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김예훈은 하은혜에게 그녀의 사직서를 건네면서 말했다.“사직서는 도로 갖고 가요. 은혜 씨는 여전히 CY그룹 비서이고, 오늘부로 오정범한테 24시간 경호를 맡길 거예요. 필요하다면 당도 부대원을 보낼게요. 아무쪼록 은혜 씨 안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요.”하은혜는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오늘 그녀는 김예훈의 평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성격이 센 걸 떠나서 횡포를 놓는 모습은, 그녀 어머니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고 미움마저 제대로 샀다.앞으로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면 얼마나 번거로울지 눈에 선하다. 그걸 다 떠나서 하은혜는 김예훈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문 앞에 막아서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김 대표님, 갑자기 든 생각인데.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어요. ”“무슨?”김예훈은 눈빛이 번쩍 뜨여서 물었다.“무슨? 내가 능력이 닿는 선에서 전력을 다해 도울게요.”“당연히 대표님이 할 수 있는 거예요.”하은혜는 꿍꿍이가 있는 듯 웃으며 김예훈의 귓가에 말했다.“날 가져요.”쿵쿵쿵.곧이어 일련의 쿵쿵 소리가 방안에서 나더니 화장실의 창문이 열렸고 김예훈이 그대로 창문으로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 어렴풋이 하은혜의 한숨 소리도 들렸다. 김예훈은 화장실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착지했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어떨 때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고, 집에 여자가 있는 몸이라. 그녀하고도 아직 제대로 해결을 보지 못했는데, 감히 어디 한눈팔 새가 있겠냐고.’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예훈은 전화를 걸었고 심씨 가문의 상황을 금방 보고 받았다. 모든 사람이 각자 말 못 할 어려운 일이 있듯이 경상 재벌인 부산 심씨 가문도 그랬다.심씨 가문도 엄청나게 잘나갔었지만, 이십 년 전쯤, 강력한 경쟁 상대를 제대로 만나 격변을 겪었다. 상대는 상업 측면에서 공격했고, 심현섭을 암살하겠다고 킬러 조직까지 동원했었다.젊고 혈기 왕성했던 심현섭도 거칠고 횡포하여, 그들에 맞
프리미엄 가든. 그동안 줄곧 이곳에 살던 정군과 임은숙 두 사람은 이사를 갔고 정소현은 학교로 돌아갔다. 큰 집에 정민아 혼자 남아 있어서 그런지 좀 많이 허전해 보였다. 정민아는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한 겹의 서류를 보고 있자니 미간에 근심이 가득 쌓였다.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쌓인 서류들은 다 반송된 계약서랑 주식양도 합의서이다.모든 게 다 오늘 갑자기 발생한 일이었다. 로열 가든 그룹 측에서 공개매수를 통해 시중의 유통주식 전부를 경기도 정씨 가문에서 보유했다. 그리고 얼마 전 구두계약 했던 업체들에서 한 시간 전에 로열 가든 그룹과의 협력을 깨겠다고 연락이 왔다. 다들 로열 가든 그룹의 배후가 CY그룹임을 알면서도 말 한마디로 합의 건을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망설임 없는 그들의 태도에서 충분히 적수가 기세등등해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게 설명이 되었다. “경기도 정씨 집안...”정민아는 손으로 눈썹을 만졌고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찍이 세력을 잃은 정동철이 부산 견씨 가문의 지원에 이렇게 다시 한번 기가 하늘을 뚫을지 예상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부산에서 복귀한 정가을이 기고만장했다. 그녀가 정동원을 보좌하니 하루도 안 된 사이 쾌도난마로 많은 일들을 해치웠다. 그리고 지금 정민아를 겨눌 칼을 갈고 있었다. 정동철의 요구는 딱 하나, 정민아가 김예훈과 이혼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견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일이었다. 비록 김예훈이 김세자의 신분을 밝혔지만도, 견씨 가문의 뒷받침을 받는 정동철에게는 김예훈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정동철이 봤을 때, 고작 CY그룹 하나로는 전국 10대 명문가 중의 부산 견씨 가문과 어디 내놔도 견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원칙이라고는 없는 임은숙은 이미 완전히 정동철에게 줄을 댔다. 정군은 어쩔 수 없이 따라서 태도를 보였다.“펑!”바로 그때 갑자기 방문이 누군가에 의해 뻥 차여서 열렸다. 찾아온 이는 힘이 어찌나 센지 노크도 없이 발로 문을 차고 거실로 들어왔다. 곧장 서류 하나를 정민아
정민아의 찌푸려진 미간이 더 짙어졌다. 잠깐의 침묵 뒤 냉랭하게 말했다.“곽영현, 김병욱 그리고 이대정, 그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었지. 결과는 봐서 알잖아?”정가을이 “풉”하고 비웃었다.“언니는 그게 정말 거지 같은 남편이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견세자가 이미 알아봤어요. 하정민과 양정국이 언니 남편을 도왔던 건 하은혜 비서 때문이고, 전남산 어르신이 나서 준 것도 예전의 신세를 갚느라 그랬대요. 그리고 용문당 어르신이 나선 건 우연히 그런 거래요. 다 하늘이 도운 거예요. 진짜 실력으로 따지면 벌써 진주 4대 명문가와 청별 그룹에 짓밟혀 저세상에 갔겠죠. 싸움 잘하는 건 알겠는데, 여기가 주먹만으로 통하는 그런 세상 아니잖아요. 실력이랑 배경, 인맥, 부와 권세를 다 갖춰야 하는 거고 그게 세상 돌아가는 근본이에요. 잘 싸우는 거? 기껏해야 깡패밖에 더 되겠어요? 내 말이 틀려요? 게다가 부산 견씨 가문도 10대 명문가인데, 견씨 가문하고 틀어져 봐야 뭐가 득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요. 나도 입 아프니까, 얼른 사인해요. 끝나면 나랑 같이 부산 내려가서 제대로 된 것 누려요”정민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정가을을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싫다면?”“싫다면?”정가을은 오른손으로 정민아의 턱을 치켜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거절이야 할 수 있죠. 그런데 언니가 싫다고 해도 소용이 있을까요? 언니는 아직 얼굴을 다치면 안 되니까 당장에 뺨을 갈기고 싶지만 놔두는 거예요. 마지막 시간을 줄 테니 모레 아침 10시까지 이혼 협의서에 사인해 둬요. 아! 그리고 정군, 임은숙 두 사람이 지금 우리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요. 두 분이 조심하지 않고 뭐라도 잘못 먹고 중독이라도 돼서 죽으면 누가 속상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정가을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미친!”정민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화를 냈다.“정가을,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예전엔 좀 지나치게 행동했어도 이렇게 막 나가지는 않았잖아? 왜 이렇게 독해진 거야!”“
김예훈의 시선이 이지윤에게 멈추었고 잠시 후 말문을 먼저 열었다.“말해 봐요. 좋기는 날 만족시키는 대답이길 바라요. 그렇지 않으면 이지윤 씨가 경기도를 떠날 일은 없으니까.”김예훈은 손목의 롤렉스 시계를 보았다. 그가 청별 그룹에 준다고 했던 시간이 불과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지윤은 심호흡하더니 군말 없이 바로 토크 주제를 조용히 말했다.“저는 이지윤이고, 인도 청별 그룹의 상속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이전에 김세자에 무례를 범했던 이대정 그 사람이 저의 가문 방계입니다.”김예훈은 구미가 당기는 듯했다.“그 인간을 대신해서 주인장이 나서서 저한테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건가요?”“그럴 리가요. 이대정이 한 짓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청별에서는 사실 여기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줄곧 이대정에 속아왔었죠. 오늘 소식을 접하고, 터진 일도 수습하고 김세자의 오해도 풀려고 제가 이렇게 달려왔네요.”이지윤은 깍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내 핸드폰 하나를 꺼내 영상 하나를 김예훈에게 보여줬다. 영상에서 이대정은 원유 통에 버려졌고 거기에 시멘트를 부어 바로 바다에 던져져 가라앉았다.딱 봐도 눈앞에 있는 아리따운 이지윤이 이 모든 일을 직접 시킨 것이었다.김예훈은 핸드폰을 들고 잠시 보다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이 영상을 나한테 왜 보여줘요? 내가 당신 감옥에 보낼 수도 있는데, 겁도 없네요.” 이지윤은 아양을 떨듯이 웃으며 답했다.“영상은 김세자에게 저희 청별 그룹의 성의를 보여드린 거예요. 이외에도 저희 청별은 앞으로 대표님께서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절대로 다신 무례하게 굴지 않을 것이니, 저희에게 꼭 기회를 주시기를 바랍니다.”아무래도 박용진의 죽음이 청별 그룹 측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던 모양이다. 태권도 일인자조차 껌 씹듯이 죽여버렸으니. 청별도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어찌 다시 감히 김예훈에게 기어오르겠는가.이대정을 잃고 방계를 보내 김예훈과 대적하게 한 게 청별에서도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김예훈은 실눈을 떠 보
김예훈의 말을 듣고 있던 이지윤의 표정은 착잡했다. 비록 한국지부의 재산 반 이긴 해도 한국지부의 자산이 청별 그룹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거라, 김예훈의 요구대로 반을 주면 청별 그룹의 자산 4분의 일을 바치는 격이었다.이런 터무니없는 조건을 다 떠나서, 한국에서 청별의 맥을 끊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세 번째, 오늘부로 청별 그룹의 한국 대표는 내가 임명하는 사람으로 해요. 그리고 지금 나는 이지윤 당신을 한국 대표로 지명하고 업무를 맡길 거예요.”세 개 조건을 다 얘기한 김예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이 세 가지 조건을 다 수락하면, 앞서 있은 일들은 다 없던 일로 해 줄게요. 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면, 청별은 두 시간 안에 한국에서 꺼져주면 돼요. 내가 손을 대면 청별의 숨통은 끊어질 거니까.”“뭐라고요? 저보고 한국 대표를 맡으라고요?”원래도 안색이 좋지 않던 이지윤은 그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잘못 들은 거 아니지?’사실, 이지윤이 청별의 직계기는 해도 크게 총애받지 못했다. 총애받는 인물이었으면 그녀에게 이 난장판을 처리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번 일 처리도 사실 그녀가 어떤 결과를 들고 돌아가든지, 청별 그룹에서는 위아래로 그녀에게 압박을 줄 것이 분명하다. 더하면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번 청별이 재벌로서 구긴 체면을 살리려고 할 것이다.그런데 지금 김예훈이 이지윤에게 한국 대표를 맡아서 하라는 말은 그녀더러 청별 자산의 절반을 장악하게 하는 셈이다. 게다가 잘만 경영하면 곧바로 청별의 주인 자리에 오를 수가 있을 것이다.김예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답했다.“맞아요. 이지윤 씨가 한국 대표를 맡으세요. 조건을 수락하면, 훗날 제가 이지윤 씨를 청별 그룹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게요.”이지윤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대체 왜요?”김예훈은 차분히 설명했다.“당신이 청별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요. 그러나 이
사실 김예훈은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어보니 단순히 김세자라는 신분 하나만으로 자신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고, 또 본인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기왕에 부산에 가서 부산 용문당 일을 처리하기로 생각했던 바에, 김세자라는 신분에 좀 더 무게감을 줄 필요가 있었다.청별 그룹이 엄청 얄밉지만 그걸 칼자루로 휘두른다면 훗날 일본이나 리카 제국을 상대할 때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인도 태권도 일인자 박용진이 패하는 순간 청별 그룹은 이미 기둥이 부러진 거나 마찬가지다. 또 인도 나라 특징이 중간이 없다. 날뛸 때는 엄청나게 날뛰고, 길 때는 또 모든 걸 다 내려놓는다. 한국지부의 반 되는 자산을 내놓는 것과 한국지부 자산이 증발하는 것 중, 청별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이지윤을 대표 자리에 올리는 건 김예훈의 계략이었다. 김예훈은 앞으로 이지윤의 손을 빌려 청별의 업무에 개입하고 손을 대겠다고 청별에 일러주는 셈이었다. 그러면 그들고 자신이 원하는 주식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니 청별 그룹의 임원들은 가만히 있을 것이다.그래서 김예훈은 더욱더 청별 그룹이 자신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거라 자신했다.역시나, 반나절도 되지 않아 이지윤이 돌아와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샤넬의 검정 드레스 차림에 메이크업까지 완전히 달라져서 나타났다. 김예훈의 앞에서 일부러 몸매를 드러내며 고분고분한 콘셉트로 서 있었다.“김 대표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당신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어요.”김예훈은 대꾸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한입 마셨다.“맞다, 그리고 오늘부터 제가 한국 지역 대표를 맡았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홍콩, 대만 등 아시아 지역 업무도 모두 저한테 맡겼습니다.”이지윤의 얼굴에 흥분이 더해졌다. 그 자리는 한국 대표라는 자리보다 더 높았고 청별 그룹 내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었다.이지윤도 이번 결정이 청별 그룹에서 김예훈
“김 대표님, 한 번 보셔야지 않아요? 저희를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이지윤은 복잡한 기색을 보였고 김예훈은 담담히 대답했다.“당신들 청별 그룹의 1/3 지분이면 대충 백조 정도 되겠죠? 그건 나한테 있어서 그저 숫자일 뿐, 큰 영향이 없어요. 그런데 이지윤 씨한테는 의미가 다르죠. 그 지분이 없으면, 내가 당신 뒷배가 아니라면 아시아 지역 대표 자리도 늘 불안하겠죠? 그러니 지금 당신은 나보다 더 이 일을 성사하고 싶어 하는 처지고 계약서를 수없이 들여다봤을 거고요. 나를 속이려고 함정을 판다는 건 결국 본인 무덤을 스스로 파는 걸 테고. 나는 돈을 잃으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목이 날아가는 일인데, 설마 이지윤 씨가 그랬겠어요.”여기까지 말한 김예훈의 얼굴에는 재미있는 기색이 역력했다.이지윤의 눈가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내 공손하게 얘기했다.“김세자 님, 걱정하지 마세요.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걸 잘 알고 있고 실망 시키지 않을게요.”이지윤이 물러나서야 송준은 한쪽 편에서 걸어 나오더니 의미심장하게 말을 했다.“대표님, 인도 그쪽 너무 믿지 마세요. 지금이야 깍듯하고 고분고분하지만, 기회만 되면 언제든 돌아서서 등에 칼을 꽂을 위인들이에요.”김예훈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상관없어. 청별 주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별짓을 못 할 거야. 똑똑한 사람이니 나의 존재가 자기를 도와 청별을 손에 넣게 해준다는 걸 알고 있으니 상관없어. 나의 위기가 곧 저 사람의 위기가 될 테니. 이번에 이 자리에 올라오는 것도 이미 대부분 사람한테 미움을 샀을 거야. 짧게 말하면 청별에서는 이미 혼자인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한길로밖에 걸어갈 수 없다는 소리야.”...그 뒤로, 하루 사이에 청별 그룹 관련된 여러 가지 뉴스가 쏟아졌다. 한국 지부 이대정 대표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뉴스를 시작으로 청별 그룹 직계 이지윤이 아시아 지역 대표직을 임명받아 한국 지부 사무를 총괄한다고 했다.그 외에도 CY 그룹에서 청별 그룹의 일부 지분을
둘러싼 사람들은 허리가 불룩하니 분명 무기를 챙겨서 왔다. 숨 쉴 때마다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눈빛들이 사나웠다.그 뒤로 한석범이 얼굴을 보였고 곧이어 심정효도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본 김예훈은 얼굴에 웃음 지으며 말을 건넸다.“아주머니, 저는 어제 얘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게 지금 무슨 짓이죠?”심정효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김예훈을 보며 대답했다.“이봐, 김예훈. 나야 너를 난처하게 할 생각이 없었지. 그런데 방씨 도련님이 여자를 두고 연적이 너무 나대니까 이렇게 사람을 보내서 자네 실력을 보고 싶은가 보네. 난 그저 길만 안내한 건데. 나를 뭐라 할 셈이야?”그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으로 살기에 찬 기운이 퍼졌다.“서울 방씨 가문?”김예훈은 비웃듯 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고 심정효가 답을 했다.“그렇지만도 않아. 이 사람들은 특별 조직에서 왔어. 당신이 아무리 실력 있다고 해도 방씨 가문에서 당신 하나 잡겠다고 사람을 보내지는 않아. 돈만 좀 써도 처리할 수 있는 걸 뭘 거기서 사람까지 보내겠어.”김예훈은 씩 웃었다.“방씨 도련님께 감사라도 드리라는 거예요?”“됐고!”심정효는 눈에 띄게 김예훈의 건방진 태도를 싫어했고 지금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이봐, 김예훈! 사실대로 말해 줄게. 내가 당신 조사를 다 해봤어. 당신이 암만 잘 나가고 있는 척해도 꼴에 그저 데릴사위더구먼. 남의 집 데릴사위가 감히 내 딸을 곁에 두겠다고 억지를 부려! 낯짝이 어찌 그리 두꺼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오늘 이리 따라온 건 내 딸을 봐서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온 거야. 앞으로 내 딸 곁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불쾌했던 과거를 다 잊고, 방씨 도련님한테 내가 그만하라고 말을 할 테니. 그렇지 않으면 나도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김예훈은 내색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제 뒷조사를 했다는 말이네요?”“그게 뭐?”심정효가 무뚝뚝하게 말했다.“그러면 저의 성격이랑 스타일도 잘 아시겠네요. 그런 말이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