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시월이 가장 먼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의 추론에 따르면, 시하를 해치려는 사람일수록 그의 상태를 더 신경 쓸 가능성이 컸다.지아와 시후는 미리 상의하여, 지아가 시하를 치료하러 왔다는 사실을 시후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했다. 그렇게 해야만, 줄곧 시하를 주시하고 있는 누군가가 별장에 온 것을 알아차리기 쉬울 테니 말이다. ‘소시월이 여기 나타난 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저 여자가 소씨 가문의 아가씨라고 할지라도, 단 하나의 가능성도 놓쳐서는 안 돼!’ 지아가 담담하게 설명했다.“‘소’는 제 스승님의 성을 따른 거지, 제 본래 성이 아니에요. 그런데 누구신지...” “아, 소개를 깜빡했군요. 이쪽은 제 여섯째 동생인 소시월입니다.”시하가 부드러운 눈빛과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는 그들 남매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 시후의 곁에 있을 때도 시월이 전화를 걸어온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예전 같았으면 시월을 의심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지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차분히 말했다.“안녕하세요, 아가씨.” “저희 오빠가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어느 분야의 의사세요? 혹시 심리학인가요? 제발 저희 오빠를 잘 치료해 주세요. 오빠는 그동안 심리적으로 무너져갔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지아는 시월의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시월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고, 진심에서 우러난 듯 보였다.‘내가 너무 의심한 걸까?’ “죄송하지만, 저는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에요. 저는 단지 제 스승님의 부탁으로 도련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뿐이니까요.” “스승님은 어떤 분이시죠?”“제 스승님은 시골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라,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지아는 자신의 출신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술에 대한 기대감을 일부러 낮췄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저희 오빠의 불면증은 약물 없이 해결할 수
무무는 얌전히 지아의 곁을 따르며, 걸을 때마다 발목에 매달린 방울을 딸랑딸랑 울렸다. 그 소리에 시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시월은 유난히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소씨 가문과 같은 대가족에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그녀가 이토록 따뜻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의외였다. 시월은 식사 중에도 지아와 무무를 살뜰히 챙기며 매사에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지아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절대 이런 사람이 범일 리 없어.’‘만약 이 사람이 범인이라면, 치밀하고 교활한 사람이라고밖에 해석이 안 돼.’‘그 정도로 감정을 숨기고 행동을 꾸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무서운 사람일 테니까.’아침 식사가 끝난 후, 지아는 시월의 재촉에 못 이겨 시하의 다리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아는 그의 다리뼈를 만져보고, 얼마 전에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도 면밀히 검토했다.“선생님, 저희 오빠의 다리 상태는 어떤가요? 치료할 수 있을까요?” 지아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련님의 부상은 너무 심각했고, 이미 몇 차례 수술을 받으셨지만 효과가 미미한 것 같아요. 제 스승님이라 해도 치료가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저는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고요...” 시하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불면증을 고친 사람이라면 다리 치료도 가능할 줄 알았어.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구나.’ “괜찮습니다. 제 다리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의사들도 손을 뗐으니까요. 모두 방법이 없다고 했어요. 치료를 못 한다고 해도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지아가 또 입을 열었다.“하지만 너무 낙담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리를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지만, 최소 불면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 이번 방문이 헛된 건 아니잖아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희 오빠는 약물 없이 한숨도 잘 수 없었어요. 만약 오빠의 불면증을 고칠 수 있다면, 우리 가족에게 정말
지아는 표정을 가다듬었다.‘단지 집 설계만으로 범인이 저 여자라는 걸 확신할 수는 없어. 침착하자.’“아니요, 그냥 디자인이 독특해서요.” “최근 몇 년 동안 R국에서 유행한 디자인이에요. 깔끔하고 심플해 보이지 않나요? 제가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더구나 병을 앓던 시하는 모든 신경이 자신의 고통에 쏠려 있어서, 방의 인테리어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아가 은침을 하나하나 놓기 시작했다. 예전에 백채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상태가 시하 못지않게 심각했지만, 지아는 그녀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하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아는 이 비밀을 시하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침을 놓으며 시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내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얻고자 했다. 그때였다. 방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하를 보러 왔어.”시월이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둘째 오빠, 지금은 의사 선생님이 오빠한테 침을 놓는 중이야. 방해하지 마.” “침? 어디서 온 의사길래? 시하의 상태가 저렇게 나쁜데, 아무 의사나 데려다가 치료하겠다는 거야? 그런 행동이 오히려 자극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냐고! 정말 무모하군!”그 사람은 이 말을 끝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지아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유명한 디자이너인 소시언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그는 훨씬 차분하고 안정된 모습이었고,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정말 북적북적하네. 막내 아가씨뿐만 아니라 둘째 도련님도 오시다니.’ “당신은 누구입니까?”시언이 곧장 차가운 태도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형, 오해하지 마. 소 선생님은 의술이 정말 뛰어나셔. 어젯밤엔 소 선생님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어.” 시언은 지아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실력자는커녕 아주 평범해 보이는데?’“진짜야?”시언의 시선이 침으로 뒤덮인 시하에게로 향했다. 서양 의학에 익숙했던 그에게 한의학은 다소 낯설었고, 믿음이 가지
소시후는 소씨 가문의 장남으로, 총명하고 유능한 인재였다. 신장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완벽한 사람으로 모든 여성이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었다.소시언은 어릴 적부터 그림과 디자인을 좋아해 일찍이 소씨 가문을 떠났고, 자신만의 의류와 주얼리 브랜드를 창립했다. 소시언의 브랜드는 국제적으로도 아주 유명했다. 소시하는 에이스 조종사였다. 도윤의 자료에는 중요한 부분이 강조되어 있었다. Z항공은 소씨 가문의 기업이었고, 시하는 단지 항공사의 조종사로서 훈련받던 중이었다. 이듬해부터 가족의 항공 사업을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나, 바로 그 시점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시하의 여자 친구는 청순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승무원이었고, 두 사람은 3년 안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사고 전날 밤, 여자 친구는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고 해외로 떠나겠다고 했다. 시하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지만, 시하의 여자 친구는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꿔 급히 현장으로 달려오다 또 다른 사고를 당했다. 다만, 여자 친구는 시하만큼 운이 따르지 않아서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여자 친구의 죽음은 이후 시하의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아 그를 우울하게 했다. 반면, 소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은 가장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는 일찍이 군에 입대해 현재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신분의 특수성으로 인해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다섯째 아가씨인 소시영은 과거 실패한 연애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뛰어난 의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것이었다. 여섯째 아가씨인 소시월은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음악, 서예, 그림 등 여러 방면에 능통했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지는 못했다. 더욱이 형제자매들이 차례로 사고를 겪었으니, 여전히 소씨 가문의 경제적 핵심을 관리하는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다. 소씨 가문의 사업은 전 세계에 걸쳐 있
무무는 다시 손짓으로 지아에게 신호를 보냈다.“저 여자에게서 멀리 떨어지세요. 왠지 느낌이 안 좋아요.” 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너도 조심해.”무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짓으로 답했다.“엄마, 저는 괜찮아요.” 아이는 어려서부터 조원주의 곁에서 자랐다. 조원주는 무무를 무척 아끼며 특별히 독벌레 왕의 피로 아이를 정화했다. 덕분에 다른 독벌레들은 무무를 두려워하며 가까이 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아는 달랐다. 그녀는 약인이었기에 많은 독소를 예방할 수 있었지만, 독벌레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어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독벌레 같은 작은 존재는 워낙 위험해서 조금만 방심해도 순식간에 당할 수 있었다. “조심할게.”그때였다. 지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시월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는 분명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였지만, 지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고급 맞춤 의상을 입은 채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한 시월이 주술을 다룬다니, 지아의 머릿속에는 ‘독사 같은 미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월이 천천히 지아 쪽으로 다가오자, 무무는 말없이 지아의 곁으로 한발 다가섰다.“소 선생님, 우리 오빠의 불면증은 얼마나 치료해야 할까요?” 지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소처럼 답했다.“장담하긴 어렵습니다. 서양 의학은 속전속결을 중요시하지만, 한의학은 근본을 다지고 천천히 체질을 개선하는 걸 중시하거든요.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시월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당분간 여기 머무르셔야 한다면, 제가 더 넓은 방을 준비하도록 할게요. 따님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라요. 1층에도 빈 방이 하나 있는데, 저희 오빠와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더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아, 소 선생님은 어느 지역 분이신가요? 제가 미리 말씀드려서 선호하시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와 무무는 음식을 가리지 않으니, 뭐든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소 선생
시월이 고개를 살짝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왜요? 소 선생님은 외동이신가요?” “저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졌어요. 하지만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어주셨고, 귀하게 키워주셨죠. 하지만 혼자 계신 분이라 다른 형제나 자매는 없었어요. 아가씨 댁처럼 북적이는 분위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삶이었죠.” 지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시월과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시월의 전화가 울렸다.일과 관련된 전화였고,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언은 지아를 감시하는 것처럼 일부러 남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는 무무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시언은 드레스 디자인을 하던 중, 자수를 어떻게 넣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지아는 약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디자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무무는 그가 한참을 끙끙대는 것을 보더니 슬며시 다가가 그의 작업을 살폈다. 그러고는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종이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이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 본 시언은 어린아이가 낙서하는 것쯤으로 여기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30분 후, 색까지 채워진 디자인 초안이 눈앞에 놓이자, 시언은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그는 그림에 담긴 금실 자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순간, 막혔던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금실 자수를 사용할 생각을 못 했지? 화려하면서도 우아해. 디자인 주제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무무를 바라보는 시언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꼬맹아, 네가 금실 자수를 알아? 게다가 그림도 그릴 줄 안다고?” 무무는 그저 옆에서 지켜봤을 뿐인데도, 시언의 디자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자수 도안을 만들어냈다. 이는 아이의 그림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무무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하자, 시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지아가 대신 설명했다.“무무가 살던 마을에서는 금실 자수가 일반적이었어요. 집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머리 위에 검은 구름이 드리워진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들의 눈에는 어떠한 빛도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곤 한다.하지만 지아는 시하의 다리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문부터 열게 해야겠어.’침을 놓으며, 지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분들이 정말 도련님을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도련님의 곁에 남아 있겠어요? 가족분들은 언제나 도련님을 받아들이고, 도련님의 존재를 품어주는 항구 같은 존재예요.”“시영 아가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던데,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도련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면, 가족분들은 그때 도련님이 느끼신 것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겠어요?”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도련님은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어요. 도련님처럼 젊고 강한 사람이, 죽음이 아닌 삶을 두려워한다는 게 말이 돼요?” 시하는 창밖에 흔들리는 잔디밭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낮게 중얼거렸다.“맞아요,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뭐가 두렵겠어요? 단지...” 그는 손을 펴며 흐릿한 눈빛으로 말했다.“단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잖아요. 소 선생님, 새벽부터 아침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저는 약에 휘둘려 산송장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 삶은 단 1초도 버틸 수 없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지아의 예상이 맞았다.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시하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언정, 시간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흉터로 남게 했다.물론 그 흉터를 떠올릴 때마다 아픔은 느낄 수 있겠지만, 이미 몇 년이 지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하를 진짜로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불면증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일 약을 먹는 것을 거부했기에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지아는 정신 질환에 대한 전문
남자는 몸을 숙여 여자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거울 속에는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소씨 가문의 여섯째 아가씨, 소시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선 평소에 보여주던 단정하고 우아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시월은 남자의 애정 어린 손길에도 휘말리지 않고, 되려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월의 머릿속엔 온통 지아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만이 가득했다.‘그 여자... 정말 의심스럽단 말이지.’ ‘과거나 출신을 전혀 알아낼 수 없었어.’‘게다가... 아무리 겸손한 게 미덕이라지만, 그 여자는 지나치게 스스로를 폄하하고 있어.’ ‘소시하는 아주 심각한 상황인데, 어떻게 그런 의사를 찾게 된 걸까?’‘대체 누가 데려온 사람이냐고!’ 시월은 지아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지만, 끝내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이것은 분명히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소씨 가문 내부에서 누군가 이미 조사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커.’ 바로 그때, 남자가 시월의 귓불을 세게 깨물며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대체 누굴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그를 밀쳐내며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집어 들었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재미없어.”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시월을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도대체 왜 그래? 소시하한테 다녀온 뒤로 표정이 너무 어둡잖아. 대체 누가 널 화나게 한 거야?” 화장대로 다가간 시월이 서랍에서 여성용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가늘고 늘씬한 몸매, 담배를 문 채 반쯤 감긴 눈, 차가우면서도 당당한 분위기.그녀는 마치 밤에 피어난 검붉은 장미와 같았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다재다능하고 매사에 능숙한 ‘시월 아가씨’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소시하한테 새로운 의사가 왔어.” “그냥 의사일 뿐이잖아. 그동안 소씨 가문에서 부른 의사가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서 그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