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염경훈은 몹시 억울했다. “제가 미연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미연 씨 눈에는 오직 그 사람밖에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 어떻게 제가 보이겠어요?”지아가 생각하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전에 이도윤을 사랑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백했지만, 지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심지어 고백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너무 슬퍼하지 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이제 더는 찾고 싶지 않아요.”“융통성이 없어.” 지아는 이마를 짚으며 어이가 없다고 느꼈다.‘어쩜 하나하나 고집이 이렇게 셀까?’“사모님,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저녁에 외출하지 마세요. 정원의 오솔길이 미끄러우니 넘어지실 수 있어요.”“음.”지아는 계속 국을 마셨고 뱃속의 아이도 지금 아주 활발했다. 그래서 지아는 방에서 잠시 산보하다 잠을 자려 했다.밤새 억수 같은 비가 내렸는데, 천둥까지 쳐서 지아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이튿날, 큰비가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아는 창가에 앉아 책을 볼 수밖에 없었다.“아가씨, 저 돌아왔어요.”미연은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손에 간식을 들고 달려와 지아에게 건네주었다.“호떡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특별히 사 왔어요.”“오랜만에 안 먹어서 너무 먹고 싶었거든.”지아는 먹으면서 물었다.“네 선배와는 어떻게 됐어?”미연은 수줍어하며 말했다.“어젯밤에 저에게 고백했어요. 이거 보세요, 이것은 선배가 저에게 준 팔찌인데, 외국에서 특별히 사람을 찾아 주문 제작한 거래요. 비록 비싸진 않지만, 나름 정성을 들였어요. 위에 저 닮은 귀여운 토끼까지 있어요, 예쁘죠?”미연이 팔찌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지아는 그녀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팔찌는 받을 수 있지만 너무 흥분해 하지 마. 내가 전에 한 말 꼭 명심하고.”“안심하세요, 아가씨. 저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선배는 제 집안 상
염경훈은 전화를 끊은 후, 지아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 몰랐다.‘설마 사모님께서 무슨 이상함이라도 발견하셨단 말인가?’그는 직접 감시실로 갔고, 별장은 산 중턱에 있어서, 길을 따라 카메라를 가득 설치했다.만약 차가 올라왔다면, 산기슭에서 발견되어 실시간으로 그들의 감시를 당할 것이다.이곳은 외지고 또 호화로운 별장이 있어, 일반인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는데, 가끔 몇몇 등산객들이 올라오더라도 절반쯤 올라왔을 때, 내려가라는 경고를 받곤 했다.그동안 그들 자신만이 차량으로 각종 필수품을 운송했기에 다른 사람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염경훈은 한참 동안 카메라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옮기더니, 맨 아래에 있는 몇 개의 카메라가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이 몇 개의 카메라는 절벽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절벽은 원래 가파른 데다가 요 며칠 수위가 위로 이동해서, 파도와 큰비 때문에 훼손당할 수도 있었다.낮에 절벽에서 올라오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오늘 밤처럼 이런 악렬한 날씨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산을 오르는 길에 수상한 사람과 차량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염경훈은 그제야 감시실을 떠났다.분명히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염경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이 무엇을 소홀히 했다고 느꼈다.‘도대체 무엇을 소홀히 한 걸까?’이때 염경훈의 머릿속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어제 자신과 처음 만난 장민호였다.두 사람은 만날 때만 악수를 했고, 그 후 미연은 바로 남자를 끌고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염경훈은 자신이 그의 눈에 거슬릴 것 같다는 생각에 바로 떠났다.염경훈은 이제야 그 남자의 힘이 센 데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미연은 그 선배가 외국에서 학술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평소에 컴퓨터와 펜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손에 온통 굳은살이 박힐 수 있을까?‘설마…….’염경훈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나와 마
지아는 이불로 머리를 덮고 있었는데, 창밖의 천둥소리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꽉 막으며 애써 잠들려고 했다.하지만 짜증날수록 잠들기 힘들었고, 심지어 지아는 자꾸만 등골이 오싹했다.머릿속에 누군가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빨리 도망가, 빨리!’‘도망가? 난 또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그리고 난 왜 도망 가야만 하는 것일까?’지아는 이미 염경훈에게 전화를 했고, 별장 주위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24시간 순찰하고 있었으니, 만약 정말 이상이 있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지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 지금 또 무슨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환청까지 생겼다니.’한참이나 몸을 뒤척였지만, 지아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반년 전, 전효가 자신에게 남겨준 그 총을 꺼냈다. ‘이거라면 액운을 막아줄 수 있겠지?’뱃속의 두 아이는 전에 들볶다가 지쳤는지 지금은 조용해졌다.바깥에는 천둥소리와 파도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지아는 창문이 반쯤 열린 것을 발견했고, 바람은 무거운 커튼을 흔들며 조금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지아는 일어나서 창문을 모두 닫으려 했는데, 이때 옆방에서 전해오는 비명소리를 들었다.‘미연이야!’‘무슨 일이지?’창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지아는 문 앞으로 달려갔고, 문을 여는 순간, 자신의 방에 있는 테라스에 완벽하게 무장한 낯선 남자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젠장, 이런 날씨에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절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니. 바다에 떨어지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바로 죽을 텐데!’지아는 도윤이 전에 말한 그 킬러 조직을 떠올렸다. 보아하니 누군가 큰 돈을 들여 그녀의 목숨을 원하는 것 같았다.지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선 후, 문을 세게 닫았다.복도에는 미연이 재빨리 달려왔고, 그녀는 그 문자를 본 순간,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그녀도 더 이상 사랑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미연은 아무리 어리석어도, 정상인
이때 누군가가 쫓아왔다. 비록 그 사람은 방수복을 입고 물안경을 쓰고 있어 오직 턱밖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연은 여전히 그 사람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장민호였다.지금 미연은 그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그는 도대체 무슨 사람인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다음 순간, 남자는 총을 들었는데, 정확하게 지아를 겨누었다.쓸데없는 말도 없었고, 심지어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아를 겨냥했던 것이다.이 순간, 장민호는 더 이상 미연이 알고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고, 그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악마와 같았다.온몸은 큰비에 젖었고, 그의 매끄러운 옷 표면에서 빗물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는데, 복도의 양털 카펫을 적셨다.장민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미연은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지아의 앞을 가로막았다.총알이 몸에 떨어지자, 지아의 귓가에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지아는 미연의 몸에서 피가 튄 것을 보았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몸은 천천히 땅에 쓰러졌다.“미연아!!”그리고 그녀에게 총을 쏜 그 남자는 멈출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마치 방금 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나 개 한 마리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것은 미연이었다! 그동안 줄곧 장민호를 사랑하며, 마음속에 온통 그로 가득한 미연이었다. 새빨간 피는 미연의 잠옷을 빨갛게 물들였고, 하얀 카펫까지 피로 물들였다.미연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장기 파손 때문에 피가 직접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내밀어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렵게 그 질문을 던졌다.“이, 이유가 뭐야?”그러나 남자는 심지어 미연과 말 한마디 더 하는 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했고, 그의 주의력은 온통 지아에게 있었다.지아는 허리를 구부리며 힘겹게 한 손으로 미연을 안았고, 그녀의 손가락도 피에 물들었다.“미연아, 괜찮아. 여기엔 의사가 있잖아. 이건 치명상이 아니니까 죽지 않을 거야.”“아가씨, 어, 어서 도망가세요!”장민호는 다
지아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온 별장에 울려 퍼졌다. 염경훈은 지아의 방에 뛰쳐든 남자를 해치우고 재빨리 달려왔지만 여전히 늦었다.그는 미연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의 심장도 따라서 저린 것 같았다.하지만 염경훈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자기 앞에 쓰러져도 그는 임무를 멈출 수 없었다.남자가 뜻밖에도 방탄복을 입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 염경훈은 바로 달려들어 장민호와 주먹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지아가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았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윙윙거렸고 눈앞은 온통 핏빛뿐이었다.미연의 몸은 지아의 곁에 힘없이 떨어졌고, 새빨간 피는 그녀의 손목에 있는 팔찌에 조금씩 스며들었다.그녀가 예쁘다고 했던 그 토끼 머리는 피로 물들어 미연과 함께 영원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지아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마구 흘렸다. 그녀는 손으로 피 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피는 여전히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미연아, 좀 버텨, 의사가 곧 올 거야.”“미연아, 죽지 마, 너 살아 있어야 돼, 잘 살아 있어야 한다고.”“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아이를 낳으면 네가 나 대신 아이들 돌봐줄 거라고. 그리고 우리 아직 세계 여행도 못 갔잖아.”“미연아…….”지아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손에 묻은 피가 얼굴에 묻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사모님,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이곳은 너무 위험해요!”귓가에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연밖에 없었다.“의사는? 빨리 의사 불러와!”“미연 씨는 이미 숨을 거두었어요, 사모님,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되니까 얼른 떠나세요.”점점 더 많은 킬러들이 상륙에 성공하자, 총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그 중 한 경호원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사모님, 죄송합니다.”그는 허리를 굽혀 지아를 안았다.“미연아…….”미연은 죽기 전에 마침 지아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지금 그녀의 두 눈은 뚫어지게 지아를 쳐다보았다.피는 지아의 눈앞을 흐리게
지아도 물론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방금 그런 일을 겪었으니 또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는가?노지혜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지아의 감정을 달랬고, 부드럽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은 이미 무사히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지금 사모님도 별일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이에요.”‘다행이라고?’그러나 방금, 지아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해 주던 친구를 잃었다.차는 아주 빠르게 달렸고, 이 속도로 십여 분 후면 산에서 내려와 순환 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큰비가 빽빽이 내렸고, 와이퍼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여전히 우르르 몰려드는 빗물을 깨끗이 닦을 수 없었다.산속은 안개가 심한 데다 비바람도 강하게 불어왔기에, 이런 악렬한 조건에서 운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모든 사람들은 심장이 조여왔고, 아이들은 이미 지아의 뱃속에서 한참 동안 소란을 피웠다.지아는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를 달랬고 훌쩍이며 말했다.“얘들아, 너희들 좀 얌전하게 있어, 떠들지 말고. 엄마가 있으니까, 너희들을 꼭 보호해 줄게.”지아의 끊임없는 설득에, 아이들은 마치 정말 알아들은 것처럼,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점차 조용해졌다.노지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사모님, 안심하세요. 이제 몇 분만 지나면 곧 하산할 거예요. 그때…….”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부신 전조등이 갑자기 그들을 비추더니, 거대한 트럭 한 대가 커브길에서 뛰쳐나왔다.지금 피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는데, 상대방은 진작에 이런 계획을 짰던 것이었다.앞뒤로 협공하여 소지아를 죽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미션이었다.노지혜는 이미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손으로 지아를 단단히 잡으며, 그녀가 어디도 다치지 못하게 했다.산길에서 긴급 브레이크 소리가 울렸는데, 이대로 부딪힌다면 지프차도 폐기될 것이다.설령 페기되지 않더라도 이런 거센 충돌에, 지아의 배는 기필코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럼 그녀는 그대로 아이를 잃을 것이다.그야말로 재난 그 자체였다.지금 지프차의 속도가 매우 빠른
이 말을 듣자 지아 뒤에 있던 노지혜까지 당황했다. “사모님, 농담하지 마세요.”“나 예전에 바다에서 조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같은 느낌이야.”“사모님, 저를 꼭 잡으세요.”염경호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재빨리 지아를 데리고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그는 힘을 대해 지아를 끌어올린 다음, 몸에서 비상등을 꺼냈다.지아는 물에 흠뻑 젖었는데, 바닷물인지 양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노지혜는 차가운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제가 상황을 좀 볼게요.”양수 외에 피까지 흘러나온 것을 보자, 노지혜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큰일이에요, 사모님. 양수가 터졌지만 피까지 흘리고 있어요.”양수만 터졌다면, 아이가 조산했다는 것이지만, 지금 피까지 흘리고 있었으니,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양막이 터지면서 가장자리에 있던 모세혈관도 파열되어 출혈이 생겼는지 아니면 아이에게서 피가 났는지.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일은 끝난 셈이었다.지아는 배가 너무 아팠고, 숨조차 쉴 힘없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노 의사, 내 아이 꼭 좀 살려줘.”노지혜는 그 절벽을 바라보았는데, 조산한 임산부를 데리고 올라갈 가능성은 정말 너무 희박했고, 그 위에 심지어 적까지 있었다.그녀들은 기다릴 수 있지만, 아이는 기다릴 수 없었기에 노지혜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할 수 없네요. 일단 안전한 장소로 옮기죠. 제가 지금 사모님의 출산을 도울게요.”염경호는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고, 마침내 약간 평탄한 암석을 발견했는데, 밖으로 나온 부분은 마침 비바람을 잘 막을 수 있었다.“사모님, 조금만 더 버티세요.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길게요.”말을 마치자 염경호가 지아를 안은 뒤, 그 암석 아래로 기어갔다.지아는 이미 통증에 휩싸였는데, 귓가의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뱃속의 통증은 온몸으로 번져 가슴이 찢어졌고, 그녀는 아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미 한 번 아이를 잃은 지아는 눈물투성이가 되었는데, 이런 고
지아는 이 말을 마친 다음 휴대전화를 한쪽에 던졌고 노지혜가 시키는대로 했다.“사모님, 지금 이런 조건에서 저는 사모님에게 수술을 해줄 수 없으니 사모님은 자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반드시 빨리 두 아이를 낳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두 아이는 모두 산소가 부족하여 죽을 거예요. 이제 힘을 주세요. 자궁문이 이미 열렸어요.”지아는 아이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양수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인지, 두 아이는 모두 그녀의 뱃속에서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아이들은 모래사장에 좌초된 물고기처럼, 그녀와 함께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얘들아, 너희들 꼭 견뎌내야 해. 이제 아빠가 곧 너희들을 데리러 올 거야. 괜찮아,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엄마가 있으니까, 절대로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너희들도 포기하지 마.”비록 지아는 이런 일을 이미 한 번 겪었지만, 다시 한번 마주하자, 그녀는 전보다 더욱 두려워하고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었다.지금 지아는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는데, 무서워서 그런지 아니면 몸이 너무 추워서 그런 건지 몰랐다.아마 지아처럼 이렇게 초라한 환경에서 출산하는 임산부는 없을 것이다. 지아는 이미 질식할 정도로 아팠다.전화기 맞은 편의 소리 역시 매우 시끄러웠지만, 도윤의 목소리는 줄곧 끊어지지 않았다.“지아야, 나 곧 도착할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지아야,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마!”“아이들은 괜찮을 거야, 너도 괜찮을 거고.”“지아야…….”지아는 이미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었다. 먼 곳의 염경호는 총알을 이미 다 썼지만, 위의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끊임없이 떨어졌다.‘누구일까?’‘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날 죽이고 싶은 것일까!’‘이렇게 많은 돈을 써가며 용병까지 구하다니, 상대방은 도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일까?’‘이예린일까?’그러나 지아는 마음속으로 이예린이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충은 독을 쓰길 좋아했기에,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