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부하들은 지금 조하랑의 집은 물론이고 하성 전체를 뒤지고 있다.조하랑 별장의 도우미들이 한 명 한 명 끌려가 조사를 받기 전에 김인우가 박예찬을 데리고 간 것은 오히려 행운일 지도 몰랐다.유남준은 박민정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이제 며칠 남았지?”박민정은 그 말에 눈을 깜빡거리다 뒤늦게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열흘이요.”아니, 정확하게는 오늘을 제외하고 3일 뒤면 이제 이곳을 떠나게 된다.“이따가 도쿄로 갈 거야.”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이따가 바로요?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진짜 부부 행세 같은 건 이미 포기해버린 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유남준은 기어코 한 달을 다 채울 생각인 것 같다.“내일모레 돌아올 거야.”그는 예전에 박민정이 얘기했던 여행계획에 따라 오늘은 도쿄로 가서 야경을 구경하고 내일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가가 그린 곳을 돌아볼 예정이다.“알겠어요.”내일모레면 시간도 딱 맞았다.“지금 바로 준비할게요.”“그럴 필요 없어. 거기에 다 준비해 뒀으니까.”“그래요.”원래 연지석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연락은 아마도 도쿄에서 갔다 온 뒤에 해야 할 것 같다.반 시간 후 두 사람은 전용기에 올라탔다.박민정은 유남준의 곁에 앉아 불빛으로 반짝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 시간이 넘어갔을 때 임신해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유남준은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뒤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한 채 일에 매진해 마찬가지로 피곤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이미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때 서다희가 담요를 가져다주려고 다가왔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유남준은 빠르게 시선을 거두어들이더니 담요를 건네받아 박민정에게 덮어주었다.“호텔은 예약했어?”유남준이 물었다.“네, 물론입니다.”서다희는 대답을 한 후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물었다.“대표님, 열흘 뒤에 박민정 씨가 여전히 떠나겠다고 하면 정말 보내주실 겁니까?”유남준
유남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환불은 안 해. 싫으면 그냥 버리던가.”그는 옆에 놓인 상자를 발로 걷어차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 도착한 후 그는 몸이 가려워 알레르기약을 한 번 더 섭취하고 샤워했다.박민정은 홀로 소파에 앉아 다시 한번 선물을 바라봤다.‘선물이 족히 백 개는 훌쩍 넘겠네.’유남준과 결혼한 후 박민정은 자신의 개인 자산을 몰래 그의 회사에 투자했기에 일상적인 물건을 사는 돈은 아깝게 느껴졌다.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일기장에 적어둔 후 가격까지 적어놓고 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자신은 정말 미련할 정도로 유남준을 사랑했다.손만 까딱하면 살 수 있는 물건을 행여 그의 비즈니스가 잘 안 될까 봐 혼자 전전긍긍하며 절약을 하고 있었다니...유남준은 화장실에서 꽤 오래 있다가 나왔고 그가 나왔을 때 박민정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에는 두드러기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얼굴 왜 그래요?!”유남준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괜찮아. 꽃 향이 너무 세서 이런 것뿐이야.”“다희 씨한테 전화해서 당신 병원으로 옮겨가라고 해야겠어요.”박민정이 휴대폰을 꺼내자 유남준이 그녀를 제지했다.“괜찮아. 이대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 져.”내일 박민정에게 보여줄 것도 있는데 이대로 병원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박민정은 그 말에 정말 괜찮은 줄 알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그러다 침대에 누운 유남준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준 씨!!”“윽.”반 시간 후 구급차 소리가 들리고 유남준은 병원으로 이송됐다.박민정은 그에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의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그녀는 병원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박민정의 기억 속 유남준은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건 없었다.그때 서다희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알레르기약이 효과가 없을 줄은 몰랐어요. 민정 씨가 제때 전화를 해주셔서
하지만 입술이 닿는 순간 박민정이 빠르게 피해버렸다.유남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곧바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이제 괜찮아. 그보다 바보도 아니고 왜 여기서 밤을 새워?”어젯밤 서다희가 다시 그녀를 데리러 나왔지만, 박민정은 한사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유달리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혹시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이름마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게다가 지금까지 봐 온 유남준은 누군가가 자기 행세를 하는 걸 잠자코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남준 씨, 우리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거 맞죠?”유남준은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어젯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이러는 거로 생각해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응, 우리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십몇 년이 넘어가.”박민정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그래요. 십몇 년이죠...”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착각을 했을까.서다희는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남준이 여자에게 이토록 다정한 건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어머니인 고영란에게조차 이런 다정한 행동은 해준 것이 없을 것이다.유남준은 갑자기 울어버리는 그녀를 보더니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주었다.“나 진짜 괜찮아. 이까짓 알레르기가 뭐라고. 나 안 죽어.”정말 다정한 말투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이 어릴 때와는 사뭇 달랐다.예전의 그 남자는 다치고 와서 이렇게 말했었다.“우리 민정이 내 걱정 많이 했겠네.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 안 아플 게.”박민정은 답을 뻔히 알면서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같았다.애초에 성격부터가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일 수가 있을까.하지만 그때는 이 차이를 의심해 볼 겨를도 없었다. 유남준이 이지원과 연애를 한 후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박민정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목구멍이 메어왔다.유남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진주시.이지원은 퇴원 후 내일 있을 크랭크인 준비를 시작했다.입원 중에 유남준에게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하예솔이 다가와 물었다.“지원아, 내일 있을 크랭크인에 영향력 있는 매스컴을 전부 불러뒀어. 넌 이번 드라마로 아주 대박이 날 거야.”“예솔아, 고마워.”이지원이 달콤하게 웃었다.“우리 사이에 감사 인사는 무슨.”하예솔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너 크랭크인 날 몇 명 더 초대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너 대신 박민정 초대할게. 지금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줘야지.”이지원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입 밖으로는 자신의 친구를 말렸다.“그러지 마. 집도 망하고 이혼도 했는데 불쌍하잖아.”“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보기나 해.”하예솔이 문자를 보내자 예상외로 박민정은 금방 수락했다.이에 이지원도 더 이상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이따 내 남자친구 오게 되면 나 대신 얘기 좀 해줘.”“응, 알겠어.”하예솔이 떠난 후 얼마 안 가 권진하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하예솔이 돌아오자 권진하가 그녀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인사를 하며 두 사람을 배웅하는데 마침 이지원의 휴대폰 알림이 울렸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유남준이었다.[크랭크인 당일에는 따로 사람을 보내 줄게. 그리고 넌 박씨 가문 옛 저택을 얼마에 팔 건지 얘기해 봐.]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이지원은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박씨 가문 옛 저택은 왜?”“넌 그냥 팔기만 하면 돼. 다른 건 쓸데없이 물어보지 마.”유남준의 목소리는 쌀쌀했다.이지원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가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요구에 따라 값을 불렀다.두원 별장.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박민정은 우연히 유남준의 휴대폰을 보다가 이지원이 많은 메시지를 보낸 것을 발견했다.그리고 역시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박예찬은 이틀이나 유치원에 가지 않았다. 김인우는 집에서 일하면서 박예찬과 함께 있어줬다.밖의 조하랑은 너무도 시끄러웠다.김인우는 원래 조하랑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할아버지를 찾아 간다는 소리를 듣고 얼른 조하랑을 들어오게 하고 친자 확인에 동의했다.조하랑은 박예찬을 안고 엉엉 울면서 말했다.“우리 아들, 많이 놀랐지?”박예찬은 조하랑이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연기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박예찬은 작은 손으로 조하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얘기했다.“엄마, 울지 마요. 나 괜찮아요.”김인우는 이 두 사람을 보면서 박예찬이 자기 아들이 아닐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게다가 친자 확인은 4, 5일 정도 걸린다. 그동안 박예찬은 무조건 김인우 곁에 있어야 한다.“김인우 씨, 지금 한 말은 꼭 지키길 바라요.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를 모셔와서 얘기할 테니까요!”조하랑은 김인우의 약점이 김훈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마침 김훈은 조하랑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김인우는 짜증을 내면서 얘기했다.“알겠으니까 이만 가봐.”조하랑은 또 박예찬을 안고 김인우한테 학대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떠났다.그리고 돌아가자마자 박민정에게 얘기해주었다.그 소식을 들은 박민정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이제 내일 떠나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하지만 그녀는 유남준이 이지원의 손에서 박씨 가문 옛 저택을 사왔고 또 바음 그룹 빌딩을 다시 수리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유남준은 이 모든 것이 준비되면 박민정에게 서프라이즈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유남준은 박민정과 다시 아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다만 두 사람 중, 한 명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고 한 명은 도주를 계획하고 잇었다.침실에서.박민정은 간단하게 짐을 정리했다. 가방에는 박예찬과 박윤우가 좋아하는 인형이 있었다.유남준이 사준 선물은 열어보지도 않았고 챙기지도 않았다.박민정은 해외의 비서에게 전화해 물었다.“회사에 지금 돈이 얼마나 있죠?”
유남준은 그 문자를 보고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다.짜증이 난 그는 바로 문자를 지워버렸다.두원으로 돌아오니 박민정은 이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유남준은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김인우도 아이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유남준은 천천히 박민정에게 키스를 했다.박민정이 거부할 틈도 없게 말이다.밤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박민정은 욕실에서 물 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일어났다.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세수를 한 후 가방을 메고 유남준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나왔다. 그는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보다 많이 온화해 보였다.두 사람이 같이 별장을 나설 때, 밖의 날씨는 매우 추웠고 빗방울이 약간씩 떨어지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정림원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유남준의 벨소리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이지원이 걸어온 전화였다.박민정도 발견했다. 다만 유남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들어왔다.[오빠, 전화 좀 받아주면 안돼? 문제가 좀 생겼어.]박민정은 크랭크인에서 이지원의 실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었다.박민정은 이지원이 이렇게 빨리 유남준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받아요.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박민정이 부드럽게 얘기했다.이지원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유남준은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남준은 전화를 끊고 박민정에게 얘기했다.“크랭크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다녀와야겠어. 얼른 정림원으로 돌아올게.”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회사의 대표가 직접 가야하는 걸까.박민정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그저 상대가 이지원이라서 그런 거겠지.그녀는 평소 답지 않게 시원하게 얘기했다.“알겠어요. 나랑 윤우는 정림원에서 기다릴게요.”이번에는 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마치 밤하늘과 바다를 담은 듯한 눈은 아주 예뻤다.유남준은 갑자기 그녀를 껴안았다. 박민정은
그 시각, 연지석과 하민재는 멀지 않은 건물에서 술을 마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경하려고 했다.하민재는 연지석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유남준을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형, 이러면 앞으로 국내에서 일하기 어려울텐데.”연지석이 하민재를 보면서 얘기했다.“지금은 뭐, 쉬워?”하민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유남준은 이미 연지석의 모든 길을 막아놓은 것과 같았다.유남준이 연지석과 하민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몰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하민재도 별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유남준 표정이 어떻게 구겨질지 궁금하네. 그런데 저 이지원은 정말 꼴 보기 싫어.”하민재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그에게도 영화제작사가 하나 있었기에 하민재는 불공정한 수단으로 자리에 오늘 여자 연예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열시. 크랭크인이 시작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언론사와 기자들도 있었고 생방송 라이브를 책임진 방송사도 있었다.적지 않은 팬들과 관객들이 가득 모여있었다.유남준이 오자 여러 언론사는 또 한번 놀랐다.이지원은 그를 보고 감독과 대화를 나누더니 바로 유남준 앞으로 왔다.기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사진을 찍었다.“남준 오빠, 그 사람이 어디에 숨어있을지도 몰라요. 너무 무서워요...”이지원은 몸을 벌벌 떨면서 얘기했다.“전에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크랭크인에서 다친 연예인도 있대요. 혼자면 모르겠는데 오늘 메이크업 받으면서 보니까 다른 사람이 더 있더라고요. 연지석 경호원 같은데...”이지원은 자기가 아무렇게 뱉은 말이 진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는 길에 이미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사했어.”유남준이 대답했다.그리고 그는 불쾌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보더니 얘기했다.“일자리 잃고싶지 않으면 다들 꺼져!”기자들은 얼른 카메라를 돌렸다.하지만 그래도 몰래 라이브 방송을 내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다른 한편.박민정은 이미 지도에서 본 대로 윤우를 데리고 정림원에서 나
10시가 되었을 때, 크랭크인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의 사람을 따라 비행기에 올라 직접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촬영기지.새 드라마의 크랭크인은 원래 감독이 맡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지원이 끼어드는 바람에 오늘의 주인공은 이지원이 되고 말았다.감독은 이지원같은 실력 없는 스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의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맞춤 제작한 예복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선 이지원이 드라마 소개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멀지 않은 곳의 유남준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그래서 꽃다발을 들고 점점 다가오는 임수호를 발견하지 못했다.정장을 차려입은 임수호는 더는 이지원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았다.임수호가 이지원과 10미터 거리로 좁혀졌을 때, 이지원은 그제야 임수호를 발견하고 경호원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의 경호원은 이미 연지석의 사람들에게 제압당했다.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임수호가 올라가 얘기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이지원 전 남자 친구입니다.”그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유남준의 사람들이 얼른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다.이때 누군가가 유남준의 곁에 왔다.“유 대표님, 뭘 그리 조급해 해요? 저 사람 익숙하지 않아요?”연지석이 얘기했다.연지석의 말을 듣고 다시 임수호를 쳐다보자 유남준은 갑자기 박민정을 차로 친 사람이 떠올랐다.동일 인물이었다!그는 핸드폰을 들고 경호원들더러 끼어들지 말라고 전했다.이지원은 낯색이 파리하게 질렸다.“경호원 어딨어요? 얼른 이 사람을 끌어내요! 난 모르는 사람이라고요!”하지만 이지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같은 드라마 스탭 중 한 명이 올라가려는데 다른 사람이 막아나섰다.“왜 경호원들이 지켜주지 않겠어. 잘 생각해봐.”그제야 스탭은 이지원이 사람을 잘못 건드린게 아닐까 생각했다.이지원은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주변을 보다가 유남준 옆의 사람을 확인했다.연지석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