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우는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이 없어 아쉬운 마음에 차에 올라타고 운전기사에게 몰래 쇼핑몰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조하랑과 박민정이 무엇을 사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그 시각, 조하랑과 박민정은 이미 쇼핑몰에 도착해 있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한 두 사람은 옷과 신발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을 신나게 결제했다. 김인우의 카드를 사용한 덕분에 VIP 대우를 받으며 쇼핑을 즐길 수 있었고 직원들이 짐을 들어주거나 구매한 물건을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되었다.“돈이 많으면 쇼핑이 이렇게나 즐거운 거구나.”여자라면 누구나 쇼핑을 좋아할 터, 특히 한도 없는 카드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박민정 역시 네 아이를 위해 옷을 잔뜩 샀다.조하랑도 아이들 옷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난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 예쁜 옷을 잔뜩 사줄 수 있을 텐데.”박민정도 딸을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낳은 건 모두 아들이었다. 아들딸 모두 있으면 참 좋을 텐데...“엄마, 하랑 아줌마, 남자아이도 좋아요! 크면 짐도 들어줄 수 있잖아요.”그 순간, 작은 손에 두 여성의 가방을 든 박예찬이 씩씩하게 말했다. 이를 본 박민정이 흐뭇하게 웃었다. “맞아. 우리 예찬이도 정말 멋진걸. 아들이든 딸이든 다 소중하지.”칭찬을 듣자 박예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야, 귀여운 녀석. 설마 이렇게 쉽게 부끄러워할 줄이야. 얼굴이 꼭 사과 같네.”박예찬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랑 아줌마, 저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요.”“그래, 그래. 하나도 안 부끄러운 거 맞아. 그냥 얼굴이 빨개진 거지. 아마 여기 공기가 더운가 봐. 하하하.”조하랑은 아무 거리낌 없이 크게 웃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사람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한쪽에 서 있었고 그 곁에는 윤소현이 함께하고 있었다.윤소현
이지원은 윤소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약점이 윤소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민정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민정 씨, 하랑 씨.” 이지원이 부드럽게 불렀다.멀지 않은 곳에서 박민정과 조하랑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으나 곧 그녀를 알아차렸다.비록 이지원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익숙했기에 박민정과 조하랑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당신이 여기서 뭐 해요?” 조하랑이 한 치의 예의도 없이 날카롭게 물었으나 이지원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냥 쇼핑하러 나왔어요.”그녀의 눈빛은 순진무구했고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과거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그래요.” 조하랑은 무심하게 대꾸하더니 박민정의 손을 잡고 박예찬을 불렀다. “가자.”이지원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이지원이 다시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민정 씨, 축하해요. 곧 지엔 그룹의 대표가 되겠네요. 그리고 하랑 씨도 축하해요. 드디어 김씨 집안의 손자며느리가 되었잖아요.”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돌아서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지원 씨, 정말 웃기네. 우리 축하는 당신 입에서 들을 필요 없어. 당신은 우리랑 비교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까.”이지원은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순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제 신분이 두 사람과 비교될 리 없다는 걸 잘 알아요. 전 그냥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이 위선적인 태도는 정말이지 변함이 없었다.조하랑은 혀를 차며 비웃었다. “역겹네. 내가 언제 신분을 운운했어? 당신이 저지른 짓들, 우리가 다 잊었다고 생각해? 이지원 씨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이지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마침내 이지원은 윤소현과 함께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이지원은 겨우 마음을 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소현 씨.”윤소현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며 비웃듯 말했다. “김인우를 보자마자 호랑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떠네요. 설마 지원 씨가 예전에 조하랑을 납치했던 일이 들킬까 봐 겁나는 거예요?”이지원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무섭죠. 그런데 그 일, 소현 씨도 함께한 일이 아닌가요?”윤소현은 하품을 하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헛소리 마요. 지원 씨가 조하랑을 질투해서 벌인 짓이지 전 아니예요. 전 김인우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이지원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요즘 김인우가 당시 조하랑 납치 사건을 조사하고 있더군요. 소현 씨, 우리 서로를 의심하기보다는 협력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윤소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네.”“그렇다면 신중해야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예요. 지원 씨가 요즘 사귀는 유력 인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어요?”이지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망칠 걸요.”윤소현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모없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요. 알겠죠?”“네.”이지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윤소현이 떠난 후 그녀의 눈빛은 서늘하고 음울하게 변했다.한편, 박민정의 쪽.김인우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조하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김인우는 코를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밥 먹으러 나왔어요. 두 사람은 쇼핑 어땠어요?”조하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꽤 많이 샀어요. 인우 씨는 가서 밥이나 먹어요. 우리는 이미 먹었거든요.”그녀는 김인우가 빨리 자리를 뜨길 바랐지만 김인우는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태연
예전의 김인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촬영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기혼 남성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곁에 있는 건 박민정과 유남준의 아들이었다.만약 그들이 이유 없이 기사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그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그렇기에 그의 경호원들은 내내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행인들이 멋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막았다.반면, 박민정과 조하랑은 이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그러다 피곤해지자 김인우가 그녀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을 먼저 바래다준 후, 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데리고 돌아왔다.박예찬은 방금 전 박민정이 자신에게 사준 옷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새로 산 거야?”“네!”박예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엄마가 사줬어요!”그 말을 듣자 김인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조하랑에게로 향했다.“하랑 씨, 내 선물 안 샀어요?”“...네?”조하랑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는 딱히 필요한 게 없었고 그녀 역시 애초에 김인우에게 뭔가를 사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겠구나 싶어 시선을 떨구었다.“하... 난 하랑 씨가 내 카드를 그렇게 썼으니 형식적으로라도 뭔가 하나쯤 사줬을 줄 알았는데...”“뭐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카드 준 게 결국 선물 바라서였어요? 그렇게 쪼잔하게 굴 거면 카드 돌려줄게요!”조하랑이 단박에 받아쳤다.하지만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깨달았다.어쨌든 김인우가 카드를 준 건 사실이었고 정작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으니 그가 서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조하랑이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김인우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그런 뜻이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요.”“카드는 그냥 하랑 씨가 쓰고 싶은 대로 써요.”그의 말투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기 짝이 없었고 그 모습에 조하랑
한적한 개인 병원의 한 병실.유남준은 정수미의 병상 곁에 서서 이미 그녀의 병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전했다.정수미는 순간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준아, 제발 이 일만큼은 민정이에게 말하지 마. 난 그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유남준의 표정은 복잡했다.“하지만 이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나버리신다면 민정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그는 알고 있었다.지금 박민정은 겉으로는 정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그때가 되면 민정이는 대표님이 아픈 걸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을까, 왜 대표님에게 그토록 냉정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죠.”유남준의 음성은 단호했다.정수미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불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나는 내 병 때문에 민정이가 나를 용서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저 내 힘으로, 내 마지막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 아이의 마음을 열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박민정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유남준도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지금 민정이는 대표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있는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게다가 민정이는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믿으신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이 사실을 전하세요. 그래야만 민정이가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정수미는 멍하니 유남준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정말... 그럴까?”유남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누구보다도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그녀는 쉽게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정
“이리 와.”정수미가 손짓하자 윤소현은 충성스러운 개처럼 급히 다가왔다.“엄마, 저한테 뭘 말하시려고요?”“좀 더 가까이 와 봐.”정수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소현이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려는 순간 ‘짝!’하고 벼락처럼 날아든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윤소현은 순간 얼어붙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수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엄마... 왜 저를 때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감정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정수미는 단 한 대를 때렸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뗐다.“유언장을 바꿀 생각도, 예전 유언장을 손에 넣을 생각도 하지 마. 이미 모든 걸 정리해 두었어. 이전의 유언장들은 전부 장 변호사에게 맡겼다.”그제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들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그 변호사가 감히 일러바쳤어요?”“가만두지 않겠어.”“변호사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널 그대로 두라는 뜻이겠니?”정수미의 차가운 반문에 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아니, 대표님. 정말 저한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실 거예요? 저희 사이에 모녀의 정이란 게 정말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전 그래도 엄마 곁에서 몇십 년을 모셨어요. 그런데 겨우 돌아온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가는 게 공평해요?”과거, 정수미는 친딸을 찾았다고 해서 윤소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결코 은혜를 모를 자였다.“꺼져!”그녀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소현은 뺨을 감싼 채 할 말을 잃었다.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미 경호원들이 다가와 그녀를 내쫓으려 했다.결국, 그녀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후, 비서가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정수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그렇게 말
“정 대표님.”박민정이 병실로 들어서며 조용히 부르자 정수미의 눈빛이 순간 빛을 머금었다.“민정아.”그녀는 몸의 불편함을 억누르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줘.”박민정이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몸 상태가... 왜 이렇게...”무심코 내뱉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정수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아. 아마 계절이 바뀌려는 탓인지 요즘 얼굴색이 좀 안 좋아 보일 뿐이야. 의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정수미가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눈치껏 자리를 비우며 문을 닫았다.병실 안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정수미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번번이 삼켜졌고 결국 차마 자신의 병세를 말하지 못했다.대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민정아, 아직도 나를 원망하니?”박민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과거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원망하지 않아요.”그 말에 정수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고맙구나... 정말 고맙다.”정수미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민정아, 나를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순간, 박민정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아니어도 돼.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정수미 스스로도 그 ‘앞으로’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을 조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네.”박민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널 부른 건 용건이 있어서야.”정수미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데요?”“내가 가진 자산 일부를 미리 너에게 넘겨주고 싶단다.”박민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본능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정 대표님.”박민정이 병실로 들어서며 조용히 부르자 정수미의 눈빛이 순간 빛을 머금었다.“민정아.”그녀는 몸의 불편함을 억누르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줘.”박민정이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몸 상태가... 왜 이렇게...”무심코 내뱉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정수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아. 아마 계절이 바뀌려는 탓인지 요즘 얼굴색이 좀 안 좋아 보일 뿐이야. 의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정수미가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눈치껏 자리를 비우며 문을 닫았다.병실 안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정수미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번번이 삼켜졌고 결국 차마 자신의 병세를 말하지 못했다.대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민정아, 아직도 나를 원망하니?”박민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과거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원망하지 않아요.”그 말에 정수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고맙구나... 정말 고맙다.”정수미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민정아, 나를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순간, 박민정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아니어도 돼.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정수미 스스로도 그 ‘앞으로’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을 조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네.”박민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널 부른 건 용건이 있어서야.”정수미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데요?”“내가 가진 자산 일부를 미리 너에게 넘겨주고 싶단다.”박민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본능
“이리 와.”정수미가 손짓하자 윤소현은 충성스러운 개처럼 급히 다가왔다.“엄마, 저한테 뭘 말하시려고요?”“좀 더 가까이 와 봐.”정수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소현이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려는 순간 ‘짝!’하고 벼락처럼 날아든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윤소현은 순간 얼어붙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수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엄마... 왜 저를 때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감정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정수미는 단 한 대를 때렸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뗐다.“유언장을 바꿀 생각도, 예전 유언장을 손에 넣을 생각도 하지 마. 이미 모든 걸 정리해 두었어. 이전의 유언장들은 전부 장 변호사에게 맡겼다.”그제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들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그 변호사가 감히 일러바쳤어요?”“가만두지 않겠어.”“변호사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널 그대로 두라는 뜻이겠니?”정수미의 차가운 반문에 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아니, 대표님. 정말 저한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실 거예요? 저희 사이에 모녀의 정이란 게 정말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전 그래도 엄마 곁에서 몇십 년을 모셨어요. 그런데 겨우 돌아온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가는 게 공평해요?”과거, 정수미는 친딸을 찾았다고 해서 윤소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결코 은혜를 모를 자였다.“꺼져!”그녀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소현은 뺨을 감싼 채 할 말을 잃었다.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미 경호원들이 다가와 그녀를 내쫓으려 했다.결국, 그녀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후, 비서가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정수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그렇게 말
한적한 개인 병원의 한 병실.유남준은 정수미의 병상 곁에 서서 이미 그녀의 병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전했다.정수미는 순간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준아, 제발 이 일만큼은 민정이에게 말하지 마. 난 그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유남준의 표정은 복잡했다.“하지만 이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나버리신다면 민정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그는 알고 있었다.지금 박민정은 겉으로는 정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그때가 되면 민정이는 대표님이 아픈 걸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걸 후회할 거예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을까, 왜 대표님에게 그토록 냉정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죠.”유남준의 음성은 단호했다.정수미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불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나는 내 병 때문에 민정이가 나를 용서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저 내 힘으로, 내 마지막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 아이의 마음을 열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박민정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유남준도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지금 민정이는 대표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있는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게다가 민정이는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믿으신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이 사실을 전하세요. 그래야만 민정이가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정수미는 멍하니 유남준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정말... 그럴까?”유남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누구보다도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그녀는 쉽게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정
예전의 김인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촬영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기혼 남성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곁에 있는 건 박민정과 유남준의 아들이었다.만약 그들이 이유 없이 기사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그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그렇기에 그의 경호원들은 내내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행인들이 멋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막았다.반면, 박민정과 조하랑은 이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그러다 피곤해지자 김인우가 그녀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을 먼저 바래다준 후, 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데리고 돌아왔다.박예찬은 방금 전 박민정이 자신에게 사준 옷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새로 산 거야?”“네!”박예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엄마가 사줬어요!”그 말을 듣자 김인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조하랑에게로 향했다.“하랑 씨, 내 선물 안 샀어요?”“...네?”조하랑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는 딱히 필요한 게 없었고 그녀 역시 애초에 김인우에게 뭔가를 사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겠구나 싶어 시선을 떨구었다.“하... 난 하랑 씨가 내 카드를 그렇게 썼으니 형식적으로라도 뭔가 하나쯤 사줬을 줄 알았는데...”“뭐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카드 준 게 결국 선물 바라서였어요? 그렇게 쪼잔하게 굴 거면 카드 돌려줄게요!”조하랑이 단박에 받아쳤다.하지만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깨달았다.어쨌든 김인우가 카드를 준 건 사실이었고 정작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으니 그가 서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조하랑이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김인우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그런 뜻이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요.”“카드는 그냥 하랑 씨가 쓰고 싶은 대로 써요.”그의 말투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기 짝이 없었고 그 모습에 조하랑
마침내 이지원은 윤소현과 함께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이지원은 겨우 마음을 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소현 씨.”윤소현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며 비웃듯 말했다. “김인우를 보자마자 호랑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떠네요. 설마 지원 씨가 예전에 조하랑을 납치했던 일이 들킬까 봐 겁나는 거예요?”이지원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무섭죠. 그런데 그 일, 소현 씨도 함께한 일이 아닌가요?”윤소현은 하품을 하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헛소리 마요. 지원 씨가 조하랑을 질투해서 벌인 짓이지 전 아니예요. 전 김인우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이지원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요즘 김인우가 당시 조하랑 납치 사건을 조사하고 있더군요. 소현 씨, 우리 서로를 의심하기보다는 협력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윤소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네.”“그렇다면 신중해야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예요. 지원 씨가 요즘 사귀는 유력 인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어요?”이지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망칠 걸요.”윤소현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모없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요. 알겠죠?”“네.”이지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윤소현이 떠난 후 그녀의 눈빛은 서늘하고 음울하게 변했다.한편, 박민정의 쪽.김인우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조하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김인우는 코를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밥 먹으러 나왔어요. 두 사람은 쇼핑 어땠어요?”조하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꽤 많이 샀어요. 인우 씨는 가서 밥이나 먹어요. 우리는 이미 먹었거든요.”그녀는 김인우가 빨리 자리를 뜨길 바랐지만 김인우는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태연
이지원은 윤소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약점이 윤소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민정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민정 씨, 하랑 씨.” 이지원이 부드럽게 불렀다.멀지 않은 곳에서 박민정과 조하랑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으나 곧 그녀를 알아차렸다.비록 이지원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익숙했기에 박민정과 조하랑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당신이 여기서 뭐 해요?” 조하랑이 한 치의 예의도 없이 날카롭게 물었으나 이지원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냥 쇼핑하러 나왔어요.”그녀의 눈빛은 순진무구했고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과거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그래요.” 조하랑은 무심하게 대꾸하더니 박민정의 손을 잡고 박예찬을 불렀다. “가자.”이지원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이지원이 다시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민정 씨, 축하해요. 곧 지엔 그룹의 대표가 되겠네요. 그리고 하랑 씨도 축하해요. 드디어 김씨 집안의 손자며느리가 되었잖아요.”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돌아서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지원 씨, 정말 웃기네. 우리 축하는 당신 입에서 들을 필요 없어. 당신은 우리랑 비교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까.”이지원은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순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제 신분이 두 사람과 비교될 리 없다는 걸 잘 알아요. 전 그냥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이 위선적인 태도는 정말이지 변함이 없었다.조하랑은 혀를 차며 비웃었다. “역겹네. 내가 언제 신분을 운운했어? 당신이 저지른 짓들, 우리가 다 잊었다고 생각해? 이지원 씨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이지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김인우는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이 없어 아쉬운 마음에 차에 올라타고 운전기사에게 몰래 쇼핑몰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조하랑과 박민정이 무엇을 사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그 시각, 조하랑과 박민정은 이미 쇼핑몰에 도착해 있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한 두 사람은 옷과 신발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을 신나게 결제했다. 김인우의 카드를 사용한 덕분에 VIP 대우를 받으며 쇼핑을 즐길 수 있었고 직원들이 짐을 들어주거나 구매한 물건을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되었다.“돈이 많으면 쇼핑이 이렇게나 즐거운 거구나.”여자라면 누구나 쇼핑을 좋아할 터, 특히 한도 없는 카드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박민정 역시 네 아이를 위해 옷을 잔뜩 샀다.조하랑도 아이들 옷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난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 예쁜 옷을 잔뜩 사줄 수 있을 텐데.”박민정도 딸을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낳은 건 모두 아들이었다. 아들딸 모두 있으면 참 좋을 텐데...“엄마, 하랑 아줌마, 남자아이도 좋아요! 크면 짐도 들어줄 수 있잖아요.”그 순간, 작은 손에 두 여성의 가방을 든 박예찬이 씩씩하게 말했다. 이를 본 박민정이 흐뭇하게 웃었다. “맞아. 우리 예찬이도 정말 멋진걸. 아들이든 딸이든 다 소중하지.”칭찬을 듣자 박예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야, 귀여운 녀석. 설마 이렇게 쉽게 부끄러워할 줄이야. 얼굴이 꼭 사과 같네.”박예찬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랑 아줌마, 저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요.”“그래, 그래. 하나도 안 부끄러운 거 맞아. 그냥 얼굴이 빨개진 거지. 아마 여기 공기가 더운가 봐. 하하하.”조하랑은 아무 거리낌 없이 크게 웃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사람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한쪽에 서 있었고 그 곁에는 윤소현이 함께하고 있었다.윤소현
허탈하지 않다면 그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그러나 유남준은 얼굴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김인우더러 혹시나 난청 수술이 가능한지 박민정을 데리고 검사받아 보라고 전했다.각종 검사를 마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다행히 다른 환자도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가 수술 후 지금 정상인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민정아, 너무 잘됐다.”조하랑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자 박민정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어릴 때부터 그녀는 청력이 약해서 주변 사람들, 친구나 가족 모두가 그녀를 대하기 꺼렸는데 이제 희망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그러면 언제 수술하는 게 적당할까?”유남준의 물음에 김인우가 잠깐 고민해 보더니 다시 답했다.“다음 달이면 가능할 것 같아.”다음 달까지 며칠 안 남은 상황이라 박민정은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혹시 조금 더 미룰 수 있을까요?”“왜?”조하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녀는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요즘 바쁘기도 하고 아직 처리 못 한 일들도 많거든. 며칠 안으로는 다 끝내지 못 할 것 같아서...”수술하는 건 고작 하루이틀밖에 걸리지 않겠지만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이때 김인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히 가능하죠. 형수님, 언제 시간이 괜찮을 때 말씀만 해주시면 다시 수술 스케줄 잡아드릴게요.”수술 시간을 연기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마워요.”“우리 사이에 고맙긴요.”그러자 조하랑도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그러게. 민정아, 우리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데.”“그래.”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검사 결과에 너무 기분이 좋은 조하랑과 박민정은 그 길로 쇼핑하러 떠났다.박예찬은 비록 쇼핑이 싫었지만 두 사람이 너무 신이 난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기로 했다.김인우도 그들과 같이 가고 싶었으나 조하랑이 단칼에 거절했다.“여자들이 쇼핑하는데 끼지 말고 남자들은 따로 놀아요.”사실 예전에도 단둘이 쇼핑해 본 적이 있었지만 김인우가 매우 지루
조하랑도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네가 그랬잖아, 내가 남준 씨한테 상처받고 임신한 상태에서 그 사람 곁을 떠났다고. 그런데 너도 옆에서 지켜봤다시피 아이들한테는 아빠가 필요해.”“더구나 인우 씨는 그때의 남준 씨랑 달라.”박민정의 말에 조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알려주기 싫어. 인우 씨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한번 테스트해 봐야겠어.”“그래.”조하랑과 얘기를 마친 뒤 박민정은 재검사받으러 진료실로 들어갔다.김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하랑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무슨 얘기 나눴어요?”“여자끼리 하는 얘기를 왜 궁금해하죠?”조하랑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김인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되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쌀쌀맞아요?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조하랑은 살짝 마음에 찔렸지만 애써 덤덤한 척했다.“아니요. 인우 씨가 착각한 거예요.”사실 임신한 뒤로 감정 조절이 잘 안되고 있었다.“어디 불편하면 병원에 왔던 참에 한 번 검사해 봐요.”김인우가 걱정스레 말하자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요.”그녀가 거부하니 김인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러다가 다시 유남준의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남준아.”“응.”유남준은 대답하면서도 눈길은 진료실에서 떼지 못했다.“걱정하지 마. 오늘 보니까 형수님 안색도 꽤 괜찮던데 분명 별문제 없이 회복될 거야.”김인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축하해.”“뭘?”“뉴스 보니까 정 대표가 모든 재산을 전부 형수님께 드린다고 하던데?”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정 대표의 지금 상황을 보니 기껏해야 1, 2년 정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던데 진주시에만 변화가 있는 게 아니겠군.”그의 말에 유남준의 얼굴색이 확 변하더니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되물었다.“1, 2년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