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에서 나온 선우경진은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고 돌아가는 길 내내 주춤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차를 별장 앞에 세우고서야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백아영, 넌 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어. 열심히 배운다면 앞으로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거야.”선우경진은 그녀가 잘못된 길로 가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을 느꼈다.“네가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면 내가 할아버지께 사정해서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어.”이전의 태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지만, 그녀를 도와 사정하겠다는 말에 예의상 정중하게 인사했다.“고마워요.”별장에 들어선 선우경진은 서재로 들어가 선우소훈을 찾았다.그는 캐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말했고, 전과 다른 태도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백아영이 전에 사칭했던 건 잠깐 눈이 멀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젊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고 기회 한번 주는 건 어떨까요? 정말 보기 드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재입니다. 집에 갇혀 도우미 생활하는 건 인재를 낭비하는 거나 다름없고 계속된 채찍질로 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면 큰일이에요.”선우소훈을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내보내자는 뜻이야?”선우경진은 이 부탁이 사실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용서해도 저희한테는 아무런 손해가 없을 겁니다.”“경진아, 백아영이 채영이랑 어떤 관계인지 잊지 마. 그냥 이렇게 내보내면 채영이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선우소훈도 인재를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손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이 일은 내가 좀 더 생각해 볼 테니까 넌 이만 나가봐.”비록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지만 선우소훈도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더는 원래 방법으로 백아영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돌아서 서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 잔뜩 난 채로 백채영이 그를 찾아왔다.“오빠
곧바로 그윽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그건 마치 산속의 호수가 소용돌이치면서 사람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끌어들인 것과 같았다.백아영은 마음이 심란했다.이성준은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며 잡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손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그는 주춤거리며 망설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중에 아이한테 아빠 찾아줄 거야?”그의 질문에 놀란 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했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관심 가질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백아영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했다.“아니.”백씨 일가에 입양된 그녀는 친자식이 아니면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걸 느꼈고 혼자 키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한테 그런 일을 겪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답에 기분이 좋아진 이성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그럼 됐어.”줄곧 싸늘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유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짓자 백아영은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봤다.그의 말은 깃털처럼 가볍게 심장을 건드렸고 싱숭생숭한 느낌에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선우 일가로 돌아오는 길 내내 백아영은 심장이 두근거렸고 머릿속에는 이성준의 얼굴과 그의 말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넋을 잃은 채 방으로 향하던 그녀를 백채영이 불러세웠다.“백아영, 내 방으로 와서 선물 상자 뜯어줘.”백채영의 방엔 수많은 선물 상자가 놓여있었고 하나같이 귀중해 보였다. 아마도 선우소훈이 선물해 준 것 같았다.다가가 상자를 뜯자 아기옷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마치 꿈을 꾸다 뺨 한 대를 맞고 벌떡 깨어난 듯 백채영이 이성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그런데 지금껏 오는 길 내내 이성준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약혼자를, 곧 아이 아빠가 될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백채영은 선물 상자 속의 유아복을 가져다가 보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 넌 무슨 생각하는 거야, 계속 뜯어.”
선우 일가로 돌아간 그녀는 마치 차가운 창고에 들어선 것처럼 싸늘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아무 생각 없이 인테리어를 했다.신혼 방을 다 꾸미니 이제는 별장 전체를 꾸미라고 시켰다.백아영은 하루 종일 ‘축’이 쓰인 스티커를 별장 곳곳에 붙였다.백채영은 일부러 트집을 잡았고 의자도 없는데 더 높은 곳에 붙이라며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어쩔 줄 몰라 난처해하던 그때 웬 길고 가는 손이 나타나 스티커를 백채영이 원하는 곳에 붙였다.백아영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고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경진을 발견했다.“사람 시켜서 사다리 가져오라고 할게.”백아영은 고마움에 감격했다.“고마워요.”백아영을 돕는 걸 목격한 백채영은 기분이 언짢았다.“오빠, 왜 도와주는 거예요?”선우경진은 그녀가 백아영을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참다 못해 다가온 것이었다.“잠깐 나 따라와.”그는 백채영을 데리고 옆 복도로 나가서 나지막하게 물었다.“이성준이 너한테 했던 말 까먹었어?”백채영은 순간 안색이 변하더니 변명을 늘어놓았다.“고작 스티커 붙이는 거로 제가 어떻게 괴롭혀요. 성준 씨도 이런 사소한 일로 저와 싸우지는 않을 거예요. 더군다나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제 편인데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성준 씨가 알 리가 없죠.”치료가 끝났고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마주칠 수 없다는 생각에 백채영은 더 건방지게 행동했다.선우경진은 그녀의 속셈을 알아챈 지 오래였고 상대방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도발하는 백채영의 행동이 못마땅했다.백채영이 시비 걸지 않고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이성준도 순순히 약속 지켜 결혼할 텐데, 그는 문득 문제가 백채영한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채영아, 조용하게 지내면 안 돼? 너한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결혼이랑 해독 침술이야. 어디까지 배웠어?”갑자기 ‘숙제’를 묻자, 백채영은 눈도 깜빡 안 한 채 거짓말을 했다.“이미 절반 배웠어요.”이 말을 듣고 선우경진은 조금
이렇게 하면 백채영한테 문제가 생기더라도 선우 일가는 더 이상 그녀에게 속지 않게 된다.하지만 선우 일가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게 뻔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방법을 고민하던 중 화초 관리하는 도우미가 밥을 먹으면서 불편한 듯 기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병든 기색이 역력했다.백아영은 일부러 그녀에게 다가가 무심하게 맥을 짚으며 병세를 확인했다.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못하는 고질병이었다.이러한 병은 약을 먹고 통증을 완화할 수는 있으나 완치할 수 없는 난치병의 일종으로 백아영은 일찌감치 접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법을 연구했다.한 가지 독성 약물로 상태를 악화시켜 다른 바이러스를 만든 뒤 원래 있던 독을 해독하면 병도 완치되는 방법이다.지금이야말로 그 독을 바이러스로 진화시킬 최적화 시기였고 이제 백채영의 실력을 밝힐 일만 남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백아영은 백채영이 집에 있는 틈을 타 도우미의 상태를 악화시켰다.도우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내뱉고 있었고 깜짝 놀란 다른 도우미들은 다급하게 달려가 선우 일가네 사람을 불렀다.곧 선우경진과 백채영이 함께 도착했다.선우경진은 도우미의 상태를 살폈고 중독이 확인되자 침을 꺼냈다.그때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백아영이 입을 열었다.“백채영이 요즘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연습 삼아 한번 맡겨보는 게 어때요?”그 말을 들은 선우경진은 침을 놓으려던 손을 멈췄다.강 건너 불구경하듯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죽일 듯이 백아영을 째려봤고 백아영은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왜? 설마 도우미라서 구하기 싫은 건 아니지?”어렵게 생각한 핑곗거리를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반박당하자, 백채영은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다.어찌할 바를 모르던 백채영은 선우경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제가 구하기 싫은 게 아니라 아직 완벽하게 해독 침술을 익힌게 아니어서...”“
백채영이 난처한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 하이힐을 신은 선우주영이 또각거리며 다가와 도도한 표정으로 도우미를 내려다보았다.“주인이 목숨 구해주겠다는데 둘러싸서 구경이나 할 때야? 얼른 썩 꺼지지 못해?!”선우주영의 성격이 제일 까다롭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녀가 호통치자 다들 걱정에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차마 더는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선우경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도 걸음을 옮겼다.선우주영이 도우미를 내쫓는 모습을 보자 백채영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선우경진을 향해 말했다.“오빠, 제가 해독 침술을 배운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남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을 놓는 게 긴장되어서 자리를 좀 피해 주면 안 될까요? 조용한 환경에서 침을 놓고 싶어요.”의사들은 각자의 습관과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침술사는 더더욱 유별났다.이에 선우경진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떠났다.선우주영도 떠나기 전 백채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바보, 치료가 자신 없으면 손이라도 못 쓰게 하면 그만이잖아.”선우주영의 웃는 얼굴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순간 백채영은 온몸이 얼어붙더니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선우주영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니!그러나 제법 그럴싸한 제안에 수긍이 갔다. 치료에 소질이 없더라도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치료를 못 하는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다.백채영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더니 덜컥 겁이 나서 덜덜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자해하냐는 말이다!이내 돌멩이를 높이 치켜들었지만, 차마 자기 손등을 내리칠 수는 없었다.백아영은 선우주영과 선우경진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백채영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혼자 남은 거지?게다가 환자는 의술도 모르는 백채영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지 않겠는가? 만약 백채영이 침을 함부로 놓다가 자칫 목숨까지 앗아가
꽃밭을 여러개 가로지르자 도우미가 쓰러져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아까의 모습대로 바닥에 누워 있는 도우미를 발견한 백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나마 백채영이 사람 목숨이 걸린 일에 섣불리 행동할 만큼 담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선우주영은 뒤를 바짝 따랐다. 물론 시선은 백채영의 발 옆에 놓인 돌멩이를 바라봤는데, 겉면에서 핏기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아하니 백채영은 자해할 만큼 독하진 않은 듯싶었다.‘겁쟁이!’선우주영은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선우경진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도우미를 보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채영아, 여태껏 손도 안 대고 있은 거야?”그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족히 10분은 지난 것 같았다.백채영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뭇머뭇 오른손을 슬며시 폈다. 이내 오른쪽 검지에 애매한 길이의 핏자국이 드러났다.그녀는 죄책감과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내가 침을 놓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가락이 은침에 찔려서 똑바로 잡지를 못하겠어요.”선우경진은 할 말을 잃었다.선우주영도 어이가 없었다.고작 찔려서 생긴 상처라니? 이렇게 찌질할 수가!백아영은 그제야 백채영이 사람을 따돌린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 상처를 입었다는 핑계를 대면 침을 놓지 않더라도 의심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백채영, 다친 시점도 참 공교롭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하필이면 혼자서 사람 구하는 타이밍에 다쳐?”이미 지은 죄가 있는 백채영은 백아영의 말을 듣자 정색하며 반박했다.“백아영,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다칠 수는 없잖아?”“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을까?”백아영은 오늘 백채영을 까발리기는 글렀다는 걸 직감하고 어쩔 수 없이 의심할 수 있게 여지를 남겨 두었다.“선우경진 씨, 혹시 그동안 백채영이 직접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선우경진은 눈살을 찌
선우경진은 어디까지나 명문가 출신으로서 평소에 아무리 다정하고 착해 보여도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 포스가 철철 넘쳤기에 백채영은 겁을 먹은 나머지 울음마저 뚝 그쳤다.그녀는 식겁하면서 선우경진을 바라보더니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나... 난...”“선우경진, 지금 뭐 하는 거야?!”위엄이 넘치는 호통 소리가 별안간 들려오더니 선우소훈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와서 백채영의 팔목을 잡은 선우경진의 손을 잡아당겼다.그는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채영을 잘 돌보라고 했더니 그동안 이렇게 괴롭히고 있었던 거야?”“할아버지! 전 단지 도우미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물었을 뿐인...”“그만!”선우소훈은 다짜고짜 백채영을 등 뒤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여동생을 의심한 지 벌써 몇 번째야?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평소에 널 이렇게 가르쳤니?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지? 고작 백아영의 말에 휘둘리는 거야?!”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그 주제에 자기도 의학 천재라고, 능력이 좀 있다고 해서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을 거로 착각하나 본데, 네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손녀를 의심해? 우리 집안일에 너 같은 외부인이 끼어들 틈은 없어!”백아영은 선우소훈이 직계 가족을 이 정도로 중요하게 여길 줄은 몰랐다. 심지어 손자가 자기 여동생을 의심하는 것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니?그녀는 오히려 더더욱 납득이 안 갔다. 백채영이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존재인 만큼 아무리 의술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선우소훈이 애지중지 여기는 보물이라서 사랑을 듬뿍 받기 마련일 텐데, 굳이 온갖 속임수를 써서 신분을 속일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어쩌면 그녀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음모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백아영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어르신, 전 백채영이 의술에 문외한이라서 침놓을 줄 모른다고 100% 확신합니다!”“아직도 이간질하다니?!”선우소훈은 그녀의 말을 듣기는커녕
선우경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공교롭지 않으세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안심이 될 텐데 왜 방해하셨죠?”“백채영은 뭐니 뭐니해도 선우 일가의 공주님이야.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렇게 몰아세우면 결과가 어떻든 망신은 면치 못할 거야. 앞으로 무시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선우소훈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경진아, 사회 물을 몇 년이나 마셨다는 사람이 성격이 아직도 그렇게 경솔하면 쓰겠니?”선우경진은 오로지 백채영의 신분을 확인하려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백채영이 도우미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요!”“아까 물어봤거든? 도우미가 뱀독에 중독되었다고 하더라.”선우소훈이 흐뭇하게 대답했다.선우경진은 살짝 놀랐다.“진짜요?”선우소훈은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왜?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유라도 있어?”그건 말도 안 되었다.선우경진은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왜 뻔히 알면서도 훌쩍거리기만 할 뿐,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냐는 말이지? 설마 여자라는 이유로 일부러 투정 부리고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작전인가?그러나 미심쩍은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선우 일가는 임시로 찾은 별장에 거주했는데, 최대한 자취를 감추려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기피했다. 따라서 별장 자체도 그리 크고 화려한 편이 아니었다.물론 경비실도 마찬가지였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였다.방에는 책상, 의자, 그리고 1.2m짜리 싱글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는데, 야간 경비 중에 그럭저럭 눈 좀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별장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탓에 결국 경비실이 백아영의 거처가 되었다.딱딱한 침대에서 자려니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백아영은 그렇게 경비실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오후,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졌다.창문을 타닥타닥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