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지아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를 다시 내 곁으로 데려오는 것은 전철을 밟은 것에 불과해. 다시 한번 지아를 슬프게 할 뿐이지.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은 마치 꽃병에 꽂힌 꽃과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게 될 거야. 아마 지아를 놓아주는 게 정확한 선택일지도 몰라.”진봉과 진환은 도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느꼈다.“대표님, 정말 이대로 사모님을 놓아주려고요?”“예전에 난 줄곧 지아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늘 불의의 사고가 찾아왔지. 지아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날 원망하고 있으니, 만약 이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난 지아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이것도 모두 나의 추측일 뿐, 아직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먼저 지아가 아직 살아있는지부터 검증해. 지아의 휴대폰 위치와 일주일 간 임건우의 모든 동향을 추적하고. 그리고 절대로 들키지 마.”“네, 대표님.”“먼저 돌아가실래요?”도윤은 고개를 저었다.“만약 지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일 거야. 그녀를 두렵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요 며칠 바다에서 지낼게.”지아의 죽음에 미쳐버린 도윤은 틀림없이 시체를 인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할 테니 또 어떻게 하루 만에 포기할 수 있겠는가?도윤은 지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지아 역시 도윤을 잘 알고 있었다.다만 도윤은 자신이 언젠가 지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놓아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다음 며칠간, 인양작업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진환도 무언가를 조사해냈다.“사모님의 핸드폰 신호는 마지막으로 해변에 나타났는데, 지금은 이미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히 임건우의 동향을 조사해 봤지만, 요 며칠 그는 여전히 제때에 출퇴근했고, 퇴근 후 심지어 여자친구와 함께 쇼핑하고, 식사를 하거나 영화까지 봤습니다. 아무튼 모든 것이 정상이었습니다.”“정상일수록 이상하지. 이 모든 것은
이때 진환이 말했다.“대표님, 전에 비해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예전에 난 항상 내 결정이 바로 지아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 오히려 한 번 또 한 번 지아를 다치게 했어. 게다가 지아가 가짜로 죽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야. 날 속일 수 있는 이상, 전의 그 주모자를 속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지아는 오히려 안전해졌고, 수시로 암살당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그래서 대표님은 지금 사모님뿐만 아니라 주모자에게 보여주려고 연기를 하시려는 거군요.”“그래야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이용해 조사할 수 있어. 지금 그 사람은 아마 경계심을 내려놓았을 거야. 그러나 그 전에 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무슨 일이죠?”“집안 정리.”이씨 가문의 작은 사모님이 불치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재빨리 전해졌다. 지아의 장례식은 오늘 저녁으로 정해졌고, 거의 모든 상류층의 유명 인사들이 찾아왔다.심예지는 눈시울이 새빨갰다. 그녀는 지아란 며느리를 매우 좋아했지만, 아쉽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어르신은 정신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망연한 표정으로 홀에 서서 오 집사에게 물었다.“누가 죽었지?”오 집사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어르신, 더 이상 묻지 마세요.”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의론을 하기 시작했다.“듣자니 이 대표님이 자신의 부인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던데.”“그런 것 같지 않은데. 전에 국내에 있을 때,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 하지 않았어?”“하긴, 이 작은 사모님도 참 불쌍한 사람이야.”백채원은 장례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지만, 지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마침내 이 날이 왔군. 소지아가 죽었으니 앞으로 나와 도윤 씨를 빼앗는 사람은 없을 거야!’‘하느님도 내 편에 섰던 거야. 마침내 소지아가 먼저 죽어버렸어.’도윤이 나타났을 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비록 도윤은 여전히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원래 깨끗하던 턱에는 짧은 수염이 자랐고, 얼굴은
도윤은 피하지 않았다. 이때 진환이 나타나 민아를 뒤로 끌어당겼다.“김민아 씨, 진정 좀 하시죠. 저희 대표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고, 이 모든 것은 사모님께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에요. 대표님은 지금 충분히 고통을 느끼고 있단 말이에요.”민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이 찌질한 남자 같으니라고. 지아의 상태는 분명히 많이 좋아졌는데, 틀림없이 당신이 지아를 자극해서 일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지아가 당신을 만난 것은 정말 재수가 없는 일이군요.”민아는 진환을 돌아서 도윤의 앞으로 걸어갔다. 하이힐을 신은 민아는 도윤과 키가 거의 비슷했고, 가까이 다가간 다음, 도윤의 옷깃을 꽉 잡았다.“지아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대체 왜 지아를 이렇게 만든 거죠?”도윤은 고개를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지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다 나 때문이야.”민아는 화가 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지금 도윤을 죽인다고 해서 또 뭐가 달라지겠는가? 지아는 이미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나 민아는 여전히 내키지가 않아 계속해서 도윤을 때리려 했다.이번에 누군가가 민아의 손을 잡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사장님이자 그녀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고, 또 특별히 그녀를 데려온 남자였다.“김 비서, 그만해.” 남자의 표정은 무척 엄숙했다.그러나 민아는 한창 화가 나 있었기에 또 어찌 손을 내려놓으려 하겠는가.“사장님, 이 손 놓으세요. 난 이 쓰레기 같은 남자를 죽일 거예요! 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지아도 죽지 않았을 텐데. 다 이 남자 때문에 지아가 핍박을 못 이겨 죽은 거라고요.”민아는 옆에 놓인 흰국화와 흰장미를 모두 도윤의 몸에 던졌다. 장미의 가시는 그의 뺨을 매섭게 스쳐 핏자국을 남겼고, 피는 그의 얼굴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도윤은 처음부터 반항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그는 확실히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민아가 지아를 대신해서 자신을 때렸다
머리가 타일에 부딪치자, 격렬한 충돌 소리가 났고 모두를 놀라게 했다.이것은 추모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다!‘이 대표 미친 거 아니야? 이 어린 소녀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심하게 손을 쓰는 거지?’이예린은 자신이 지아의 장례식에 놀러 왔다가 뜻밖에도 남에게 발각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오빠에게.‘나와 소지아 사이에서 줄곧 날 선택했는데.’‘지난번에는 심지어 날 위해 소지아의 손까지 다치게 했고.’‘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머리가 타일에 박히자, 이예린은 어지러워서 눈앞이 캄캄해졌고, 이마는 아예 피투성이가 되었다.‘내가 지금 이 모습을 유지하려고 얼굴에 얼마나 많은 수술을 했는데!’“대표님, 지금 사람 잘못 본 거 아닌가요! 난 당신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죠?”이예린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거친 목소리를 숨기기 어려웠다.그녀는 얼굴을 고칠 수 있어도 불에 타버린 성대를 통제할 수 없었다.그러나 도윤은 이예린과 다툴 마음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억누르더니 몸을 숙여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이예린, 지아는 이미 떠났지만 그녀를 해친 사람, 난 하나도 놓치지 않을 거야. 지아 앞에 고분고분 무릎 꿇고 참회나 해. 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이예린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그 여자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앞으로 오빠가 지옥에 가면 스스로 그 여자 찾아가서 설명하든가.”“잘못을 뉘우치고 싶지 않은 건가? 하지만 오늘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아에게 꼭 절을 해야 해!”말을 마치자, 도윤은 이예린의 머리를 잡고 힘껏 눌렀고, 이예린은 발버둥 칠 여지가 전혀 없었다.심예지는 두 사람의 행동에서 이미 여자의 신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도윤이 이예린을 험하게 대하는 것을 보며 심예지는 마음이 아팠지만 나서서 막지 않았다.심예지가 이예린에게 빚진 것
도윤 쪽은 이미 단서를 찾았는데, 그는 지아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했고, 곧 그녀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와줘서 고맙군.”건우는 도윤과 눈을 마주쳤는데, 그의 눈에는 이미 핏발이 가득했고 얼굴 역시 전보다 많이 야위었다. 요 며칠 도윤에게 있어 1분 1초가 고문이었다.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아주 이상하다고 느꼈다. 장례식에서 한 여자를 피투성이로 만들다니. 게다가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뜻밖에도 나서서 도윤을 막지 않았고 심지어 도윤이 무릎을 꿇도록 내버려두었다.남자는 쉽게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는 옛말이 있었는데, 도윤은 뜻밖에도 자신의 부모님이 아닌 아내의 위패 앞에서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시간은 1분 1초 지나갔고, 날이 점점 어두워질 때, 이예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쪽에 쓰러졌다.심예지는 얼른 가서 도윤을 말렸다.“도윤아, 이제 그만해.”도윤은 이예린을 바라보았다. 이마의 피는 이미 응고되었지만 안색은 많이 창백해졌다.왠지 모르지만, 지금 도윤의 머릿속은 온통 지아가 약물치료를 받은 후의 그 연약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가득했다.‘그에 비하면 이게 뭐라고?’도윤은 냉담하게 웃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었기에 그는 진환을 바라보았다.“데리고 가서 치료해 줘.”그리고 도윤은 계속 무릎을 꿇으며 참회했고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갔다.이예린은 자기가 이런 방식으로 다시 집에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얼마 동안 기절했는지, 이예린은 천천히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귓가에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이예린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것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심예지였다.심예지는 관심을 가진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움직이지 마. 너 지금 뇌진탕이라 휴식을 취해야 해. 오랫동안 잤으니 목마르지? 참, 배도 고프겠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이예린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방금 전의 일로, 지금 이예린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심예지는 도윤이 충분히 감정을 발산했다고 생각했다. 이예린이 하룻밤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가 특별히 의료진을 청해 그녀를 돌보라고 했기 때문이다.“도윤아, 예린은 금방 깨어났으니 네가 이렇게 나오면 엄청 놀랄 거야.”도윤은 담담하게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어머니, 설마 제가 예린이 지아를 다치게 한 일을 이대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심예지도 안색이 변하더니 이예린을 뒤로 감싸며 도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지금 예린은 이렇게 다쳤는데, 설령 지난날 지아에게 몹쓸 짓을 했더라도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잖아?”비록 심예지는 지아를 귀여워했고 또 지아가 이렇게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웠지만 이예린은 결국 그녀의 딸이었다.짐승도 자신의 새끼를 아꼈으니, 죽은 며느리와 딸 사이에서 심예지는 당연히 자신의 딸을 선택할 것이다.도윤은 싸늘하게 웃더니 절뚝거리며 이예린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무릎을 너무 오래 꿇어서 무릎이 다쳤고 걷는 자세도 평소와 달랐다.“이예린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머니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데다 나와 지아의 관계까지 이간질하여 우리를 이혼하게 만들었죠. 그리고 지아를 수차례 죽이려는 것도 모자라 지아가 암 말기에 이르렀을 때, 고의로 지아를 자극했어요. 이예린이 이러고도 사람인가요?”심예지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더 큰 아들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이예린도 그녀의 아이였으니 심예지는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도윤아, 예린도 물론 잘못을 저질렀지만, 지아는 이미 떠났으니 네가 지금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을 해도 모를 거야. 죽은 사람은 하늘에서 편히 쉬게 하고, 우리처럼 살아있는 사람이 계속 속죄하는 건 어떨까?”도윤은 이런 말을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아 손을 들어 심예지를 떼어냈다.“어머니, 지금 이예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거, 저
도윤은 마치 괴물을 보는 것처럼 이예린을 바라보았다. ‘왜 소리를 지르지 않는 거지? 왜 이렇게 냉정한 거지?’이예린은 다른 한 손을 내밀어 도윤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뜻밖에도 웃기 시작했다.“오빠, 지금 나보다 더 아프겠지?”“왜, 왜 그런 거야? 지아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왜 그녀를 다치게 한 거냐고?”“별다른 이유 없어. 난 그 여자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밉거든.”이렇게 보면 광기도 유전되는 것 같았다. 이예린과 도윤은 그들의 어머니처럼 미친 짓을 하기 좋아했다.“어쩜 아직도 반성을 할 줄 모르는 거야!”도윤은 재빨리 이예린의 오른손 수근을 잘랐고, 순간 새빨간 피가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그러나 이예린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 여자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심예지는 도윤이 정말로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여동생의 손을 이렇게 만들다니.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도윤을 밀어냈지만 오히려 이예린이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미친놈, 너희 둘 다 미쳤구나! 이 집사! 빨리 의사 불러와!”심예지는 이예린의 손목을 살펴보려고 황급히 그녀의 소매를 걷어올렸는데 오히려 이예린의 팔에 있는 수많은 흉터들을 보았다.딱 봐도 수십 년 전에 생긴 것으로,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심예지는 바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딸이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그리고 딸의 손에 아직도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심예지는 일어나 도윤의 뺨을 때렸다.“예린이는 네 여동생인데,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빌어먹을 놈!”도윤도 그 흉터들을 보았다. 그는 이예린이 시골에 팔려가 죽기보다 못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도윤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 한 번 또 한 번 봐주었다.그러나 이예린을 시골로 팔아먹은 사람은 지아가 아니었고, 그녀를 이렇게 만든 사람도 지아가 아니었으니 어째서 자신이 겪은 이 모든 고통을 지아의 탓으로 여긴 것일까?‘지아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윤
“안 돼!” 심예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이거 다 내 잘못이야. 그때 이남수와 얽매이지만 않았어도 멀쩡한 아이들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오빠는 오빠 같지 않았고, 여동생은 또 동생 같지 않았다.도윤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에 정말 이예린의 두 손과 두 다리를 못쓰게 만들어 그녀를 불구로 만들었다.심예지가 이예린의 곁에 있는 것은 마치 전에 주지 못한 사랑을 다시 메우기 위한 것 같았다.그녀는 매일 상냥하게 이예린을 위해 세수를 해주고 머리를 빗어주며 밥을 먹여 주었다.어릴 때 이예린이 받지 못한 사랑을 전부 보충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예린은 사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으니까.인생에서 뜻밖에 만난 소시후가 준 그 따뜻함을 제외하고, 이예린은 이미 인간의 냉담함과 추악함에 익숙해졌다.그러나 심예지의 보살핌을 받자, 이예린은 좀 적응하지 못했다.예전에 그녀를 미워한 사람은 어머니였고, 그녀를 다정하게 대한 사람은 오빠였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도윤은 그녀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오히려 심예지가 아주 부드럽게 그녀를 챙겨주었다. 매일 이예린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심지어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도 했다.처음에 이예린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아픔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는 인형 같았다.3일 뒤, 이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뭐죠?”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자, 심예지는 깜짝 놀랐지만 곧이어 무척 기뻐했다.“예린아, 지금 엄마랑 얘기하는 거야?”그 기쁨에 찬 표정을 보며 이예린은 더욱 이해하지 못했다.“왜 날 챙겨주시는 거죠? 전에 내가 엄청 밉지 않았나요?”“난...”영문 몰라 하는 아이의 눈빛에 심예지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이 세상에 딸인 자신에게 잘해준다고 엄마한테 이유를 물어보는 아이가 어딨어?’이예린은 두 손과 두 다리가 모두 못쓰게 됐지만,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것은 이예린이 전에 이보다 더 아픈 상처를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