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시간 나면 전화 한 통 꼭 주세요.”“응.” 최현아는 가볍게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남편인 유성혁의 곁에 앉았다. 그런데 유성혁의 시선이 자꾸만 박민정을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이미 유성혁에 대한 사랑은 식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남편 아닌가. 최현아는 분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그를 세게 찔렀다.“성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유성혁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최현아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성혁 씨, 내가 지난번에 당부한 일, 잊은 거 아니겠죠? 제대로 처리했어요?”그녀는 유성혁에게 박민정의 아이를 없애라고 지시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민정의 세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곳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최현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성혁은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날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거야?”“서둘러요. 박민정은 이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됐어요. 더 늦추기라도 하면 우리 가족은 남은 평생을 찬바람이나 쐬며 살아야 할 거예요.”테이블이 워낙 커서 모두들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은 유명훈이 모습을 드러냈다.최근 들어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는데 유석진이 온갖 기묘한 약재를 구해 와도 세월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력했다.“할아버지...”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유명훈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식사가 시작되자 그는 박민정을 특별히 배려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정아,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몰라서 내가 알아서 준비했다. 입에 맞지 않으면 주방장에게 따로 부탁하도록 하거라.”“할아버지한테는 언제든 말해도 괜찮단다.”유명훈의 얼굴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박윤우도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쟁취할 줄 아는 그는 재빠르게 유명훈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 유명훈의 팔을 꼭 붙잡으며 애타게 말했다.“증조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 언제까지나 윤우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그 연기는 능숙하기 짝이 없었는데 유지훈의 아첨보다 훨씬 자연스러웠으며 그저 유명훈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한 태도는 절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유명훈은 자신을 이렇게 아끼는 증손자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성에 푹 빠져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게 시리면서도 동시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윤우야, 사람은 언젠가 떠나는 법이란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 없어. 증조할아버지도 오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그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따뜻한 연륜이 묻어 있었다. 그가 박윤우와 유지훈을 대하는 태도는 양가의 부모들마저 놀라게 만들었다.이를 지켜보던 최현아는 은근한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눈썹을 찌푸렸다.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유지훈에게도 저런 ‘가족의 정’을 내세우게 할 걸.그녀는 유지훈을 앞으로 내세워 유명훈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유명훈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됐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지금 내 손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재산이 있어.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재산을 너희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야.”그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고 유명훈의 말에 집중한 채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물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가난한 집에서도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기가 쉽지 않지. 우리 같은 가문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내가 내린 결정이 불공정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리 개의치 말도록 해라.”그 말은 곧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았다.시간이 흘러 식탁 위의 음식이 다 식어갈 무렵, 유명훈은 드디어 자신의 유산 분배에 대해 명확히 밝혔다.그 결과는 모
서재에서 유명훈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도 내 입장을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어떤 어른인들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지 않겠느냐. 그중에 유독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란다.”이 말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유남준이 처음 유씨 가문의 사업을 맡았을 때 수도 없이 공격을 받았고 죽을 고비까지 넘긴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 유명훈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이제 와서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로 설득하려는 것은 오직 유남준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할아버지, 그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개인 재산입니다. 누구에게 주시든 저희는 존중합니다.”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발음하며 말했다. 그러나 유명훈은 그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애써 그를 달래듯 덧붙였다.“남준아, 아무리 그래도 석진이는 네 큰아버지이고 성혁이는 네 사촌 형이다. 제발 절대 그 아이들을 해치지 말아다오.”유명훈은 그동안 유석진과 유성혁이 뒤에서 벌인 더러운 짓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유남준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절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그분들을 건드릴 일 없습니다.”“너...!”유명훈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유석진이 화를 자초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부탁이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제발 가족만큼은 건드리지 마라.”유남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다 말씀하셨습니까?”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담담하게 물었다.“그렇다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서재를 나서려 했다. 유명훈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결국 유남우를 불러들였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유남우가 서재를 나설 때 그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바깥에 나오자 유석진이 환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남우야, 이제부터 우리 한 식구 아니겠냐? 성혁이도 네 친형처럼 여기거라.”유남우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저희는 어
홍주영은 다시금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근처에 적당한 식당을 찾아볼게요.”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하자 유남우가 덧붙였다.“매운 음식으로 하자.”“하지만 몸에 맞지 않으시잖아요. 평소에도 담백한 음식이 낫다고 하셨고요.”홍주영이 염려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유남우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은 매운 게 당기네.”홍주영은 그가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매운 요리가 있는 식당을 골랐다.유남우는 매운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홍주영이 홀로 매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고향은 매운 음식을 즐기는 지역이었다.그녀는 혼자 식사할 때마다 매운 요리를 찾았다. 하지만 유남우의 생활을 보살피며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입맛에 맞춰왔다.레스토랑에 앉아 요리가 나오자 홍주영은 걱정스러운 듯 뜨거운 물을 따로 준비해 달라고 했다.“너무 맵다면 뜨거운 물에 헹궈 드세요.”유남우는 대답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한입 베어 물었다. 화끈한 매운맛이 혀끝을 강렬하게 자극하자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겠다.”“이런 말씀을 왜 갑자기 하세요, 도련님?”홍주영이 당황한 듯 물으니 유남우는 미소 지었다.“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그는 원래 매운 음식을 입에 대기 힘들었기에 한 입 먹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그녀는 몇 년 동안 그와 함께하며 담백한 음식만 먹었다.“그래서 말인데 약혼 날짜 정해지면 알려 줘.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싶어. 좋은 선물도 준비할게.”유남우가 고개를 들어 홍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말에 그녀는 순간 목이 턱 막힌 듯했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 그게...”그녀는 허둥지둥 물 한 잔을 들이켜며 어색한 기색을 감추려 했다.“아마 곧 정해질 거예요.”유남우는 살짝 고개를
하민재는 순간 멍해졌고 억울하다는 듯 묻듯이 말했다.“주영 씨 화난 거예요?”홍주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유치하다고?하민재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원래 홍주영의 거센 질책을 감수할 각오까지 했었다. 그런데 화는 커녕,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다니?한참 후에야 그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렸고 코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미안해요, 이런 건 처음이라서 그랬어요. 다음번엔 좀 더 성숙하게 행동할게요.”처음 맞닥뜨린 ‘라이벌’이라 그런 걸까.‘남자는 죽을 때까지 소년이다.'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한 그는 홍주영이 내민 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연거푸 여러 모금 마시더니 결국 잔을 비워버렸다.홍주영은 예상치 못한 그의 갈증에 놀라며 물었다.“더 줄까요?”“아니요, 됐어요.”하민재는 손을 휘저으며 사양했다.그 뒤로 둘 사이에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하민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떠날 기색이 없었고 피곤해지기 시작한 홍주영이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언제 갈 거예요?”그 말에 하민재는 아예 버티기로 작정한 듯 미소를 지었다.“우리 곧 약혼하잖아요. 시범 결혼이라도 해볼까요?”“...시범 결혼이요?”홍주영은 어리둥절했다.“결혼이 시험해 볼 수 있는 거였어요?”하민재는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며 장난기가 발동했다.“당연하죠. 만약 내가 문제가 있으면요? 그래도 그냥 결혼할 거예요? 그러면 주영 씨만 손해잖아요.”홍주영은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깨닫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상관없잖아요.”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문제는 이미 별 의미가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심스레 하민재를 바라보았다.“만약 민재 씨가 정말 신경 쓰인다면... 한 번 시험해봐도 되겠죠, 맞는지 아닌지.”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긴장한 채 외투를 벗었다.하민재는 여전히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즐기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는
유씨네 본가.최현아는 유명훈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후 윤소현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야?”전화를 받은 윤소현은 다급하게 말했다.“정수미가 지금 재산을 전부 박민정에게 넘기려고 해요.”“뭐?”최현아는 순간 놀랐지만 곧바로 박민정의 행운이 부러워졌다.집을 나간 딸에게는 재산을 분배하지 않는 것이 최씨 가문의 철칙이었다.“동서, 보아하니 정수미가 동서를 견제하고 있는 것 같네. 동서도 서둘러 회사 자금을 옮겨두는 게 좋겠어.”최현아의 말에 윤소현은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애초에 그녀가 쥐고 있던 권한이 크지 않아 자금을 빼돌린다 해도 그 규모는 미미할 터였다.정씨 가문은 워낙 거대한 재산을 보유한 명문가였다. 그녀가 손을 써봤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정말이지 너무 분해요.”최현아는 그녀의 분노를 듣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동서, 난 진주시에 아는 사람이 많아. 날 믿는다면 그 사람들을 소개해 줄 수도 있어. 동서가 가진 걱정을 덜어줄지도 모르지.”“무슨 뜻이에요?”윤소현은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박민정 주변엔 늘 보디가드들이 따라다녀요. 특히 그 정민기랑 진서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박민정의 곁을 지키고 있어요.”최현아는 미소 지었다.“동서, 누가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지켜줄 수 있겠어?”윤소현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말했다.“좋아요, 그럼 형님이 말한 사람들의 연락처를 알려 줘요.”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알겠어.”최현아는 전화를 끊은 후 곧바로 여러 개의 번호를 전송했다.그녀는 진주시에서 오래 머물며 꽤 많은 인맥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 수는 윤소현이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전송된 번호를 바라보며 윤소현은 여전히 고민스러웠다.그때 옆에 있던 윤석후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난 이 방법,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그는 과거에 정수미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사람이었다.“네가 직접 나서는
유남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진서연이 상기된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박민정에게 슬쩍 물었다.“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대?”그러자 박민정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데이트하러 가거든요.”‘데이트라...’그말에 문득 박민정과 이미 오랫동안 데이트를 하지 못했고 또 지금 각방까지 쓰고 있는 자신이 생각났다.“민정아.”“네?”박민정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아니면 우리도 오늘 밖에 나가서 데이트할까?”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이 단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돼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들도 많아서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거든요. 게다가 아직 윤소현 씨가 예전에 회사 자금을 빼돌렸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어요.”유남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자신보다 회사 일을 더 열심히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 그러면 다 하고 주변이라도 구경하러 가자.”그의 말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박민정을 지엔 그룹까지 데려다줬다.도착 후 차에서 내리려는데 박민정의 손을 갑자기 덥석 잡았다.“왜요?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유남준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아니, 그냥. 저녁에 데리러 올게.”“먼저 가도 돼요. 그리고 굳이 운전 기사님더러 데리러 오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의 거절이 유난히 서운하게 느껴졌지만 유남준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편한 대로 해.”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놓자마자 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이때, 운전기사가 갑자기 떠나가는 박민정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사모님은 참 따뜻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유남준은 이상하게 이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그래요?”그리고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운전기사는 유남준의 반응을 보더니 갑자기 눈치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네, 만약 제가 하루라도 제 아내를 데리러 가지 않으면 아주 난리를
서다희는 그들이 어렵게 모셔 온 사람을 단번에 바꾸라는 소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이지원도 당연히 그들의 대화가 다 들리는 상황이었기에 돌아가려는 유남준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유 대표님, 저도 예전의 일들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계약서에도 이미 다 사인했어요.”이지원은 몇 가지 면접을 거쳐 겨우 IM 그룹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걱정하지 마. 계약했어도 위약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까.”이지원은 순간 멍해 있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유남준의 앞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사람이 속죄할 기회는 줄 수 있잖아요? 민정 씨도 그렇게 대표님을 용서해 준 거고요. 저는 예전에 단지 대표님을 좋아했을 뿐이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한 적이 없어요.”사실 유남준은 아직 박민정의 1년 전 실종과 이지원이 관련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이지원을 곁에 남겨뒀던 원인도 혹시나 그녀가 박민정의 행방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더는 못 참고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난 더 이상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내 기분 망치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이지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두 주먹을 꽉 쥐고 답했다.“알았어요.”사실 이지원은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유남준과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지금의 유남준은 그리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이지원은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탄 뒤 하늘 위로 뻗은 IM 그룹의 빌딩을 올려다보며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지원 씨, 어디로 모실까요?”옆에 있던 매니저가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지원은 겨우 마음을 다시 진정시킨 뒤 그녀에게 말했다.“지엔 그룹으로 가.”“네?”이지원의 말에 순간 깜짝 놀랐다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박민정이 한창 바삐 업무 보고 있는데 진서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지금 이지원이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
과거, 유남우는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그 순간,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고 등에 남은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이 구한 사람이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유남준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믿어 왔다.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목이 텁텁해졌다.“어떻게 나한테 정신과 약을 먹일 수 있어요?”박민정은 다그치듯 물었다.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처럼 왜곡된 집착을 품게 될 줄은.유남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다른 방법이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국 넌 이미 마음을 돌렸어. 솔직히 말해서 너 처음부터 유남준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박민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유남준에 대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나랑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처음부터 마음이 떠 있었던 거, 아니야?”그는 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함께했던 1년동안 그녀는 그의 손길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그리고 이제 유남우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몇 개월이나 됐어?”“...네?”박민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임신 몇 개월이냐고.”유남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얼마 전 조하랑이랑 병원에 갔었잖아.”그제야 박민정은 깨달았다. 그가 조하랑의 임신을 자신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해명하기도 전에 유남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정말 실망이야. 형을 기억조차 못 하면서 형 아이를 가졌다고? 형이 강요한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 거야?”그 순간 유남우의 태도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었고 그의 말
전화를 받자마자 저편에서 박민정의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한 번 만나죠.”그는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전화를 끊고 나니 박민정이 보낸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주영 역시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유남우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홍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홍 비서, 차에서 기다려.”홍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유남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운전사인 주범식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홍 비서, 왜 그래? 혹시 연애가 잘 안 풀려?”직장에서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홍주영은 연장자인 주범식 앞에서는 좀 더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아뇨, 연애는 할 만해요.”“할 만하다고?”주범식은 젊은이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결혼...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순간 말을 잃었고 머릿속에는 하민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글쎄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겠죠.”“그렇지. 하지만 우리 도련님 같은 사람을 옆에서 오래 보면 다른 남자는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도련님은 따뜻하고 자상하잖아.”주범식이 말을 이었다.밖에서 본 유남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홍주영은 다시 한 번 웃었으나 이번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네, 도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부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응,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많다니까. 윤소현 씨는 너무 심했어.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배신이라니.”주범식은 혀를 찼다.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판단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를 두고도 만
전화를 끊기 전, 조하랑은 잊지 않고 당부했다.“민정아, 아줌마께 꼭 감사 인사 전해 줘.”정수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겪었을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응, 알았어.” 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한편, 이지원은 집에서 송달된 변호사 서한과 연이어 도착하는 계약 해지 통지서를 바라보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김인우나 유남준이 곧 자신을 찾아와 추궁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어떡하지...?”이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신호가 가더니 뜻밖에도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유남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으나 이지원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남우 씨... 박민정이 전부 기억해 낸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 그때 당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요! 당신도 그때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고요!”유남우는 병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곤히 잠든 작은 아이, 유다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이지원 씨가 착각한 것 같군요. 난 당신이 다시 스타로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어요.”“뭐라고요?”이지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남은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제발요.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유남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나도 지금 내 앞가림하기 바뻐요.”그는 짧게 덧붙였다.“스스로 잘 살아남아 봐요.”그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어휴,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보러 오려는 걸까요?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그녀는 유남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혹시 이 아이와
정수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 이지원이 널 사칭하고 있었잖니?”“하지만 난 처음부터 이지원이 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사람을 붙여 몰래 이지원의 뒤를 밟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이지원이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되었지.”“그날 밤 이지원이 고용한 불량배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어. 덕분에 하랑이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단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엄마, 저 하랑이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그래, 다녀오렴.”박민정이 밖으로 나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조하랑은 임신한 이후로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늘어지게 소파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바쁘게 지냈겠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과거의 박예찬이라면 벌써 그녀를 채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과일을 씻어 가져다주는 것은 기본이고 밤마다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신신당부했다.이런 다정한 모습에 조하랑은 마음 깊이 감동했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하랑 아줌마, 엄마가 전화하셨어요.”전화벨은 한참이나 울렸지만 조하랑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조하랑이 힘겹게 눈을 떴다.“예찬아, 무슨 일이야?”“전화 왔어요.”박예찬이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자 조하랑은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민정아,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방금 전 정수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전했고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아 그래서...”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났는데 박민정은 이를 금방 눈치를 챘다.“하랑아, 혹시... 너 이미 알고 있었어?”조하랑은 잠시 망설였다.그녀는 방 안에 아직 박예찬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엄마 최고예요.”박민정은 그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되찾자 꼭 끌어안으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했다.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저택의 하인들은 박민정과 유남준이 오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두 분, 도련님들을 보러 오신 거지요?”“네.” 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사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하인 중 한 명이 서둘러 고영란에게 알리러 갔다.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영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민정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저녁 먹으려던 참이야.”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겨우 한 살 된 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박민정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아이들도 그녀를 보고는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우는 괜히 심통이 났다.박민정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 좀처럼 놓지 못하는 걸 본 고영란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곧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민정이 오늘 이상하지 않니?”유남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기억을 되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놀라면서도 기뻤다.“그래? 정말 다행이구나!”하지만 이내 걱정이 스며들었다. 박민정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이제까지 1년 넘게 정성껏 키워온 손주들이었기에 쉽사리 떠나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이들의 친모였고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녁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박민정은 직접 먹는 것보다도 두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아이들도 박민정을 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고영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식사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요?”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있어.”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는 나름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하지만 몇 시간 뒤, 그녀는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의 품에 안긴 채 이마에 닿는 입맞춤을 느꼈다. 유남준의 목소리는 아직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한 번 더.”“아, 안 돼요. 나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그녀가 정말 지쳐버린 모습을 보자 유남준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좋아. 천천히 하면 돼. 오늘 밤에 계속하면 되니까.”“...네?”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오늘 밤엔 본가에 가서 애들을 봐야 해요. 예찬이랑 윤우도 있잖아요.”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윤우랑 예찬이, 그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 품을 잃었으니까.“그럼 본가에서 자면 되겠네.”유남준의 목소리는 유혹에 가득 차 있었다.“잘 때 이야기하자.”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지?’그녀는 더 이상 그 품에 기대어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서 씻고 가요. 엄마도 걱정하셨을 텐데 어서 전화해야죠.”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렇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정수미 역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응.”유남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민정아, 넌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 알아?”박민정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알죠. 방금 전까지도 절실히 깨달았어요.”유남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