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들이 예찬이랑 윤우구나?”외할머니는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진 똑같이 생긴 두 아이를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였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얌전하게 인사했다.“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그래, 그래. 어서 와서 우리 곁으로 오너라. 같이 들어가자.”아이들이 자신을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 외할머니는 더욱 기뻐했다.외할아버지 역시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원래 정씨 가문이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안으로 들어가면서 외할아버지는 문득 물었다.“증손주가 더 있다고 했지?”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두 아이가 더 있어요. 그런데 아직 너무 어려서 갑자기 낯선 곳에 오면 적응하기 힘들까 봐 이번에는 데려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데려올게요.”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진주로 직접 보러 가면 되지.”“네?”정수미는 순간 당황했다.원래라면 연세도 많으시니, 장거리 이동을 권하지 말아야 했지만, 정보주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정보주는 그녀에게 눈짓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외삼촌과 외숙모께서 정말 기뻐하고 계셔. 괜히 기분 상하게 하지 마.”정수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사실 어르신들이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거지 실제로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 굳이 안 좋은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알겠어.”그렇게 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 서주의 특별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민정아, 너희 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배고프지? 일단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먹고 싶은 걸 골라봐. 가볍게 먹은 다음에 점심을 따로 차려줄게.”외할머니가 말했다.그녀는 요즘 젊은이들이 식사보다는 간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어렵게 온 박민정이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맛있게 먹기를 바랐다.“네.”가족들은 함께 간식을 먹
커다란 안방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침대 하나가 있었는데 말이 침대지 크기가 거의 방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옛날 집안의 여자들은 거의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쭉 침대에서 생활해야 하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그리고 두 어르신이 자신에게 준비해 둔 침대를 보고 나서야 말로만 들었던 방만한 침대가 있구나 싶었다.또한 화장대며 세면대 등 기본적인 가구들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이런 침대를 만들어내려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시간은 최소 5년은 넘게 걸린다고 했다.그러기에 당연히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박민정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봤는데 너무 편안했다.그러다가 문득 그때 자신에게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또 보육원에 보내지지 않았다면 이런 집에서 그들의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기에는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흘렀지만 뒤늦게라도 가족을 되찾은 걸 감사하게 여겼다. 박민정은 아직 너무 피곤한 건 아니였기에 조하랑에게 자신도 서주에 도착했다고 알리고자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빠르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아.”“하랑아, 나 오늘 서주에 도착했어. 넌 좀 어때?”박민정의 물음에 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아, 그런데...”조하랑의 우물쭈물한 대답에 박민정이 되물었다.“그런데 뭐?”“잠깐만.”조하랑은 베란다 쪽에 가서 문을 닫았다.“인우 씨랑 같이 왔어.”여기에 온 목적이 김씨 가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글쎄 김인우가 따라왔다고 한다.“인우 씨는 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그러자 조하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나도 몰라. 그래서 지금 어떻게 다시 돌려보낼지 생각 중이야.”조하랑은 말하면서도 시선은 방안으로 향했는데 김인우는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혹시나 그가 박민정과의 대화를 엿들을까 봐 조하랑은 대충 지금 상황만 말해준 뒤
“하랑 씨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돌아가서 뭐 해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하랑 씨가 여기서 1년간 일해야 하는 거면 저도 같이 여기에 있을래요. 그리고 내년에 우리 둘이 같이 돌아가는 거죠.”조하랑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다시 그를 설득했다.“김씨 가문의 사업이 모두 진주에 있는데 인우 씨가 여기에 있으면 어떡해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제 나이도 많으신데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냥 돌아가요.”계속되는 거절에 김인우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저는 왜 자꾸만 하랑 씨가 저를 피하는 것만 같죠?”“제가 여기에 있으면 하랑 씨를 돌봐줄 수도 있는데, 그것도 싫어요?”순간 조하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다.그러다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꼭 쥔 채,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아무튼 저는 이곳에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냥 돌아가요. 같이 있으면 불편해요.”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김인우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순간 방안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애써 담담한 척,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혹시 밖에 다른 남자라도 숨겨둔 건 아니겠죠? 그걸 들킬까 봐 지금 저를 급히 보내려고요?”농담처럼 물었지만 혹시나 진짜로 맞다고 할까 봐 살짝 심장이 떨렸다.“아니요.”조하랑은 단번에 부인했다.“전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어쨌든 우리는 지금 부부고 여기서 아무리 1년이 아니라 10년을 혼자 지낸다고 해도 인우 씨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하랑은 자신만의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강연우와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다른 남자를 찾았을 것이고 절대 솔로로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러면 더욱 저를 내쫓을 이유가 없겠네요. 만약 저랑 같은 집에 사는 게 불편하면 제가 집 하나 따로 맡을게요. 가끔 만나서 밥이나 먹어도 좋으니까.”“안 돼
조하랑은 사실 자기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임신 초기라 입덧이 너무 심해 집에서 밥을 거의 못 먹었다시피 했고 억지로 먹어도 다 토해냈었다.불행 중 다행히 이런 음식은 먹을 수 있었고 의사도 지금 상황에서는 우선 산모부터 살고 봐야 하기에 먹고 싶은 음식은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는데 원래 야식까지 먹으려 했던 조하랑이 갑자기 메스꺼움을 느끼고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오늘 먹었던 음식을 전부 토해내기 시작했다.깜짝 놀란 김인우도 뒤따라와 그녀에게 휴지와 물을 건네주며 걱정스레 물었다.“탈 났어요? 당장 병원부터 가요.”그러나 조하랑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아니요.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어른이면 이런 길거리 음식은 될 수록 먹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 병원에 가자고 하니 또 말도 안 듣고.”김인우는 옆에서 걱정되는 마음에 계속 궁시렁거렸다.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조하랑은 화가 슬슬 치밀어 올라 단번에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으악! 계속 그렇게 잔소리만.... 할, 할 거면 당장... 당장 나가요!”그러나 김인우는 이 와중에도 그녀가 괴로워하는 게 더 신경 쓰였지만 여기서 더 뭐라고 하면 당장에라도 쫓겨날 것 같아 다시 말을 삼켰다.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조하랑도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거실 소파에 털썩하고 쓰러졌다.“이제 좀 괜찮아요?”“많이 나아졌어요.”조하랑은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이때, 김인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조하랑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뭐 하려고요?”“하랑 씨 얼굴이 너무 빨개서 혹시나 열이 있나 보려고요.”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조하랑은 이 순간이 너무 어색해서 빠르게 그의 손을 다시 뿌리쳤다.“괜찮다니깐요. 전 이만 씻으러 갈 테니까 인우 씨도 일찍 쉬어요.”말을 마친 뒤 다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그러고는 이제 슬슬 나오
“네 아빠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이었지. 그런데...”정수미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잘 생겼던 건 인정, 아니면 내가 데리고 살아주지도 않았을 거야.”박민정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수미는 한숨을 다시 내뱉었다.“사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가정 환경마저 평범한 아주 보통 집에서 태어난 남자였지.”“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결국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서주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으로 되었고.”“나랑 네 아빠는 어느 기업의 한 파티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연인 사이가 되어버렸어.”“그렇게 약혼도 하고 네가 태어난 거야.”정수미는 간단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줬다.“그때의 정씨 가문은 지금처럼 그리 화목하지 않았어. 내 위로 오빠 한 명이 있는데 그 사람은 네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서 데려온 아이였지. 그리고 내가 임신한 사실과 네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하자 내가 정씨 가문의 재산을 빼앗아 갈까 봐 몰래 우리한테 손을 썼어.”“그렇게 너는 그 사람 손에 의해 보육원에 보내졌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그 사람은 그때 널 죽이려 했어. 그런데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널 그냥 살려둔 거야.”“그때의 나는 너를 낳고 나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가 하마터면 그 사람이 지른 불로 인해 죽을뻔했어.”“그렇게 네 아빠가 나를 불바다에서 꺼내주다가 본인은 죽게 되었지...”여기까지 말하던 정수미의 눈가는 이미 빨개졌고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나랑 꼭 행복하게 살겠다고 맹세했는데 그렇게 나만 두고 가버린 사람을 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결국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말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괴로워 아무 핑곗거리나 찾았던 것 같았다.박민정은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아빠도 아마 엄마가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길 바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박민정은 어렵게 되찾은 자기 친엄마를 두 번 다시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이 기회에 원래 자기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박민정의 반응을 보고는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래, 그만 말할게. 너도 얼른 쉬어. 그리고 요 며칠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랑 즐겁게 놀기만 해.”“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정수미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정수미가 집에 돌아와 보니 길연서가 이미 그녀를 위해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대표님, 혹시 민정 씨한테 말했어요?”그러자 정수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약을 한 입 마셨다.“아니.”그러다가 허망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분명히 아주 간단한 몇 마디인데도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네.”길연서는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이런 일은 최대한 빨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나도 알아.”정수미는 빈 컵을 그녀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됐어. 오늘 너도 힘들었을 텐데 이만 가서 쉬어. 난 괜찮으니까.”“네.”길연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떴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은 일찍 깨어나 모든 준비를 마쳤다.도우미들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일어나자마자 학교 갈 준비를 도와줬는데 그 모습이 박민정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정근우와 임은숙은 박민정이 오늘 친구 만나러 간다는 걸 알고 특별히 조하랑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 뒀다.“민정아, 이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인데 네 친구한테 주면 분명 좋아할 거야.”그러나 박민정은 습관적으로 거절했다.“아니에요. 저랑 오래된 친구라 그럴 필요 없어요.”“바보야, 오래된 친구일수록 이런 서프라이즈도 가끔 필요한 거야.”임은숙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선물은 우리가 꼭 주고 싶었어. 우리 민정이랑 친구로 지내줘서 고맙다는 표시니까 빨리 갖고 가.”자신
그 사람이 박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조하랑의 입꼬리는 주체를 못하고 아래위로 춤을 췄다.‘뭐야?’‘민정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꼴값을 떨었지? 오늘은 그저 밥이나 먹고 쇼핑하는 건데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데려올 필요가 있나?’박민정도 차 안에서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하여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가게 안으로 달려가다가 뒤따라오는 경호원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시면 돼요. 그리고 밖에서 기다려줘요.”그러자 그들은 난감한 얼굴로 박민정에게 말했다.“안 됩니다. 정 대표님께서 무조건 10미터 이내로 밀착 경호하라고 했거든요.”순간 할 말을 잃은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경호원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사장은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저기, 혹시 저희 가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순간 박민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답했다.“가게는 괜찮네요. 인테리어도 심플해서 마음에 들고요. 왜요?”그녀의 대답에 순간 사장은 어리둥절했다.“그러면 여기까지 온 목적이...”사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저 친구랑 밥 먹으러 왔는데요?”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두리번거리다가 그제야 구석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조하랑을 발견했다.원래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조하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박민정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박민정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하랑아.”조하랑이 못 들은 척 고개를 수그리자 박민정은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뒤따라오던 경호원들이 사장에게 말했다.“이제부터 다른 손님은 받지 말아 주세요.”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사장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네네.”그렇게 경호원들은 다시 박민정의 주위로 흩어져서는 혹시나 위험한 인물이 없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맞은편에 앉자
정씨 가문의 두 노인은 아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차피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부자라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을 것 같았다.“이따 쇼핑 좀 하면서 혹시나 선물할 게 없나 봐야겠어.”“그래.”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주문하려고 웨이터를 부르니 뜬금없이 사장이 직접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혹시 두 분께서는 어떤 음식으로 주문하실까요? 메뉴판은 여기에 있는데 드시고 싶은 음식은 맘껏 주문하셔도 되겠습니다.”박민정은 너무 배고픈 상태가 아니어서 조하랑에게 주문을 넘겼다.그렇게 몇 가지 메뉴를 주문하니 빠르게 음식들이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조하랑은 밥을 먹다가 요즘 따라 김인우가 거머리처럼 자신에게 달라붙는다고 박민정에게 하소연했다.“나 어떡해?”이때, 조하랑은 또다시 속이 울렁거려 밥 먹다가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갔다.그 모습을 본 사장은 깜짝 놀라 얼굴까지 창백해져서는 다급히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혹시 저희 요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을까요? 아니면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라도 드신 건지요?”박민정은 안절부절못하는 사장의 모습을 보고 빠르게 해명했다.“아니요. 임신 중이라 입덧이 좀 심할 뿐입니다.”“아, 네네. 그러면 다행이네요.”그래도 여전히 창백한 얼굴인 사장을 보고 박민정은 점점 미안해지기 시작했다.왠지 오늘 이 가게에 적잖이 민폐 끼친 것 같아 박민정은 조하랑을 데리고 빠르게 가게에서 나와 그길로 쇼핑하러 갔다.그러나 두 사람이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웬 남자가 다시 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바로 김인우였는데 그는 아까부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시름 놓고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다가 조하랑이 토하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이상함을 느꼈다.하여 사장에게 방금 상황을 묻자 그는 사실대로 알려줬다.“아, 아까 그 아가씨가 지금 임신 중이라면서 음식을 먹으면 자주 토한다고 하셨어요.”임신!김인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잘못 들었나 싶어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