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영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유미와 몸을 섞는 남자를 떠올리자 괜히 기분이 상했고 심지어 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그래요? 그냥 평범한 남자에 불과한데 어디가 잘생겼다는 거죠? 저런 사람과 엮여봤자 유미 씨만 손해이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본인과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야죠, 나중에 제가 소개해줄까요?”허영심이 강한 심유미는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심유미는 시선을 돌리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그러고 나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아영 씨 약혼자처럼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소개해주나요?”이도하가 결혼식 준비를 워낙 거창하게 해서 상류층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백아영은 이도하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다만 얼굴은 가식적인 미소를 잃지 않았다.“물론이죠!”멀지 않은 곳에서 물뿌리개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가면서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그나저나 아영 씨 약혼자 형님도 참 괜찮은 남자인데, 잘 나가는 사람 중에서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심유미는 한숨을 쉬며 머뭇거렸다.“다만 아이가 있어서 아쉬울 뿐, 아들도 착하다는 소문이 무성해서 1+1도 나쁘진 않잖아요?”백아영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심유미와 스타일 자체가 달라서 형식적인 대화조차 이어갈 수 없을 지경이다.“결혼하기 전에 애부터 낳는 남자는 아웃이죠!”백아영은 땅을 치며 후회하는 심정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집안 갈등도 많아서 결혼해봤자 행복과는 거리가 멀 거예요. 차라리 아무 남자나 만나서 결혼하고 말지, 이성준은 절대로 안 돼요.”우지끈!희미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에 든 물뿌리개가 두 동강이 났고,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백아영은 왠지 모를 오싹함이 밀려와 주먹을 꼭 쥐었다. 어쩌면
“사실은...”백아영이 변명하려던 순간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표정이 돌변하더니 그녀를 이끌고 재빨리 옆 칸으로 이동했다.칸막이로 된 공간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들어서자 유난히 비좁게 느껴졌다.백아영은 그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했다. 오감을 자극하는 익숙한 숨결에 심장이 두근거렸다.방금 생판 남보다 더 못한 존재냐고 따지는 말은 그녀가 이성준을 저격한 것인데...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백아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남자의 얼굴은 시커멓고, 두 눈에 분노로 가득했다. 이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차라리 심유미와 잤으면 잤지, 넌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칸막이에서 제일 먼 곳으로 밀어냈다.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문득 손을 뻗어 턱과 목 사이를 만져보았는데 피부가 나름 진짜 같았지만, 만지작거릴수록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누가 만든 거야? 꽤 그럴싸한데?”그녀마저 감쪽같이 속았다니.남자의 안색이 살짝 돌변하더니 화가 나는 와중에 흠칫 놀랐다.“내가 누군지 알아?”“성준아, 너무 티 나잖아.”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이성준의 분노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비를 맞은 듯 서서히 잦아들었다.상대방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모든 특징을 파악하고 있지 않은 이상 찰나의 순간에 분장한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따라서 그가 백아영의 마음을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도 했다.이성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지만, 말투만큼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어젯밤에 떠나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갔어?”비록 일면식도 없는 얼굴을 마주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심지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안도감이 저절로 들었다.“심유미의 지문을 채취해서 별장 안에 들어가 보고 싶어.”이성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갈 거야. 찾는 물건이 있다면 나한테 얘기해.”백아영이 거절했
이성준을 고문한다고?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으로 떠오르자 백아영은 머리털이 쭈뼛 섰다.이성준이 계속 이곳에 얼쩡대다가는 큰일 날지도 모르니 기회를 봐서 얼른 도망치라고 알릴 심산이었다.백아영이 초조한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심유미 부하가 재빨리 다가와 보고했다.“저기 오네요.”백아영의 가슴이 철렁했다.망했다, 벌써 붙잡히다니? “아영 씨, 저랑 같이 고문하죠?”심유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미리 준비한 채찍을 꺼내 건네주었다.그녀가 팔을 뻗는 순간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우아한 몸짓으로 똥물을 들고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나타났다.백아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성준을 쳐다보았다.아무리 분장이라고 해도 결국은 이성준인데, 무려 그 이성준이 똥물을 들고 있지 않은가?!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말도 안 돼!’보고하던 사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마도 똥물 가지러 가서 놓친 것 같습니다.”결국 머리가 좋아서 일부러 따돌린 게 아니라 그들이 과대평가한 탓에 간과한 것이란 말인가?“절 찾으셨습니까?”이성준은 똥물을 들고 당당하게 심유미 앞으로 걸어갔다. 순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확 풍겨왔다.“욱!”심유미는 역겨운 냄새에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했다.“일부러 비위를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이성준은 깜짝 놀란 척 잽싸게 똥물을 들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그러나 서두를수록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결국 급하게 뒤돌아서려고 하다가 똥물이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마침 심유미의 화사한 치마에 묻었다.심유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젠장! 감히 나한테 똥물을 끼얹어?! 죽여버릴 거야!!!”백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제야 이성준이 심유미의 옷을 갈아입히게 하겠다는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심유미를 위로했다.“유미 씨, 그것보다 얼른 저랑 가서 샤워해요. 냄새가 너무 고약하네요.”심유미는 정신을 놓고
이성준은 고개를 숙인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걱정돼?”뜨끔한 백아영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단지 불필요한 짓이라고 생각해서...”그를 걱정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은 여자라니.분명 곁에 있지만 왠지 모르게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이성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어젯밤 이후로 순찰 규정이 바뀌었어. 총 3팀이 교대로 24시간 순찰해.”이 팀이 떠나면 다른 팀이 곧바로 출동할 테니 즉시 해결하는 게 상책이었다.“괜히 시간 지체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서 일이나 봐. 오래 끌수록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더 많아질 테니까.”이성준이 피식 비웃었다.“날 죽이고 싶다면 계속 꾸물대던가.”갑작스러운 냉담한 태도에 백아영은 당황했고, 속으로 참 변덕스러운 남자라고 구시렁댔다.잠시 후 가루약 한 봉지를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독가루가 들어 있으니까 위급한 상황에 사용해.”손에 든 봉지를 보자 이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러고 나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순찰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백아영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별장으로 뛰어가 지문 복사기로 문을 열었다.대낮인데도 별장 안은 어두컴컴했고, 커튼이 전부 처져 있었다. 온도는 바깥보다 훨씬 낮았고, 찜통 같은 더위에도 으슬으슬한 느낌이라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그와 동시에 희미한 피비린내와 함께 이상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백아영은 잔뜩 경계하며 은침을 손에 들고 냄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복도를 지나 1층 끝까지 걸어가서 어느 방 문 앞에 다다르자 조금 전 맡았던 이상한 향기가 유난히 강했고, 피비린내도 물씬 풍겼다.안에 대체 뭐가 있단 말이지?백아영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더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함과 긴장감이 몰려왔다.그녀는 주먹을 꼭 쥐더니 방문을 찔끔 열었다.작은 소리에도 방 안의 사람은 금세 눈치를 챘다.이내 젊은 여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내가 누군지 몰라요?”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곧이어 한시름을 놓은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날 죽이라고 심유미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다행이고... 전 심유미의 쌍둥이 여동생 심은아라고 해요. 심유미 때문에 여기 갇혀서 지내고 있죠. 심씨 일가 규정에 따르면 쌍둥이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 둘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죽고 못 사는 경쟁 관계였죠. 9살 때 심유미랑 겨룬 적이 있는데 승자는 가문을 이어받는 후계자가 될 것이며 패자는...”심은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죄수 신세가 되는 거죠. 하지만 전 평생 갇혀 살고 싶지 않아 4년 전에 몰래 도망쳤어요. 심유미와 재산을 빼앗을 생각 따위 없었고, 조용히 숨어서 평범한 삶을 살려고 했는데 결국 다시 붙잡혀 왔죠. 한번 도망간 사람은 살아갈 권리를 상실하게 되죠. 심유미는 언제든지 날 죽일 수 있고 곧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요.”심은아는 기운이 없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당신은 누구죠? 심유미의 원수인가요?”백아영은 심씨 일가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방법이 잔인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토록 인정사정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심은아에게 동정심을 느꼈다.“사람 찾으러 왔어요. 이 별장에 당신 말고 또 누가 갇혀 있어요?”심은아는 고개를 저었다.“저밖에 없어요.”백아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적나라한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심은아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기에 그녀의 피가 아니었다.이내 착잡한 눈으로 심은아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계속해서 냄새를 따라 찾아다니다가 곧이어 방 안의 나무 벽 앞에 멈춰 섰다.나무 벽은 겉보기에 평범해 보였지만, 냄새가 유난히 강하게 풍겨왔다.백아영이 물었다.“이 안에는 뭐가 있나요?”심은아는 제 발 저린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벽이죠, 뭐.”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모습이다.백아영은 캐묻는 대신 손을 들어 벽을 두드려 내부가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즉시 장치를
잠깐의 감탄을 끝으로 백아영의 시선은 방안을 훑기 바빴다. 그녀는 피비린내의 근원을 찾았다.곧이어 혈홍화를 심은 흙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했다. 이는 물을 주는 게 아니라 무려 피였다!가느다란 관에서 피가 계속해서 유입되었고, 관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문까지 이어진 것을 발견했다.백아영은 곧바로 작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작은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이내 자물쇠를 부수고 땅에 무릎을 꿇고 안을 들여다보았다.1평 정도 되어 보이는 내부 공간은 비좁기 그지없지만, 누군가 웅크리고 있지 않겠는가?!피를 공급하는 관은 바로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몸에 걸친 옷은 마치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갈아입지 않은 듯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했다. 키가 꽤 커 보이는 남자는 비쩍 말라 뼈만 앙상했다.그를 본 순간 백아영은 심장이 가시에 찔린 듯 고통스러웠다.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혹, 혹시 고개를 들어 얼굴 좀 보여줄 수 있나요?”그녀의 소리를 듣자 남자는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앞의 얼굴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한단 말인가?수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시체도 많이 봤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충격에 휩싸여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얼굴은 살점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말랐고, 머리뼈를 간신히 감싸고 있는 두피만 남아 있었다. 눈언저리는 움푹 팼고, 눈알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해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이게 대체 어디 봐서 사람이란 말인가? 그냥 살아있는 미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눈앞의 ‘미라’는 이목구비와 윤곽, 그리고 골상에서 유추해 볼 때 선우소훈이 보여줬던 사진 속 인물 같았다.바로 그녀의 아버지 온유성 말이다!‘아빠...’백아영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끝내 삼켜버렸다. 순간, 감정이 폭발하면서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다.아버지와 재회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상상했지만, 이런 광경은 생각지도 못했다.이게 그동안 아버지가 살아
“아, 아빠?”백아영은 당황한 나머지 패닉에 빠져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이제 가족 찾기를 포기하고 혈연관계 따위 관심이 없는 줄 알았지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동안 다잡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무려 20년 동안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한 사람이지 않은가?가까스로 찾아내서 목숨까지 구했는데 죽어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아빠, 안 돼요! 죽지 마세요! 엄마도 찾아야 하고 나중에 집으로 같이 돌아가야 한단 말이에요.”백아영은 덜덜 떨며 은침을 꺼내 그에게 침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혈자리마저 제대로 찾지 못했다.자칫 침을 잘못 놓았다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백아영!”이성준은 재빨리 걸어가 커다란 손으로 백아영의 팔목을 붙잡았다.“침착해, 네가 정신을 차려야만 아버지를 구할 수 있어.”이성준의 손바닥은 따뜻하면서도 힘이 넘쳤는데 마치 마법이 깃들어 있는 듯 백아영의 마음을 다잡아줬고, 폭우 속에서 떨고 있는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다.덜덜 떨리던 손이 차츰 진정되었고, 그녀는 곧바로 온유성에게 침을 놓았다.침을 놓자 출혈이 멈추기 시작했고, 잔뜩 흥분한 온유성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면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백아영은 마치 구사일생한 사람처럼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이성준의 품에 털썩 쓰러졌다.그러나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다시 기운을 차렸다.아직은 시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심은아에게 물었다.“혹시 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나요?”아버지를 찾았지만 아직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선우정현은 어디에 있단 말이지?심은아는 고개를 저었다.“어릴 때부터 여기 갇혀 있어서 밖에 나가본 적이 없어요.”그녀가 문지기 역할을 ‘겸사겸사’ 하기 전에 온유성이 이미 갇혀 있었는지라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딱히 유용한 단서를 찾지 못한 백아영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온유성이 이 정도로 고
온유성을 방으로 데려갔을 때 선우소훈이 부축을 받으며 걸어 들어왔고, 그를 보자 역시나 비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그러고 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진료를 이어갔다.“아영이가 제때 구해줘서 천만다행이야. 1~2년만 더 지났더라면 목숨을 다해서 저세상에 갔을지도 모르겠네.”선우소훈은 제일 좋은 약재를 선별해서 약을 지어오라고 시켰다. 이는 온유성의 몸을 이른 시일 내에 회복하게 하고 심지어 정신병마저 치료할 수 있다.“정신병도 치료가 돼요?”정신병은 신경계 질환으로써 의술만으로는 완치할 가능성이 희박했는데, 선우 일가의 뛰어난 의술에 또 한 번 감탄한 백아영이었다.선우소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가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니고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돼. 그동안 가끔 의식을 회복할 때가 있는데 이런 케이스는 치료하기 훨씬 수월하거든. 약을 먹고 다시 깨어난다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을 거야. 물론 그런 시간이 점점 많아질 테니까 안심해.”백아영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빨개졌다. 큰 돌이 짓누르는 듯한 가슴이 마침내 한결 홀가분해졌다.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시름을 놓는 순간 심은아의 얼굴만큼은 수심이 가득했고, 남몰래 주먹을 꼭 쥐었다....심씨 일가.빨간색 잠옷 원피스를 입고 느긋한 자세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심유미의 앞에 흠씬 두들겨 맞은 경호원들이 의기소침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도망갈 틈을 만들어 놈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떠한 벌도 달갑게 받겠습니다.”“끌고 가.”심유미는 무심한 얼굴로 경호원들을 내보냈고, 굳이 이런 일로 조급하거나 화도 나지 않았다.경호원들이 떠난 뒤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허리에 타올만 두른 제갈연준이 걸어 나왔다.그는 자연스럽게 침대로 올라가 심유미를 끌어안았다.제갈연준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우리 아영은 귀여울 정도로 순진하네. 아버지를 구하면 그만이지, 굳이 한 사람을 더 데려가서 말이야. 아,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