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지아야, 오늘의 벌, 잘 기억해.”“이도윤, 차라리, 날 괴롭혀. 절대 임씨 집안에 손 대지 마.”“이도윤, 이제 나 좀 놔줘. 그리고 나 혼자 여기에 두지 마. 너무 무서워!“이도윤, 물 좀 꺼, 나 추워, 나 아프면 안 돼...”그러나 소지아를 대답하는 것은 이도윤의 무관심한 뒷모습과, 쿵 하고 닫는 문 소리였다.“날 두고 가리지 마.”“내가 잘못했어. 나를 어떻게 괴롭히든 상관없지만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 두지 마.”“이도윤, 나 너무 추워. 날 내보내줘. 네 말 잘 들을게...”“불 끄지 마, 무서워...”애원에 가까운 그 목소리는 그로 하여금 한순간 마음이 약해지게 했지만, 곧 사라졌다.그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로비에서 백채원은 사방에서 그를 찾다가, 그의 곁에 소지아가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도윤 씨, 어디 갔었어요? 내가 한참 찾았잖아요.”“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왜요?” 이도윤의 담담한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백채원은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피했다.“난 저녁에 약속이 하나 더 있으니, 끝났으면 기사에게 데려다 주라고 할게요.”“그래요, 그럼 술 좀 적게 마시고 일찍 들어가요.” 백채원은 불만을 접고 얌전하게 대답했다.그날, 이도윤은 구청 밖에서 혼인신고를 거부했다. 백채원은 어쩔 수 없이 이도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착한 여자로 위장해야 했다.“음.”이도윤이 성큼성큼 떠나자 백채원은 즉시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는 이미 옷을 갈아입었다.다음 약속 때문인가, 아니면 소지아 때문인가?“좀 보고 다녀요!”김민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뒤에서 달려왔다. 그녀가 무엇을 먹고 컸는지, 백채원은 아예 옆으로 밀려났다.“김민아 씨!”김민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미안해요. 앞에 분명히 사람이 없었는데 못 봐서 미안해요.”지금 김민아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김민아는 이도윤을 보자마자 바로 목을 움츠렸다. 그녀가 전에 술자리에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했지만, 그것은 술을 그녀가 마셨기 때문이고 또 소지아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도윤이 지아에 대한 사랑을 직접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지아를 아끼는 반면 남에게 모질었다.2년 전, 김민아가 지아를 술집으로 데려갔었는데, 그가 직접 지아를 데리러 왔었고, 지아가 주의하지 않았을 때,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다음은 없다고 경고했다그가 떠나자 김민아는 이미 식은땀에 푹 젖었고, 며칠 동안 이도윤의 그 두 눈이 나오는 악몽을 꾸었다.“달칵”.그는 라이터를 닫고 담담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 영혼까지 지배당하는 느낌이 다시 엄습했다.김민아는 침을 삼키고 목소리가 작아졌다.“이 대표님, 전 지금 지아를 찾고 있으니까 먼저 가볼게요.”이도윤은 담뱃재를 털며 그녀를 흘겨보았다.“얘기 좀 할까?”김민아는 이도윤이 자신과 한가하게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바로 거절했다.“우리 엄마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일찍 집에 오라고 말해서요. 다음에 봐요.”김민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발을 빼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혔는데, 바로 진환이었다. 전에 김민아는 늘 사석에서 그를 이도윤의 싸움꾼이라고 불렀다.“이쪽으로 가시죠.”김민아는 울먹이며 몇 분 뒤 옆에 있는 한 카페에 도착했다.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리를 계속 떨었고, 탁자 위의 커피까지 따라서 흔들렸다.이도윤은 커피를 들고 싶었는데, 커피의 무늬가 그녀에 의해 변한 것을 보고 멈칫했다.분위기가 어색하자 김민아는 난감하게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건네주었다.“드세요.”그리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또 직업병이 도졌다고 은근히 욕했다.그녀가 커피를 건네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고, 이도윤은 직접 커피를 한쪽에 놓고 입을 열었다.“난 소지아와 임건우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은데.”이도윤이 병이 있는지 없는지 김민아는 모르지만 그의 소유욕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알
이도윤은 그제야 조금 믿었다. 김민아는 감히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얼마 전에 지아 아팠어?”“네 맞아요, 그때 저는 전 남친과 헤어지느라 지아를 소홀히 했는데, 다행히 그때 선배가 매일 지아한테 밥을 해 주었어요.”김민아는 원래 이도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 소지아조차도 잘 몰랐기에 그녀는 자신이 이 사실을 말하면 두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몰랐다. 그래서 김민아는 소지아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창백한 소지아의 얼굴을 생각하자 이도윤은 한마디 더 물었다.“어디가 안 좋았는데?”김민아는 심장이 뛰더니 이도윤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감히 그 어떤 미세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감기에 걸렸어요.”“그냥 감기일 뿐이야?”“그렇지 않으면요? 지아의 몸은 항상 좋았잖아요.”“하긴.” 이도윤도 맞장구를 쳤다. 그녀가 그렇게 허약한 척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동정을 얻어 이혼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자신이 원하는 답안을 얻자 이도윤은 한마디 남기고 일어섰다.“괜찮다면 내일부터 이숲 빌딩으로 출근해.”김민아는 눈이 밝아졌다. 이숲은 YS 그룹 산하의 부동산 지부였다. 만약 그곳에서 출근할 수 있다면 그녀는 또 누구의 눈치를 볼까?“감사합니다, 이 대표님. 만수무강하세요”이도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 김민아는 또 쫓아와서 물었다.“대표님, 지아가 줄곧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혹시 만났어요?”이도윤은 고개를 돌려 김민아를 바라보았다.“네 생각엔?”그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자신이 또 무슨 바보 같은 말을 묻고 있는 것일까?김민아는 머리를 긁적였다.“내가 쓸데없는 말을 물었네요, 그냥 지아가 좀 걱정돼서요.”이도윤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떠났다. 김민아는 생각하다 결국 용기를 내여 입을 열었다.“대표님, 만약 정말 지아를 사랑한다면 지아한테 좀 잘해 줘요. 더 이상 지아한테 상처 주지 말고요. 지아는 속으로 여전히 대표님을 사랑하고 있어요.”비록 이도윤이 소지아의 마음을 저버렸지
소지아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보면서 눈의 빛이 조금씩 사라졌다.몇 번 당해도 여전히 같은 결말이다.전번엔 자신의 아이였는데 이번엔 자신이란 말인가?그녀가 수술을 마친 후 30분이 지나서야 이도윤은 백채원과 병실에 들어왔다. 이미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절망을 느끼며 난삽하게 입을 열었다.“왜 구했어?”“넌 수영할 줄 아니까.”이 답을 듣고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천천히 쏟았다.그때 그녀는 임신 말기에 처해 있었고, 발은 그물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임산부일 뿐 신이 아니었다.이번에 그는 또 자신의 몸이 예전과 같다고 생각했다. 찬물을 맞으면 자신은 기껏해야 감기에 걸릴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약물치료 후의 작은 감기라도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다.이도윤은 세상이 모두 그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는 그의 오만함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혼수상태에 빠진 소계훈은 제외하고, 그녀는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그녀는 십자가에 묶인 죄수처럼 끝까지 고개를 숙이고 죽음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문이 마침내 열렸다. 그녀는 허약하게 고개를 들고 문앞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숨을 억지로 참고 그가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녀 앞에 선 이도윤은 그녀에게 물었다.“지아야, 이제 네가 뭘 잘 못했는지 알겠지?”‘잘못?’‘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을까?’이 순간, 소지아는 웃고 싶었다. 위는 이미 너무 아픈 나머지 감각이 없어졌고, 손도 뻣뻣해졌으며 몸의 체온조차도 거의 떨어져 감각이 없었다.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다 그녀가 자초한 것이었다.소지아의 입술은 마치 죽음에 직면한 물고기처럼 떨렸다.“이도윤, 내가 잘못했어.”어둠 속에서 그의 입가는 점차 올라갔다.이도윤은 재빨리 벨트를 풀었고, 소지아의 힘없이 늘어진 몸과 함께 그녀의 차갑고 살을 에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널 만난 게 내 가장 큰 잘못이야
분명히 전에 가장 익숙했던 몸이었지만, 이도윤은 소지아의 배에 있는 흉터를 처음 보았다.사실 그는 그녀가 마취제에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술할 때 억지로 절개했기에 그는 수술실 밖에서 그녀가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는 모두 몇 번 꿰맸는지, 어떻게 꿰맸는지 그는 모두 훤히 알고 있었다.복부의 상처뿐만 아니라 그녀의 왼쪽 팔 안쪽에는 새로운 상처가 있었는데, 이도윤은 문득 백채원이 소란을 피우러 온 날 그녀가 병원에 갔다는 것을 떠올렸다.그는 그녀가 기껏해야 찰과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긴 흉터일 줄은 몰랐다.소지아처럼 그렇게 아픔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참을 수 있었을까.이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소지아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한 말을 생각했는데, 그의 마음은 마치 칼에 베인 것 같았다.이도윤은 그녀에게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 입히고 또 방의 온도를 높여 그녀를 한사코 품에 안았다.진환은 바로 개인의사 양요한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이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은 피하려 했다.“당장 이리로 와서, 왜 그런지 좀 봐봐.”“예, 이 대표님.”양요한은 이도윤의 개인의사였다. 소지아는 몸이 좋아 별로 아픈 적이 없었지만, 매번 그를 볼 때마다 손을 다치거나 발을 삐었다.그때 그는 소녀가 매우 활력이 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이미 2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그가 활력이 있다고 말한 그 소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종이처럼 얼굴이 하얘진 채 거기에 누워 무척 허약했다.양요한은 간단하게 진단했다.“대표님, 지금 사모님의 건강상태가 지나치게 허약해 쓰러진 걸로 보입니다. 금방 감기에 걸린 것 같으니 체온에 신경을 써서 열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목의 상처는 뼈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곳도 세균에 전염되지 않도록 치료하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허약해?” 비록 얼마 전에 그녀가 좀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렸을 뿐, 요 며칠 진작에 나았어야 했
소지아는 이도윤의 마음속에서 줄곧 활력의 상징이었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이 몇 글자가 진환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는 좀 어리둥절해졌다.진환은 재빨리 그의 곁으로 가서 휴대폰 속의 혈액검사 사진을 눌러서 보여주었는데 적혈구 외에 또 여러 가지 림프 등 세포의 수치가 모두 정상수치보다 낮았다.이도윤은 자기가 떠날 때, 소지아의 그 가슴을 찢는 비명소리를 생각했는데 그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그는 넋을 잃은 듯 천천히 늦게 대답했다.“지금 열이 나고 있어.”“즉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차 대기시켜.”이도윤은 지난 몇 차례의 만남에서 소지아는 모두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지난날 멋 부린다고 양모 외투만 입었던 그녀와는 정반대였다.결국... 그녀는 지금까지 전혀 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정말 아팠다.이도윤은 약간의 바람이라도 들어갈까 봐 허둥지둥 그녀를 꽁꽁 싸맸다.소지아의 볼은 새빨갛게 타서 불쌍하면서도 하편으로는 또 귀여워 보였다.예전에 그녀가 열이 난 적이 있었지만, 생명의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열로 인해서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다.그녀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야 이도윤은 그녀의 체중이 과거보다 훨씬 가벼워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이도윤은 그녀를 바로 개인 병원에 보냈다. 양요한은 혈액검사보고를 들고 왔다.“대표님, 이미 상황은 알고 계시죠. 지금 사모님은 위독해서 일단 사모님 주사부터 맞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도윤은 줄곧 그녀를 안고 있었고, 소지아는 열 때문에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는 배를 만지며, 한 손으로는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도윤아, 나 구해줘, 우리 아이 좀 구해줘.”그녀의 오른손에는 주사를 놓고 있었는데, 바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까 이도윤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소지아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마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그녀의 조급함은 그제야 서서히 사라지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아가야, 엄마가 마
이도윤은 양요한의 멱살을 놓아주며 뒤로 물러섰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소지아가 한 말들로 맴돌고 있었다.“이도윤, 내가 잘못했어.”“널 만난 게 내 가장 큰 잘못이야.”그녀는 자신을 너무 미워해서 삶의 희망마저 포기했다.양요한은 처음으로 이도윤의 얼굴에서 두려운 기색을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혈액보고서를 보았는데, 수치가 무엇 때문에 일반인보다 낮은 거지?”“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은...”양요한은 자신이 하려는 말을 멈추었다.암에 관한 약물치료 후, 각종 수치가 매우 빠르게 하락할 수 있었다. 비록 이 2년 동안 그는 소지아의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소지아의 몸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암에 걸릴 리가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이렇게 젊었고, 암 환자는 일반적으로 중년이고 노인이 많았다.이도윤의 현재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으니, 검사 없이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도윤의 심리적 부담을 더하면 안 됐다.“뭔데?”“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모님, 요즘 이상한 점 없었나요?”“얼마 전에 큰 병이 난적이 있었고, 팔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어.”“일부 세균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신체의 각종 수치가 하락했을 수도 있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또 찬물에 젖어서 재발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같습니다.”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도윤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이도윤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양요한은 한마디 덧붙였다.“사모님은 지금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서 반드시 잘 보호해야 해요. 감기에 걸리지 말고 다른 병에도 걸리지 말아야 해요. 제가 다시 약을 첨가해서 반드시 열을 먼저 내려보겠습니다.”이도윤은 천천히 두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응.”블린시트백채원은 이도윤이 아이를 소지아의 곁으로 데려가려는 것을 몰랐다. 이 아이는 갈수록 이도윤과 닮았으니 그가 그렇게 좋아할만 했다.그가 아이를 좋아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때 꿈이 바뀌더니 그녀의 주위는 더 이상 바닷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해바라기 밭이었다. 꽃밭에서 한 아이가 뛰면서 웃었다.“엄마, 나 잡아봐요.”“아가야, 내 아가야.”그녀는 마침내 그 아이를 쫓아가서 품에 안았다.“찾았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이번에 반드시 너를 잘 보호할 거야.”그녀가 아이를 뒤집어 보니 놀랍게도 이지윤의 통통한 얼굴이었다.그녀가 놀라기도 전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황급히 도망쳤고, 빗줄기는 그녀의 온몸을 적셨다.꿈을 꾸던 소지아가 놀라며 깨어났고 눈을 뜨니 통통하고 작은 얼굴을 보였고, 작은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며 곧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려 했다.이도윤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침을 받을 준비를 했고, 눈을 마주치자 무척 어색했다.이도윤은 줄곧 카리스마가 넘치는 대표였기에 손을 벌리고 아이의 침을 받는 대표님을 본 적이 있는가? 그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낯선 환경에 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꿈인가? 아니면 난 이미 죽은 건가? 너희가 꿈에 나타나다니.”이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물었다.“그렇게 죽고 싶어?”“그래, 죽으면 자유롭잖아.” 소지아는 이것이 꿈인 줄 알고 손을 뻗어 꼬마의 통통한 얼굴을 주물렀다. 촉감이 정말 좋았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이지윤은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이는 소지아를 좋아했다. 그래서 아니는 줄곧 소지아의 몸에 기어올랐고 중얼거렸다.“엄마, 엄마 포옹.”엄마라는 말에 소지아의 눈시울은 순식간에 붉어졌다.“너... 날 뭐라고 불렀어?”이도윤은 막지 않았다. 만약 소계훈조차도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면, 그녀는 새로운 희망이 필요했다.이걸로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아이가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왔다.“엄마, 뽀뽀.”이지윤은 간단한 단어만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아이는 백채원의 곁에 있을때는 단 한 번도 엄마라는 단어를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가정부와 있을 때, 백채원이 몇 번이나 가르쳤지만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