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개인 병원의 한 병실.유남준은 정수미의 병상 곁에 서서 이미 그녀의 병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전했다.정수미는 순간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준아, 제발 이 일만큼은 민정이에게 말하지 마. 난 그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유남준의 표정은 복잡했다.“하지만 이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나버리신다면 민정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그는 알고 있었다.지금 박민정은 겉으로는 정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그때가 되면 민정이는 대표님이 아픈 걸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을까, 왜 대표님에게 그토록 냉정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죠.”유남준의 음성은 단호했다.정수미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불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나는 내 병 때문에 민정이가 나를 용서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저 내 힘으로, 내 마지막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 아이의 마음을 열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박민정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유남준도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지금 민정이는 대표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있는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게다가 민정이는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믿으신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이 사실을 전하세요. 그래야만 민정이가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정수미는 멍하니 유남준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정말... 그럴까?”유남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누구보다도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그녀는 쉽게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정
“이리 와.”정수미가 손짓하자 윤소현은 충성스러운 개처럼 급히 다가왔다.“엄마, 저한테 뭘 말하시려고요?”“좀 더 가까이 와 봐.”정수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소현이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려는 순간 ‘짝!’하고 벼락처럼 날아든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윤소현은 순간 얼어붙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수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엄마... 왜 저를 때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감정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정수미는 단 한 대를 때렸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뗐다.“유언장을 바꿀 생각도, 예전 유언장을 손에 넣을 생각도 하지 마. 이미 모든 걸 정리해 두었어. 이전의 유언장들은 전부 장 변호사에게 맡겼다.”그제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들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그 변호사가 감히 일러바쳤어요?”“가만두지 않겠어.”“변호사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널 그대로 두라는 뜻이겠니?”정수미의 차가운 반문에 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아니, 대표님. 정말 저한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실 거예요? 저희 사이에 모녀의 정이란 게 정말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전 그래도 엄마 곁에서 몇십 년을 모셨어요. 그런데 겨우 돌아온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가는 게 공평해요?”과거, 정수미는 친딸을 찾았다고 해서 윤소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결코 은혜를 모를 자였다.“꺼져!”그녀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소현은 뺨을 감싼 채 할 말을 잃었다.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미 경호원들이 다가와 그녀를 내쫓으려 했다.결국, 그녀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후, 비서가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정수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그렇게 말
“정 대표님.”박민정이 병실로 들어서며 조용히 부르자 정수미의 눈빛이 순간 빛을 머금었다.“민정아.”그녀는 몸의 불편함을 억누르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줘.”박민정이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몸 상태가... 왜 이렇게...”무심코 내뱉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정수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아. 아마 계절이 바뀌려는 탓인지 요즘 얼굴색이 좀 안 좋아 보일 뿐이야. 의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정수미가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눈치껏 자리를 비우며 문을 닫았다.병실 안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정수미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번번이 삼켜졌고 결국 차마 자신의 병세를 말하지 못했다.대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민정아, 아직도 나를 원망하니?”박민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과거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원망하지 않아요.”그 말에 정수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고맙구나... 정말 고맙다.”정수미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민정아, 나를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순간, 박민정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아니어도 돼.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정수미 스스로도 그 ‘앞으로’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을 조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네.”박민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널 부른 건 용건이 있어서야.”정수미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데요?”“내가 가진 자산 일부를 미리 너에게 넘겨주고 싶단다.”박민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본능
거리는 고요했고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 연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너를 봤어. 어쩌다가 병원 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던 거야?”‘비를 맞고 있었다고?’박민정이 조용히 답했다.“아니,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잠시 너무 몰두했던 것 같아.”연지석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떤지, 그녀가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지도.“민정아, 혹시 네가 이미 기억을 되찾았는데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는 건 아닐까?”박민정이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이자 연지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마... 7년 전쯤이었을 거야. 묘지에서 쓰러진 널 처음 봤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양부모님이 널 결혼시키려 강요하는 것도 봤어. 그때부터 생각했어. 도대체 넌 지난 세월을 어떻게 버텨온 걸까.”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네가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버린 이유도 이해해. 다시 상처받는 게 두렵겠지. 하지만...”연지석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널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가족의 온정을 누릴 자격도 충분해.”박민정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알아.”그러나 연지석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마음 깊이 새기지 않았다는 것을.그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도 너처럼 많은 일을 겪었어. 어릴 때, 신림현에 보내졌고 여러 차례 죽을 뻔했지. 외국으로 보내진 후에도 더 많은 일이 있었어. 그런데도 내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너 덕분에 희망을 놓지 않았고 살아가려 애썼어.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박민정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연지석은 오랫동안 묻어둔 마음을 꺼내 보였다.“돌아온 후 오랫동안 널 곁에 두고 싶었어. 정말이야.”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진심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깊숙이 감추어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회사 차를 타고 병원에 갔고 기사도 함께 있었어요. 따로 마중 나올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잠시 망설였으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섰고 박민정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정수미와 연지석이 한 말,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누군가에게 털어놓을 곳이 없던 박민정은 결국 서재로 가서 유남준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유남준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정 대표 말이 맞아. 넌 그 사람 딸이야. 그리고 정 대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네가 그분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 이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그냥...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그녀는 정수미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그녀는 지금껏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과거 한수민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끊임없이 옭아맸고 끝없는 죄책감 속에 살게 만들었다.박민정은 아직도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것이 어머니의 삶을 망친 것만 같았다.한수민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겼다.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더 일찍 진실을 밝혔더라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도,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민정아.”유남준은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정 대표는 한수민과 달라. 난 알 수 있어. 그분은 진심으로 널 사랑해.”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대답했다.“네.”“걱정된다면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너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마.”그의 위로에 박민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때, 유명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남준아, 민정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거라.”유명훈을 비롯한 유씨 집안의 사람들, 예전에는 박민정을 하찮게 여겼던 이들이 이제는
윤소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시간 나면 전화 한 통 꼭 주세요.”“응.” 최현아는 가볍게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남편인 유성혁의 곁에 앉았다. 그런데 유성혁의 시선이 자꾸만 박민정을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이미 유성혁에 대한 사랑은 식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남편 아닌가. 최현아는 분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그를 세게 찔렀다.“성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유성혁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최현아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성혁 씨, 내가 지난번에 당부한 일, 잊은 거 아니겠죠? 제대로 처리했어요?”그녀는 유성혁에게 박민정의 아이를 없애라고 지시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민정의 세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곳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최현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성혁은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날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거야?”“서둘러요. 박민정은 이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됐어요. 더 늦추기라도 하면 우리 가족은 남은 평생을 찬바람이나 쐬며 살아야 할 거예요.”테이블이 워낙 커서 모두들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은 유명훈이 모습을 드러냈다.최근 들어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는데 유석진이 온갖 기묘한 약재를 구해 와도 세월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력했다.“할아버지...”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유명훈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식사가 시작되자 그는 박민정을 특별히 배려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정아,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몰라서 내가 알아서 준비했다. 입에 맞지 않으면 주방장에게 따로 부탁하도록 하거라.”“할아버지한테는 언제든 말해도 괜찮단다.”유명훈의 얼굴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박윤우도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쟁취할 줄 아는 그는 재빠르게 유명훈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 유명훈의 팔을 꼭 붙잡으며 애타게 말했다.“증조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 언제까지나 윤우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그 연기는 능숙하기 짝이 없었는데 유지훈의 아첨보다 훨씬 자연스러웠으며 그저 유명훈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한 태도는 절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유명훈은 자신을 이렇게 아끼는 증손자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성에 푹 빠져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게 시리면서도 동시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윤우야, 사람은 언젠가 떠나는 법이란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 없어. 증조할아버지도 오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그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따뜻한 연륜이 묻어 있었다. 그가 박윤우와 유지훈을 대하는 태도는 양가의 부모들마저 놀라게 만들었다.이를 지켜보던 최현아는 은근한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눈썹을 찌푸렸다.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유지훈에게도 저런 ‘가족의 정’을 내세우게 할 걸.그녀는 유지훈을 앞으로 내세워 유명훈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유명훈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됐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지금 내 손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재산이 있어.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재산을 너희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야.”그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고 유명훈의 말에 집중한 채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물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가난한 집에서도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기가 쉽지 않지. 우리 같은 가문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내가 내린 결정이 불공정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리 개의치 말도록 해라.”그 말은 곧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았다.시간이 흘러 식탁 위의 음식이 다 식어갈 무렵, 유명훈은 드디어 자신의 유산 분배에 대해 명확히 밝혔다.그 결과는 모
서재에서 유명훈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도 내 입장을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어떤 어른인들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지 않겠느냐. 그중에 유독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란다.”이 말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유남준이 처음 유씨 가문의 사업을 맡았을 때 수도 없이 공격을 받았고 죽을 고비까지 넘긴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 유명훈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이제 와서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로 설득하려는 것은 오직 유남준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할아버지, 그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개인 재산입니다. 누구에게 주시든 저희는 존중합니다.”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발음하며 말했다. 그러나 유명훈은 그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애써 그를 달래듯 덧붙였다.“남준아, 아무리 그래도 석진이는 네 큰아버지이고 성혁이는 네 사촌 형이다. 제발 절대 그 아이들을 해치지 말아다오.”유명훈은 그동안 유석진과 유성혁이 뒤에서 벌인 더러운 짓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유남준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절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그분들을 건드릴 일 없습니다.”“너...!”유명훈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유석진이 화를 자초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부탁이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제발 가족만큼은 건드리지 마라.”유남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다 말씀하셨습니까?”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담담하게 물었다.“그렇다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서재를 나서려 했다. 유명훈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결국 유남우를 불러들였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유남우가 서재를 나설 때 그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바깥에 나오자 유석진이 환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남우야, 이제부터 우리 한 식구 아니겠냐? 성혁이도 네 친형처럼 여기거라.”유남우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저희는 어
“전 그분을 위해 친어머니와 연까지 끊었어요. 그런데 그분은요? 친딸을 찾자마자 절 버렸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윤소현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물었으나 정수미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냉소하며 되물었다.“내가 친딸을 찾았기 때문에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니?”“난 분명히 말했어. 민정이를 찾았지만 내 재산은 너희 둘이서 반반씩 나누라고 했지. 그런데 네가 욕심을 부려 날 해치려 들었고 내 친딸까지 죽이려 했다고!”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담담하게 덧붙였다.“난 너한테 빚진 게 없어. 게다가 네가 친어머니와 연을 끊은 게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내 손에 있는 돈이 아니라?”그녀는 조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며 쏘아붙였다.“내가 한 푼도 없었다면 넌 과연 친어머니와 인연을 끊었을까? 끊기 싫었다면 내가 억지로 시켰을 것 같니?”그 몇 마디에 윤소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무너져 내린 듯,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그만해요! 이건 전부 엄마 잘못이에요! 대체 왜 친딸을 찾겠다고 난리예요? 제가 엄마 곁에 있는데, 그걸로 부족해요? 엄마는 평생 친딸을 못 찾았어야 했어요!”정수미는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한 채 정호철에게 말했다.“호철아, 겁낼 거 없어. 어차피 난 오래 살지 못하니까 어서 들어와서 소현이를 붙잡아. 이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하자. 사형 선고받게 만들면 되잖아.”그러나 정호철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대표님...”윤소현 역시 정호철이 정말로 정수미의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당장 나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단도를 더욱 깊숙이 겨누며 협박했다.그 순간, 정호철은 처음으로 정수미의 명령을 거역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뭐해? 당장 나가라고!”정수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않을 작정이었다.바로 그때 박민정이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윤소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대표님을 놔
정수미는 핏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윤소현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윤소현, 내가 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지.”윤소현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침대 쪽으로 기어갔다.“엄마, 한 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이고 저 또한 영원히 엄마의 딸이에요. 그리고 여태껏 키워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게요.”“웃기지 마!”정수미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네가 지금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럼 그때 내가 마신 우유에 그 더러운 것들을 탈 때는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정수미의 물음에 윤소현은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답했다.“엄마, 그건 정말 생각 없이 한 행동이고 진짜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 후로 깊이 반성하고 있고요.”이게 어딜 봐서 뉘우치는 태도인지, 그저 궁지에 몰리니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하는 걸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정수미가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번에도 말했지만 날 독살하려던 일은 내가 여태껏 키워준 정을 봐서 눈감아주겠어. 그런데 너는 민정이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해. 그 애는 내 유일한 딸이자 20 년동안 애타게 찾아 겨우 데려온 사람이란걸 네가 제일 잘 알잖아.”“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꼭 민정이를 도와 회사를 잘 관리하겠습니다.”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말을 이었다.“진짜 맹세해요.”그러나 정수미의 눈에는 그저 쇼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이제 와서 회사를 관리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장난해?’“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우리 가문의 일은 이제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정수미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 손으로 널 감옥에 넣을 거야. 아무리 네가 직접 죽이려 했던 게 아니더라도 벌은 받아야겠지. 이제부터 거기서 나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윤소현은
바로 정호철이 모든 부하와 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순간 윤소현은 온몸이 떨려왔지만 애써 괜찮은 척 그에게 말을 걸었다.“아저씨, 여긴 웬일이에요?”정호철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러는 소현 씨는 이 늦은 밤에 창문까지 넘으면서 어디로 가는지?”“그게...”윤소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순간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지 몰라 했다.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호철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 더는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소현 씨랑 윤석후 씨가 바로 민정 씨를 살해하려 했던 주범이죠? 당신 아버지는 이미 저희한테 잡힌 상황인데 지금 순순히 저희 따라갈 건가요, 아니면 끌고 갈까요?”윤소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애원했다.“아저씨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잖아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저 좀 봐주세요. 진짜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 감옥에 가기 싫단 말이에요!”‘사람을 사주해 박민정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그녀의 말대로 어릴 때부터 봐온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고약하게 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솔직히 이런 아이를 입양해 키울 바엔 차라리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애초에 왜 그런 행동을 했지? 데리고 가!”정호철이 부하들을 향해 외치자 한 명은 그녀의 짐을 챙기고 다른 두 사람은 양쪽으로 윤소현의 팔을 끼고 데려가려 했다.윤소현은 끌려가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캐리어를 건드리는 모습을 보고 흥분해서 소리쳤다.“내 짐에 손대지 마! 난 여전히 정 대표 딸이야. 아무리 지금은 날 미워한다고 해도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 보면 절대로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의 으름장에 짐을 챙기던 부하는 겁을 먹고 빠르게 다시 내려놓더니 정호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이 부하들은 정수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윤
정수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넌 내 친딸인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어?”단호한 대답에 박민정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예전에 자신이 찾은 몇 가지 자료들을 정수미에게 보여줬다.“이건 윤소현 씨가 회사 재산을 빼돌린 증거들이에요.”만약 정수미가 방금 명확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빨리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정수미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읽어보다가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여태껏 부족함 없이 키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저런 인간을 지금까지 키워준 게 내가 멍청이지!”그러다가 너무 흥분했는지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깜짝 놀란 박민정이 빠르게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정수미가 그녀를 말렸다.“쿨럭... 잠깐!”“왜요?”“물 한 잔이면 돼.”“네.”박민정은 냉큼 따뜻한 물 한 잔을 정수미에게 건넸고 몇 모금 마시니 기침도 점점 잦아들었다.그리고 침대에 한참 동안 누워있다가 곧바로 길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길 비서, 지금 할 말이 있는데 당장 이쪽으로 와줘.”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민정아, 너랑 유남준 씨는 이 일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전부 나한테 맡겨. 내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한편, 윤소현은 자기 개인 별장으로 돌아갔다.어젯밤의 일로 그녀도 잠 한숨을 못 잔 상황이기에 앞으로의 일들은 천천히 계획해 보고 일단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윤소현은 겨우 통화버튼을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여보세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윤석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현아, 빨리 도망쳐!”그러나 여전히 비몽사몽 상태인 윤소현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뜬금없이 왜 도망가야 해요?”윤석후가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수미 쪽에서 이미 우리가 박민정 살인 사건의 주범이란 사실을 다 알아버렸
정수미가 완전히 잠에 든 걸 보고 난 후에야 박민정은 자기 손을 살짝 뺐다.그리고 병실 밖으로 나와보니 유남준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출근 안 했어요?”줄곧 들어오지 않으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네가 여기에 입원해 있는데 회사에 어떻게 가?”“그리고 회사에 사람이 많아서 나 하나 없다고 무너지지 않아.”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할 말이 있어요.”유남준은 단번에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리 나가서 말하자.”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박민정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누가 저를 죽이려 했는지 저 알아요.”유남준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누구야?”“윤석후, 윤소현 부녀요.”박민정은 어젯밤에 자신이 봤던 모든 걸 그에게 알려줬다.그러자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일단 푹 쉬고 있어.”두 사람은 다시 앉을 곳을 찾아 앉은 뒤 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직 이 일을 정 대표님께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해도 윤소현 씨 편을 들면 어쩌죠?”어쨌든 정수미는 20년 도 넘게 윤소현을 키워준 사람인데 그녀한테 아무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이것이 바로 박민정이 여태껏 누가 자신을 해쳤는지 말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유남준이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정 대표가 너 몰래 윤소현 씨를 도와줬을까 봐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윤소현 씨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게 걱정되는 거야?”“만약 첫 번째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절대로 윤소현 씨를 가만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날 믿어줘.”유남준의 단호한 말에도 박민정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렵게 답했다.“알겠어요. 이따 정 대표님께 말해줘야겠네요.”“그래.”유남준의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오후가 되어 정수미가 깨어나 보니 자
“뭐? 그럴 리가 없는데?”윤석후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뭐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민정이를 풀어줬다고요!”윤소현은 다급한 나머지 발까지 동동 굴렀다.“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란히 손잡고 감옥에 들어가야 할 판이에요.”더 이상 윤석후와 말하기 싫어 윤소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런 곧바로 이지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또 무슨 일이시죠?”“소현 씨, 들어보니 어제 진주시에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하던데요?”이지원은 살살 간을 보면서 낚시질하기 시작했다.“민정 씨는 잘 있죠?”윤소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갖고 모르는 척 답했다.“민정이가 글쎄 어젯밤 누군가에게 납치당했어요. 지금은 다시 돌아왔고 몸도 멀쩡하더라고요.”“네?”이지원도 깜짝 놀란 척 연기했지만 사실 이 납치사건이 윤소현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민정 씨가 어떻게 납치를 당해요. 누구 짓이에요?”쏟아지는 물음에 윤소현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든지요.”그녀가 금방에라도 전화를 끊으려 하자 이지원이 다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소현 씨,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요? 그리고 우리 둘 다 박민정이 살아있는 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잖아요.”“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렇게 불편하면 진작에 손을 썼어야죠.”윤소현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부터 정호철이 다가오는 걸 보고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아저씨, 빨리 나오셨네요?”그러자 정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네.”원래부터 윤소현에게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정수미가 키우는 딸이라 여태껏 상대해 줬을 뿐이다.“아저씨, 제 철없을 적 범했던 행동들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윤소현은 지금 정호철이 정수미한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정수미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민, 민정이를 찾았대.”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윤소현은 정수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금 어디에 있대요?”“병원에 데려갔다는데 별로 다친 데는 없나 봐.”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우리도 괜찮은지 가보자. 분명 많이 놀랐을 거야.”“네.”정호철도 그제야 한시름 놓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윤소현은 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혼란에 빠졌다.‘이럴 수가?’‘어떻게 찾아냈지?’윤소현은 순간 너무 어지러워 몸을 휘청거리다가 금방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정수미와 같이 왔던 차들이 하나둘씩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본 윤소현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다가와 물었다.“혹시 저희도 따라가야 하나요?”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당연하지!”당장 가서 박민정이 진짜 살아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차에 올라타서도 윤소현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병원.박민정은 전면 검사를 받았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그저 너무 피곤해서 잠든 것뿐이라고 했다.그리고 팔과 다리도 그저 작은 찰과상만 있다고 의사가 전했다.박민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기 곁을 지키고 있는 유남준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전 괜찮아요. 그저... 배고프고 목이 너무 말라요.”어제 납치된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그녀의 대답에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빠르게 물 한 잔과 간식거리를 가져왔고 박민정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정수미는 사람들과 같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달려와 울먹거리며 물었다.“민정아,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다.“왜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그녀의 대답에 정수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누구 차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그래도 경계를 늦출 수 없으니 차들이 모두 떠나기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살아남으려면 이런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러나 박민정이 이 차량에 구조 요청을 안 하기 천만다행인 게 차 주인이 바로 윤석후네 사람들이었다.윤석후는 박민정한테 달려가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 잠깐 멈춰섰다.차량 불빛으로 그는 내린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이때 윤석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여긴 대체 어디야? 기분 나쁘게!”분명 그때 자신을 해치려던 그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한 순간 박민정은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몰려왔다.“날 해치려던 사람이 윤소현이였구나!”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상하게 이 장면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어렴풋이 1년 전에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가 생각났다.그러다가 너무 기억하려고 애써서 그런지 머리가 또 아파지기 시작했다.하여 일단 모든 생각들을 접고 차들이 다 떠나간 뒤에 다시 앞만 보고 걸어갔다.얼마간 걸어가다가 그녀는 또 앞에서 차가 오는 걸 보고 다시 나무 뒤에 숨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정수미가 타고 있는 차였는데 그녀는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중얼거렸다.“민정이를 어떻게 이런 곳으로 데려왔을까?”이 시각 윤소현은 정수미네 차량을 뒤쫓아오다가 윤석후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아빠, 어떻게 되었어요?]윤석후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그쪽에서 이미 깔끔하게 처리했는지 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당장 거기서 나와요. 저랑 정 대표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래.”윤소현은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정수미는 얼마 안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이곳은 도로 끝이었고 낡은 집이 딱 하나가 보였는데 정호철은 두말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샅샅이 찾아보기 시작했다.그러나 집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집 구조는 영상에서 봤던 거랑 똑같아.”정수미는
정호철이 마침 눈치채고는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그리고 밖에 와보니 윤소현이 이미 차 앞에 서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아니, 정 대표님. 아까 제가 영상 하나를 받았는데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초조한 얼굴로 다급히 되물었다.“무슨 영상? 혹시 지금 민정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어?”윤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보시기 전에 꼭 마음 준비를 해주셔야 해요.”그녀의 말에 정수미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빨리 줘!”윤소현은 빠르게 영상을 틀어 정수미에게 보여줬고 정수미는 화면 속의 박민정을 본 순간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윤소현이 옆에서 위로하는 척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제 생각에는 민정이나 대표님께 원한을 가졌던 사람의 짓인 것 같아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지엔 그룹을 민정이한테 물려준다니까 더는 못 참고 손을 쓴 거고요.”그녀의 말은 온통 모순덩어리였다.그러나 정수미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인 상태라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호철이 차분하게 물었다.“소현 씨, 그런데 이 동영상을 왜 소현 씨한테 보냈을까요?”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윤소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정호철도 그녀의 대답에 더는 캐묻지 않고 다시 정수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면 가짜 영상일 수도 있고 편집된 영상일 수도 있잖아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씨 가문과 트러블이 있었던 회사는 없었어요. 경쟁 관계라고 해도 민정 씨의 목숨까지 위협할 만큼은 아니에요.”정수미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아까 민정이 행적을 알아냈다고 하지 않았어?”정호철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재빨리 답했다.“네, CCTV에서 민정 씨를 데려갔던 그 차량을 찾았다고 했으니까 이제 그 차가 어디로 갔는지만 쫓아가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정수미는 힘겹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