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누군가가 쫓아왔다. 비록 그 사람은 방수복을 입고 물안경을 쓰고 있어 오직 턱밖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연은 여전히 그 사람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장민호였다.지금 미연은 그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그는 도대체 무슨 사람인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다음 순간, 남자는 총을 들었는데, 정확하게 지아를 겨누었다.쓸데없는 말도 없었고, 심지어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아를 겨냥했던 것이다.이 순간, 장민호는 더 이상 미연이 알고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고, 그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악마와 같았다.온몸은 큰비에 젖었고, 그의 매끄러운 옷 표면에서 빗물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는데, 복도의 양털 카펫을 적셨다.장민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미연은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지아의 앞을 가로막았다.총알이 몸에 떨어지자, 지아의 귓가에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지아는 미연의 몸에서 피가 튄 것을 보았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몸은 천천히 땅에 쓰러졌다.“미연아!!”그리고 그녀에게 총을 쏜 그 남자는 멈출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마치 방금 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나 개 한 마리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것은 미연이었다! 그동안 줄곧 장민호를 사랑하며, 마음속에 온통 그로 가득한 미연이었다. 새빨간 피는 미연의 잠옷을 빨갛게 물들였고, 하얀 카펫까지 피로 물들였다.미연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장기 파손 때문에 피가 직접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내밀어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렵게 그 질문을 던졌다.“이, 이유가 뭐야?”그러나 남자는 심지어 미연과 말 한마디 더 하는 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했고, 그의 주의력은 온통 지아에게 있었다.지아는 허리를 구부리며 힘겹게 한 손으로 미연을 안았고, 그녀의 손가락도 피에 물들었다.“미연아, 괜찮아. 여기엔 의사가 있잖아. 이건 치명상이 아니니까 죽지 않을 거야.”“아가씨, 어, 어서 도망가세요!”장민호는 다
지아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온 별장에 울려 퍼졌다. 염경훈은 지아의 방에 뛰쳐든 남자를 해치우고 재빨리 달려왔지만 여전히 늦었다.그는 미연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의 심장도 따라서 저린 것 같았다.하지만 염경훈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자기 앞에 쓰러져도 그는 임무를 멈출 수 없었다.남자가 뜻밖에도 방탄복을 입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 염경훈은 바로 달려들어 장민호와 주먹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지아가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았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윙윙거렸고 눈앞은 온통 핏빛뿐이었다.미연의 몸은 지아의 곁에 힘없이 떨어졌고, 새빨간 피는 그녀의 손목에 있는 팔찌에 조금씩 스며들었다.그녀가 예쁘다고 했던 그 토끼 머리는 피로 물들어 미연과 함께 영원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지아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마구 흘렸다. 그녀는 손으로 피 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피는 여전히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미연아, 좀 버텨, 의사가 곧 올 거야.”“미연아, 죽지 마, 너 살아 있어야 돼, 잘 살아 있어야 한다고.”“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아이를 낳으면 네가 나 대신 아이들 돌봐줄 거라고. 그리고 우리 아직 세계 여행도 못 갔잖아.”“미연아…….”지아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손에 묻은 피가 얼굴에 묻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사모님,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이곳은 너무 위험해요!”귓가에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연밖에 없었다.“의사는? 빨리 의사 불러와!”“미연 씨는 이미 숨을 거두었어요, 사모님,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되니까 얼른 떠나세요.”점점 더 많은 킬러들이 상륙에 성공하자, 총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그 중 한 경호원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사모님, 죄송합니다.”그는 허리를 굽혀 지아를 안았다.“미연아…….”미연은 죽기 전에 마침 지아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지금 그녀의 두 눈은 뚫어지게 지아를 쳐다보았다.피는 지아의 눈앞을 흐리게
지아도 물론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방금 그런 일을 겪었으니 또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는가?노지혜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지아의 감정을 달랬고, 부드럽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은 이미 무사히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지금 사모님도 별일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이에요.”‘다행이라고?’그러나 방금, 지아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해 주던 친구를 잃었다.차는 아주 빠르게 달렸고, 이 속도로 십여 분 후면 산에서 내려와 순환 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큰비가 빽빽이 내렸고, 와이퍼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여전히 우르르 몰려드는 빗물을 깨끗이 닦을 수 없었다.산속은 안개가 심한 데다 비바람도 강하게 불어왔기에, 이런 악렬한 조건에서 운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모든 사람들은 심장이 조여왔고, 아이들은 이미 지아의 뱃속에서 한참 동안 소란을 피웠다.지아는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를 달랬고 훌쩍이며 말했다.“얘들아, 너희들 좀 얌전하게 있어, 떠들지 말고. 엄마가 있으니까, 너희들을 꼭 보호해 줄게.”지아의 끊임없는 설득에, 아이들은 마치 정말 알아들은 것처럼,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점차 조용해졌다.노지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사모님, 안심하세요. 이제 몇 분만 지나면 곧 하산할 거예요. 그때…….”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부신 전조등이 갑자기 그들을 비추더니, 거대한 트럭 한 대가 커브길에서 뛰쳐나왔다.지금 피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는데, 상대방은 진작에 이런 계획을 짰던 것이었다.앞뒤로 협공하여 소지아를 죽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미션이었다.노지혜는 이미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손으로 지아를 단단히 잡으며, 그녀가 어디도 다치지 못하게 했다.산길에서 긴급 브레이크 소리가 울렸는데, 이대로 부딪힌다면 지프차도 폐기될 것이다.설령 페기되지 않더라도 이런 거센 충돌에, 지아의 배는 기필코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럼 그녀는 그대로 아이를 잃을 것이다.그야말로 재난 그 자체였다.지금 지프차의 속도가 매우 빠른
이 말을 듣자 지아 뒤에 있던 노지혜까지 당황했다. “사모님, 농담하지 마세요.”“나 예전에 바다에서 조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같은 느낌이야.”“사모님, 저를 꼭 잡으세요.”염경호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재빨리 지아를 데리고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그는 힘을 대해 지아를 끌어올린 다음, 몸에서 비상등을 꺼냈다.지아는 물에 흠뻑 젖었는데, 바닷물인지 양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노지혜는 차가운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제가 상황을 좀 볼게요.”양수 외에 피까지 흘러나온 것을 보자, 노지혜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큰일이에요, 사모님. 양수가 터졌지만 피까지 흘리고 있어요.”양수만 터졌다면, 아이가 조산했다는 것이지만, 지금 피까지 흘리고 있었으니,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양막이 터지면서 가장자리에 있던 모세혈관도 파열되어 출혈이 생겼는지 아니면 아이에게서 피가 났는지.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일은 끝난 셈이었다.지아는 배가 너무 아팠고, 숨조차 쉴 힘없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노 의사, 내 아이 꼭 좀 살려줘.”노지혜는 그 절벽을 바라보았는데, 조산한 임산부를 데리고 올라갈 가능성은 정말 너무 희박했고, 그 위에 심지어 적까지 있었다.그녀들은 기다릴 수 있지만, 아이는 기다릴 수 없었기에 노지혜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할 수 없네요. 일단 안전한 장소로 옮기죠. 제가 지금 사모님의 출산을 도울게요.”염경호는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고, 마침내 약간 평탄한 암석을 발견했는데, 밖으로 나온 부분은 마침 비바람을 잘 막을 수 있었다.“사모님, 조금만 더 버티세요.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길게요.”말을 마치자 염경호가 지아를 안은 뒤, 그 암석 아래로 기어갔다.지아는 이미 통증에 휩싸였는데, 귓가의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뱃속의 통증은 온몸으로 번져 가슴이 찢어졌고, 그녀는 아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미 한 번 아이를 잃은 지아는 눈물투성이가 되었는데, 이런 고
지아는 이 말을 마친 다음 휴대전화를 한쪽에 던졌고 노지혜가 시키는대로 했다.“사모님, 지금 이런 조건에서 저는 사모님에게 수술을 해줄 수 없으니 사모님은 자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반드시 빨리 두 아이를 낳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두 아이는 모두 산소가 부족하여 죽을 거예요. 이제 힘을 주세요. 자궁문이 이미 열렸어요.”지아는 아이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양수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인지, 두 아이는 모두 그녀의 뱃속에서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아이들은 모래사장에 좌초된 물고기처럼, 그녀와 함께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얘들아, 너희들 꼭 견뎌내야 해. 이제 아빠가 곧 너희들을 데리러 올 거야. 괜찮아,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엄마가 있으니까, 절대로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너희들도 포기하지 마.”비록 지아는 이런 일을 이미 한 번 겪었지만, 다시 한번 마주하자, 그녀는 전보다 더욱 두려워하고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었다.지금 지아는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는데, 무서워서 그런지 아니면 몸이 너무 추워서 그런 건지 몰랐다.아마 지아처럼 이렇게 초라한 환경에서 출산하는 임산부는 없을 것이다. 지아는 이미 질식할 정도로 아팠다.전화기 맞은 편의 소리 역시 매우 시끄러웠지만, 도윤의 목소리는 줄곧 끊어지지 않았다.“지아야, 나 곧 도착할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지아야,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마!”“아이들은 괜찮을 거야, 너도 괜찮을 거고.”“지아야…….”지아는 이미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었다. 먼 곳의 염경호는 총알을 이미 다 썼지만, 위의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끊임없이 떨어졌다.‘누구일까?’‘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날 죽이고 싶은 것일까!’‘이렇게 많은 돈을 써가며 용병까지 구하다니, 상대방은 도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일까?’‘이예린일까?’그러나 지아는 마음속으로 이예린이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충은 독을 쓰길 좋아했기에,
“뭐, 뭐라고?”“아마 나올 때 질식해서 그런 거 같아요. 사모님, 괴로워하지 마세요. 6개월 넘은 아이는 무사히 태아나도 살아날 희망이 거의 없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모님의 건강이에요. 사모님은 이렇게 젊으시니 앞으로 또 아이가 생길 거예요.”“그럴 리 없어, 내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죽을 수가 있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하며 품은 아이들인데…….”“사모님, 킬러들이 곧 닥칠 거예요. 지금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해요.”“아니, 안 돼! 난 내 아이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노지혜는 그렇게 많은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받은 명령은 지아를 보호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아이들이었다.아이와 지아가 동시에 위험에 빠졌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지아를 보호해야 했다.“사모님, 죄송해요.”노지혜는 재빨리 지아를 등에 업었고, 지아는 외투 위에 버려진 숨소리조차 없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은 빗물에 섞여서 제멋대로 흘러내렸다.“싫어! 내 아이들 구할 거야!”노지혜는 지아를 업고 간신히 절벽에 올라갔는데, 그녀는 평소에 줄곧 훈련을 받았기에 일반인보다 신체적 자질이 훨씬 좋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아를 업고 있으니 노지혜는 매우 힘들었다.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는 데다, 뒤에 파도 소리까지 뒤섞였기에 그녀는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염경호에게 총 한 자루를 던져준 다음, 그들은 앞뒤로 지아를 보호하며 절벽에서 살아날 기회를 찾았다.7~8명의 킬러들은 잇달아 지아를 쫓아갔는데, 그 두 죽은 아이를 지날 때, 아무도 고개를 숙이고 보지 않았다.그들의 목표는 모두 지아였다.하지만 이때, 일행 중 맨 뒤에 있던 사람이 속도를 늦추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안았다.아이들은 큰비 속에서 조금의 온도도 없었고 온몸은 말랑말랑한 채 마치 버려진 유기견 같았다.그는 아이의 등을 두드렸고, 두 아이는 입에서 양수를 토해내더니,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남자는 자신의 방수복을 벗은 다음,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놓았고, 뜨거운 체온
“사모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대표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임무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희는 사모님을 보호할 수밖에 없어요!”“고마워. 이 몇 달 동안 줄곧 날 챙겨줘서.”이때 지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노지혜는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사모님,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마세요. 저희 꼭 무사히 이곳에서 탈출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탈출? 내가 또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지아는 고개를 들어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빗물이 차갑고 매정하게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사실 나도 알아, 우리 아빠에게 시일이 많지 않다는 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기계와 약물 때문이었고, 우리 아빠는 이미 살아갈 욕망 자체가 없었어.”“사모님…….”“예전에 내 친구가 그랬는데, 내가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발산하고 있다고 했어. 그러나 후에 내 빛은 조금씩 꺼지더니 결국 어둠이 날 삼켰고, 난 오랫동안 진흙탕에서 걸어야만 했어.”“그때 나는 넘어져도 마구 기어다니며 발버둥 쳤어. 난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운명 따위도 믿지 않았어. 설사 내 생명에서 미약한 빛이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난 소중히 간직했어.”“난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 빛을 간직하며,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만이지만, 왜 그들은 나의 친구,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것일까?”“사모님, 이것은 사모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은 그들이 했지.”하지만 지아는 이미 자신의 생각에 잠겨 눈빛이 망연해졌다.“아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들을 해쳤어.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거야. 나와 가까이한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질 테니, 노 의사, 나도 더 이상 당신들을 연루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제 날 내려놔.”노지혜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희가 어떻게 사모님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제가 살아있는 한,
지아는 어둠 속에 빠졌고, 혼자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아이들은 어딨지? 내 아이들.’지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빨리 아이들을 찾는 것.그녀는 지칠 줄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는데, 눈앞에 갑자기 빛이 나타나더니 그녀는 풀밭에 서 있었다.풀밭의 끝에는 무지개로 만든 다리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안개가 자욱했다.‘내 아이들이 저쪽에 있을까?’이때, 무지개다리의 건너편에 한 줄기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강미연이었다.미연은 그날 공항에 마중하러 간 치마를 입고 있었고 아주 예쁘게 단장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지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미연아!”지아는 속으로 기뻐해하며 즉시 무지개다리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발을 내디딘 순간, 귓가에 갑자기 두 아이의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엄마!”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깜찍한 두 아이를 보았다. 남자아이는 도윤처럼 생겼고, 여자아이는 그녀와 똑같이 생겼다.“얘들아, 엄마가 드디어 너희들을 찾았구나!”지아는 몸을 웅크리고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두 아이에게 닿았을 때, 손가락은 아이들의 몸을 곧장 통과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몸이 점차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럴 수가?”아이들이 바로 그녀 앞에 있지만, 지아는 오히려 그들을 안아주지 못했다.하지만 두 아이는 오히려 지아에게 미소를 지었고, 마치 하늘의 햇살처럼 찬란했다.“엄마,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해요!”말하면서 아이들은 손을 내밀어 지아를 밀었고, 그녀는 깊이가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떨어졌다.지아는 손을 뻗으며 눈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싫어! 미연아, 얘들아!”그리고 기나긴 어둠 속에서 지아의 몸은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이때 지아는 눈을 번쩍 떴다.“얘들아! 내 아이들.”“지아야, 드디어 깨어났구나.” 귓가에 도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이들도, 미연도 없었다.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