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소지아의 말에 승낙했다.철이와 민이는 소지아와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지아 누나, 누나가 떠난 후, 형님도 섬을 떠났어요. 지금은 아마 A시에 왔을 거예요. 만약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몰래 그에게 연락하면 돼요.”“너희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소지아는 전효가 매우 신비롭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은 무기를 가진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양기범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지만, 전효는 달랐다. 그는 더욱 많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특수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전효의 신분은 충분히 신비로워서, 주모자는 지금 그의 존재를 몰랐다.“형님은 몇 년 전에 바다에서 떠돌다 우리 섬으로 왔어요. 그때 그는 숨이 간당간당했고, 아주머니가 그를 구했어요. 그도 가족이 없는 것 같아 그 후 우리 섬에서 살았고요. 하지만 나는 형님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사격 기술이 엄청 좋거든요.”여기까지 말하자 철이는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누나, 그날 나 너무 긴장해서 하마터면 누나를 쏠 뻔했어요. 하지만 누나 전 남편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요. 거의 망설이지 않고 누나를 보호했으니까요.”소년은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칭찬을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이 화제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넌 다른 방법을 통해 학교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야 출세할 수 있어. 그럼 아주머니도 너를 위해 기뻐해줄 거야.”“알았어요, 누나.”아직 입사하지 않았기에 소지아는 특별히 두 아이를 데리고 당지의 유명한 그림 전시회에 갔다. 이는 민이가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런 예술품을 접한 것이었다.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눈은 어디를 봐야 좋을지 몰랐다.철이는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책벌레인데,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림 벌레인 것 같아요. 이 낡은 그림
민이는 소지아의 앞을 가로막았다.“누나 보지 마요.”그리고 철이는 아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금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말 취소할래요. 자신의 아내를 배신한 그는 그냥 찌질한 남자예요. 누나는 이런 찌질한 남자 보지 마요. 그러다 눈병 나겠어요.”소지아는 한순간 가슴이 아팠다. 이도윤이 자신을 그의 곁에 가두고 밤마다 자신을 안고 잤다고 해도 그가 백채원과 결혼하려는 사실을 개변시킬 수 없었다.백채원은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하려고 이도윤과 애정을 과시하며 공공장소를 빈번히 드나들었다.그녀는 여기서 소지아를 만날 줄은 몰라, 소지아 앞에서 이도윤의 팔을 단단히 잡으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이런 방법은 간단하지만 효과가 있었다.이도윤은 소지아가 아이를 데리고 B구역으로 가는 것을 보고 백채원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뺐다.예전에 이도윤은 그래도 백채원의 체면을 세워줬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겉치레도 하려 하지 않았다.정교한 화장을 한 백채원의 얼굴은 좀 일그러졌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또 그 천한 년 찾으러 가려고요? 도윤 씨, 잊지 마요, 지금 당신의 약혼녀는 바로 나라고요!”이도윤은 눈을 드리우며 싸늘하게 백채원의 날카로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에 그는 형제의 감정과 백채원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감정을 봐서, 그녀의 말에 순종했고 평소에도 백채원을 무척 존중했다.백채원의 진실한 모습을 본 지금, 이도윤은 그런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면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당신이 원하는 거, 난 이미 다 했어.”이도윤은 냉담하게 대답하면서 눈빛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지금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금실 좋은 부부라고 생각하고 있지.”백채원은 이도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굴은 험상궂었고, 마음속에는 더욱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이 용솟음쳤다.그녀는 이 남자가 소지아에 대한 미움이 점점 줄어들고, 오히려 점점 더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백채원은 가까스로 오늘 이 자리에 이르렀는데, 계
소지아는 분명히 무척 고분고분했지만, 또 말할 수 없이 이상하여 이도윤은 그저 답답했다.그는 섬에서 그녀를 데려왔고, 그의 성격대로라면 그녀를 자신의 곁에 가두어야 했다.이도윤은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고 소지아에게 자유를 주며 그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고 심지어 그 두 아이까지 특별히 챙겨주었다.그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으니 소지아가 예전처럼 눈에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기뻐할 줄 알았다.그러나 지금, 소지아의 눈은 마치 맑은 호수와 같았고, 그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조금의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이도윤의 드리운 차가운 눈동자에 소지아의 맑은 얼굴이 거꾸로 비쳤다. “소지아, 작작 좀 하지 그래.”이도윤의 목소리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띠고 있었다. “설사 내가 그녀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네 지위에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을 거야.”그의 뜻은 마치 자신에게 은혜라도 베푸는 것만 같았다.소지아는 웃었고, 미소에는 경멸을 드러냈다. “백채원은 이미 이씨 집안 사모님의 자리를 얻었는데, 내가 또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어?”이도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지아는 이 화제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정리했다.만약 이도윤을 화나게 만들면 결국 소지아 자신이 아양을 떨며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자, 이제 그만 네 약혼녀한테 돌아가. 난 지금 내 신분을 잘 알고 있으니까 널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자 소지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철이 그들에게 따지지 않아서 고마워.”이도윤은 입을 벌렸지만, 결국 소지아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소지아는 돌아왔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없어졌다.그의 말은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이도윤은 자신에게 말했다.‘그녀는 날 그렇게 사랑했으니 지금은 단지 잠시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야.’소지아는 곧 돌아올 것이고, 다시 자기밖에 안 보이는 그 여자로 변할 것이다.소지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고, 두 소년은 입을 다문 적이 없었다
궤짝 안의 빛이 어두워서 소지아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이렇게 무서울 줄 알았으면 그녀는 죽어도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심하게 떠는 것을 보고 어두컴컴한 궤짝에서 갑자기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소지아는 자꾸만 이 웃음소리가 익숙하다고 느꼈다.바로 이때, 남자는 도구등을 켰고, 어두운 불빛이 그 창백한 얼굴에 쏟아졌다. 소지아는 바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나야.”소지아는 멈칫하더니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전효 씨?”“음.”언제나 엄숙하던 남자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맴돌았다.“미안, 이런 식으로 너와 만나서. 난 네가 이렇게 쉽게 놀랄 줄 몰랐어.”사실 전효는 소지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분장한 것은 단지 경호원을 피하려 했을 뿐이었다.그러나 만나서 입을 열기도 전에 소지아에게 잡혀 도망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소지아는 놀란 가슴을 달랬다.“정말 깜짝 놀랐잖아요.”그동안 소지아와 지내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전효가 칼을 들고 그녀의 목에 댔어도 소지아는 이렇게 놀라지 않았다.이런 그녀는 좀 더 생기가 있었다.“자, 본론부터 얘기하지. 네가 나더러 조사하라고 한 사람에 대해 이미 알아봤어.”전효도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고 조사한 내용을 빠르게 소지아에게 알려주었다.“뭐 좀 알아냈어요?”“네가 말한 오정인은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게 아니야. 요 몇 년 동안 그는 가끔 출국했지만, 단지 출장일 뿐이었어.”‘역시, 이 오정인에게 확실히 문제가 있었어. 그 주모자는 이미 이도윤과 내 곁에 각각 사람을 배치한 모양이군.’애초에 소지아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오정인이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곁에 둔 스파이였다. 그 탐정이 찾아낸 정보도 단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용일 뿐이었다.이도윤이 갖고 있는 그 보고서도 가짜인 것 같지만 병상에 누워 깨어나지 못한 소계훈이 이 모든 진실을 안고 잠들었다.그 사람은 소계훈이
소지아는 전효를 따라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그녀는 특별히 옷차림을 바꾸었다.소지아를 놀라게 한 것은 전효의 변용술이 매우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뭔가를 붙였을 뿐이지만, 그는 쉽게 소지아의 이목구비를 바꿀 수 있었다.짙은 색의 가루를 덧입히자, 소지아는 순식간에 40대 정도로 변했다.전효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중년 남자로 변신하여 그의 본모습을 감추었다.두 사람은 다시 풍원 정신병원에 갔다. 소지아는 간소연의 먼 친척을 사칭하여 원장을 찾았고 전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철망을 넘어 들어갔다.소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안이 벙벙했다. ‘철망에 전기가 없어도 위에는 전부 날카로운 가시인데, 그는 어떻게 했지!’그들은 문 앞에서 갈라졌고, 소지아는 찾아온 뜻을 설명했다. 그녀를 맞이한 원장의 얼굴에도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아이고, 이 아이도 얼마나 불쌍한지. 여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시체도 찾아가지 않았고.”소지아는 간소연이 이미 화장된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시체는 아직 장례식장에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간소연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불쌍하게 살아갔지만 죽을 때까지 줄곧 불쌍했을 줄이야.“원장님, 안심하세요. 우리는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서 잘 안장할 거예요. 그녀의 부모님은 지금 외국에 있어서 돌아오기가 좀 번거롭거든요. 내가 그녀의 뒷일을 처리할게요. 여기에 그녀의 물건들이 있겠죠.”“그래요 그럼, 그녀의 물건은 내가 다 정리해 두었으니 이리 와요.”소지아는 지난번 그 병실을 거칠 때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그래요,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와 한방 쓰던 환자들도 모두 병실을 옮겨서 이 방도 이젠 비었네요.”소지아는 문을 밀었고, 방안의 장식은 그날보다 더욱 썰렁했다. 병실은 침대와 궤짝 외에 다른 것이 없었고, 벽은 새하얗게 칠해졌다.햇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자, 먼지가 공기 중에
소지아는 처음으로 이런 곳에 와 봤는데, 방안은 무서울 정도로 추웠다. 한기는 발에서 온몸으로 퍼졌고 뒤에는 마치 무수한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서 있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이미 모든 정력을 소모했다.“겁내지 마.”전효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지아는 손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네요.”“그래요, 너무 오래 걸리지 마요. 난 밖에서 기다릴게요.”직원이 떠나자, 어디서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소지아는 놀라서 전효의 품속으로 도망쳤다.전효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넌 이곳과 잘 맞지 않으니까 나가서 기다려. 나도 곧 나올 거야.”“그래도…….”전효의 표정은 엄숙했다. “나도 죽은 사람을 많이 봤으니 어떤 시체를 두려워하겠어?”소지아는 뭐라 해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전효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눈 감고 있어. 내가 상황을 말해줄게.”“좋아요.”소지아는 마침내 그의 이 제의에 동의했다.그녀는 전효의 뒤로 물러나 전효의 검은 재킷에 있는 어두운 무늬를 바라보았다.그는 팔에 힘을 주더니 손잡이에 손을 얹고 힘껏 당겨 단숨에 보관함을 열었다.시체가 끌려나오는 순간, 악취가 확 풍겼다.소지아는 위가 좀 아팠는데, 그 바람에 속이 뒤집혀 바로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소지아는 눈을 들어 보려고 했지만, 눈앞에 갑자기 손바닥 하나가 나타나 그녀의 눈을 덮었다.남자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모든 빛을 가렸다.그리고 전효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보지 마, 시체가…… 좀 비참해서 그래.”소지아는 당시 뉴스에서 본 모자이크 처리한 간소연의 사진을 떠올렸다. 붉은색으로 가득한 모자이크를 생각하면 그녀는 현장에 많은 피가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사실 그뿐만 아니었다.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보관함에 있어도 그 시체는 매우 무섭게 변했다.전효는 끝내 소지아에게 시체의 모습을 형용하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그
소지아는 집안 어르신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시체를 언뜻 본 적이 있었는데, 앞의 이 비참한 시체와는 전혀 달랐다.비록 그녀는 간소연의 얼굴조차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놀라서 헛구역질이 끊이지 않았다.전효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미안해요.”소지아는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일반 사람들은 시체를 본 적이 없는데다, 이런 시체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이해할 수 있지.”“당신은 왜 안 무서워하는 거예요?”“많이 봐서 그래.”전효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깊은 눈언저리에는 희미한 감정이 스쳤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산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무섭지.”소지아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겪었는지 몰랐다. 분명히 그녀보다 몇 살밖에 안 큰 것 같았지만 너무 신비로웠다.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눈빛이 없었을 것이다.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종래로 소지아 혼자뿐만 아니었다. 소지아는 마음속의 공포를 극복하고 손전등을 켰다.“내가 비춰줄 테니까 얼른 검사해봐요.”“음.”전효는 담담하게 분부했다. “눈 감고, 다른 것은 나에게 맡겨.”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 소지아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때 전효는 소지아의 손목을 잡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례하는군.”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시체 앞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방에서 전효의 손의 온도는 유난히 뜨거웠다.소지아는 또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도 전효가 시체의 바지를 벗기고 있는 것 같았다.다행히 정신병원의 바지가 비교적 헐렁해서 그는 큰 힘을 쓰지 않고 바로 벗겼다.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소지아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소리를 통해 전효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그녀는 손전등을 높이 들었다.“됐어.”전효가 일깨워 주었다. “눈 뜨지 마. 내가 시체를 보관함에 넣을 때까지 기다려.”소지아는 기다릴 수 없단 듯이 물었다.“어때요?”“그녀의 자궁경관은 가로로 갈라졌어.”“보통 아이를 낳은 적이
소지아는 다소 의외였는데, 뜻밖에도 이도윤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비록 모든 일을 전효에게 맡겼지만, 소지아는 차에 탈 때 여전히 약간 긴장되어 자꾸 이도윤의 눈이 자신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고 느꼈다.차에 오르자 놀랍게도 이도윤은 그녀에게 물었다.“잘 놀았어?”“그럭저럭, 근데 좀 무서웠어. 철이는 놀라서 엉엉 울 뻔했고.”소지아는 말을 하면서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고, 이도윤은 담담하게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이도윤은 자신이 일부러 소지아를 이 아이들과 함께 있게 하면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해맑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실이 말해주다시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의 감정 외에 또 소지아 자신도 있었다.예전에 두 사람이 같이 앉으면, 소지아는 이도윤의 팔을 잡고 재잘재잘 말을 하며 작은 입을 거의 멈추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소지아는 단정하게 앉아 팔걸이를 잡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도윤이 한 마디 물어야 소지아가 대답했는데, 입을 열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천지를 사이에 둔 것 같았다.숨이 막힐 정도로 침묵한 분위기에 두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자신에게 떨어진 이도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줄곧 불안했다. ‘설마 내가 몰래 뛰쳐나간 일을 들켰나?’결국 어젯밤에 이도윤은 금방 자신에게 경고를 했다. 그는 섬을 개발하여 주민들의 생활 조건을 보장할 수 있지만, 그 조건은 바로 자신이 다시는 전효를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소지아는 맹세하자마자 이튿날에 바로 약속을 어겼으니 이도윤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이도윤이 말을 하지 않자, 소지아는 자신에게 떨어진 눈빛이 마치 자신을 칼로 베는 것처럼 느꼈다.이씨 집안에 도착할 때까지 이도윤이 화를 내지 않은 것을 보고 소지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이도윤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난 돌아와서 밥을 먹지 않을 거야.”“응. 알았어.”소지아는 차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이때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