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영문 모른 채 강욱을 바라보았다.“또 무슨 일 있어?”강욱은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표정은 어색하면서도 쑥스러웠다.“생일이라면 당연히 생일 선물 있어야 하잖아요. 이건 제가 전에 떠돌아다니면서 일할 때, 절에 가서 구한 건데, 아주 영험한 부적이에요. 제가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결국 살아남았거든요. 그래서 이걸 아가씨에게 드리고 싶어요.”까무잡잡한 손바닥에는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가 있었는데, 펜던트 안에는 평안부가 하나 들어있었다.“안 돼, 이건 강욱 씨의 평안부인데, 어떻게 내가 가져갈 수 있겠어?”남자는 억지로 지아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냥 받으세요. 저도 더 이상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니까 이 부적이 아가씨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비싼 물건이 아니니 싫어하지 마시고요.”지아는 강욱이 기어코 자신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고마워. 그럼 잘 받을게.”문을 닫자, 지아는 이 초승달 펜던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펜던트의 줄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게 아니라 오색 실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펜던트조차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랐다. 아무튼 플라스틱이나 옥이 아닌 것 같았다.그러나 디자인이 꽤 예뻤기에 지아도 자신이 얼른 좋아지기를 바라며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지아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건강하길 바랄 뿐이었다.그날 밤, 지아는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잤다.강욱과의 관계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이런 일을 했다고 먼저 지아와 말을 걸거나 친한 척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녀가 말한 규정을 명심하고 있었다. 별일 없을 때, 그는 지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절대로 다가오지 않았다.그렇게 두 달 정도 휴식한 후, 지아가 약물치료를 끝낸 지 이미 3개월이나 지났다.치료가 몸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많이 줄어들었고, 지아는 이미 휠체어를 떠나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강욱도 이제 그녀의 곁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지아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건우는 지아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녀를 대신 모든 것을 안배할 것이라 약속했다. 그래서 지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이날 지아는 아주머니에게 맛있는 음식 가득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의의로 강욱을 불렀다.강욱은 한쪽에 서서 무언가를 의식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앉아서 같이 먹어.”“하지만 아가씨, 그래도 규정은...”“앉아.”강욱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 있었고 젓가락을 움직이는 대신 다시 입을 열었다.“아가씨, 더 이상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 거예요?”최근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지아는 더 이상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외출할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아를 따라다니는 것 외에 그는 오직 물건만 들어주면 됐다.지아도 진작에 발견했다. 강욱은 비록 어수룩해 보이지만 마음은 무척 섬세했다.“이제 나도 내 일상생활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 넌 더 이상 내 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이미 임 의사에게 부탁했는데, 너에게 좋은 일자리 하나 구해 줄 거야.”비록 처음에 지아는 그 누구와도 마음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기에 애초에 그런 규정을 세운 것이었다.그러나 몇 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 강욱은 최선을 다했기에 지아는 더 이상 그를 낯선 사람으로 취급하며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았다.“너도 나이가 꽤 있으니까 앞으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법을 어기는 일 하지 마. 이 세상에는 돈을 버는 방법이 많아. 넌 마음씨도 나쁘지 않으니 좋은 일자리를 선택해서 돈 벌어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아야지.”강욱은 묵묵히 지아의 말을 들은 다음 젓가락을 들었고 조용히 대답했다.“그래요, 알겠어요.”지아도 자신의 말 때문에 강욱이 슬퍼하고 있는 건지 잘 몰랐다. 분위기가 굳어지자, 그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강욱은 일어날 때, 갑자기 입을 열어 물었다.“아가씨,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죠?”“일주일 후에.”지아는 대답을 마치자 즉시 멈칫했다.강욱에게 자신이 떠날 것
지아는 강욱이 하루를 돌려보낼 거라 예상했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됐다.어차피 떠나기 전에 다빈에게 하루를 맡기려 했던 그녀는 떠돌이 인생이 될 운명이었기에 아이를 오래 키울 수 없었다.게다가 지아는 자신의 불행이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모두가 자신을 멀리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이 또한 그녀가 건우 곁을 빨리 떠나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불행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소계훈도, 강미연도, 하루도 모두 그랬다.다시는 아무도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강욱은 혼자 살고 고양이도 다정하게 대하는 걸 보아 그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아주머니는 집에 볼일이 있어서 일찍 나가셨고, 넓은 마당에 남은 사람은 지아뿐이었다.마당에 있는 태양광 조명이 자동으로 켜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집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지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앉아 있었다.예전에 하루는 활기가 넘쳐 매일 마당을 뛰어다니거나 캣티저의 방울을 딸랑딸랑 울렸다.이제 홀로 남은 그녀에겐 빛 아래 드리워진 긴 그림자만이 함께할 뿐이었다.찬바람이 불어오자 지아는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전등에 달린 술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지아는 나지막이 피식 웃었다.‘혼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을 테니까.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는 지아의 몸이 어둠에 조금씩 삼켜지고 있었다.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지난 며칠 동안 지아는 간단한 운동을 시작했다. 가끔 다소 격한 동작에 몸이 불편해도 지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그리고 7일 후, 건우와 다빈이 특별히 지아를 배웅하러 왔다.부두.이미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 지아는 이 도시가 좋았다.바다조차도 자식을 부드럽게 달래는 다정한 어머니 같았다.지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은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쓰고 손바닥만 한
다빈은 건우의 어깨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배에 오르는 지아를 바라보았다.“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 나요. 지아 언니 그동안 너무 고생만 한 것 같아요. 이제 조금 나아질까 했는데 또 떠나야 하고, 또 바다에 그렇게 오래 있는데... 혹시나 바다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건우는 다빈의 어깨를 안으며 다정하게 위로했다.“괜찮아. 맹 선장 아무런 위험 없이 20여 년간 항해했어. 지아가 고생한 건 맞지만 운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내가 몇 년 동안 이 일을 해 오면서 저 지경이 됐는데도 살아있는 건 하느님이 도우신 거야. 고생 많이 했으니까 앞으로 더 잘될 거야. 인생은 돌고 도는 거라잖아.”“그러길 바라야죠.”다빈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A시로 도망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처럼 멀리 떨어진 곳이 얼마나 좋아요.”건우도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거야. 너무 중요해서 몇 개월도 기다릴 수 없는 일이겠지. 걱정 마, 최후의 카드로 지아를 지켜줄 사람 보냈어. 혼자 길을 떠나게 할 수는 없잖아?”“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네요. 이만 돌아가요.”선원들은 지아를 배에 태워주며 마치 VIP처럼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건우가 남몰래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지아는 이 우정을 굳게 마음속에 새겼다.훗날 언젠가는 반드시 건우에게 이자까지 붙여 제대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배에 오르자 선장은 지아에게 배의 구조에 대해 열정적으로 소개했다.“아가씨, 임 선생님이 진작부터 아가씨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희 배는 화물선이라 다른 것들보다 속도가 빠르지 않고 바다에 있는 시간이 기므로 조금만 참아주세요.”“알겠습니다.”“네, 그리고 전 맹국영입니다. 아저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그럼 사람 보내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아저씨, 번거로우실 텐데.”“그럴 리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지아의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아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랬다.“하루는 잘 지내요?”“잘 지내요. 친구에게 맡겼으니 잘 돌봐줄 겁니다. 임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까 봐 저보고 여기 와서 돌봐달라고 하셨어요.”“정말 고생이 많네요.”지아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착각일까?헤어져야만 했던 사람과 다시 재회한 지아는 기쁜 대신 묘한 감정이 들었다.마치 이 사람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또 강욱이 온 이유는 이해가 되었다.지아의 직감이 자신에게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속을 모르는 사람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강욱을 피하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지아는 항상 방에 틀어박혀 식사조차 밖에서 하지 않았다.강욱이 식사를 가져다주면 지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고, 그 외엔 하루 동안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강욱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지아가 소원해졌다고 해서 늦장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챙겨주고, 오후에는 신선한 차와 과일을 준비해 오는 것은 물론, 사과도 지아가 먹기 좋게 껍질을 깎고 썰어서 가져다주곤 했다.겉보기엔 거친 사람 같았지만 속은 의외로 섬세했다.지아는 강욱이 가져온 포도를 만지작거리며 두 눈에 깊은 사색의 흔적이 역력했다.옛날에는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지아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어서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취향을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밥이든 과일이든 아주머니가 주는 대로 먹었다.건우가 지아를 돌봐줬을 때도 지아가 나서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한 적은 없었고, 건우 역시 이를 몰랐다.하지만 배에 오른 후부터 식사부터 과일까지 매일 다양하게 준비된 것들은 모두 지아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주머니마저 가끔 지아가 싫어하는 요리를 한두 가지 만들어 주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배에서 지내면서 놀랍게도 싫어하는 요리는 하나도 없었다.확률적으로도 말도 안
저녁 식재료는 대부분 신맛이 강한 편이었고, 지아는 싫은데도 불구하고 모두 한 입씩 먹어보았다.다음 날도 신맛 나는 음식이 많아지자 지아는 먹다 토할 뻔한 뒤 강욱을 불렀다. “흠, 요즘 신 음식이 너무 많아서 좀 질리네요.”“알겠습니다, 지아 씨. 뭘 좋아하는지 알려주면 기억했다가 주방 사람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지아는 강욱의 표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이도윤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이도윤이 아무리 자신을 잘 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곁을 지킬 수는 없었다.게다가 고고하신 대표님께서 언제부터 남의 시중을 들었단 말인가.지아는 며칠 동안 관찰했지만 별다른 낌새가 없자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고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강욱을 대했다.바다 위에서의 나날은 확실히 지루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 일출과 일몰도 오래 보고 있으면 따분했다.지아는 갑판 위에 앉아 있었다. 저녁노을은 이맘때가 가장 아름다웠다.저녁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고, 지아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전혀 자신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가끔씩 선원 한두 명을 만나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대머리에 향해도 덤덤히 받아들였다.그녀의 두피에는 키위처럼 솜털이 잔뜩 자라기 시작했다.강욱의 시선이 지아의 머리 위로 스치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아가씨, 저녁 바람이 좀 찬데 모자라도 쓰실래요?”“아뇨, 괜찮아요.”지아는 옆자리를 두드렸다.“나랑 같이 앉아 얘기 좀 해요.”요즘 유심히 관찰한 결과, 강욱에게 의심스러운 부분은 찾지 못했기에 지아도 한층 편하게 대했다.“얘기나 해요.”바다는 너무 지루했고, 며칠을 참다 보니 사람이 상당히 우울해져 있었다.강욱은 곧바로 다가가 알아서 화제를 찾았다.“아가씨, 다음 지점이 뭔지 압니까?”지아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네요.”“이글랜드 해협.”지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지리책이나 여러 소셜 플랫폼에서 들어본 적이
강욱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긴 악마들의 뒷마당 같은 곳입니다. 이 바다에서 마음껏 악행을 일삼고 온갖 짓을 저지르며 사람들을 강탈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이 단속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지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위험한데 왜 이쪽으로 가요?”“사람들은, 특히 상인들은 도박 심리가 있어요.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면 보름이 더 걸리고, 게다가 다른 항로도 위험해요. 암초에 부딪힐 위험도 있고, 비용 부담도 커지고, 해적들도 몇 년 전부터 덜 나타나고 있어서 다들 마음 놓고 지나가고 있죠.”강욱은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지아는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신가요?”“모든 일에는 최악의 상황이 있어요. 특히 악랄한 악당 집단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강욱은 고개를 돌려 진지함이 가득한 지아의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무서워요? 미안해요. 전 그냥 미리 알려주고 싶었어요.”지아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우리의 운이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안 만났는데 우리만 만나지는 않겠죠.”“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불행한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긴 악마의 해연이고, 극락지경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말해줘요.”“좋아요, 극락지경은...”어느새 어둠이 깃들고, 지아는 강욱이 가장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통찰력은 가장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들으며 지아는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이렇게 위협적이면서도 놀라운 곳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이 모든 곳을 다 가봤다고요?”“네, 젊었을 때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해보느라 여행도 많이 다녔거든요.”강욱은 두 팔을 등 뒤에 가져가 몸을 지탱하며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바다 위 별빛이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산업공해
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조금이라도 조심하는 게 낫죠. 그냥 배에 있을게요.”강욱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아가씨,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국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애초에 건강도 좋지 않고, 국내에 가족도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돌아가는 건가요?”“음, 일이 좀 있어서요.”지아는 입을 꾹 다물고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럼 일찍 쉬세요.”화물선이 정박한 후 보급품을 재보급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지만, 지아는 배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계속해서 방에만 머물렀다.그녀는 달력을 빨간 펜으로 그으며 점점 A시와 가까워지는 날들을 바라보았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두 아이를 볼 수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원이 와서 알렸다.“아가씨 죄송해요. 배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지금 기술자들이 정비 중인데 오늘 안에 출항이 어려울 것 같아요.”“연착은 얼마나 걸리나요?”“빠르면 하루, 늦으면 2, 3일 걸립니다. 현재 수리 때문에 다들 야근을 하고 있는데, 선장님이 특별히 배에서 심심하면 섬을 한 바퀴 돌아도 된다고 저를 여기로 보내 알려드리라고 하셨어요.”“네, 알겠어요.”지아는 섬의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덤덤하게 대답했다. “감사하지만 됐어요.”“괜찮습니다. 선장님과 다른 분들은 선술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있으니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로 연락해 주세요.”“네.”항구에 가까워지자 밤은 시끄러운 파도 소리 없이 고요해졌다.지아는 몸을 뒤로 젖히고 갑판에 앉아 별을 바라보는 것이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습관이 되었다.어느새 누군가 그녀를 위해 망토를 씌워주었고 강욱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전례 없이 그는 맥주 캔을 손에 들고 있었다.“선술집에 가서 한잔하지 그래요?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힘들지 않아요?”강욱의 긴 손가락이 펑 소리와 함께 고리를 당기고 두어 모금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대답했다. “내 임무는 당신을 보호하는 건데, 월급을
이예린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노련한 태도로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새로운 곳에 와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요. 좀 걸으려고요.” “네 오빠도 여기 있잖니. 그 아이가 네가 나가는 걸 보면 분명히...” 이예린은 곧장 심예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가 제 손발이 이미 회복된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오빠가 정말 저를 죽이고 싶었다면, 이미 3년 전에 끝냈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누군가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마음 여린 사람이라고요.” 당시 도윤은 예린을 죽이지 않고, 단지 손과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지아를 위해 복수를 한 셈이었다.더구나 지아는 죽지 않았기에, 도윤은 더 이상 예린을 해치지 않았다.“너는 전혀 우리를 닮지 않은 모양이구나.”예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사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그들 가문에 흐르는 피와 같았다.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도윤도 그러했으며, 예린도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후가 예린을 구해준 순간부터, 예린은 자신의 목숨이 영원히 시후의 것임을 알았다. “그래, 주변에서만 걸어 다니렴.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알겠어요.”예린은 몇 발짝 걸어가다가 멈추더니, 뒤돌아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엄마.”심예지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니?” 심예지는 지난 몇 년 동안 예린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지만, 예린은 늘 과묵했으며,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예린은 태도마저 차갑고 무관심했기에, 심예지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저 여생 동안 속죄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심예지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예린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심예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차올랐고, 다시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 뭐라고?”“엄마.”이번에는 예린
전화를 받은 이예린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말씀만 해주세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어요.]이 대답은 시후가 예상한 대로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 재회했을 때도, 예린은 시후를 볼 때마다 두려워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평소의 당당한 이예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후는 연애 경험은 없었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유형의 여성을 접해왔다. 그래서 예린이 단순히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 외에도, 깊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예린이 이씨 가문의 아가씨라 할지라도, 시후 앞에서는 늘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예린은 시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늘 자격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제가 선생님의 아버지를 구출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할 수 있겠어?”시후는 예린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어려울 순 있겠지만, 반드시 해낼게요.]예린은 나이가 어리지만 결단력이 있었다. 예린의 대답에 시후는 한결 안도했다.“뭐든 얘기해줘.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적에게 이상한 낌새만 줄 뿐이에요.]시후는 곧 이예린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예린은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계획, 냉혹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예린이 적이었다면, 정말로 두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양지운이 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사람들을 철수시켜.” “그 여자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요.” 시후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때로는 은혜 하나만으로도 평생 기억되는 법이지
이 말을 할 때 조경선의 얼굴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입가에는 미친 듯한 웃음이 번졌다.“꼭 살아남아서, 그 모든 걸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조경선은 다시 소임호에게 영양제를 주사했다. 소임호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는데, 조경선과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소임호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병약한 모습을 보자, 조경선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조경선은 수년간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계획해 왔다.조경선이 상상했던 장면은 소임호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애원하며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임호를 붙잡고 나서도, 소씨 가문이 이렇게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임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조경선의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날린 주먹이 솜사탕에 파묻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조경선의 가슴속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계획했지만, 조경선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조경선은 뼛속 깊이 소임호를 증오하면서도, 소임호가 그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소임호는 조경선이 평생 이루지 못한 소원이자,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를 미워할수록 사랑도 더 깊어졌기에, 조경선은 소임호를 죽이기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며 돌아오기를 원했다.해가 저물 무렵.조경선은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별장 안팎에 놓인 꽃들과 각종 장식은 사실 특정한 용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기계음이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경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침대 옆 협탁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고,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그렸다. “감히 여길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조경선이 손을 한 번 흔들자,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실시간 CCTV 화면이 투사되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