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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7화

Author: 윤지
이지원은 윤소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약점이 윤소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민정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민정 씨, 하랑 씨.”

이지원이 부드럽게 불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박민정과 조하랑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으나 곧 그녀를 알아차렸다.

비록 이지원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익숙했기에 박민정과 조하랑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당신이 여기서 뭐 해요?”

조하랑이 한 치의 예의도 없이 날카롭게 물었으나 이지원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냥 쇼핑하러 나왔어요.”

그녀의 눈빛은 순진무구했고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과거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그래요.”

조하랑은 무심하게 대꾸하더니 박민정의 손을 잡고 박예찬을 불렀다.

“가자.”

이지원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이지원이 다시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민정 씨, 축하해요. 곧 지엔 그룹의 대표가 되겠네요. 그리고 하랑 씨도 축하해요. 드디어 김씨 집안의 손자며느리가 되었잖아요.”

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돌아서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지원 씨, 정말 웃기네. 우리 축하는 당신 입에서 들을 필요 없어. 당신은 우리랑 비교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까.”

이지원은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순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제 신분이 두 사람과 비교될 리 없다는 걸 잘 알아요. 전 그냥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 위선적인 태도는 정말이지 변함이 없었다.

조하랑은 혀를 차며 비웃었다.

“역겹네. 내가 언제 신분을 운운했어? 당신이 저지른 짓들, 우리가 다 잊었다고 생각해? 이지원 씨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이지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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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gnay na kabanata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18화

    마침내 이지원은 윤소현과 함께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이지원은 겨우 마음을 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소현 씨.”윤소현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며 비웃듯 말했다. “김인우를 보자마자 호랑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떠네요. 설마 지원 씨가 예전에 조하랑을 납치했던 일이 들킬까 봐 겁나는 거예요?”이지원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무섭죠. 그런데 그 일, 소현 씨도 함께한 일이 아닌가요?”윤소현은 하품을 하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헛소리 마요. 지원 씨가 조하랑을 질투해서 벌인 짓이지 전 아니예요. 전 김인우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이지원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요즘 김인우가 당시 조하랑 납치 사건을 조사하고 있더군요. 소현 씨, 우리 서로를 의심하기보다는 협력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윤소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네.”“그렇다면 신중해야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예요. 지원 씨가 요즘 사귀는 유력 인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어요?”이지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망칠 걸요.”윤소현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모없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요. 알겠죠?”“네.”이지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윤소현이 떠난 후 그녀의 눈빛은 서늘하고 음울하게 변했다.한편, 박민정의 쪽.김인우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조하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김인우는 코를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밥 먹으러 나왔어요. 두 사람은 쇼핑 어땠어요?”조하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꽤 많이 샀어요. 인우 씨는 가서 밥이나 먹어요. 우리는 이미 먹었거든요.”그녀는 김인우가 빨리 자리를 뜨길 바랐지만 김인우는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태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19화

    예전의 김인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촬영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기혼 남성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곁에 있는 건 박민정과 유남준의 아들이었다.만약 그들이 이유 없이 기사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그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그렇기에 그의 경호원들은 내내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행인들이 멋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막았다.반면, 박민정과 조하랑은 이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그러다 피곤해지자 김인우가 그녀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을 먼저 바래다준 후, 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데리고 돌아왔다.박예찬은 방금 전 박민정이 자신에게 사준 옷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새로 산 거야?”“네!”박예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엄마가 사줬어요!”그 말을 듣자 김인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조하랑에게로 향했다.“하랑 씨, 내 선물 안 샀어요?”“...네?”조하랑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는 딱히 필요한 게 없었고 그녀 역시 애초에 김인우에게 뭔가를 사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겠구나 싶어 시선을 떨구었다.“하... 난 하랑 씨가 내 카드를 그렇게 썼으니 형식적으로라도 뭔가 하나쯤 사줬을 줄 알았는데...”“뭐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카드 준 게 결국 선물 바라서였어요? 그렇게 쪼잔하게 굴 거면 카드 돌려줄게요!”조하랑이 단박에 받아쳤다.하지만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깨달았다.어쨌든 김인우가 카드를 준 건 사실이었고 정작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으니 그가 서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조하랑이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김인우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그런 뜻이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요.”“카드는 그냥 하랑 씨가 쓰고 싶은 대로 써요.”그의 말투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기 짝이 없었고 그 모습에 조하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0화

    한적한 개인 병원의 한 병실.유남준은 정수미의 병상 곁에 서서 이미 그녀의 병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전했다.정수미는 순간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준아, 제발 이 일만큼은 민정이에게 말하지 마. 난 그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유남준의 표정은 복잡했다.“하지만 이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나버리신다면 민정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그는 알고 있었다.지금 박민정은 겉으로는 정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그때가 되면 민정이는 대표님이 아픈 걸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을까, 왜 대표님에게 그토록 냉정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죠.”유남준의 음성은 단호했다.정수미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불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나는 내 병 때문에 민정이가 나를 용서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저 내 힘으로, 내 마지막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 아이의 마음을 열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박민정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유남준도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지금 민정이는 대표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있는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게다가 민정이는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믿으신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이 사실을 전하세요. 그래야만 민정이가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정수미는 멍하니 유남준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정말... 그럴까?”유남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누구보다도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그녀는 쉽게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정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1화

    “이리 와.”정수미가 손짓하자 윤소현은 충성스러운 개처럼 급히 다가왔다.“엄마, 저한테 뭘 말하시려고요?”“좀 더 가까이 와 봐.”정수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소현이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려는 순간 ‘짝!’하고 벼락처럼 날아든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윤소현은 순간 얼어붙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수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엄마... 왜 저를 때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감정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정수미는 단 한 대를 때렸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뗐다.“유언장을 바꿀 생각도, 예전 유언장을 손에 넣을 생각도 하지 마. 이미 모든 걸 정리해 두었어. 이전의 유언장들은 전부 장 변호사에게 맡겼다.”그제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들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그 변호사가 감히 일러바쳤어요?”“가만두지 않겠어.”“변호사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널 그대로 두라는 뜻이겠니?”정수미의 차가운 반문에 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아니, 대표님. 정말 저한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실 거예요? 저희 사이에 모녀의 정이란 게 정말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전 그래도 엄마 곁에서 몇십 년을 모셨어요. 그런데 겨우 돌아온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가는 게 공평해요?”과거, 정수미는 친딸을 찾았다고 해서 윤소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결코 은혜를 모를 자였다.“꺼져!”그녀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소현은 뺨을 감싼 채 할 말을 잃었다.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미 경호원들이 다가와 그녀를 내쫓으려 했다.결국, 그녀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후, 비서가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정수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그렇게 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2화

    “정 대표님.”박민정이 병실로 들어서며 조용히 부르자 정수미의 눈빛이 순간 빛을 머금었다.“민정아.”그녀는 몸의 불편함을 억누르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줘.”박민정이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몸 상태가... 왜 이렇게...”무심코 내뱉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정수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아. 아마 계절이 바뀌려는 탓인지 요즘 얼굴색이 좀 안 좋아 보일 뿐이야. 의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정수미가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눈치껏 자리를 비우며 문을 닫았다.병실 안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정수미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번번이 삼켜졌고 결국 차마 자신의 병세를 말하지 못했다.대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민정아, 아직도 나를 원망하니?”박민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과거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원망하지 않아요.”그 말에 정수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고맙구나... 정말 고맙다.”정수미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민정아, 나를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순간, 박민정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아니어도 돼.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정수미 스스로도 그 ‘앞으로’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을 조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네.”박민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널 부른 건 용건이 있어서야.”정수미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데요?”“내가 가진 자산 일부를 미리 너에게 넘겨주고 싶단다.”박민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본능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3화

    거리는 고요했고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 연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너를 봤어. 어쩌다가 병원 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던 거야?”‘비를 맞고 있었다고?’박민정이 조용히 답했다.“아니,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잠시 너무 몰두했던 것 같아.”연지석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떤지, 그녀가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지도.“민정아, 혹시 네가 이미 기억을 되찾았는데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는 건 아닐까?”박민정이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이자 연지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마... 7년 전쯤이었을 거야. 묘지에서 쓰러진 널 처음 봤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양부모님이 널 결혼시키려 강요하는 것도 봤어. 그때부터 생각했어. 도대체 넌 지난 세월을 어떻게 버텨온 걸까.”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네가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버린 이유도 이해해. 다시 상처받는 게 두렵겠지. 하지만...”연지석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널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가족의 온정을 누릴 자격도 충분해.”박민정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알아.”그러나 연지석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마음 깊이 새기지 않았다는 것을.그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도 너처럼 많은 일을 겪었어. 어릴 때, 신림현에 보내졌고 여러 차례 죽을 뻔했지. 외국으로 보내진 후에도 더 많은 일이 있었어. 그런데도 내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너 덕분에 희망을 놓지 않았고 살아가려 애썼어.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박민정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연지석은 오랫동안 묻어둔 마음을 꺼내 보였다.“돌아온 후 오랫동안 널 곁에 두고 싶었어. 정말이야.”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진심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깊숙이 감추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4화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회사 차를 타고 병원에 갔고 기사도 함께 있었어요. 따로 마중 나올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잠시 망설였으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섰고 박민정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정수미와 연지석이 한 말,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누군가에게 털어놓을 곳이 없던 박민정은 결국 서재로 가서 유남준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유남준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정 대표 말이 맞아. 넌 그 사람 딸이야. 그리고 정 대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네가 그분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 이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그냥...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그녀는 정수미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그녀는 지금껏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과거 한수민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끊임없이 옭아맸고 끝없는 죄책감 속에 살게 만들었다.박민정은 아직도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것이 어머니의 삶을 망친 것만 같았다.한수민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겼다.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더 일찍 진실을 밝혔더라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도,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민정아.”유남준은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정 대표는 한수민과 달라. 난 알 수 있어. 그분은 진심으로 널 사랑해.”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대답했다.“네.”“걱정된다면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너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마.”그의 위로에 박민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때, 유명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남준아, 민정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거라.”유명훈을 비롯한 유씨 집안의 사람들, 예전에는 박민정을 하찮게 여겼던 이들이 이제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25화

    윤소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시간 나면 전화 한 통 꼭 주세요.”“응.” 최현아는 가볍게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남편인 유성혁의 곁에 앉았다. 그런데 유성혁의 시선이 자꾸만 박민정을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이미 유성혁에 대한 사랑은 식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남편 아닌가. 최현아는 분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그를 세게 찔렀다.“성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유성혁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최현아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성혁 씨, 내가 지난번에 당부한 일, 잊은 거 아니겠죠? 제대로 처리했어요?”그녀는 유성혁에게 박민정의 아이를 없애라고 지시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민정의 세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곳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최현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성혁은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날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거야?”“서둘러요. 박민정은 이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됐어요. 더 늦추기라도 하면 우리 가족은 남은 평생을 찬바람이나 쐬며 살아야 할 거예요.”테이블이 워낙 커서 모두들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은 유명훈이 모습을 드러냈다.최근 들어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는데 유석진이 온갖 기묘한 약재를 구해 와도 세월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력했다.“할아버지...”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유명훈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식사가 시작되자 그는 박민정을 특별히 배려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정아,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몰라서 내가 알아서 준비했다. 입에 맞지 않으면 주방장에게 따로 부탁하도록 하거라.”“할아버지한테는 언제든 말해도 괜찮단다.”유명훈의 얼굴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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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0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혹시나 정수미와 박민정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갈 때도 모두 짝을 지어 돌아갔는데 그중 정민기와 진서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서다희와 민수아도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하더니 그녀도 임신했다고 알렸다.세 커플 중 오직 방성원과 설인하 두 사람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진작에 눈치챈 방성원은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애써 참고 있었다.하여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김인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성원아, 나도 곧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그러자 방성원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우리 은정이는 이제 곧 두 살이야.”“어쩌라고? 우리 딸이 아마 네 딸보다 더 귀여울걸?”그의 말에 방성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순간 김인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의 말대로 아무리 자기가 딸은 원한다고 무조건 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그러고 보니 유남준도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네 명의 아이는 모두 남자였다. 역시나 딸 복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러다가 방성원은 문득 설인하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걸 발견하고 재빨리 김인우에게 말했다.“그만하자.”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설인하를 쫓아갔다.“뭘 이리도 빨리 가?”설인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기다리란 소리도 없었잖아.”방성원은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가 문득 앞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두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 설인하는 비록 지금 이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방성원은 지난번 설인하와 연지석 사이를 오해한 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차에 올라탈 때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남자의 돌발행동에 설인하는 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손잡고 싶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9화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만약 어느 날 네 마음이 변했더라도 민정이한테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우리 정씨 가문으로 보내줘.”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미 수많은 일을 겪어온 정수미는 약속이란 게 참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유남준도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자기 말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하여 허리를 숙이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비록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아는데요. 꼭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전 이미 IM 그룹의 모든 지분을 민정이 명의로 변경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저희 둘이 헤어지면 민정이가 평생 먹고 남을 돈은 있는 거잖아요.”사실 박민정은 이미 지엔 그룹을 소유하고 있기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유남준이 저렇게 말하니 마음이 든든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하여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게.”“네.”유남준의 입꼬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민정이 수술이 끝났는지 이만 가볼까요?”“그래.”그렇게 유남준은 정수미의 휠체어를 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사실 방금 정수미가 당부했던 말은 서주에 있을 때 정근우도 똑같이 말했었다.“만약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는 날에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때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그들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박민정의 수술은 점심이 되어서야 끝났고 김인우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유남준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어떻게 됐어?”김인우는 마스크를 벗으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텐데 회복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정수미와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밥부터 먹고 옵시다.”김인우도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밥부터 먹어요.”박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8화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오늘 수술한다고 해서 옆에 있어 주려고, 겸사겸사 정 대표님도 보려고 왔지.”박민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안 깨어나셨어.”“괜찮아, 밖에서 기다릴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김인우는 그녀의 업무를 전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고 조하랑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그녀는 박민정곁에 앉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맞다, 남준 씨는?”“예찬이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로 올거야.”지금 정민기도 매우 바쁜 시기라 왠지 유남준이 직접 박예찬을 데려다줘야 안심될 것 같았다.“아, 그렇군.”그렇게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또 한동안 위로의 말을 건네는걸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박민정의 얼굴이 지금 괜찮아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니란 걸 조하랑은 다 알고 있었다.“괜찮을 거야, 민정아.”그러고는 박민정을 꽉 안아줬다.김인우는 곁에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다가 조하랑은 정수미 보러 들어갔다.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는데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정 대표님, 오면서 과일 좀 사 왔어요.”조하랑은 혹시나 정수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최대한 밝게 인사를 건넸다.“하랑 씨, 고마워요.”“저는 민정이 친구이고 민정이 엄마면 제 엄마나 마찬가지예요.”그리고 뒤에 서 있는 김인우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나중에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 남편한테 말씀 주시면 되겠습니다.”그러자 김인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정수미에게 말했다.“하랑 씨말대로 혹시나 병원에 불편한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병원 너무 좋아요.”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박민정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수미가 중병 환자란 사실마저 잊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매일 슬픔 속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7화

    그의 호들갑에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지금 여기서 어떻게 더 늦게 가란 소리예요? 전 그냥 임산부일 뿐이지 어디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걷는 것까지 뭐라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줄래요?”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안 뒤로부터 김인우는 조하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고 먹는 것도 철저하게 관리했다.그리고 지금은 혹시나 넘어질까 봐 걷는 것까지 걱정했다.조하랑은 이제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하랑 씨는 제 아내이고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있는데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줘요? 말 좀 들어요, 네?”김인우는 말하면서도 조하랑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지만 조하랑은 그냥 못 들은 척 앞으로 직진했다.병원에는 당연히 사람도 많고 급히 걸어가는 의사나 환자, 그리고 병간호는 사람들도 많았다.그 보습을 지켜보던 김인우는 조하랑을 안쪽으로 세우더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여기 임산부가 있는데 혹시나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김인우란 사실을 알아차린 뒤 바로 벽 쪽에 붙다시피 지나다녔다.하지만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당연히 김인우가 누구인지, 그가 병원에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저마다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조하랑은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기어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과잉보호하는 남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그만해요. 인우 씨는 얼굴이 두꺼워서 잘 못 느끼겠지만 전 부끄러워 미치겠어요.”그러나 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의 아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빠르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작 임신한 거로 왜 저리 오버야?”“내 말이, 누가 보면 이 병원에서 혼자 임신한 줄?”“너무 저러면 오히려 위험한 일이 더 많이 발생하던데.”“그러니까요. 너무 몸을 사리는 것도 안 좋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우리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게 낫지.”“문제는 아직 배도 너무 불러온 게 아니던데요?”몇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6화

    어렵게 되찾은 친엄마의 사랑을 다시 잃는 게 두려워서일까?박민정은 그렇게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저녁.박민정은 유남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서 정수미 곁을 지키려 했다.그러나 정윤아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그렇게 밤이 되자 정수미는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어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박민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엄마, 잠이 안 오면 우리 수다나 떨어요. 어차피 저도 안 피곤하거든요.”정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모, 우리 얘기나 나눠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정윤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민정 언니, 언니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어렸을 때라...박민정은 그 시절 행복했던 부분만 말해줬다.“사실 별거 없어요. 그때 저는 한 가정부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박민정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자 정윤아와 정수미는 모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특히 정수미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녀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절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그러다가 중간중간에 정윤아는 궁금한 점도 박민정에게 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고 정수미의 통증도 어느새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저녁 10시.정수미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내일 박민정의 수술이 생각나 졸린 척 하품했다.“안 되겠다. 나 너무 피곤한데 우리 이만 자자.” “네? 한참 재밌는데 벌써 잔다고요?”정윤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아직 하나도 안 졸려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 같은 늙은이가 너희 젊은 사람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쉬운 줄 알아? 자, 너희 둘은 옆에 칸에 가서 자. 민정이는 내일 수술도 해야 하잖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5화

    유남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저 물어본 거예요.”그러고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거 알아요? 저는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주변 사람들이 제 곁을 떠나는 건 너무 무서워요.”처음에는 박형식이었고 그 뒤로는 은정숙마저 떠나버렸다.그리고 지금은 친엄마인 정수미마저 건강이 점점 악화하고 있다.박민정은 요 며칠 꿈에서 거의 매일 누군가를 떠나보냈는데 깨어나 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답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어느 날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다시 만난다는 말에 박민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정말 그렇게 될까요?”“당연하지.”예전의 유남준이라면 분명 이런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날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여태껏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눈앞의 박민정이 슬퍼하니 자신마저 가슴이 저린 것 같았다.박민정은 문득 가게에 다른 손님들도 있는 걸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괜찮은 척 말했다.“남준 씨 말이 맞아요. 어차피 우리도 결국에는 죽을 텐데 이렇게까지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은 여전히 씁쓸해 보였다.그렇게 주문했던 요리가 포장되어 나오자 그들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달려와 박민정에게 말했다.“형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건 운명에 한 번 맡겨봅시다.”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알겠어요.”김인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아무 고통도 없이 정 대표님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네네.”“그러면 민정 씨도 내일 바로 수술 진행할까요?”사실 박민정은 원래 수술 날짜를 뒤로 미루려고 했는데 정수미가 병실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박민정을 불렀다.“민정아.” 박민정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4화

    정수미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전에 엄마는 키워준 아이들한테 속아서 많은 약을 먹게 되었고 나중에는 어디 갇혔다가 불에 타 죽을뻔하기도 했어. 그때 아마 많은 유해 물질도 같이 마셨을 거야. 비록 네 아빠가 나중에 구해주긴 했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온몸에 큰 화상까지 입었어.”“그 이후로 비록 치료를 받았어도 여러 질병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었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심장이 하도 따끔거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렵게 찾은 친엄마가 곧 그녀를 떠나간다.정수미도 진작에 그녀의 슬픈 얼굴을 알아챘지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사실 박민정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여태껏 잘 키워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또 병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민정아... 이렇게 또 너만 두고 가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엄마 잘못도 아니고 엄마 탓도 아니에요.”박민정은 정수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러자 정수미도 어느새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착한 딸, 엄마 이해해 줘서 고마워.”박민정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정윤아와 유남준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두 모녀가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정수미에게 기대어 좀처럼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이때 정수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 나 배고파.”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뭐 먹고 싶어요? 제가 사 올게요.” “아무거나 다 돼.”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배고픈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버틸만하다는 뜻이 아닐까?”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당연하죠.”“금방 갔다 올게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와 그제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먹을거리 좀 사 올 테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3화

    정윤아는 한눈에 봐도 다급한 기색이었다.그러자 의사는 마스크를 벗고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요... 가족분들도 아시다시피 환자분의 지금 상태로는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정윤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혹시 며칠 전 먹었던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요?”그러자 의사가 의심의 눈초리로 되물었다.“혹시 환자분은 상태를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떻게 이럴 수가?”의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정윤아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나 이미 진작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박민정은 덤덤한 얼굴로 의사에게 다가가 말했다.“의사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그러자 의사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아닙니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환자분과 많은 시간을 나누시길 바랍니다.”“네.”말을 마친 뒤 의사는 자리를 떴다.그렇게 박민정은 정수미의 침대를 밀고 병실로 돌아왔다.정윤아는 뒤따라오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 언니, 언니는 고모 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박민정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답했다.“저도 며칠 전에야 알았어요. 그때 윤아 씨는 윤소현 씨한테 한창 속고 있을 때였죠. 저는 엄마의 건강에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어 예전에 엄마 주치의였던 분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더니 지금까지 병이 계속 악화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속이고 계셨더라고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새빨개져서는 말까지 더듬었다.“어떻게 이럴 수가...”박민정은 본인도 슬펐지만 오히려 눈앞의 정윤아를 먼저 위로했다.“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그리고 이따 엄마 보러 가서도 꼭 눈물을 참아야 해요, 알겠죠?”정수미는 분명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박민정의 말에 정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울지 않을게요. 이런 상황이면 분명 당사자부터 마음이 약해질 텐데 그럴수록 저희가 옆에서 파이팅 해드려야 고모가 병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2화

    박민정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 잘 부탁드릴게요. 임신이 처음이라 많이 서툴 텐데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셔도 돼요.”김인우가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산부인과 지식까지는 섭렵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그럴게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잘 돌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에 자기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뻤다.그 덕분에 최근 병원의 복지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박민정과 정수미는 그제야 병원에서 나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는데 가는 길 내내 정수미는 오늘 많이 피곤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그러자 박민정이 자기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엄마, 너무 피곤하면 제 어깨에 기대어 한잠 자요.”“그래.”정수미는 박민정의 말대로 그녀에게 기댄 뒤 눈을 꼭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정은 이상하게 어깨가 축축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정수미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순간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운전기사더러 차를 세우게 했다.“당장 병원으로 다시 가주세요.”“네.”그녀의 말에 운전 기사는 황급히 핸들을 돌려 병원으로 향해 달려갔다.“엄마, 엄마...”박민정은 정수미를 안고 낮은 소리로 불러보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마음이 점점 조급해진 박민정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엄마!”다행히 그들은 빠르게 다시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정수미가 수술실 안에 들어갈 때까지 박민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이때, 김인우가 다급히 뛰어오더니 그녀의 어깨가 피로 흥건하게 젖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의 병이 재발했다고 알려줬다.그러자 김인우는 침착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네.”김인우는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바로 수술실 안으로 뛰어갔다.가기 전에 유남준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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