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은 꽁꽁 싸맨 채 뽀얗고 말간 얼굴만 드러내놓고 박민정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특히나 정성스레 그려진 듯한 눈매와 눈동자를 가진 박민정은 그녀가 봐도 미인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챙겨입었어도 볼륨감 있는 몸매가 감춰지지 않았다.자신도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걸 물론 알고 있지만 뭔지 모르게 박민정보다 조금 부족한 것만 같았다.“그딴 걸 보낸다고 내가 졸 줄 알았어?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소용 없어. 그러니까 힘 그만 빼.”이럴 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윤소현은 생각했다.박민정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두려울 거 없는데 왜 일찌감치 여기 와서 앉아 있는건지. 하나 굳이 까발리지 않고 그녀 앞에 친자확인 서류를 내밀었다.의심스러운 눈길로 그 서류를 열어보던 윤소현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빛이 스쳤다.“나 뒷조사하고 있었어?”친자확인서를 들고 있는 윤소현의 첫마디가 친자관계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뒷조사를 한 것에 대한 비난이자 박민정은 순식간에 멍해졌다.“한수민 씨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네요.”그녀는 물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이 사실을 정수미한테 알릴까 봐 두려운 윤소현은 대뜸 해명했다.“나도 어제 금방 들어서 알게 된 거야, 네가 내 이부동생이라는 거.”윤소현은 손을 뻗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진작에 알았다면 널 해치려고 안 했어. 우린 자매잖아. 난 박민호랑은 달라.”하지만 박민정은 손을 빼내며 냉담한 눈매로 그녀를 쳐다봤다. 참말이지, 윤소현의 연기 실력은 이지원의 발밑도 못 따라간다. 이지원한테서 하도 많이 당해,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진심인지 아닌지 변별해 낼 수 있었다.“오늘 여기 가족 상봉하러 온 게 아니에요. 경고하는 데, 이런 일이 또 있는 날엔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그 말에 윤소현은 얼굴이 굳어버렸다.박민정은 일어서며 또 한마디 남겼다.“윤씨 집안 아가씨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그 집안 재산은 모두
거실 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예전의 집안에서 부리던 가정부 따위가 감히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한수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은정숙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간병인이 앞으로 나서서 말렸다.“이보세요, 사모님. 저희 집 어르신이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가 경찰부를 수도 있어요.”한수민은 손을 허공에 든 채로 간병인의 말을 듣더니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어르신은 무슨. 저거 그냥 데려가는 남자 하나 없는 궁상맞은 여편네일 뿐이야. 운 좋게 내 딸을 좀 돌봐줬다고 지금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고. 내 딸이랑 사위가 능력이 있어서 집에 모시고 있으니까, 진짜로 무슨 귀부인이나 되는 줄 아나 보지?”간병인은 조금 의아했다. 줄곧 은정숙이 박민정의 친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고,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 사모님이 박민정의 친어머니였다.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비슷하게 생겼긴 하였지만, 성격과 인품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말투 또한 신랄하고 각박하기만 하다.하지만 고용주의 친어머니라는 생각에 뭐라고 할 수도 없어, 한쪽에 물러서서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은정숙은 한수민의 비꼬는 말에 대꾸했다.“난 아무리 가난해도 남자한테 의지 안 하고 제힘으로 꿋꿋이 잘 살아왔어요. 누구처럼 자식의 피까지 빨아먹는 짓은 절대 안 해요.”박민정의 성질머리가 누구를 닮았는지 한수민은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이 은정숙이란 여자한테서 배운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간병인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뺨을세게 내리쳐 바닥에 쓰러뜨렸다.“콜록콜록...”워낙에 몸이 안 좋은 은정숙은 바닥에 쓰러지자 격렬하게 기침 하기 시작했다.간병인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어르신, 괜찮아요?”연거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은정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한수민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정숙이 점점 힘들어하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자,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어 한
“그래요, 누굴 만나실 건데요? 저랑 같이 가요.”박민정은 즉시 대답했다. 지금은 은정숙이 자신의 시야에서 잠시도 떨어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냥 옆 마을 영천댁에 갔다 오려는 거야. 그 집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는데 내가 한번 가보려고. 넌 집에서 곡이나 써, 나랑 같이 갈 거 없어.”은정숙이 부드럽게 말하자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의사가 지금 푹 쉬셔야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바보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전에 그 전문가가 사오 년 사는 건 문제 없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박민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은정숙은 또 거짓말을 했다.“너 영천댁 기억 안 나니? 그 여편네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해. 평생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어. 네가 가면 우린 얘기도 편하게 나누지 못해.”박민정은 은정숙이 요즘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셨을 거라 생각되어,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그 댁까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래.”약속을 한 후에야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집에 돌아온 윤우는 은정숙이 다쳤다는 걸 알고 조용히 간병인한테 자초지종을 물었다.쓰레기 외할머니가 집에 왔을 뿐만 아니라 은정숙을 때려 다치게까지 했다는 걸 듣자 바로 예찬이한테 전화를 걸었다.“박예찬! 그 나쁜 여자, 아직도 혼을 안 낸 거야?”나쁜 여자?예찬이는 얼떨떨해서 물었다.“누굴 말하는 거야?”“그 늑대 외할멈 있잖아!”예찬이는 이제야 그 나쁜 여자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았다.늑대 외할멈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지만 또 왠지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한수민 계좌에는 돈이 없어. 돈은 다 그 여자 남편 윤석후가 갖고 있어. 그래서 요즘에 밤마다 윤석후 회사 시스템을 뚫고 있어.”그 말을 들은 윤우는 엄지를 내보이며 예찬이를 칭찬했다.“형, 진짜 짱이야!”예찬이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구시렁 거렸다.‘쓸모없을 땐 박예찬, 쓸모가 생기면 형이구나?’“됐어, 별일
목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느껴지자 한수민은 동공이 움츠러들며 손에 쥔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뭐... 뭐 하는 거야?!”은정숙은 손에 든 칼을 꽉 쥐고는 더 가까이 들이댔다.“민정이한테 돈 돌려줘요!”“돈... 돈은 다 우리 남편한테 줬는데 무슨 돈을 달라는 거야. 얼른 칼 내려놔, 아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한수민은 애써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협박에 은정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평생 손에 핸드백보다 더 무거운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사모님께서 무슨 힘으로 날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지 참 궁금하네요.”한수민은 목이 조금 아파지는 것이 느껴졌다. 칼끝에 베여 피가 나는 것만 같았다.“진정해. 원하는 거 돈이잖아. 내가 줄게.”죽음 앞에서는 역시 잘난 인간은 따로 없었다.한수민이 죽는 걸 두려워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은정숙이 오늘 죽이려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엄마, 문은 왜 닫고 있어요? 나 엄마한테 볼일 있으니까 문 열어봐요.”이때 방문 밖에서 갑자기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자 은정숙은 일부러 당황한 듯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당신 죽여버릴 거야. 민정이 대신해 복수 할 거야!”잔뜩 겁이 난 한수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에 든 칼을 빼앗으려고 잡았다. 바로 그때, 은정숙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칼끝을 자신한테 겨눠 힘껏 찔렀다.“아!”순간 한수민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새빨갛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피가 흥건했지만 그녀는 왠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시 보니 은정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뭐... 뭐야!”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서둘러 칼은 쥔 손을 놓자 은정숙이 쿵, 하며 바닥에 쓰러져서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당신네처럼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을 내가 상대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한가지는 할 수 있어요. 내 목숨으로... 당신을 평생... 불안하
”말하지 마요, 아줌마.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힘을 아껴요.”목소리가 벌써 잠겨버린 박민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응...”은정숙은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그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을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아줌마...”“그래... 민정아... 울지 마, 울지 마...”너무 울어서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박민정은 흐느끼며 대답했다.“네, 저 안 울어요. 아줌마는 괜찮아질 거예요. 꼭 괜찮을 거예요.”은정숙의 아직 남아있는 기운은 분명 회광반조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천천히 창밖으로 향해 하얀 바깥세상을 눈동자에 담았다.“이제... 곧 새해구나... 설날이야...”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박민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맞아요.”“우리 집에 가자꾸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네, 그래요. 우리 집에 가요.”박민정은 두 팔을 뻗어 은정숙을 안았다. 마르다 못해 뼈밖에 없는 은정숙은 별로 힘이 없는 박민정도 거뜬히 안아 들 수가 있었다.은정숙을 안고 긴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갑자기 떠나갈까 봐 박민정은그녀한테 계속하여 말을 걸었다.“지금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설이 되면 떡국도 먹고 만두도 빚어요, 우리. 설이니까 물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죠? 윤우랑 예찬이가 세배도 하고, 세뱃돈도 주셔야죠.”은정숙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지고 눈앞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박민정도 품 안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 엄마... 가면 안 돼요. 제발... 저랑 계속 같이 있기로 약속했잖아요...”박민정은 진작에 은정숙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엄마보다 더 친한 엄마였다.그녀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은 은정숙은 마지막 힘을 다 해 두 글자를 뱉었다.“그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남준 씨, 곧 설날이에요.”“응, 맞아.”“이제 아줌마는 여기 없네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옷을 꽉 붙들며 슬픔을 참아보려 했다. 유남준은 위로의 말 대신 그녀를 꼭 껴안으며 이마에 다정한 뽀뽀를 남겼다.그 순간, 이미 흘릴 만큼 흘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가에 또 눈물이 차올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다 제 탓이에요. 나 때문이 아니면 한수민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건데...”“아주머니가 너한테 남긴 편지가 있어. 영천댁이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그 편지를 가져왔어.”그녀의 자책을 끊어내며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들고 그를 보며 물었다.“어디 있어요, 편지?”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협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박민정이 서둘러 그 편지를 열어 보니 은정숙이 쓴 몇 구절 글씨가 눈 안에 들어왔다.“민정아.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됐을 때는 난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다 엄마의 팔자고 운명이야.”“엄마가 너한테 했던 얘기 기억하니? 사람이 늙으면 결국 다 죽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두렵지 않아. 그저 죽기 전에 널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야.”“의사 말로는 엄마가 이제 살날이 며칠 안 남았대. 나도 한수민을 어찌 못할 거란 걸 잘 알아. 어리석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면 다신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끝으로, 너의 엄마라고 자칭한 걸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정말로 널 내 친딸로 생각해 왔어. 이번 한 번만 염치 불문하고 싶구나. 다음 생엔 우리 꼭 친 모녀로 태어나자. 나랑 약속할래?”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박민정은 마음이 찢겨나가는 듯이 아팠다.“그런 거였구나...”그녀는 은정숙이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남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한수민이
유남우는 그녀한테 쌓인 눈을 털어주려고 하였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에 몸을 피했다.“도련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유남우는 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뒤늦게야 거둬들였다.“뉴스를 보고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전에 나한테 아주머니는 네 친어머니만큼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네가 많이 슬퍼할 거 같아, 걱정돼서 보러 왔어.”말을 마치고 유남우는 은정숙의 묘비를 향해 절을 했다.그가 어린 시절의 일을 아직도 그렇게 똑똑히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박민정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고마워요... 괜찮아요, 전.”추위로 얼굴이 퍼레진 박민정은 눈시울이 빨갛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내가 얘기했잖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라고.”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끝내 입을 열었다.“전 이제 돌아가야겠어요.”“데려다줄게.”그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아뇨, 차를 근처에 주차했어요.”“너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유남우의 책망하는 말투에는 관심이 듬뿍 담겨있었다.“내 차로 가.”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박민정은 그를 따라 차로 향했다.유남우는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여느 때와 같은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눈 좀 털어. 아니면 이따 감기 걸릴 수도 있어.”“고마워요.”수건을 받아 몸에 있는 눈을 털고 나서 차에 올라타자 유남우가 운전석에서 히터를 켜고 그녀가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틀었다.순간 박민정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이 노래를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해외에서 치료받을 때 자주 들었었어.”유남우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해외에서 잘
은정숙의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난 조하랑과 예찬이는 박민정과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유남우의 차가 하도 커서 네 명이 탔는데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고급 차라면 조하랑도 꽤 많이 타봤다. 특히 최근에는 예찬이 덕분에 고급 차 구경을 더 많이 해보긴 하였지만, 차 내에 각종 의료 장비와 의사까지 갖춰져 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차에서 바로 치료하면 될 것 같았다.세 사람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박민정과 작별하고 난 뒤 유남우는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그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조하랑은 박민정한테 물었다.“남준 씨는 어디 갔어?”“내가 먼저 윤우랑 같이 돌아가라고 했어.”“아아...”조하랑은 또 박민정의 옷이 일부 젖어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유남준을 나무랐다.“그런다고 그냥 돌아가? 곁에서 널 지키지도 않고. 우산이라도 씌워주든가 해야지.”절친으로서 조하랑은 박민정이 그녀한테 잘 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내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들어가자, 춥다. 너랑 예찬이 감기 걸리겠어.”“어, 그래.”조하랑은 예찬이를 데리고 박민정의 뒤를 따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밖이 추워서 그런지 집안은 유난히 따뜻했다.유남준과 윤우는 이미 요리사한테 부탁하여 박민정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으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윤우는 조하랑과 예찬이를 보고 좀 의아해했다.“이모, 형. 여긴 어떻게 왔어?”“좀 늦었는데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지?”조하랑이 오자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물론이지.”조하랑은 두 아이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왠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박민정은 별로 밥맛이 없었다.유남우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와 물었다.“괜찮아?”그는 유남우처럼 따뜻한 말로 남을 위로해 주는 말재주가 없었다.“네.”박민정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플 텐데 얼른 식사부터 해요. 난 배가 안 고파요.”“안 고파도 먹어야 해.”은정숙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