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다섯 시에 박민정은 조하랑을 문 앞까지 바래다줬다.나가기 전 조하랑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민정아, 나 오늘 어때?”조하랑은 본바탕이 아주 좋았다. 둥글고 커다란 두 눈과 계란형 얼굴에 부드러우면서도 귀여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너무 예뻐.”“그럼 됐어. 너 그거 알아? 난 연우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긴장돼. 연우가 혹시라도 나를 싫어할까 봐...”“아냐, 그럴 리가 없어.”“우리 하랑이가 이렇게 예쁜데, 누가 싫어한단 말이야.”박민정이 조하랑을 안심시키자, 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문을 나섰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래다주고 방으로 돌아갔다.“엄마.”박예찬은 왠지 벌써 깨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하랑은 새벽 3, 4시 때부터 깨나서 준비했다.“우리가 너무 떠들어서 깬 거야?”박민정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물어보자, 박예찬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엄마, 하랑이 이모가 만나려고 하는 아저씨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래, 하랑이 이모한테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그녀는 대학교 때 강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그는 그들 동기 중 가장 잘생긴 남학생이었지만 아쉽게도 가정형편이 별로였다.조하랑과 강연우가 같이 있으면 외모는 진짜 잘 어울렸지만, 집안 조건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엄마에게는 연지석 삼촌이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멈칫하더니 아무런 고민 없이 대답했다.“물론이지. 지석이 삼촌은 우리에게 엄청 잘해주잖아.”“그럼, 우리 돌아가면 지석이 삼촌 받아주면 안 돼? 주변에 예쁜 여자가 많긴 해도 다 엄마보다 별로야.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엄마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박민정은 또 한 번 놀랐다.유남준의 미니 버전 같은 아들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그는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 어제 엄마 보고 선보러 가라며?”“내가 확률 계산을 해봤는데 엄마가 성공적으로
“아까 그 뭐야 최씨 집안 따님인가 뚱뚱한 게 꼭 돼지 같지 않아? 그러고도 무슨 자신감으로 선보러 온 걸까?”“하하하, 그냥 공룡 같던데 걸을 때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잖아.”“그리고 전에 서씨 집안 따님은 새빨간 입술이 꼭 귀신같았지...”“이번에는 누구야?”“아마 조씨 가문 따님일걸, 듣기로 해외에서 연수하고 금방 돌아왔다고 하던데...” “해외에서 돌아왔으면 분명 개방적이고 방탕할 거야.”“조금 있다 우리 앞에서 춤을 추라고 하고 잘 추면 후보 자리에 올려준다고 할까. 하하하...”안에서 들려오는 저속한 말소리에 박민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이제야 왜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는 부잣집 따님들이 맞선을 마친 후 하나같이 화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떠났는지 알았다.이 사람은 애초에 맞선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유흥을 즐기게 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조하랑이 이곳에 오지 않은 걸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조하랑의 성격상 오래도록 속상해할 게 뻔했다.안내원을 따라 들어선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점잖고 품위 있는 장소여야 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더럽고 지저분했다.그들은 일부러 부잣집 딸들을 자극하기 위해 품에 몇 명의 예쁘장한 술집 아가씨를 껴안고 있었다.박민정이 나타나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우, 마스크를 쓰고 왔네.”“너무 못생겨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걸까요?”그들의 비웃음 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박민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혼자서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는 메인석에 앉아있는 김인우에게로 돌렸다.누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진주의 부잣집 딸들을 다 불러와 혼자서 고르고 있나 했더니 다름 아닌 진주의 황태자였다.만약 유남준이 진주의 폭군이라면 김인우는 진주의 황태자였다.한 사람은 진주 전체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주 사람들의 생명줄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김인우는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당연히 이번에 들어온 사람이 조
박민정의 맑은 눈과 마주친 순간, 김인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닮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박민정이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왜 맞선 자리에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말했다.“갑시다.”정민기는 박민정을 데리고 떠났다.땅바닥에 엎어진 그 남자는 입으로는 욕을 하며 웅얼거렸다. “가지 마! 너희는 나한테 찍혔어. 딱 기다려!”다른 재벌 집 자제들이 비아냥거리며 그를 자극했다.“장 씨, 너무 약해빠졌어. 잘났으면 복수하던가!”“그래, 소리만 지르지 말고!”그 남자도 정민기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방금 걷어차인 고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했다.어려서부터 받들어 자랐기에 이런 억울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기어서 일어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 혼쭐을 내주겠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인우가 그 남자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아까 무슨 짓을 한 거야?”“그년...”경호원 몇 명은 눈치가 없는 장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땅에 엎어져 피를 토했다.장 씨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몰랐다.주위의 다른 재벌 집 자제들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김인우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비서에게 물었다. “얘가 방금 무슨 짓을 했었어?”비서는 남자가 박민정을 모욕하려고 한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이 놈의 손을 남겨둘 필요가 없어.”김인우는 더 이상 선을 볼 기분이 나지 않아 박민정을 찾으러 갔다.등 뒤로 재벌 집 자제들이 애원하며 용서를 빌었다.그들은 끊임없이 흐느낄 뿐, 조하랑이 어떤 인물이며, 김인우가 왜 그녀를 위해 화를 내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아마 장 씨는 오늘 여기에서 죽어나갈게 분명했다.김인우가 파라다이스에서 나올 때 박민정은 이미 사라졌다.그는 축 처진 손을 조이며 아까 현장에 온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원래 김 어르신께 선을 보는 모양새만 보여 드리고,
아침 일찍 유남준은 보디가드한테 박민정이 오늘 오전에 파라다이스에 갔다고 전해 들었다.“박민정이 파라다이스에는 왜 간 거야?”유남준이 아는 바에 따르면, 파라다이스는 재벌 집 자제들이 술을 마시는 장소이며, 내막은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다.보디가드는 잠시 머뭇거렸다.“맞선 자리인 것 같습니다.”유남준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 주위의 기압마저 가라앉았다.그녀가 볼일이 있다던 것이 맞선 보러 가는 것일 줄이야...유남준은 박민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보디가드는 유남준의 성격을 알기에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무실을 나왔다.오후 두 시,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 대표님.”박민정이 들어오자마자 유남준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그는 음험한 눈동자를 치켜들고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물었다.“왔어?”유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네, 저랑 같이 갈 곳이 있다고 어제 얘기 하셨잖아요.”유남준은 대답 없이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오늘 오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어?”그는 박민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유남준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런 물음을 물어본 것이다.그의 심문하는 듯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한 치의 숨김이 없이 말했다. “소개팅 했어요.”유남준은 화가 나 헛웃음만 지었다.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줄 몰랐다.그는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왜? 그렇게 공허하고 쓸쓸했어? 남자 둘로는 부족해?”공허하고 외롭다니? 그리고 무슨 두 남자?박민정은 화가 났다.유남준은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나 싶다.그녀는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 대표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싱글인데 왜 선을 못 보나요?”“싱글?”유남준은 더 이상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박민정의 팔을 휘어잡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싱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밟아놓는 것은 참 무정한 짓이다.박민정은 입술을 꼭 오므렸고 손바닥은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바움 그룹이 박민호 손에 있을 때, 비록 적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았었다.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황무지가 된 곳을 바라보았다. 목이 시큰거리며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이죠. 유앤케이 그룹 대표인 당신의 결정에 따를게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쉬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어도 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잃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녀가 사태를 파악한 후, 자신에게 따지고, 울고, 소란을 피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유남준을 보던 시선은 지금처럼 담담한 것이 아니라 빛이 났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아팠다. 훤칠한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았다.“너도 박씨 가문을 나한테 팔아버린 거잖아! 잊어버렸다고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야?”“나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너도 평생 남에게 시집갈 생각 마!”그는 눈꼬리가 빨개지고 이성을 잃었다.박민정은 창백한 채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 기억엔 당신이 없어요.”“당신이 원하는 아내는 이미 죽었어요!”그녀의 말은 유남준을 철저히 격노시켰다.“잊어버렸으면 기억해 내! 죽었더라도 내 앞에 살아 돌아와!”그는 박민정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놔줘요, 안 그러면 고소할 거예요!”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그녀의 옷깃을 덥석 찢었다.“나를 잊었다며. 내가 기억나게 도와줄게!”그는 박민정의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우으으,유남준씨,으아아...”그때 전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유남준의 어머니인 고영란이 전화한 것이다.그는 그제야 박민정을 놓아주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남준아, 왔어? 빨
김인우는 오늘따라 밥 먹는 것에 별로 흥미가 없다.김훈이 그가 아침에 한 일을 알고 특별히 레스토랑에 오라고 한 것은 그와 연회의 다른 재벌 집 딸과 사귀게 하기 위해서였다.김인우가 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르신은 그를 한쪽으로 불렀다.“유씨 가문의 연회도 망치려는 건 아니겠지?”김훈은 김인우을 꼼짝 못 하게 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구석에 앉았다.김인우는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지금 그의 옆으로 다가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다.그는 한 꼬마가 자신을 몰래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유씨 가문이 마련한 연회에 주인은 당연히 모두 참석했다.이번에 온 사람 중에 이지원도 있었다.그녀도 김인우를 눈치챘지만,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김인우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김 어르신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사실 김 어르신이 그녀를 따로 찾지 않았다면 이미 김인우의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이지원은 아직도 김 어르신이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인우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김 씨네 며느리는 너 같은 신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염치도 모르고 인우를 꾀여서 시집온다면 인우가 아내를 잃게 해줄 거야.”아내를 잃게하다니...이지원은 악랄한 김훈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박예찬은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쓰레기 같은 아빠의 가족과 아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모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오늘따라 엄마의 복수가 너무 시급해서 김인우가 여기에 있는지만 알아보았다.하지만 이번 연회가 유씨 가문에서 주최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기왕 왔으니 그렇게 쉽게 갈 순 없었다.유남준이 도착하기 전에, 박예찬은 까치발을 들고 테이블에서 와인 한 잔을 들고 김인우를 향해 걸어갔다.“아저씨,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요. 술이나 한잔하세요.”김인우는 심기가 불편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가 자신의 다리 길이도 안 되는 꼬맹이였다.누가 아이를 데려왔을까?박예찬이 마스크와 모자를 썼기 때
주위의 시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김인우는 이곳에 더 머물면 분명 주목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줄 안다.김인우는 화장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박예찬은 가엾은 모습을 금세 거두고 자신의 전화 시계를 들고 적당한 각도를 찾아 당황한 김인우를 찍었다.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김인우의 방에 들어갔다.멀지 않아 고영란은 이 아이를 발견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 있던 이지원에게 말했다.“너무 귀여운 아이야.”“우리 남준이의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야.”어린아이를 대할 때만 고영란의 한결같던 차가운 얼굴이 자애롭게 변했다.이지원은 고영란이 자신을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알고는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임시로 설치된 방.김인우는 전화를 걸어 비서에게 새 옷을 한 벌 보내라고 했다.“대표님, 옷을 탁자 위에 놓았습니다.”“응, 가도 돼.”“네.”비서는 나가면서 소파 구석에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필경 김인우의 방은 일반인이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김인우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욕실 물소리를 들으며 살금살금 걸어 나온 박예찬은 김인우의 옷과 휴대전화를 3층에서 아래로 던졌다.“엄마를 괴롭힌 대가야.”이 모든 것을 끝내고, 호텔과 연결된 통신 장비를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박예찬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재빨리 나가 1층 로비에 도착해 문으로 나갔다.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한 남자의 곧고 긴 다리를 들이받았다.“죄송합니다...”박예찬은 고개를 들어 쓰레기 같은 아버지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유남준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친근감을 느꼈다.“괜찮아.”그는 냉담하게 대답했다.박예찬은 재빨리 달아났다.레스토랑을 나올 때까지도 그의 작은 심장은 계속 쿵쾅쿵쾅 뛰었는데, 뜻밖에도 유남준과 부딪친 것이다.마스크와 모자를 쓰길 잘한 것 같았다.한편, 방에서 샤워를 마친 김인우는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옷
“조씨 가문의 딸인 조하랑과 박민정은 대학 동창이에요. 조하랑은 졸업 후 바로 출국했고 박민정이 돌아온 후 곧 따라 귀국했어요.”“제가 조사한 바로는 조하랑은 같은 학년 남자인 강연우를 좋아해요.”“박민정을 선 자리에 보낸 이유가 강연우 때문인 것 같아요.”비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김인우에게 말했다.김인우는 눈앞이 캄캄했다.옷을 다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유남준과 이지원이 함께 서 있었다. 둘은 참 어울렸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일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9호 공관,박민정이 조하랑의 전화를 받자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민정아, 나 오늘 저녁에 돌아갈게.”“어떻게 됐어? 찾았어?”박민정의 물음에 조하랑은 목이 멨다.“응, 찾았어.”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다시 털털하게 말했다.“하지만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아. 우리 둘은 완전히 끝났어.”박민정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조하랑이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소개팅은 어땠어? 상대방이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지?”“말도 마.”박민정이 창밖을 내다보니 이미 해가 졌다.“저녁에 너와 예찬이 찾으러 갈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그래.”한여름 밤,조하랑은 돌아온 후 실망에 찬 표정을 감추고 강연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더 이상 자세하게 묻지 않고 오늘 소개팅에 대해 그녀에게 말했다.“김인우? 어떻게 그 사람일 수가 있어? 진작 알았으면 제대로 물어봤어야 했어.”조하랑은 한숨을 쉬었다.“너한테 복수할까 봐 걱정돼.”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조하랑은 개의치 않았다.“남자가 여자 둘을 괴롭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아?”“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김인우는 이지원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잖아.”박민정은 김인우를 신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책을 읽으며 대화를 듣던 박예찬은 그동안 찍었던 김인우의 사진을 슬쩍 인터넷에 올렸다.박예찬의 조작으로 이튿날 아침 인터넷이 폭주했다.한 가지 뉴
방성원도 방은정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설인하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그러다가 문득 이혼도 먼저 제안하고 거기에 아이 양육권까지 달라고 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도 아빠를 너무 잘 따랐고 방성원도 아이를 많이 예뻐했다.이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게 되었는데 설인하가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방성원은 그녀와 방은정을 자기 품에 꼭 안았다.그리고 살벌한 얼굴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대표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에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연신 사과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방성원이 다시 차분하게 답했다.“천천히 몰아요.”“네.”이 시각 설인하는 여전히 딸과 함께 방성원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다가 문득 그의 두 눈과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이때, 방은정이 방성원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불렀다.“아빠...”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 뒤로 차는 도로 위를 아주 천천히 달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설인하는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은 방은정을 안은 채 앞에서 걸었고 설인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도우미는 세 사람이 같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은정이는 괜찮나요?” “그저 보통 감기래요.”방성원은 아이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너무 다행이네요.”여태껏 도우미가 방은정을 계속 돌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 자신도 걱정되었다.그렇게 도우미는 방은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방성원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설인하를 불러세웠다. “얘기 좀 해.”“뭐?”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고 방성원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정말 나랑 이혼하고 싶어?”
“괜찮아. 할아버지께서 건강검진 받으셨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대.”조하랑도 병원 의사한테서 들은 얘기였지만 김훈이 미리 시켰단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당장에라도 조하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이모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순간 조하랑은 깜짝 놀라 단번에 박예찬의 입을 막았다.“예찬아, 이 일은 이모랑도 약속했지? 절대로 할아버지랑 인우 삼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그러자 박예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말하려면 진작에 말했어요.”‘하긴.’조하랑은 이미 어른이랑 별다를 게 없는 박예찬이 너무 든든했다.“그러면 다행이고. 어른들의 일은 어른이 해결할 테니까 넌 빨리 학교 가.” 박예찬은 자신의 설득에도 조하랑이 고집을 부리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른 한편, 김인우는 그제야 박민정의 난청 수술에 관한 일이 떠올라 수술 시간을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박민정은 서주에 갔다 와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겠다고 말했다.순간 오늘 갑자기 서주로 가겠다던 조하랑이 떠올랐는데 사실 지금 그녀가 하는 업무는 온라인 마케팅 부분이라 굳이 출장 갈 필요가 없었다.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요 며칠 하랑 씨가 뭐 하고 다니는지 잘 지켜봐 봐.”김인우는 모든 일을 안배한 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 설인하 부부와 딸 방은정의 모습이 보였다.“성원아, 병원엔 웬일이야?”“아기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검사하러 왔어.”“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더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그러다가 김인우는 다시 뒤돌아 방성원네 세 식구의 모습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은 언제쯤 아이가 있을지, 언제쯤 조하랑과 아이와
“왜요? 혹시 아이 갖고 싶어요?”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데 과연 조하랑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순간 짜증이 밀려온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저도 싫어요. 애초에 아기를 잘 돌보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냥 말해본 거예요.”그녀는 말하면서도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동시에 김인우도 그녀의 대답에 적잖이 실망감을 느꼈다.여태껏 조하랑이 박예찬과 잘 놀아주는 모습만 봐서 당연히 그녀가 아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솔직한 마음을 속인 채 불편한 상태로 자야 했다.그러나 조하랑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고 내일은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외지로 떠나겠다고 말할 셈이었다.이튿날 아침.두 사람은 모두 일찍 일어났는데 그중 김인우는 확실히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졌다.“깼어요? 언제 시간 있을 때 우리 또 훠궈 먹으러 가요.”김인우는 이제부터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조하랑은 왠지 그러기 싫어졌다.“아마 내년까지 기다려야겠네요.”식탁 옆에 앉아 있던 김훈이 그녀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하랑아, 왜 내년까지 기다려?”“할아버지, 마침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요. 저 서주시에 가서 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략 1년 반 정도 뒤에 다시 돌아올게요.”조하랑의 말에 김훈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왜 갑자기 그리 멀리 가는데?”이때 조하랑은 박예찬에게 눈빛을 보내며 자신을 도와 몇 마디라도 해주길 바랐다.그러나 지금 박예찬의 머릿속은 온통 김훈의 건강 때문에 누구를 도와줄 처지가 아닌 것 같아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할아버지,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여러 곳에서 많이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부디 허락해 주세요.”조하랑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녀가 김씨 가문으로 시집오고부터 김훈은 조하랑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줬고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문득 자기 건강을 생각해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 그럼 인우랑
김인우는 살짝 어리둥절했다.집에 있을 때도 매번 셰프에게 평범한 집밥 요리만 주문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그러자 조하랑이 매운 닭발 하나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저는 기분이 다운되거나 우울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매운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먹으면 좀 나아져요?”“당연하죠. 입 안이 얼얼해지면서 온몸이 개운해지거든요. 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한번 도전해 보시든지.”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그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덜어줬다.김인우는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는데 순간 너무 뜨겁고 매워 허겁지겁 물로 입을 헹궜다.“너무 매운데요? 이런 음식은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 적게 먹는 게 좋겠어요.”그러자 조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도 아는데 가끔 먹는 건 상관없어요.”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라 매일 집에서 해주는 요리를 거의 못 먹는 상황이었는데 오늘 훠궈를 보자마자 갑자기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자, 여기 더 먹어요. 이것도 먹다 보면 습관 되거든요.”김인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먹기 시작했다.조하랑의 말대로 처음에는 살짝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먹다 보니 너무 매운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확실히 덥긴 더웠는지 두 사람은 땀도 많이 흘리고 물도 엄청나게 마셨다.어느새 배가 부른 조하랑은 만족스러운 듯 자기 배를 통통 두드렸고 김인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확실히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당연하죠. 저는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 풀거든요.”말하면서 활짝 웃는 조하랑의 모습을 김인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어느새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조하랑은 뚝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김인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 몇 번 하더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너무 배불러서 잠깐 멍때린 거지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아, 네네.”조하랑은 그의 대답에 별생각 없이 또 우유 한 잔을 들이켰다.사실 지금 상태로는 가능한 매운
이 시각, 조하랑은 무작정 핸들은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랐다.김인우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것 같아 그저 도로를 따라 앞으로 계속 직진했다.평소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김인우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그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조하랑은 가는 도중에도 사실 몇 번이고 그를 위로해 보고 싶었지만 끝내 내뱉지 못하고 말을 다시 삼켰다.딱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김인우가 스스로 이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앞으로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요.”이때, 김인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그리고 그의 말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니 어느새 인적이 없는 작은 길이 나왔다.얼마쯤 더 가보니 조하랑은 산 중턱에 있는 묘원을 발견했다.“여기서 세워줘요.”“네.”차가 멈추자마자 김인우가 먼저 내렸고 조하랑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디예요?”“김씨 가문의 묘지에요.”조하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그렇게 수많은 묘비를 지나 김인우는 어느 부부의 합장 묘비 앞에 멈춰 섰다.조하랑은 묘비에 걸려있는 왼쪽과 오른쪽 두 장의 흑백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두 부부의 모습이 김인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겨우 20~30대밖에 안 돼보이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일찍 고인이 된 것 같았다.김인우는 묘비 위의 부모님 사진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그들을 불렀다.“아빠, 엄마.”조하랑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 이름은 조하랑이고 인우 씨 아내입니다.”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김씨 가문의 묘원에는 와본 적이 없었다.김훈은 그녀가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석이나 설 때에도 될수록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쇨 수 있게 배려해 줬다.김인우는 뜬금없는 조하랑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말했다.“뭐가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