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바람이 거세차게 불고 창밖의 대나무 한 그루가 쌓인 눈에 눌려 휘어졌다.간호사가 박민정에게 저녁밥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녀는 입맛이 없어서 몇 입밖에 먹지 못했다.고영란은 언제 문을 밀고 들어왔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닫았다.이전의 화려했던 모습에 비해 고영란은 지금 유난히 초췌하고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고영란은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며 직접 물었다.“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너와 남준이의 아이지?”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했다.“아니에요.”그러자 고영란은 이마를 찌푸렸다.하지는 그녀는 가까스로 진정을 되찾고 다시 말했다.“나한테까지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동안 넌 내내 남준이와 함께 있었어.”그러자 박민정은 되물었다.“잠잘 때도 우리를 지켜본 건 아니잖아요?”고영란은 말문이 막혔다.유남준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게다가 박민정은 배 속의 아이가 남준이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설마 앞으로 유씨 집안을 정말 다른 사람에게 내줘야 해야 하는 걸까.그녀는 억울했다.그래서 그녀는 박민정의 침대 곁으로 와서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민정아, 예전에 내가 너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었던 건 인정해.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로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봐. 네 배 속의 아이가 분명히 우리 유씨 집안의 아이잖아.”박민정은 고영란이 강한 여자인 것을 알았고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주면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뺏어갈 것이라고 짐작했다.“어머님, 이미 할 말은 다 했어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아드님에게 물어보세요.”고영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남준을 언급하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무슨 염치로 남준에게 물어보라고 해? 남준이는 널 구하려고 다쳐서 지금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어. 의사가 남준이의 두 눈이 유리에 찔려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해.”두 눈이 유리에 찔려 완전히 망가졌다.박민정은 넋을 잃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영란을 쳐다보았
그러자 고영란은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갔다.박민정도 일어나서 따라갔지만 2층 중환자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외에 누구도 2층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병실로 다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단지 유남준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두 눈도 제발 아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에게 빚지고 싶지 않아서였다.얼마 후에 경호원이 문을 두드렸다.“박민정 씨, 사모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그러자 박민정은 병실에서 나와 2층으로 향했다.조하랑의 말처럼 2층 구역의 경비는 매우 엄격했다. 경호원과 의료진 외에는 고영란 한 사람뿐이었다.경호원이 앞장서서 고영란에게 말했다.“사모님, 박민정 씨가 왔습니다.”“알았어.”고영란은 병실 문으로 걸어가서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남준이가 널 만나고 싶어 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어들어갔다. 그녀는 머리와 눈에 붕대를 가득 두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그의 주위에는 의료기기가 가득 꽂혀 있었고 붕대 때문에 그의 완전한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박민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겪은 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병실에서 허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누워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유남준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멀찌감치 그를 바라보며 목이 메었다.박민정이 다가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유남준은 손을 들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민정아...”“...”유남준은 줄곧 그녀를 박민정이라고 불렀다.박민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걸어가면서 말했다.“제가 왔어요.”박민정의 소리를 들은 그는 비로소 안심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말했다.“나 지금 너무 아파, 민정아.”박민정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애교를 부리는 유
박민정은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녀도 예전에 이 방법을 사용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유남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유남준 씨, 연기하지 마요.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은 거 다 알아요.”유남준의 손안이 텅 비자 그는 다시 허공을 더듬기 시작했다.“민정아, 어디 있어?”그는 앞이 안 보이니 그저 손으로 한바탕 앞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방금 다 처치를 마친 상처가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것 같았다.그는 매우 심각한 부상에다가 방금 세게 움직였기 때문에 머리가 큰 돌에 맞은 것처럼 강한 통증을 느꼈다. 간호사는 그에게 진정제 주사를 놓아주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하지만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민정아...”의사는 박민정과 고영란을 밖으로 불러냈다.“박민정 씨, 더 이상 환자를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진단에 따르면 유 대표님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뇌진탕과 뇌신경 손상으로 인해 기억을 잃었습니다.”“연기하는 게 아닙니다. 국내외에서도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박민정은 아까 유남준의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그런데 저는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 거죠?”“우리가 수술할 때 유 대표님은 계속 민정 씨 이름을 중얼거렸어요. 이것이 바로 민정 씨를 기억할 수 있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고영란도 자기 아들이 박민정에게 이토록 정이 들 줄은 몰랐다.고영란은 방금 유남준이 박민정만 있으면 된다고 자기를 밀어냈던 장면을 생각하니 질투심이 들었다.“제 아들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나요?”“이건 유 대표님 본인에게 달렸어요. 뇌신경 손상 질병은 아직 현대 의학으로 치료하기에 너무 부족합니다.”의사는 확신하지 못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눈은요? 회복될 수 있어요?”그러자 의사는 난처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고영란은 완전히 당황했다. 유남준이 눈이 멀고 기억까지 잃었으니 유앤케이 그룹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유남준이 교통사고가 나자 일부 주주들은 이미 냄새를 맡고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박민정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준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소리로 박민정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었다.“화장실에 좀 데려다 줄 수 있어?”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손을 뻗었다.“알겠어요.”그녀는 유남준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화장실까지 데려다주고 화장실 위치를 알려준 후 바로 떠났다.한참 후 갑자기 화장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쿵!”박민정은 다급히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니 유남준이 부주의로 세면대 위의 유리컵을 떨어뜨렸고 그는 허리를 굽혀 유리 조각을 주우려다가 손을 베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일어나세요. 손을 다쳤어요.”박민정은 황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그러나 유남준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어젯밤에 했던 물음을 다시 물었다.“나를 싫어하는 거야?”박민정은 어리둥절해하다가 대답 없이 그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간호사를 불러서 일단 먼저 지혈하도록 할게요.”10분 후, 간병인이 와서 화장실을 청소하고 깨지기 쉽고 날카로운 물건들을 모두 교체했다.유남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간호사가 그의 옆에서 손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어린 간호사는 때때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있더라도 타고 한 고귀함을 숨길 수 없는 얼굴이었다.간호사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박민정 씨, 이제 다 되었어요.”“감사합니다.”간호사가 떠난 후 박민정은 몸을 일으켜서 병실 문을 닫았다.어제 유남준은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그녀는 미처 그의 상황을 묻지 못했다.비록 의사는 그가 뇌신경이 손상되어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믿지 못했다.“유남준 씨,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나요?”그녀가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제 이름이 정말로 유남준이라 해요?”그러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다.‘설마 자기 이름 마저 잊은 거야?’“네.”“어젯밤 그 여자는 제 어머니였어요?”유남준은 기억을 잃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대화 중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다. 원래 박민
유남준은 박민정을 안고 있던 두 손을 놓았고 그의 얼굴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박민정은 그가 기억을 잃었다고 연기했던 것이 자신한테 들켜서 원래대로 돌아온 줄 알았다.그래서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이혼 소송을 다시 제기하겠어요.”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가방을 들고 나갔다.밖에 나서자 고영란은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박민정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우리 남준이가 지금 이렇게 됐는데, 아직도 이혼을 고집해?”박민정은 지금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고영란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우리 가정은 무너졌어요. 제 청력이 점점 나빠지고 중증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 아들이 저를 다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임신에 도움 되는 약을 한 봉지 한 봉지 줄 때는 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고영란은 할말이 없었지만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네 배 속에는 우리 유씨 집안의 아이가 있어. 이대로 가면 안 돼. 이혼하더라도 넌 아이를 우리에게 남겨줘야 해.”박민정은 어젯밤에 고영란에게 배 속의 아이가 유남준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박민정은 냉소하며 말했다.“어머님. 전 이미 몇 번이고 말했어요. 제가 임신한 아이는 유남준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못 믿으시겠으면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세요.”‘유남준에게 물어보라고?’고영란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정신이 혼미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후 그는 자기 이름도 모르는데 박민정 배 속의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는 더더욱 알 리가 없었다.“민정아,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난 네가 남준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어. 넌 그리 훌륭하지는 않아도 착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왜 이렇게 독한 사람이 되었어? 정말 구역질 나.”고영란은 홧김에 몇 마디하고는 문을 열고 유남준의 병실로 들어갔다.박민정은 퇴원 절차를 밟으러 갔다.병원을 나설 때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
유남준이 교통사고로 인해 실명되었다는 사실은 얼마 숨기지 못하고 며칠 후 각종 매체에서 보도했다.호산 그룹, 즉 유남준이 소유하고 있던 회사의 주식이 대폭 떨어졌다.순간 주주들의 민심이 흉흉해졌다.유명훈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조하랑은 박민정의 전셋집에 가서 티브이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말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사람이 실명하다니. 사람 일은 역시 어떻게 될지 몰라. 호산 그룹은 누가 물려받을까?”박민정은 과일을 잘라서 그녀 앞에 놓았다.“하랑아, 내가 재소하자고 한 건 어떻게 됐어?”그러자 조하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미안해.”“왜?”“며칠 전에 뉴스에 나온 너와 유남준 씨의 이혼 소송 기사를 아빠가 봐버렸어.”조하랑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아빠가 내가 변호사로 일하는 것을 알고 사람을 찾아서 내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했어.”조하랑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아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아빠는 나를 김씨 집안에 시집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이 정도 수단은 아무것도 아니야.”조씨 집안은 돈이 많았지만 조하랑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몹시 가난했다. 그러니 지금 나이가 되면 돈이 없어서 예전처럼 힘든 삶을 사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자기 딸을 진정한 돈이 많은 유명 가문에 시집보내서 딸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친정집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박민정이 묻자 조하랑이 대답했다.“한 달에 70만 원 정도 월급을 주는 사무원 일자리를 구했어. 아껴 쓰면 충분해.”조하랑은 자신의 아버지한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알려줘.”박민정이 말했다.그러자 조하랑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였다.“알았어. 이따가 다른 변호사를 소개해 줄게...”조하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가 휴대전화를 들어보니 고영란이
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서다희가 유남준과 무언가 말한 후 그는 박민정을 향해 걸어왔다.그는 박민정의 앞에 다가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민정 씨,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갑작스러운 비난에 박민정은 멍해졌다.서다희는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다가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유 대표님은 민정 씨를 구하려고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기억을 잃은 대표님을 이용해서 이혼할 수 있어요?”기억을 잃었다고...박민정이 들어왔을 때 유남준과 서다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한번 그가 가짜로 기억을 잃은 척하는 줄 알았다.그녀는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이용이라니요? 유남준 씨가 기억을 잃기 전부터 저는 이혼을 하겠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서다희를 곁을 지나 유남준의 앞으로 왔다.“유남준 씨, 제가 왔어요.”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자 유남준의마음은 떨렸다.그는 몸을 일으키며 일부러 박민정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다희야.”그러자 서다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대표님, 제가 곁에 있습니다.”“이혼 창구로 가자.”유남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의 그는 기억을 잃지 않을 때의 모습처럼 보였다.두 사람이 앞장서고 박민정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그들은 이혼 신고 창구 앞으로 왔다.서다희가 유남준의 곁에 서 있었고 직원은 유남준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그들이 제출한 자료를 둘러보다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두 사람은 5년 전에 이혼 신고를 했다가 최근 이혼 소송을 했는데 법원에서 기각당했군요.”그러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지금은 이 사람도 이혼을 원합니다.”직원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계속 정보 내용을 확인하다가 유남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최근에 유남준의 뉴스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기에 그는 이름을 보자마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호산 그룹의 대표가 지금 자기 앞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 대표님이세요? 대
결국 이혼하지 못했다.솔직히 유남준뿐만 아니라 서다희도 놀랐다.늘 연약한 모습을 보이던 박민정이었지만 오늘은 성질이 사나운 여자로 변했다.그들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떠나자 심지어 차를 몰고 그들을 뒤따르던 사람도 있었다.오늘 인터넷에서 또 어떤 뉴스가 나올지 아무도 몰랐다.차 안에 앉아있던 박민정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그녀의 바로 옆에 앉은 유남준은 갈 데 없는 두 손을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예전에 있었던 일은 미안해.”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자 입술을 오므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말도 하지 않으니 유남준의 마음은 칼에 베인 듯했다.“내 기억 속에 너는 나를 많이 사랑했어, 나도...”널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오늘 가정법원에서 박민정의 말을 들으니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내가 예전에 민정이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구나...’박민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요 몇 년 동안 그녀는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유남준의 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지금 유남준이 실명하자 그녀가 이혼하는 건 배은망덕한 거라고 여겼다.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유남준의 청각은 유난히 예민했다. 그는 박민정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았다.“미안해.”그러자 박민정의 몸이 굳어졌다.유남준은 몇 년 동안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유남준 씨, 왜 기억을 잃으신 거예요?”유남준은 또 목이 메어왔다.박민정은 자기 어깨에서 그의 손을 떼었다.“제 몸에 손 대지 마세요.”유남준은 손을 떼어 다시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알았어.”그의 말에 박민정은 유남준이 정말 기억을 잃었다고 확신했다.기억도 잃었고 성격도 변한 것 같았다.사실 성격은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
오준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설마요? 혹시 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게 맞아요? 전 오현웅 씨의 아들, 오준수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 대표님과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젊은 사람이 능력까지 갖췄다고 칭찬도 했었다고요.”순간 경호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졌다.“계속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나 오준수는 이대로 가기 싫었다. 막무가내로 병실 안을 향해 달려던 이때, 그와 그의 비서는 몇 명의 경호원에 의해 보기 좋게 쫓겨났다.그렇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모습을 본 이천애가 깜짝 놀라 물었다.“오빠,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누가 감히 오빠를 때렸는데?”이천애의 쏟아지는 물음에 오준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꺼져!”그러자 이천애도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예전 같았으면 금방에라도 달려가 그녀를 달래줬을 텐데 지금 이천애를 보면 자꾸 손연서만 생각났다.“나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쓸데없이 연서한테 시비 걸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없었잖아!”이혼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정씨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말에 이천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연서랑 이혼하길 잘했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말이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가 다시 차분하게 되묻자 오준수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모조리 말해줬다.이천애는 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연서 씨가 어떻게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일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박 대표라는 사람은 고작 친구 하나 때문에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대요? 우리가 어떤 가문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그러나 오준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엔 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오씨 가문과 계약해도 그만, 안 해도 아무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
그러자 손연서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답했다.“응,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오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다시 설득했다.“연서야, 만약 네가 박민정 씨한테 우리랑 재계약할 수 있도록 한 마디만 말해주면 내가 당장 너랑 재혼해 줄게.”그 말에 손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오준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웃어?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손연서는 한참 웃다가 겨우 멈추고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저기요, 오준수 씨? 설마 지금 내가 그쪽이랑 재혼하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고 재혼도 하기 싫어. 난 그저 당신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기대해 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손연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준수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대화가 단절되자 화도 나는 한편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예전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손연서와 이혼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누가 손연서한테 이런 황금 동아줄과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오 대표님,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나요?”비서가 조심스레 묻자 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모님은 무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사모님이야.”“내가 고작 이런 여자한테 당할 줄 알아? 지금 당장 박민정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네.”말을 마치자마자 비서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리고 손쉽게 박민정은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오준수는 여러 가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 뒤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박민정은 마침 손연서와 통화 중이었다.“민정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제대로 그 사람 골탕 먹였거든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저랑 재혼하자는 거 있죠?”그러자 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
오준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엔 그룹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부사장님, 여태껏 저희랑 잘 지내왔으면서 이번 건은 왜 갑자기 취소한다는 걸까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굴 건드렸는지 아직도 몰라요?”오준수는 당연히 몰랐다.“저는 건드린 적이 없는데요?”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는 전혀 오준수답지 않았다.부사장도 이처럼 멍청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지엔 그룹의 새 대표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나요?”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느라 회사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한때, 그의 아버지 오현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던 사람이라 오준수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부담이 오준수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오준수가 다급히 비서에게 묻자 비서는 현재 신임 대표는 정수미의 딸인 박민정이라고 알려줬다.“박민정...”오준수는 왠지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을 계속 곱씹어 봤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손연서 씨 친구입니다.”순간 오준수는 온몸이 굳어졌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에 대고 대답하려고 보니 상대방 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지엔 그룹 부사장은 지금 오준수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오준수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그러면서 머리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서가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라고? 어쩐지 우리랑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더니 외부에도 우리랑 계약하지 말라고 했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 대표님, 사모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아까까지 손연서라고 이름을 부르던 비서도 눈치껏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그 의미를 눈치챈 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연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