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계훈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도윤을 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백정일과 변진희도 아직 참석하지 않았다.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백정일에게는 딸이 하나밖에 없었다.‘그 사람은 자신의 외동딸이 결혼을 하는데 왜 아직도 오지 않은 거지?’오히려 백씨 집안의 어르신은 무청 늙어 보였고 얼굴에는 기쁨이 조금도 없었다.몇 바퀴를 돌자 소계훈은 좀 힘이 들었다. 그는 잠시 쉴 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옆의 레저 구역에서 전해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채원 언니, 소지아가 정말 올까요?”소지아란 세 글자는 소계훈의 주의를 끌었고, 그는 그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웨딩드레스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백채원을 발견했다. 그녀는 문 앞에 걸어둔 거대한 사진 속의 여자와 똑같았다.‘이 아이가 바로 도윤과 결혼하려는 사람인가?’소계훈을 놀라게 한 것은 백채원이 뜻밖에도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전에 머릿속에 내연녀 등 좋지 않은 말들이 많이 떠올랐지만, 백채원이 장애인인 것을 보고 그는 마음속의 분노가 좀 줄어들었다. ‘어쩌면 이 일이 내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 이 속에 무슨 오해라도 있는 건가?’소계훈은 자신보다 어린 여자아이를 귀찮게 할 리가 없었기에, 그는 여전히 도윤이 나타난 후 똑똑히 물어보려 했다.백채원의 안색은 너무나도 안 좋았는데, 지아를 언급하자, 그녀는 더욱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소지아가 오든 안 오든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어. 앞으로 내가 바로 명실상부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니까.”“그래요, 소지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죠.” 여금청은 이제 많이 똑똑해졌는데, 백채원 앞에서 더 이상 지아를 심하게 의논하지 못했다.백채원은 부모님이 죽은 후 성격이 크게 변했고. 그녀는 휠체어 손잡이를 꽉 잡으며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천한 년, 이혼하고도 도윤 씨를 꼬시다니. 난 절대로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채원 언니, 어쨌든 지금 대표님과 결혼할 사람은 언니지 소지아가 아니잖아요. 그럼 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소계훈의 머릿속에서 터졌고, 그는 그저 자신의 호흡이 곤란하다고 느끼며 온몸의 피가 굳은 것 같았다.그의 얼굴은 유난히 보기 창백해졌는데, 몸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고, 심지어 너무 흥분해서 백채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너희 엄마가 어떻게 죽은 거지?”백채원은 남이 자기 앞에서 변진희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변진희를 죽인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우리 엄마가 어떻게 죽은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디서 온 촌놈이, 더 이상 꺼지지 않으면 경호원 부를게요.”백채원은 소계훈의 충격과 고통,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복잡한 표정을 바라보았다.‘설마 우리 엄마의 옛 친구인가?’이렇게 생각하니, 백채원도 소계훈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됐어요, 오늘은 내가 결혼하는 날이니, 아저씨도 그냥 여기 남아서 식사하고 가요.”여금청은 소계훈을 흘겨보았다.“빨리 꺼지지 못 해? 자신이 옷 입은 꼴을 좀 봐, 여기가 당신이 올 수 있는 곳이야? 우리 채원 언니 웨딩드레스나 더럽히지 마.”소계훈은 변진희가 죽었다는 고통에 휩싸여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백채원은 그가 온몸을 떨며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바로 이때, 주은청이 두 아이를 데리고 걸어왔고, 채나는 달콤하게 외쳤다.“엄마.”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이를 보자, 백채원은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지윤을 바라보았다.‘그동안 줄곧 보지 못했으니, 지윤도 이제 날 엄마라고 부르겠지?’하지만 지윤은 단지 백채원을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도윤과 닮은 그 작은 얼굴은 심지어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소계훈도 당연히 지윤을 보았다.“이 아이가 네 아들인가?”여금청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사람 말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아이의 얼굴을 보자 소계훈은 그제야 깨달았다.“너와 도윤의 아이구나, 그렇지?”“뭘 그렇게 중얼거
이 말은 소계훈을 붕괴하게 만들었고, 줄곧 흔들리던 그의 몸은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세게 민 것 같았다.소계훈은 혈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이를 본 여금청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아,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면 뭐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경비원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이 사람을 쫓아내지 못해!”백채원은 여금청을 호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윤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소계훈의 몸을 부축했다.“아버님, 괜찮으세요? 진 비서, 빨리 아버님을 병원으로 모셔!”소계훈은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신랑 예복을 입은 것을 보고 더욱 화가 나서 눈이 새빨개졌다.지금의 소계훈은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화가 나서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우, 우리 집 파산하게 된 거, 자, 자네가 한 짓인가?”소계훈은 자신이 줄곧 좋아했던 사위가 자신의 집안을 망친 범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비록 그때의 일은 무척 수상했지만, 소계훈은 지금까지 도윤을 의심한 적이 없었고, 그저 자신이 전에 미움을 샀던 비즈니스 파트너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버님, 아따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돌아가?”소계훈은 차갑게 웃으며 지윤을 가리켰다.“이 아이도 자네 아들인가?”옆에 있던 여금청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물론이죠, 이 대표님과 똑 닮았으니 누가 봐도 대표님의 아들이잖아요.”소계훈은 손을 떨며 도윤의 얼굴을 향해 뺨을 내리쳤다. 비록 아무런 힘도 없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내 딸이 자네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자네 어떻게 지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그리고 자네 그때 어떻게 나에게 맹세했지? 이 양심도 없는 놈아! 내가 정말 눈이 없어서 내 딸을 자네 같은 사람에게 시집보냈구나! 우리 집안이 자네한테 못해준 게 뭐가 있다고!
소계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지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비명을 지르며 따라서 기절했다.“지아야!”도윤은 즉시 지아를 품에 안았고, 진환은 소계훈을 등에 업은 채 재빨리 떠났다.백채원도 이 갑작스러운 일들 때문에 어리둥절해졌는데,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도윤이 지아를 안고 훌쩍 떠나는 것을 보고, 그녀는 울부짖으며 뒤에서 외쳤다.“이도윤! 곧 결혼식이 시작할 거라고요!”백채원은 다급한 마음에 도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불편한 다리와 무턱대고 일어선 결과, 그녀는 바닥에 세게 쓰러졌다.아무리 진귀한 웨딩드레스라도 지금의 백채원은 낭패를 감출 수 없었고, 더욱이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말리지 못했다.여금청은 그제야 자신이 엄청난 사고를 쳤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는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린 백채원을 일으켜 세웠다.“채원 언니, 괜찮아요?”그러나 백채원은 오히려 힘껏 그녀의 뺨을 때렸다.“미친 년!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여금청은 이번엔 그야말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고, 그녀는 당황해진 채 설명했다.“채원 언니, 미안해요. 나는 단지, 단지…….”백채원은 그녀의 옷깃을 확 잡아당기더니 가슴 앞에 있는 레이스를 구겼다.“내가 만약 오늘 결혼하지 못한다면, 너 정말 끝났어!”여금청은 털썩 주저앉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병원에서.소계훈과 지아는 각각 응급실로 실려갔다.곧 지아의 진단 결과가 나왔지만, 소계훈은 다시 수술실로 밀려났다.양요한은 도윤을 말렸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에게 큰 문제는 없고, 다만 너무 놀라서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을 뿐이에요. 아이도 아주 건강하고요.”도윤은 피곤해진 미간을 쥐었다.“내가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아버님이야. 아버님의 몸은 너무 취약해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지아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소계훈에게 무슨 일 생긴다면, 지아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바로 이때, 수술실에서 의사 한 명이 걸어 나왔
“아빠, 떠나면 안 돼요. 떠나면 나중에 누가 날 보호해 주겠어요? 그들은 어렸을 때처럼 날 괴롭힐 거예요.”“불쌍한 내 딸.”지아는 최선을 다해 소계훈을 설득했다.“아빠, 아직 내 아이가 태어나는 거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이대로 떠날 수 있겠어요? 나 혼자 이 세상에 남아 고생하는 거 보고 싶은 거예요? 아이에게 이미 아빠가 없는데, 이제 외할아버지까지 없게 만들려고요?”소계훈의 표정이 좀 변했고, 그는 지아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지아야, 내가 가장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게 바로 너야.”지아는 힘껏 그의 손을 잡았다.“그러니까 가지 마요. 아이에게 외할아버지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아빠, 나도 아빠가 힘들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만약 아빠가 떠난다면, 나는 이 세상에 의지할 가족이 더 이상 없을 거예요.”소계훈은 대답하지 않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랐다. 지아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소계훈 앞에 무릎을 꿇었다.“난 이미 엄마를 잃었으니 더 이상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아요. 아빠, 아빠는 나를 제일로 귀여워하셨잖아요? 그러니 가지 마요, 네?”소계훈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그래, 아빠는 어디도 가지 않을게.”“아빠!”지아는 갑자기 눈을 뜨며 꿈에서 깨어났고 도윤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아야, 좀 어때? 어디 아픈 데 없어?”지아는 그를 상대하기가 귀찮았다. “우리 아빠는? 어떻게 됐어?”바로 이때 진봉이 재빨리 달려왔다.“좋은 소식이에요, 방금 어르신께서 생존 의지가 나타났어요.”지아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아빠 지금 어디에 있어?”“중환자실에요, 방금 한차례의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다행히 어르신은 갑자기 생존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의사는 매우 순조롭게 응급처치를 진행했어요. 그러나 아직은 방문하면 안 돼서, 사모님은 밖에서 바라보실 수밖에 없어요.”“응, 난 한 번만 볼게, 딱 한 번만.”지아는 중환자실로 달려가 유리를 사이에 두고 혼수
도윤은 지아의 명령에 따라 재빨리 먹을 것을 가져왔고, 지아는 따뜻한 물을 마신 다음 또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울렁이는 느낌이 사라졌다.그녀가 좀 나아진 것을 보고 도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배가 아픈 거야? 우리 검사하러 가자. 너 아직 임신한지 3개월도 안 됐어. 내가 아무리 미워도 지금은 아이를 생각해야지.”지아는 도윤을 상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금방 달려온 백채원이 이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다.“당, 당신들 나 몰래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서 울렸다.지아는 원래 엄청 피곤했는데, 백채원이 이렇게 떠들자, 그녀는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렸다.“여기 병원이니까 좀 조용히 해.”“천한 년이 감히 내 남편을 꼬셔? 이게 죽으려고!”백채원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소계훈을 보러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폭발적인 비밀을 들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부랴부랴 일어나려 했지만 또다시 심하게 넘어졌다.도윤은 이 상황을 보고 백채원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부축했는데, 백채원은 이 기회를 틈타 도윤의 품에 쓰러지더니 눈물을 흘렸다.“도윤 씨, 나랑 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지아는 본래 답답한 마음이 더욱 나빠졌고, 두 사람이 여기서 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자리를 떠났다.“가긴 어딜 가려는 거야? 내 남자 꼬실 땐 언제고, 이젠 오히려 도망치려는 거야?”지아는 백채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이때 도윤은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만해,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백채원은 도윤의 몸에서 나는 싸늘한 기운에 겁을 먹고 얼른 코를 훌쩍이며 울부짖는 것까지 멈추었다.그리고 그녀는 순식간에 불쌍한 모습을 드러내며 억울하게 말했다.“오늘은 우리의 결혼식인데, 당신은 오히려 손님들 앞에서 소지아를 안고 떠났으니 나와 우리 집안을 완전히 무시한 거잖아요!”“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었어.”도윤은 백채원을
“네가 아버님의 친딸이라고? 그럼 지아의 부모님은?”도윤은 일련의 질문을 던졌고 백채원은 그가 지아를 언급한 것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야 난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물론 지금은 지아의 정체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소계훈이 그녀의 아버지든 아니든 지아는 마음속으로 소계훈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 여겼다.“그럼 아버님이 네 아버지라는 것을 안 이상,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아버님은 전에 이미 머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백채원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나 정말 몰랐다니까요! 그동안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데다 난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난 아빠를 찾으려 했지만, 식물인간이 된 후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밖에 없었고요. 비록 사진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때의 아빠는 지금과 너무 달랐으니 나도 즉시 알아보지 못했어요. 도윤 씨,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난 이미 우리 엄마를 죽였으니 또 어떻게 내 친아버지를 해치겠어요.”도윤은 백채원이 슬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네가 사람 시켜 청첩장을 보냈으니, 이건 네가 받아야할 벌이지.”“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뭔데요? 분명히 나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자구 소지아와 끊임없이 얽히는 거죠?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한 거냐고요? 당신 마음속에 내가 있긴 한 거예요?”백채원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도윤은 싸늘하게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내 마음속에 네가 있을 거 같아?”이것은 백채원이 스스로 모욕을 자초한 것과 다름없었다.도윤은 그녀를 휠체어에 잘 앉힌 다음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가볍게 말했다.“백채원,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지. 전림을 봐서 사모님의 자리는 너에게 줄 수 있지만 얌전하게 있는 게 좋을 거라고. 내 마음속에 있어 넌 영원히 내 형수고, 난 평생 너를 사랑할 리가 없어. 다음 생은 더더욱 그럴 리가 없을 것이고! 넌 나의 감정
지아는 의사로부터 소계훈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일시에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몰랐다.소계훈이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심각한 것은 그가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지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과 뱃속의 아이가 소계훈을 이 세상에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소계훈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도윤은 성큼성큼 들어왔고, 길쭉한 그림자가 지아를 뒤덮었다.“지아야.”도윤을 보자 지아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는 더욱 숨길 수 없는 원한을 드러냈다.“또 뭘 하러 왔어?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거야?”전에 도윤을 바라보던 눈동자에는 사랑이 넘쳐흘렀지만 지금은 오직 경멸과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도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지난날 지아가 자신을 깊이 사랑했을 때의 귀여운 모습뿐이었다. 그렇게 알콩달콩한 두 사람은 어떻게 오늘의 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지금의 지아는 도윤을 한 번만 봐도 싫증이 났다.도윤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지아야, 내가 네 친부모님 찾아줄게.”그는 지아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지아가 자신을 상대하게끔 하려면 오직 이런 방식뿐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미 몸을 돌린 지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다.“뭐라고?”“난 방금 백채원이 소씨 집안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수수께끼로 뒤덮인 자신의 정체를 언급하자, 지아는 그제야 입을 열어 도윤과 말을 했다.“헛수고할 필요 없어. 정일 아저씨가 살아있을 때, 이미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그때의 그 산후조리원은 이미 화재로 잿더미로 됐고 사장님조차도 목숨을 잃었으니 조사하려 해도 아무런 방법이 없어.”“하지만 이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지아의 눈빛이 반짝였다.“진수련 말하는 거야?”“응, 진수련은 이 모든 일을 시작했으니 그 여자보다 네 친부모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하지만 그 여자는 쉽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야. 난 아빠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