 영향 주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목숨은 확보할 수 있잖아. 일단 살고 봐야지 미래를 논하지 않겠어?”이성준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이현무를 바라보았다.비록 지난 3년 동안 떨어져 있은 시간이 더 많았지만, 이현무는 어디까지나 그의 아들이자 소중한 가족이기에 아들의 목숨으로 거래하고 싶지 않았고, 더욱이 아들을 대신해서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생각도 없었다.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이성준은 마치 백아영의 목을 겨누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협박했다.“치료하지 못하기만 해 봐!”그가 대뜸 말했다.조마조마하던 백아영도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이성준이 그녀에게 침을 놓게 해줘서 천만다행이었다.오미란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말렸다.“성준아, 현무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함부로 결정하면 어떡하니!”“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이성준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이제 비켜주세요.”오미란은 이성준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한 번 마음 먹은 이상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이를 바득바득 갈며 경고했다.“고분고분 해독만 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우리 현무가 자칫 잘못된다면 아주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보여줄게.”어쨌거나 교양을 먹고 사는 귀부인으로서 이 정도로 위협적인 말을 한다는 자체가 오미란이 얼마
“할머니, 스파이 누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세요? 절 구해준 사람이 바로 누나예요.”이현무는 힘없고 쉰 목소리로 애써 목청을 높여 백아영을 옹호했다.아이의 순수한 눈동자 속에는 그녀를 향한 믿음과 신뢰로 가득했다.그러나 오미란은 더더욱 화가 났다. 백아영이 이현무에게 독약을 먹인 것도 모자라 속이기까지 했단 말인가? 정말 너무 괘씸했다.“성준아, 꿍꿍이밖에 없는 이 여자가 현무 주위에 얼쩡거리지 않게 얼른 끌고 가!”이현무의 말을 들은 이성준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아마 당시 이현무에게 독약을 먹이려고 거짓말했을 가능성이 컸다.아무것도 모르고 의식을 잃은 아이는 두려움을 느낄 틈마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제갈연준은 무자비하기로 소문났고, 중독되고 난 사람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제일 좋아할 텐데, 이현무만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이성준은 백아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백아영은 이현무와 제일 멀리 떨어진 방에 끌려갔다.이성준은 새로운 수갑을 꺼냈는데, 중간에는 가늘고 긴 쇠사슬로 이어졌고 한쪽은 그녀의 손목에 다른 한쪽은 철창에 채웠다. 그녀의 활동 범위는 고작 3m에 불과했고, 우리에 갇힌 동물 신세가 따로 없었다.백아영이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이렇게까지 해야 해? 밖에 경호원이 깔려서 도망칠 수도 없구먼.”이성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곧이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백아영은 어디 있어?”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넋을 잃은 백아영은 이내 납득이 갔다. 어쨌거나 지난 4년 동안 이성준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는가?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최 이해가 안 갔다.4년 전, 비록 관계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도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보통 친구에 불과할 텐데 아무리 제갈연준한
그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며칠 뒤에 밝혀질 거야. 어차피 당신한테 붙잡힌 이상 만약 며칠 뒤에도 백아영을 못 찾으면 그때 다시 죄를 물어도 늦지 않았잖아?”백아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갈연준이 절대로 그녀가 이성준 곁에 머물도록 놔둘 리가 없으니 무조건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려갈 거로 확신했다.며칠 뒤면 이성준이 제갈연준을 붙잡든지 제갈연준이 그녀를 구출하든지 할 테지만, 어쨌거나 일단은 심문을 피할 수 있었다.이성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는데, 그녀의 말을 믿었는지 알 수 없었다.곧이어 이성준이 방에서 나갔다.홀로 남은 백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지친 몸을 이끈 채 침대에 누웠다.마음을 졸인 하루가 드디어 지났고, 이현무가 제때 치료를 받아서 천만다행이었다....한밤중, 이현무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아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듯 얼굴이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생기가 넘쳤다. 곁에서 잠든 오미란을 확인하자 살며시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비록 할머니가 스파이 누나랑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백아영이 보고 싶었다.방에서 나온 이현무는 이미 알아본 대로 백아영이 갇힌 방으로 걸어가 미리 준비한 키로 방문을 열었다.30분 뒤, 비몽사몽 잠에서 깬 오미란은 잠결에 이현무에게 이불을 덮어주려고 하다가 손을 뻗는 순간 침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현무야?!”그녀는 아연실색하며 순식간에 잠에서 깼다. 이내 벌떡 일어나 이현무를 찾았지만, 방안을 샅샅이 뒤져도 코빼기가 보이지 않았다.“성준아, 현무가 사라졌어!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여.”“밖에 경호원이 지키고 있으니 나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선 CCTV부터 확인해보죠.”이성준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오미란을 데리고 CCTV를 확인하러 갔다.이내 복도 CCTV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백아영이 갇힌 방을 향해 걸어가는 이현무의 모습이 나타났다.“현무가 왜
어렴풋한 달빛 때문인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지금 이 순간, 이성준의 눈에 비친 여자의 모습은 낮과 사뭇 달랐다.더 이상 가시 돋친 화려한 장미가 아니라 은은하게 피어난 한 송이의 우담화처럼 순백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백아영처럼...“이 악독한 계집애 현무한테 손댄 건 아니지?”다급하게 뒤쫓아 온 오미란의 불안한 목소리는 착잡해하던 이성준의 생각을 끊었다.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침대 위 여인의 섬세하고 고혹적인 이목구비를 살펴보았으나 백아영과 닮은 점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방금 전에는 환각임이 틀림없었다.이성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대 옆으로 가서 이현무를 안았다. 비록 잠에서 깨지 않았지만 고사리 같은 손은 백아영의 옷깃을 꽉 움켜쥐면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눈빛이 흔들렸던 이성준은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현무한테 무슨 짓 했어?”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잠자고 있는 사람한테 달라붙은 건 저 녀석인데 왜 나한테 뭐라는 거야?’억울한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무슨 짓 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매력이 많은가 봐.”그녀의 표정에 혐오감을 느낀 이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옷깃을 잡고 있던 현무의 손을 떼어내며 그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방문이 또다시 닫히자, 방안에는 백아영 홀로 남았고 줄곧 미소를 유지하던 얼굴은 그제야 무너져 내려 순식간에 무기력해졌다.그녀는 이현무가 잠들었던 자리를 바라보면서 뭔가를 잃은 듯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비록 백채영이 낳은 아이지만 그녀와 달리 사랑스럽고 귀여울 뿐만 아니라 품에 안았을 때는 너무 부드러워 목숨 걸고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환심을 사로잡았다.‘내 아들도 이런 느낌이겠지?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안아볼 수 있을까?’다음날.잠에서 깬 이현무는 백아영이 보이지 않자, 순간 표정이 굳어지더니 서러워하며 물었다.“스파이 누나는요?”이현무의 질문에 그 일이 생각난 오미란은 화가 났지만 애써 참으며 침
백아영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현무를 바라봤다.“너 이 녀석, 여기는 왜 또 온 거야?”이현무는 문옆에 서서 수줍게 새끼손가락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스파이 누나랑 같이 놀고 싶어요.”이성준이 데려간 지 하룻밤 만에 다시 찾아온 거 보면 몰래 도망친 게 틀림없다.더 이상 이성준한테 혼나고 싶지 않았던 백아영은 마지못해 말했다.“너 이제 푹 쉬어야 해. 현무 말 잘 듣지? 얼른 가서 자...”“저 엄청 많이 잤어요. 방안은 너무 답답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스파이 누나 나랑 놀아줘요. 네?”눈을 동그랗게 든 채 불쌍한 눈빛으로 간절하게 바라보는 이현무의 모습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1초 만에 마음이 흔들려 버린 백아영은 마지못해 그를 향해 손을 저었다.“이리 와, 뭐 하고 싶어? 그런데 누나랑은 방안에서만 놀아야 돼.”그녀는 여전히 갇힌 상태였고 이현무는 그녀의 손목에 묶인 쇠사슬을 바라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문밖에서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성준은 의외인 듯 깜짝 놀랐다.‘정말로 현무가 직접 이 여자를 찾아온 거야?’이성준은 살며시 방문을 열어 문틈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백아영의 맞은편에 앉아 손뼉 치며 즐거워하는 이현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이성준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였다. 그는 그제야 현무가 한창 뛰어다니며 놀아야 할 세 살짜리 아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그와 백채영은 한 번도 이런 행복을 이현무에게 준 적이 없었다.이성준은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방문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 방안에서 들려오던 즐거운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멈췄다.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표정이 굳어버린 이현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자.”이성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이현무를 끌어올렸다.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반항할 수 없었던 이현무는 마지못해 얼굴을 찌푸린 채 아쉬워하며 백아영을 바라봤고, 서러움으로 가득차 입을 삐쭉 내민 모습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