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다.”“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주방에 갔다.“엄마, 제가 우유 한 잔을 타드릴 테니까 마시고 자요.”정수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답했다.“그래.”그리고 윤소현은 우유에 어마어마한 약을 타기 시작했다.‘설마 이걸 마시고도 안 죽는 거 아니겠지?’만약 오늘 저녁에 정수미가 죽게 되면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박민정을 대표직에서 끌어내릴 속셈이었다.그러다가 살짝 방심해서 손이 엇나간 바람에 하마터면 약을 바닥에 쏟을 뻔했지만 다행히 손이 빨랐다.윤소현은 따뜻한 우유를 정수미 앞에 가져갔다.“엄마, 여기요.”정수미는 우유를 건네받은 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답했다.“지금 안 졸리는데 이따 마실게.”“이따 마시면 다 식잖아요. 그냥 지금 마셔요.”윤소현은 자기 계획이 틀어질까 조바심이 났다.“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지.”말을 마친 뒤 컵을 한쪽에 내려놨다.“나랑 얘기 좀 하자.”윤소현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도 오늘 저에 관련된 뉴스 기사 보셨죠? 지금 인터넷에서 가루가 되도록 사람들한테 까이고 있는데 엄마랑 가만히 앉아 얘기할 기분이 나겠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이 너무 기가 막혔다.애초에 윤소현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런 뉴스가 날일도 없고 괜히 그 일로 회사까지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이만 가서 쉬어.”정수미의 말에 윤소현은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설득했다.“엄마가 이 우유를 다 마시면 그때 가서 잘게요.”정수미는 끈질긴 윤소현의 모습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마시려고 컵을 들었다가 문득 윤소현에게 물었다.“소현아, 진짜로 엄마가 이 우유 마시길 바라는 거야?”윤소현은 순간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걸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네, 마시면 이따 잠이 잘 올 거예요.”정수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단번에 우유 한 잔을 다 들이켰고 윤소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
윤소현은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내일 아침 듣게 될 정수미의 사망 소식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하지만 이튿날에도 집안은 너무 고요했고 일어날 때가 됐지만 정수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슬 조바심이 났다.“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어?”그러나 도우미의 대답은 단번에 그녀를 소름 돋게 했다.“정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깨면 병원에 오라고 전하셨습니다.”“뭐라고?”순간 윤소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제 탄 약을 다 마셨다면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윤소현이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무렵 차는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그리고 병실 안에 들어가 보니 길연서 외에 장 변호사도 같이 와 있었다.정수미는 침대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안색은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엄마, 왜 저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병원에 오셨어요?”윤소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그녀에게 물었다.사실 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왠지 안 좋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정수미는 그녀의 물음에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소현아, 너를 오늘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단 하나야. 잘 들어, 이 시간 이후부터 우리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야.”‘뭐라고?’윤소현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엄마, 농담이 너무 심한데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라니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혹시 그 뉴스 때문에 그러세요?”그러다가 문득 이모 정보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엄마, 화 풀어요. 제가 공개적으로 사과해서 지엔 그룹에 최대한 영향 끼치지 않게 할게요. 그리고 그 세 사람한테도 사과해서 꼭 양해를 구할 거고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정수미의 눈치를 살폈다.그러나 지금까지의 그 따뜻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앞으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너같이 양심 없는 딸은 둔 적이 없으니까.”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그제야 정수미가 그저 한 말이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윤소현은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내일 아침 듣게 될 정수미의 사망 소식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하지만 이튿날에도 집안은 너무 고요했고 일어날 때가 됐지만 정수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슬 조바심이 났다.“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어?”그러나 도우미의 대답은 단번에 그녀를 소름 돋게 했다.“정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깨면 병원에 오라고 전하셨습니다.”“뭐라고?”순간 윤소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제 탄 약을 다 마셨다면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윤소현이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무렵 차는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그리고 병실 안에 들어가 보니 길연서 외에 장 변호사도 같이 와 있었다.정수미는 침대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안색은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엄마, 왜 저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병원에 오셨어요?”윤소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그녀에게 물었다.사실 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왠지 안 좋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정수미는 그녀의 물음에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소현아, 너를 오늘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단 하나야. 잘 들어, 이 시간 이후부터 우리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야.”‘뭐라고?’윤소현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엄마, 농담이 너무 심한데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라니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혹시 그 뉴스 때문에 그러세요?”그러다가 문득 이모 정보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엄마, 화 풀어요. 제가 공개적으로 사과해서 지엔 그룹에 최대한 영향 끼치지 않게 할게요. 그리고 그 세 사람한테도 사과해서 꼭 양해를 구할 거고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정수미의 눈치를 살폈다.그러나 지금까지의 그 따뜻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앞으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너같이 양심 없는 딸은 둔 적이 없으니까.”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그제야 정수미가 그저 한 말이
“나 왔다.”“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주방에 갔다.“엄마, 제가 우유 한 잔을 타드릴 테니까 마시고 자요.”정수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답했다.“그래.”그리고 윤소현은 우유에 어마어마한 약을 타기 시작했다.‘설마 이걸 마시고도 안 죽는 거 아니겠지?’만약 오늘 저녁에 정수미가 죽게 되면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박민정을 대표직에서 끌어내릴 속셈이었다.그러다가 살짝 방심해서 손이 엇나간 바람에 하마터면 약을 바닥에 쏟을 뻔했지만 다행히 손이 빨랐다.윤소현은 따뜻한 우유를 정수미 앞에 가져갔다.“엄마, 여기요.”정수미는 우유를 건네받은 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답했다.“지금 안 졸리는데 이따 마실게.”“이따 마시면 다 식잖아요. 그냥 지금 마셔요.”윤소현은 자기 계획이 틀어질까 조바심이 났다.“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지.”말을 마친 뒤 컵을 한쪽에 내려놨다.“나랑 얘기 좀 하자.”윤소현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도 오늘 저에 관련된 뉴스 기사 보셨죠? 지금 인터넷에서 가루가 되도록 사람들한테 까이고 있는데 엄마랑 가만히 앉아 얘기할 기분이 나겠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이 너무 기가 막혔다.애초에 윤소현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런 뉴스가 날일도 없고 괜히 그 일로 회사까지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이만 가서 쉬어.”정수미의 말에 윤소현은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설득했다.“엄마가 이 우유를 다 마시면 그때 가서 잘게요.”정수미는 끈질긴 윤소현의 모습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마시려고 컵을 들었다가 문득 윤소현에게 물었다.“소현아, 진짜로 엄마가 이 우유 마시길 바라는 거야?”윤소현은 순간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걸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네, 마시면 이따 잠이 잘 올 거예요.”정수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단번에 우유 한 잔을 다 들이켰고 윤소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
“네가 사과하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구나.”정보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정이에게 연락해서 홍보팀을 동원해 대신 사과문을 발표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넌 당분간 회사에 나오지 마라.”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네티즌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윤소현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었다.윤소현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모,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스스로 잘 생각해 봐라. 내일까지 답을 줘.”정보주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녀는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박민정은 이미 인터넷에서 떠들썩한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지금 최선의 해결책은 명백했다.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해고된 세 명의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그러나 정보주는 잠시 기다려 보자고 했고 박민정은 이에 동의했다.그 후, 그녀는 곧장 인사 과장을 호출했다.과장은 긴장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대표님,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까지 파장이 클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박민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은 인사과장으로서 해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에 따르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걸 몰라요?”“당신,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하지 않았나요?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윤소현 씨가 시킨 일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화낼까 봐 두려웠습니다.”박민정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럼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어요?”과장은 머리를 숙였다. 사실 그는 박민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회사의 실질적인 결정권은 여전히 윤소현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짐을 정리하세요. 퇴사 준비하죠.”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하자 과장은 충격에 휩싸였다.“대표님, 저는 이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우리는 계약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박민정은 냉정하게 말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인사과장을 해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자신은 이 회사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지엔 그룹의 직원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여성 직원은 무려 백만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 인플루언서였다.그녀는 그날 바로 녹취를 남겨 윤소현이 했던 말들을 모두 인터넷에 공개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라이브 방송을 켰다.“저희는 근무 시간에 잡담한 게 아닙니다. 점심시간에 이야기한 것뿐이에요.”“저와 제 동료들은 평범한 직원들일 뿐이지 노예가 아닙니다. 설마 대화할 자유조차 없는 겁니까?”“지금의 자본가는 정말 무섭군요.”함께 해고된 두 명의 동료도 각자의 계정에 영상을 올렸고 그 안에는 윤소현의 폭언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했다.[이렇게 큰 기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근로계약을 체결했다면서? 도대체 무슨 권리로 멋대로 해고하는 거야?][법을 무시하는 인간들! 당장 노동청에 신고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해!]그녀는 댓글을 확인한 후 답장을 남겼다.[이미 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저희 같은 노동자들도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겠죠. 그러니 여러분도 이 회사를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이 사건은 삽시간에 온라인에서 퍼졌고 급기야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까지 치솟았다.네티즌들은 윤소현의 거만한 태도와 독선적인 발언을 빠르게 공유했고 곧 많은 이들이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저 사람, 원래 무용가 아니었어? 저런 인성이었다니, 정말 실망이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돈 벌기도 힘든데.][그러게. 자기 마음대로 해고 해놓고 노동법은 완전히 무시하네. 설마 계약이 장식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현실이 원래 그렇지 뭐.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는 건 순식간이지만 직원이 퇴사하려면 한 달 전부터 통보해야 하잖아. 너무 불공평해!]SNS가 들끓기 시작하자 네티즌들은 윤소현의 개인 SNS로 몰려가 댓글을 남겼다.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수없이 쏟아지는 비난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그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문제는 여
“소현아, 엄마 퇴원 수속 밟아줘.”정수미가 말했다.오랜 세월 함께한 딸이었다. 비록 친딸은 아닐지라도 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인하고 싶었다. 윤소현이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지.윤소현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좋아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비서님, 저야말로 엄마의 건강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엄마가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훨씬 빨리 회복하실 거예요.”비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가 거만하게 병실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윤소현이 사라지자 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절대 집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왠지 모르게 정수미가 집으로 돌아가면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최상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의사는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정수미는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조용히 손을 토닥였다.“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나는 안심할 수 없어.”비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표님의 몸을 담보로 삼아선 안 됩니다.”“괜찮아.”정수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만약 정말로 소현이가 그랬다면 내가 괜한 정을 준 거겠지.”윤소현은 곧바로 퇴원 수속을 마쳤고 정수미를 집으로 데려갔다.하지만 첫날 밤 그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한편, 지엔 그룹은 박민정이 취임한 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직원들은 모두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모았다.“다행히 새 대표가 박민정이지, 윤소현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제야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겠어.”“그러게 말이야. 윤소현이 대표였다면 우리 보너스는 커녕, 회사 분위기도 엉망이 됐을걸? 게다가 윤소현은 마치
정민기가 가져온 녹음 파일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윤소현이 외부 세력과 손잡고 정씨 가문을 와해시키려 한다는 것, 심지어 지엔의 주식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사실까지.박민정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배은망덕할 줄이야.이 일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마침 정호철의 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회사 내에서 오래된 경영진들에게 박민정이 휘둘릴까 걱정되어 틈틈이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묻곤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과거 그가 자신과 박예찬에게 가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서늘하게 대했다.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업무뿐이었다.정호철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아직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순전히 박민정이 그를 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정수미와 그녀의 가족을 지켜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병원에서 정수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혼수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틈틈이 윤소현의 딸을 찾아가 보곤 했는데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였다.“소현이는 한 번이라도 와서 아이를 봤어?”그녀가 묻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께서 요즘 많이 바쁘신 듯합니다. 한 번도 다혜를 보러 오신 적이 없습니다.”아이의 이름이 무색하게 윤소현은 한 번도 진심으로 이 아이를 아껴준 적이 없었다.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짊어진 아이구나.”비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병실로 돌아가 쉬셔야 합니다, 대표님. 너무 오래 밖에 계시면 안 됩니다.”“그래.”병실로 돌아온 정수미는 문득 물었다.“민정이는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나?”“정 매니저님께서 도와주고 계셔서 작은 아가씨께서는 큰 문제 없이 지내고 계십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군.”정수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소현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도록 해. 그 아이의 성격을 내가 잘 알잖아. 민정이의 아래에 머물고 있을 인물이 아니야.”비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은 이상했다. 진서연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변비라도 걸린 걸까?그녀는 여전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정민기를 보며 진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연아,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진서연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민기 씨... 갔어요?”박민정은 의아했다.“아니, 안 갔는데? 왜?”“그럼 전 계속 화장실에 있을래요.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나갈게요.”진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박민정은 그제야 그녀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서연아, 민기 씨는 널 기다리려고 여기 있는 거야. 그냥 나와.”“절 기다린다고요?”진서연은 이해하지 못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그냥 가라고 해 주세요.”그녀는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네 생각 안 들어보고 싶어? 대체 무슨 일로 널 찾아온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진서연은 한숨을 쉬며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박민정은 어제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내가 대신 물어봐 줄까?”박민정은 정민기가 진서연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는 않았다.진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말 가능해요? 그럼... 도와주세요.”“알았어.”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다가갔다.“서연이가 속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서연이를 찾은 이유가 뭐예요? 내가 대신 전해줄까요?”정민기는 그녀가 배가 아프다는 말에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혹시 뭘 잘못 먹었어요? 약이라도 가져다줄까요?”박민정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그는 역시 진서연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아니었으면 그녀가 배가 아픈 것보다 자신을 왜 피하는지 먼저 물었을 테니까.정민기가 약을 가지러 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를 붙잡았다.“어젯밤에 서연이한테 한 말, 거짓말이었죠? 난 알아요. 민기 씨가 서연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요.”정민기의 걸음이 멈췄다.“그리고... 서연이와 에리의 관계, 진짜인
정민기는 박윤우의 말에 흥미가 동했다.“서연이 아줌마가 왜?”박윤우는 입을 삐죽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서연이 아줌마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귀엽고 싸움도 잘하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많죠.”그는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정민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운전 속도도 들쭉날쭉해졌다.“그래?”“당연하죠. 예전에 엄마랑 같이 일할 때도 고객들이 줄줄이 서연이 아줌마한테 관심을 보였어요.”박윤우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했다.“솔직히 아저씨도 좀 분발해야 해요. 맨날 저런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니까 여자들이 다 도망가는 거잖아요.”“아저씨도 이제 제법 나이가 많으신데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안 하셔요?”부모 얘기가 나오자 정민기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딱 굳어졌다. 그는 박윤우가 계속 말하는 걸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숙제는 다 했어? 안 했으면 빨리 해.”박윤우는 더 놀리고 싶었지만 숙제 얘기가 나오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정민기는 박윤우를 유치원에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 그는 다른 남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자신이 에리나 진서연의 과거 남자들과 비교하면 어떤지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차는 지엔 그룹 앞에 멈춰 서 있었다.정민기는 지엔 그룹 외부에서 진서연이 쉴 때쯤 이야기를 나누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눈에 띄는 한 차량이 있었다. 그는 직업적 감각으로 이상함을 느꼈고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자 곧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한 사람은 윤소현,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윤석후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잠시 기다리자 최현아와 그녀의 시아버지 유석진까지 차에서 내렸다.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모두 같은 차에 올라탔다.정민기는 이들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직감하고 즉시 차를 몰아 뒤를 밟았다.차는 한 호텔 앞에 멈춰섰고 정민기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안 중요하다고요?”진서연은 더욱 서러워졌다.“어디가 안 중요해요? 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대답해 봐요.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그녀의 손에 쥐어진 정민기의 옷이 구겨질 정도였다. 정민기는 눈빛을 잠시 깔며 살짝 짜증이 섞인 기색을 보였다.“안 좋아해요.”그는 한때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진서연 역시 과거의 약혼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진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가득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정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제 나가줄래요?”정민기의 냉정한 한마디에 진서연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처음에 나랑 연애를 시작했어요?”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 연애를 하면 꼭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요? 사귀기 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우리는 안 맞아요.”정민기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방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에리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나로는 부족해요?”“네?”그 한마디에 진서연의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정민기에게 날렸다.사실, 정민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꽂혔다.“그, 그게... 왜 안 피한 거예요?”그녀의 주먹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순간, 정민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짙푸른 멍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정민기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제 됐어요?”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진서연은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래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 당장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