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약을 끓이느라 바삐 맴돌았다. 첫 3일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기에 약을 끊을 수 없었다.조금 전 도윤의 행동 때문에 지아는 하마터면 요물처럼 자신의 원래 모습을 드러낼 뻔했다.그녀는 마스크를 벗고 조심스럽게 말리는 동안 자신도 옷을 갈아입었다.도윤의 뒤틀린 성격을 생각하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치료하는 게 나았다. 앞으로 몸을 검사할 때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까.지아는 만약을 대비해 다른 약을 특별히 준비했다.마스크를 얼굴에 다시 끼운 지아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동굴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택했다.약을 기다리는 동안 지아는 과일 몇 개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피로를 조금이나마 달랬다.“제가 몸을 보는 걸 원하지 않으니 그쪽이 본 다음 설명해 주세요.”지아는 진봉에게 말했다.“알겠습니다.”지아가 없는 동안 진봉과 도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진봉은 심각한 얼굴로 지아에게 말했다.“몸에 새겨진 선이 많이 옅어지긴 했습니다. 위로는 쇄골, 아래로는 배꼽 아래 3센티미터까지, 등 뒤는 엉덩이까지 내려왔어요.”도윤은 진봉을 노려보았고 진봉은 가볍게 기침했다.“둔부요.”“색의 선명함, 굵기, 모양을 명확하게 설명해 줘요.”“그건...”진봉은 반나절을 생각해도 마땅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아 휴대폰으로 부분적인 사진 몇 장 찍었다.“자, 직접 보시죠, 선생님.”중요 부위를 피해서 찍었지만 도윤의 몸이 좋다는 건 아무 사진에서나 다 알 수 있었다.깎은 듯이 야윈 턱, 섬세한 쇄골, 거친 선이 드러난 복근의 윤곽, 움직이지 않아도 단단한 근육이 드러난 허벅지까지.지아가 붉은 선을 살펴보니 대충 10% 정도 옅어진 모습이었다.“네, 알겠습니다.”다음날이 지나고 도윤의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땀을 많이 흘려서 기운이 없었다.진봉이 그를 부축해 목욕 가운으로 감싸주니 더 이상 이틀 전처럼 틈틈이 몸을 적시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도윤은 과일을 먹고 몸이 너무
아니, 이건 또 무슨 전개야?지아는 도윤이 자신을 보면 검사할 수 있도록 순순히 몸을 내어줄 줄 알았는데 보자마자 입을 맞추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게다가 전에 진환이 약을 먹인 입술이라 지아는 거부감이 들었다.왠지 자신이 자초한 일에 대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도윤 씨, 이거 놔!”도윤은 코알라처럼 지아를 꼭 껴안고 손을 놓지 않았다.“지아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널 찾았는지 알아? 매일 밤낮으로 네 생각만 했어. 내가 멍청했어. 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널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지아는 멈칫했다. 어쩐지 유난히 순조롭게 떠날 수 있더라니.자신이 가자마자 누군가 쫓아왔지만 도윤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막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그녀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도 있었다.“왜 놓아주려고 했어?”도윤은 꿈속이라고 생각했는지 망설임 없이 지아에게 말했다.“내가 과거에 너한테 못된 짓을 많이 했으니까 보상해 주고 싶었어.”지아는 도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붉은 자국이 있었지만 원래도 잘생긴 얼굴에 붉은 핏줄이 더해지자 추한 게 아니라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불멸의 군주 같았다.도윤은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아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볼 수 없었다.“죽어도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잖아.”“나도 너를 억지로 곁에 붙잡아두고 있으면 영양분을 잃은 화분처럼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거라는 걸 잘 알아.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널 떠나보내기로 했어. 네가 떠나더라도 가끔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아예 소식이 끊길 줄은 몰랐지.”도윤은 지아의 숨결을 느끼며 목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후회했어. 밤마다 네 생각만 하면 후회가 밀려왔어. 널 보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괴로웠어.”지아는 도윤의 입술을 떼어냈다.“이러지 마.”도윤은 손을 뻗어 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지아야, 그거 알아? 며칠 전에 나 진짜 죽을 뻔했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 이대로 죽
지아는 애써 도윤의 복근에서 눈을 떼고 주의 깊게 살피며 청진기를 꺼내 심박수를 점검했다.“지아야, 뭐가 이렇게 차가워?”도윤은 중얼거리며 물었다.“꿈인데 왜 현실 같지.”“쉿, 말하지 마.”지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청진기로 들은 다음 눈을 벌려 상태를 관찰했지만 동공에 초점이 없어 살펴볼 수 없었기에 해독한 다음 밖에 나가 기기로 검사해야 했다.일단 독을 해독하면 다른 장기들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다.도윤은 꿈인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지아를 붙잡아두면 떠올릴 기억이 더 많아질 것 같아 서둘러 눈을 감았다.“엎드려 봐.”“응.”도윤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본 지아는 지난 이틀 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남자의 타고난 체질이 보통 사람보다 좋았기에 다쳐도 신체가 스스로 회복하는 속도가 빨랐다.“됐어, 다시 돌아누워.”잘 회복된 것을 확인한 지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윤의 엉덩이를 툭 쳤다.그런데 그 행동이 도윤의 몸에 불을 붙일 줄이야.“검사 끝났으면 이제 내가 확인할 차례인가?”도윤은 몸을 뒤집어 지아를 덮쳤고 지아는 두 손으로 도윤의 가슴을 밀어냈다.“뭐 하는 거야?”도윤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지아야, 그동안 내 생각 한 번이라도 했어? 잠깐이라도.”지아는 떠나는 날 이번 생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떠올렸다.이번에 도윤을 살려준 건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이었지, 그와 화해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면 도윤을 더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아니, 생각한 적 없어. 당신 곁을 떠나 잘 살았어. 하루하루가 행복했어.”도윤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전효를 사랑하게 된 거야?”이 가능성을 떠올리자 도윤은 폭발한 사자처럼 지아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지아야, 정말 잔인하다. 이번 생에 나만 사랑하겠다고 했잖아.”지아는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어. 도윤 씨, 이거 놔. 우린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차라리 이런 말을
지아는 처음 도윤과 결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늘 말이 없었던 그는 침대에서도 행위에만 집중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는커녕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매번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할 정도로 괴롭혀대는 게 아니었다면, 지아는 도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아했을 것이다.도윤은 항상 자신의 모든 감정을 마음속에 숨겼다.오랜 세월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 바뀐 것 같았다.지아가 감정을 감추기 시작하니 이젠 도윤이 비굴하게 들러붙었다.그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사람에게 칭얼거리며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강아지처럼 도윤은 지아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건드렸다.촉촉한 입술이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며 물기를 묻혔다.“지아야, 보고 싶었어. 미쳐버릴 정도로 보고 싶었어.”지아는 곧 진환이 들어와 도윤의 밑에 깔린 도윤을 자신을 보면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했다.하여 방법을 생각해 낸 지아는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도윤 씨, 나도 당신 보고 싶었지만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야.”“어디로 돌아가?”“꼭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말하며 지아는 도윤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고, 수동적이던 그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도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의심하지 않았다.지아는 키스로 도윤의 정신을 쏙 빼놓고 그 틈을 타 도망쳤다.도윤만 제자리에 남은 채 지아를 불렀다.“지아야, 지아야...”지아는 빠르게 옷매무시를 다듬고 동굴을 빠져나왔다.일행은 오래전에 떠났고 동굴 밖에는 커다란 붉은 뱀만 남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무무는 산에서 열매를 따고 있었고, 커다란 붉은 뱀이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주고 있었다.산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지아의 가슴 속 열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지아는 큰 나무에 올라가 머리 뒤로 손을 얹었다.나무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온몸에 스며들고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 떼를 바라보며 도윤과 함께했던 시간이 천천히 떠올랐다.행복하고
진환은 힘없이 대답했다.“보스, 저예요.”도윤은 손을 뻗어 더듬었다.“지아는 어딨어?”“또 꿈을 꾸셨나 보네요.”“꿈?”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지아의 피부의 탄력과 촉감, 온도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네, 사모님은 수천, 수만 리나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 나타나요.”도윤의 마음은 허탈했다. 힘겹게 보물을 얻었는데 결국 한낱 꿈이었다.고개를 숙인 그는 입꼬리를 내리며 힘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긴, 어떻게 만날 수 있겠어.”“깼으면 뭐 좀 먹어요.”지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은 그제야 진환 외에 그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 잠꼬대를 하지는 않았을까?“저 여자도 여기 계속 있었던 거야?”진환이 서둘러 대답했다.“아니요, 바네사는 계속 밖에 있다가 저랑 같이 들어왔는데 왜 그러세요?”“아무것도 아니야.”도윤은 진환이 건네주는 과일을 받아먹었다.지난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과일과 채소만 먹었고, 몸이 허약한 도윤은 특별히 몸에 좋게 재배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몇 개 더 먹었다.단백질이나 지방 보충은 없었지만 과일들로 허기를 달래니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가서 물통에 물 좀 갈아줘요. 이따 약을 바꿔서 남은 독을 빼내면 내일부터 안 써도 돼요.”지아가 지시했다.“네.”오직 도윤의 건강을 위해 진환은 빠르게 움직였다.지아는 하품을 하며 약을 계속 끓였고, 이날은 그녀와 도윤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하루가 지나자 육안으로도 도윤의 상태가 호전된 게 보였다.진봉도 데리러 달려왔다.“선생님, 우리 보스 다 나았나요?”“당연히 아니죠. 아직 3일밖에 안 됐고 독소는 절반 정도 사라졌어요. 남은 독소를 빼려면 6일은 더 걸릴 거예요. 다만 이제는 뜨거운 찜질할 필요 없이 매일 한 시간씩 여기 약탕에 머물면 돼요. 앞으로는 약도 하루에 세 번으로 줄일 거고요.”지친 지아의 얼굴에서 지
진환이 설명했다.“이 마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의사에요. 보스가 가면을 쓰지 않았으니까 아는 것도 이상하진 않죠.”도윤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뭐, 유명한 의사들은 좀 거만하긴 하죠.”진환이 덧붙였다.“그래도 보스 독 치료하느라 애썼어요.”도윤은 어딘가 그 의사가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괜한 생각이겠지.’미셸은 도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을 붉히며 달려왔다.“오빠, 걱정 많이 했어.”도윤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포옹을 피했다.“괜찮아, 너도 나 때문에 오래 여기 있었네. 난 남아서 치료할 테니까 넌 돌아가.”미셸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힘들게 달려왔는데 깨어난 도윤이 제일 먼저 건넨 건 떠나라는 말이었다.“오빠 눈이 안 좋아서 내가 돌봐줘야 하잖아. 휴가 냈으니까 괜찮아.”“됐어. 진봉이랑 진환이도 있는데 넌 여자라 불편하잖아.”미셸은 발을 굴렀다.“뭐가 그렇게 불편해, 나도 오빠도 미혼이고 예전에 같이 작전 나갈 때도 서로 챙겨줬잖아?”조원주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이 말을 듣고 미셸이 일방적으로 들러붙는다는 걸 알았다.시선을 옮겨 미셸을 위아래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아니꼬움이 가득했다.“요즘 아가씨들은 어린 나이에 참 뻔뻔하네. 거절하는 것도 모르고 들러붙는 게 얼마나 싸 보이는지.”자신에게 소변을 뒤집어씌운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미셸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오빠랑 나는 다정한 사이인데 결혼도 못 한 노처녀라서 질투하는 거예요?”“미셸!”이 말을 듣고 막 밖으로 나온 우서진이 미셸을 꾸짖기도 전에 하얀 그림자가 날아왔다.미셸의 얼굴에 따귀가 날아들었다.짜악-아주 선명한 울림이 숲에 울려 퍼졌다.식사를 마치고 나온 지아는 언제나처럼 거만한 미셸의 목소리를 듣고 빠른 속도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미셸은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지아를 쳐다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너, 날 때렸어?”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
지아는 사람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당신들 신분이 무엇이든 이 마을에 왔으면 이곳 규칙을 지켜요. 그게 싫으면 당장 나가요.”우서진은 격앙된 미셸을 제지했다.“얘야, 그만해. 여긴 A시가 아니야. 저 자식 안 구할 거야? 유일하게 구해줄 수 있는 의사에게 밉보여야겠어?”미셸은 도윤을 생각해서 마지못해 조원주에게 다가가 말했다.“할머님, 다 제 잘못이에요. 지난 며칠 동안 오빠의 독 때문에 불안해서 그랬어요. 용서해 주세요.”여든 살인 조원주는 어린 계집의 사소한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흘겨보며 말했다.“어린 게 주제넘게 굴지 마.”지아는 조원주를 부축하며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미셸은 지아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며 따귀를 맞고 붉게 물든 얼굴을 만졌다.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우서진은 이런 미셸의 모습을 보며 겁이 났다. 미셸은 신분이 비범했고 도윤이 수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데려온 것이다.미셸과 도윤이 크는 것을 지켜보며 둘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이대로라면 미셸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됐어 미셸, 이 자식은 이제 큰 고비를 넘겼고 여자인 네가 있는 것도 그러니까 사람 보내서 밖으로 데려다줄게.”“선생님, 저 안 가요. 전 남아서 오빠 돌볼 거예요!”미셸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충동적으로 멍청한 짓 안 할게요.”도윤의 독이 풀리는 날은 저 여자와 노파가 죽는 날이다!저 멀리 대나무 건물 위에 서 있던 무무가 미셸의 불길한 눈빛을 포착했다.무무의 마음은 3살짜리 어린애처럼 마냥 유치하지 않고 조숙했다.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마음을 더 잘 이해했던 아이는 미셸의 눈가에 담긴 감정이 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스윽 손을 들어 올리자 독수리 한 마리가 앞 난간에 내려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무무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이 장면을 우연히 진환이 포착했는데,
지아는 샘물가에 엎드린 채 손을 들어 무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착하지, 엄마 좀 잘게.”무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디밭에 누워 지아의 볼에 뽀뽀를 했다.두 사람 주위에는 작은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카메라가 있다면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지아는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너무 피곤해서 엎드리자마자 곧장 잠에 들었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지아의 하얀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무무도 지아를 귀찮게 하지 않고 근처에서 약초를 뜯었다.산속의 작은 동물들도 무무를 좋아했고, 자주 보러 오던 사슴은 무무 앞에 누워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였다.참 단조롭고도 아름다운 일상이었다.도윤은 허약한 몸인 데다 문제는 시력이 회복되지 않아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다.진환은 그를 데리고 익숙한 방으로 갔다. 크지 않은 방에는 대나무로 만든 가구가 있었고 창문을 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천천히 가. 여기 작은 테이블에 물 있어. 목마르면...”도윤은 도와주려는 미셸의 손을 뿌리쳤다.“미셸, 여기 있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사람 보내줄 테니 가.”“하지만 오빠, 난...”도윤은 손을 흔들며 진환과 진봉을 내보냈고 방에 두 사람만 남자 그때야 도윤이 말을 꺼냈다.“미셸, 넌 이미 결혼 적령기가 지났고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 나한테 눈길 돌리지 마. 3년 전에 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그 여자와의 재혼이 아니면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소지아는 이미 오빠를 떠났어. 오빠가 그동안 계속 찾아다녔다는 거 알아. 정말 오빠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면 그렇게 단호하게 떠났을까? 시간이 지나서 이미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까지 가졌을지도...”쾅-큰 소리와 함께 도윤이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부쉈다.“내 앞에서 지아 욕보이는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셸,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할 말은 끝났어. 전에도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