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 너 남의 손에서 공주님 대접받을 때, 우리 예린이 얼마나 비참하게 지냈는지 아니? 직접 그녀가 살았던 시골에 가 본 적이 있어. 그곳은 황량하고 척박해서 대다수 사람들은 3일 동안 배불리 밥을 먹지 못했어. 듣자니 다른 사람 손에 거기로 팔려 갔다더라. 어릴 때부터 개처럼 땔나무집에 갇혔다고. 우리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공주였지만, 그곳에 가서 남의 시중을 들어야 하다니. 수년간 고생해서 가까스로 A시에 왔는데, 조금만 더 버텼으면 내가 찾을 수 있었는데!”소지아는 그에게 꼬집혀 말을 하지 못하고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손으로 이도윤을 밀었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이성을 깨우려고 시도했다.그러나 이도윤은 슬픈 추억에 잠겼다.“그녀는 소계훈 그 짐승 같은 자식에게 모욕을 당하고 또 그에 의해 목이 졸려 살해된 다음 상자에 구겨 넣어졌어. 그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봐, 너도 지금 예린이의 고통을 조금 느낄 수 있지 않니?“손... 놔!” 소지아는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이도윤의 두 눈은 마치 이성을 잃은 야수처럼 새빨갰다.소지아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고, 이대로 가다 기필코 그에게 산 채로 목 졸라 죽을 것이란 것을 알고 계속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다.“소지아, 나는 분명히 너를 가만두려고 했지만 너 자신이 쳐들어오려고 한 거야.”이도윤의 표정은 갈수록 일그러졌고 두 눈은 초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지아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함께 예린이 만나러 하자. 그녀 혼자 아래에 있으면 틀림없이 두려워할 거야. 죽으면 이렇게 많은 고통도 없겠지.”그가 이런 말을 하자 소지아는 이도윤이 완전히 미쳤다고 느꼈다. 발버둥 치던 중, 이도윤은 그녀의 어젯밤에야 봉합한 상처를 건드렸고, 상처가 찢어지더니 새빨간 피가 그녀의 흰색 실크 잠옷에서 스며나왔다.새빨간 피는 이도윤의 눈은 붉게 물들였고,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소지아는 땅에 쓰러졌는데, 이도윤이 그녀의 상처를 보려고 하자, 소지아는 즉시 뒤로 물러나 경계하
소지아는 이도윤이 여동생의 죽음을 겪은 후, 큰 타격을 받아 심리적으로 점점 비뚤어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방금 그 순간, 그는 정말 그녀를 죽이고 다시 그녀와 함께 예린을 찾아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김민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 또 등불이 길을 비추었고, 차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었다.이도윤은 예리한 사람이었기, 그는 틀림없이 그녀가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차 문이 열리자 남자는 총총히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마치 무엇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곧 그는 자신의 방향으로 걸어왔는데, 소지아는 멍하니 제자리에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못했고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소지아는 놀라서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그녀는 이도윤이 자신을 찾으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몰랐다. 그녀를 죽여 이예린의 죽음을 갚으라고 하지 않을까?예전의 애인이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오늘, 소지아는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그의 발자국 소리에 따라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남자의 구두는 쌓인 눈을 밟고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마치 생명을 재촉하는 소리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소지아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두 사람 사이에는 백 년 넘은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지만, 이때, 이도윤은 멈추었다.몇 초를 기다렸는데, 그녀는 남자가 떠나는 소리만 들었을 뿐, 그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지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곁에 몇 방울의 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새하얀 눈 아래에서 유난히 선명해 보였기 때문에, 이도윤은 또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까?그가 짧게 멈춘 몇 초 동안, 소지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그는 자신을 놓아주었다.소지아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달빛 아래 남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남자의 주위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다.그녀는 갑자기
김민아는 중얼거렸다.“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젊은 나이에 귀가 먹었다니. 하하하, 나 방금 네가 위암이라고 말한 줄 알았어. 틀림없이 그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소지아는 손으로 김민아의 손등을 잡고 가볍게 말했다.“민아야, 현실을 직시해.”김민아는 동작을 멈추고 눈물로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농담하는 거지?”그러나 소지아의 눈빛은 비할 데 없이 진지했다.“내가 여태껏 농담하는 거 본 적 있어? 지난번에 내가 단발머리를 자르려는 이유도 약물치료 때문이었어.”줄곧 눈시울을 맴돌던 눈물이 흘러내리더니 김민아는 소지아의 손을 잡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오진이지, 틀림없이 오진이야! 너 이렇게 젊고, 몸도 튼튼한데, 어떻게 이런 병에 걸릴 수 있니!”소청아는 그녀를 부축하여 앉히고 일의 경과를 한번 말했다.김민아는 이미 눈물을 글썽였고, 줄곧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암이 가까운 사람에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았다.“괜, 괜찮아. 지금 의료 수준이 아주 발달해서 의사의 치료에 협조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김민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마구 닦았다.“미안. 나는 너에게 이런 일 있었는지도 몰랐어. 앞으로 나랑 함께 약물치료 다니자. 나도 지금 돈이 좀 있으니까 일 년 정도 출근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네 병 고칠 거야.”소지아는 고개를 살며시 흔들며 허무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민아야, 나랑 오로라 보러 가자...”“좋아, 네가 좋아지면 오로라는 무슨 하늘의 별도 내가 다 따줄게.”“예전에도 누군가 나에게 별을 따 줄 수 있다고 말했어.”김민아는 소지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다.“이 빌어먹을, 그 자식은 너를 버렸는데, 너는 왜 아직도 그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라면 몸 조리 잘 마친 한 후 수십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질투하게 할 거야.”“민아야, 이 일은 그를 탓할 수 없어, 그 사람도 아파.”“그도 위암이야? 말기였으면 좋겠네
김민아는 의대생으로서 약물치료의 부작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지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암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 부작용으로 사망했는데,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그녀는 이기적으로 소지아에게 모든 것을 겪으라고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은 소지아의 생명을 더 재촉할 뿐이었다.김민아는 뒤에서 소지아의 허리를 껴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래, 같이 있어줄게.”눈물이 소지아의 잠옷을 조금씩 적셨다.“그동안 너 많이 아팠겠지? 미안해, 난 아무것도 몰랐어.”“요 며칠 많이 좋아졌어, 민아야, 고마워, 나 혼자 외롭게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원래 이도윤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아마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닐 거야.”이도윤을 언급하자 김민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아야, 너 그의 여동생의 무덤이 다른 사람에게 마구 파괴되었다고 말했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네가 망치를 들고 있는 장면을 찍었고, 누군가가 고의로 너를 모함한 게 아닐까?”“백채원을 제외하고는 그럴 만한 다른 사람이 없어.”소지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도윤이 금방 한 달 동안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는 틀림없이 백채원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그녀인 줄 알면서도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작년부터 지금까지 백채원은 많은 방법을 써서 나와 이도윤이 이혼하길 원했어.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그 수단은 너무 저질이었지. 이도윤은 이런 작은 속임수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매번 백채원의 편에 섰어. 처음에 나는 그들과 도리를 따지다가 나중에야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 이도윤의 사랑이 제일 중요한 거야.”김민아는 소지아가 의기소침한 것을 보고 계속 그녀의 투지를 일깨웠다.“그러나 이번엔 달라. 만약 정말 그녀가 이예린의 무덤을 파괴했다면 설사 네가 이혼하려 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못살게 해줘야지.”“민아야, 나와 이도윤 사이의 문제는 백
그러나 모든 말은 결국 간단한 한마디밖에 되지 못했다.“가자.”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전의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고, 준비가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두 사람은 곧 이혼신고를 마쳤다.처음부터 끝까지 소지아는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서명을 마친 다음 바로 몸을 돌려 가버리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도윤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지?”소지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그녀의 어깨에 떨어지자 이도윤은 바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위해 털어내려고 했지만, 손가락은 멍하니 허공에 멈칫했다.지금의 그는 또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건드리겠는가?그가 그녀를 놓아준 것은 단지 이 일에 철저히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이다.그 찬란한 햇빛을 보면서 이도윤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한 그날 역시 이런 날씨 좋은 날이었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흰 치마를 입고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넘쳤다.“우리 다신 여기 올 일 없겠지?”“응, 평생 그럴 일 없을 거야.”“그럼 너 만약 날 배신하면 어떡해?”“그럼 넌 나 죽여. 죽은 사람은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 자신의 진지한 표정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그가 그 말을 한지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소지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도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눈밭을 걸었다.그녀는 이별할 때 그렇게 너무 못난 모습 보이지 말라고 자신에게 거듭 말했다.오늘이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르니, 그녀는 지금부터 이 남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몇 걸음 가자마자 뒤에서 백채원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 씨, 마침내 소원 이루어진 것을 축하해요.”소원이 이루어져?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자신이 일 년 동안 꽉 잡고 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진작에 자신의 아이가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에 이혼했을 것이다.이도윤이 대답하지 않자 백채원은
이혼 후의 생활은 소지아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김민아는 그녀와 함께 집에서 며칠 쉬었고, 하루 세끼 밥을 챙겨 먹으며 몸을 보살폈다. 그리하여 소지아의 안색도 눈에 띄게 점차 회복되었다.약물치료가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점점 적어지고 있었다. 비록 예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걸핏하면 쓰러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팔뚝의 상처는 다시 딱지가 앉았고 요즘 그녀의 머리카락도 그렇게 심하게 빠지지 않아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김민아도 진심으로 그녀를 위해 기뻐했다. 요 며칠간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잤고 더는 아기 침대에 웅크리지 않았다. 김민아는 소지아가 천천히 걸어나올 것이라고 믿었다.그녀의 몸이 잘 회복된 것을 보고 김민아는 제안했다.“반장이 동창회를 조직했는데, 어차피 별일도 없으니까 우리 같이 가자.“난...”소지아가 거절하려고 하자 김민아는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의 동창들 대부분 사업이 성사되었는데, 너도 좀 더 좋은 내과 의사를 찾고 싶지 않아? 동창들 중 누군가가 마침 이 방면의 인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잖아.”“게다가 너는 매일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시간을 집에 낭비해서는 안 되지. 나가서 사람들 만나보는 것도 좋아.”소지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나타난 것을 보고 김민아는 즉시 소지아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소지아는 재벌2세였을 뿐만 아니라 교수님조차 아끼는 전도유망한 좋은 학생이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학우들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했다. 소씨 집안은 파산했고, 학업도 마치지 못하고 휴학했다.“넌 낯가죽이 너무 얇아. 내가 의대생이란 이름 버리고 매일 건물을 팔아 매출 1위의 직원이 됐는데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걸. 근데 넌 뭘 무서워하는 거야? 어쨌든 너도 2000억 가진 부자잖아, 아, 아니다, 그 남자 너에게 회사 주식까지 줬지?”이혼 합의서에는 많은 조항이 있었는데, 경제면에서 이도윤은 확실히 통이 컸다. 비록 그의 절반의
슬픈 분위기가 다시 엄습하자 김민아는 노발대발했다.“그럼 죽은 사람은 왜 백채원 그 년이 아닌 거지?“운명이야 다 그렇지. 아마도 내 아기가 나를 너무 그리워서 그런 것일지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먼저 간다고 생각하고, 너는 조급해하지 말고 뒤에서 천천히 와.”소지아는 지금의 분위기를 깨기 위해 농담을 했다.“내가 죽으면 너도 자주 묘지에 와서 나랑 같이 있어줘. 미리 투자한다고 생각해. 내가 네 꿈에 나타나서 로또 당첨 번호 같은 거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네가 죽으면 나한테 그 많은 돈 다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알려줘. 이렇게 생각하면 훨씬 낫지 않니?”김민아는 눈물을 흘리다 웃었다.“그럼 내가 너에게 아주 좋은 묘지 하나 찾아 주어야겠군. 네 후손들을 보살피려면... 참, 너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깜박했네. 그렇지 않으면 너 몇 년 더 살아. 내가 아이를 낳으면 너 양자로 삼으면 되니까.”소지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좋아.”저녁의 동창회에 소지아는 모처럼 꼼꼼하게 치장했다. 단발머리인 그녀는 예전의 앳된 모습을 벗고 웃지 않을 때는 마치 하얀 장미처럼 요염하고 고급스러웠다.김민아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말을 하지 않고 여기에 서 있으면 무척 아름다운 예술품처럼 보였다.호텔로 가는 길에 김민아가 물었다.“지아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세계 일주 여행 갈래? 어차피 지금 우리는 시간도 부족하지 않고 돈도 부족하지 않잖아.”소지아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마음은 평온했다.“나는 자선기금회를 하나 설립하고 싶어. 이 세상에는 아직도 나와 마찬가지로 불치병에 빠진 환자들이 많잖아. 그리고 산간지대의 학교에 다닐 방법이 없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고.”김민아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슬프기만 했다. 거액을 가진 소지아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유독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낯선 사람에게 앞길
오랜만에 열린 동창회는 유난히 떠들썩했다.김민아는 그야말로 퀸카였다. 놀라운 말재간으로 그녀는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었고 오히려 소지아의 출현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적지 않은 동창들은 다가가서 그녀를 에워싸고 물었다.“지아야, 너 결혼했다며? 정말 섭섭해. 결혼식에 우리들 초대하지 않고, 우리가 창피했던 거야?소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귀를 찌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창피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 스스로가 창피하다고 생각한 거겠지. 소씨 집안이 파산했기에 숨어서 사람을 만나러 나올 엄두조차도 내지 못한 거 아니야?”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예전에 소지아의 라이벌, 여금청이었다. 그때 여씨 집안은 소씨 집안보다 못하였고, 여금청은 공부 또한 만년 전교 2등이었다.그녀도 재벌 집 아가씨였지만 소지아가 있는 곳이라면 그녀는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전부 소지아의 탓이라 생각했다.지금 소씨 집안은 파산했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지아가 다시 나타났으니, 여금청은 자연히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소지아에게 실컷 비난하려 했다.그때 반장 양기범이 얼른 나와서 말했다.“금청아, 그렇게 말하지 마. 누가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리고 남의 상처를 들춰내려 하지 마. 모두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흥을 깨는 일은 언급하지 말자.여금청은 눈을 부라렸지만 그래도 양기범을 약간 존경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 화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너 사람 낯가죽이 너무 두꺼운 거 아니니? 요 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가 돈 냄새 맡고 온 거 좀 봐.“무슨 돈 냄새? 오늘 동창회 아니야?” 소지아는 망연했다.“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야? 오늘 우리들은 모두 애원 병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해 왔는데?”소지아는 문득 자신이 1년 넘게 엉망진창으로 살아서 바깥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