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방성원은 자신의 일을 유남준에게 모두 이야기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냐.”“그럼 무슨 일인데?”“유석진 쪽이 요즘 조용해. 그러니까 잘 감시해.”폭풍 전의 고요일 수도 있으니까.방성원은 즉시 진지해졌다. “알겠어. 명심할게.”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랑 인하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이혼할 거야?”“그럴 리가. 난 인하랑 이혼하지 않을 거야. 우리 사이에 아이도 있는데,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잖아.” 방성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됐어. 얼른 달래주는 게 좋아. 이런 문제는 오래 끌수록 좋지 않아.”이런 부분에서는 유남준의 경험이 훨씬 많았다.방성원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직 화가 좀 남아 있어. 날 고소하겠니. 조금만 진정한 후에 생각해볼게.”두 사람의 통화가 끝난 후, 유남준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박민정에게 전했다.박민정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개입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방성원과 설인하, 둘 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기에 어느 한쪽 편을 단정적으로 드는 것도 적절치 않았다.“하아... 감정이란 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거네요.”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둘은 어때?”박민정은 순간 멍해졌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참이나 반응하지 못했다.“우리 둘은 왜요?”유남준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 다시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야.”그는 혹시나 그녀에게서 다른 반응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그냥 기다리는 게 나을 듯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아야만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모레가 서 비서 결혼식이니까 내일 도와주러 갈 거야?” 유남준은 화제를 돌렸다.박민정은 순식간에 설레는 얼굴이 되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아가 저랑 서연이랑 같이 결혼식에 서달라고 했어요.”원래 설인하도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서다희의 결혼 소식은 결국 윤소현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차피 그냥 비서 결혼하는 거잖아.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윤소현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방 안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아무리 달래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소란스러움에 짜증이 난 윤소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대체 뭐 하는 거야?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보면서 무슨 보모야? 당장 데리고 나가! 시끄러워 죽겠으니까.”보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우는데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귀찮다는 듯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다니. 역시 세상 모든 부모가 다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마침 지나가던 정수미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보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무슨 일이야?”“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아이는 유난히 잘 우네요.” 보모가 답하자 정수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기들이야 울기 마련이지만 이유 없이 우는 건 아닐 텐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닐까? 의사부터 불러봐.”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윤소현이 급히 나왔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은 원래 우는 게 정상이에요. 배가 고픈 걸 수도 있잖아요.”그러고는 보모를 향해 지시했다.“이런 사소한 일로 엄마까지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얼른 데려가서 배불리 먹이도록 해.”“네.”보모는 아이를 안고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정수미는 그런 윤소현의 모습을 보며 결국 조심스럽게 타일렀다.“소현아, 그래도 네 친딸인데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윤소현은 태연하게 받아쳤다.“제가 신경 안 쓴다고 생각하세요?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은 다 그런 거예요. 크면 괜찮아질 거니까요.”윤소현의 머릿속에는 다혜의 안위 따위 전혀 없었다. 오로지 정수미가 작성한 유언장만이 그녀의 관심사였다.정수미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하자 윤소현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엄마, 다혜가 엄마의 친손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차별하지는 말아 주세요. 다혜가 태어났을 때부터 남
“다혜가 위험해요. 지금 의식을 잃었어요. 언제쯤 시간이 돼요?”윤소현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떨리고 있었지만 유남우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내 딸도 아닌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 말을 듣는 순간, 윤소현의 가슴에 날카로운 바늘이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하지만 당신이 원해서 낳은 아이잖아요.”윤소현은 다혜가 태어나면 유남우가 자신에게 조금은 더 잘해 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다혜는 그저 유남우가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복수의 이유는 바로 과거 윤소현이 유남우에게 약을 먹인 일이었다.“말이 많네. 차라리 그 시간에 애부터 치료하는 게 낫겠어.”유남우는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그의 곁에는 홍주영이 서 있었다. 비록 통화 내용 전체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남우의 말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도련님, 다혜가 아픈 건가요?”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다니.유남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별일은 아니겠죠? 병문안이라도 가야 할까요?”홍주영도 다혜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늘 해맑았다.하지만 유남우는 단호하게 답했다.“홍 비서, 그 애는 내 친딸이 아니야. 앞으로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듣는 순간, 홍주영은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유남우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하민재가 최근에 널 찾아오진 않았어?”홍주영은 순간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 하민재는 몇 번이나 그녀를 찾아왔었지만 홍주영은 매번 그를 문전박대했다.“만약 또 찾아와서 너를 괴롭히면 반드시 나한테 말해.”유남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네.”“됐어, 이제 나가봐.”“네.”홍주영이 방을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마침 하민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주영 씨, 처음에 주영 씨를 찾았던 건 유남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홍주영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랜만이네요. 다들 여긴 어쩐 일이세요?”“근처 구경 좀 하려고요.” 진서연이 답했다.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일행은 곧 흩어졌다. 그러다 민수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저 사람이 유남우의 비서예요?”“네.” 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되게 매력 있네요.” 민수아가 감탄하듯 말했다.홍주영은 첫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직장 여성 특유의 세련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점이 오히려 남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일행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던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박민정과 친구들이 돌아보자 그곳엔 홍주영과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하민재가 있었다.홍주영은 가던 길을 가려 했지만 하민재가 길을 막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주영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네?”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홍주영은 눈살을 찌푸렸다.“미안하지만 우리 더 이상 할 말 없어요.”그녀는 관계를 질질 끄는 걸 싫어했다. 한 번 인연이 아니라 판단하면 미련 없이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하민재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애타게 말했다.“잠깐만요, 가지 마요.”“손 놔요!”홍주영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서연 일행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낮부터 이게 뭐야?”진서연은 소매를 걷어붙였다.“여자가 싫다는데도 안 놓는다고?”그러고는 박민정을 돌아보며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서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들 쪽으로 향했다.주변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었고 박민정도 걱정이 되어 민수아와 함께 따라갔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들었잖아요, 손 놓으라고.”진서연은 두 사람 앞에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하민재가 그녀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누구죠?”“홍 비서의 친구예요.”진서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이
하민재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네 명의 여자의 시선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하는 시선에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됐어요.”그는 떠나기 전에 진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그가 자리를 뜨자 주변의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홍주영은 감격의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 같은 여자끼리 서로 도와야죠.”진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홍주영이 이만 떠나려고 할 때 박민정이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같이 돌아다닐래요?”박민정은 하민재가 다시 나타날까 봐 걱정됐다. 홍주영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녀들은 같이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음식을 먹으면서 구경했다.박민정 말대로 하민재는 정말 떠나지 않았고 멀리서 홍주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민재의 부하들도 이 상황이 살짝 어이없었다.“형님, 이렇게 한 여자를 몰래 감시하는 게 좀 아닌 것 같아요.”부하는 그들이 살짝 변태 같다고 생각해서 말을 꺼내자 하민재가 차에 올라타면서 반박했다.“네가 뭘 알아? 남자는 얼굴이 두꺼워야 해.”그의 뻔뻔스러운 말에 부하는 할 말을 잃었다.“왜 같이 돌아다니는 거지?”하민재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골치가 아팠고 여자들은 쇼핑하면 정말 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박민정이 홍주영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자 그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그저 돌아가기로 했다.한편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은 유다혜는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고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것일 수 있었다.“어떻게 이런 일이...”정수미는 믿을 수 없었고 윤소현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녀는 그 남자들한테 그런 병이 있고 자신의 딸한테까지 유전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 아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절대 낳지 않았을 거예요.”정수미는 독한 말을 내뱉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위로했다.“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이때 박민정도 진서연과 민수아와 같이 저택으로 돌아왔고 마침 가만히 서 있는 정수미를 보게 되었다.진서연은 의혹스러운 듯 물었다.“왜 또 왔을까요?”“민정이 보러 왔을 거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먼저 들어가게 하고 홀로 정수미를 향해 걸어갔다. 정수미는 멍하니 서서 박민정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정 대표님.”박민정이 소리를 내자 정수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정아.”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별로 없고 그냥... 그냥 와본 거야.”그 말을 듣고 박민정이 막 떠나려는데 정수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민정아, 나랑 같이 걸으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박민정은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거절하기가 어려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정수미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다가가 나란히 걸으며 마치 평범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안부 묻듯 입을 열었다.“오늘 어디 갔었어?”“그냥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친구가 내일 결혼하거든요.”박민정이 답했다.“그랬구나.”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럼 나도 내일 참석해도 될까?”그녀는 엄마로서 박민정의 친구들을 당연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민정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그게...”“곤란하면 됐어. 괜찮아.”정수미는 서둘러 말하며 박민정이 자신을 더 꺼릴까 봐 걱정됐는데 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친구 결혼식이라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박민정이 특별히 그녀에게 설명하자 정수미는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다.“그래. 알겠어. 네 친구니까 내일 따로 축의금을 보내줄게.”기대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수미는 묵묵히 이 일을 마음속에 새겼다.얘기를 나
“다행이에요.” 박민정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녀의 오른쪽 뺨에 난 흉터를 바라보며 목구멍이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난 이만 갈게.”“네.” 박민정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고 정수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욱 아파졌다.그녀는 감정을 억누른 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택시에 올라탄 후 그녀는 박민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뒤를 돌아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결혼 축의금을 준비해 줘.”비서는 약간 의아했다.“고객 가족 중 최근에 결혼하는 분이 없는데요.”“민정이의 친구가 결혼한대. 반드시 가장 중요한 고객 기준에 맞춰 준비해 줘.” 정수미가 말했다.“알겠어요.”비서는 대답한 후 즉시 준비하러 갔다.비서는 박민정한테 정 대표님 같은 친엄마가 있다는 게 부러웠고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낸 게 안타까웠지만 만약 박민정이 버림받지 않고 입양되지 않았다면 분명 정 대표님은 박민정을 굉장히 귀하게 키웠을 거였다....박씨 가문 옛 저택.박민정은 돌아온 후 민수아와 함께 결혼 준비를 하러 갔다.민수아의 고향은 이곳이 아니어서 원래는 호텔에서 신부맞이를 하려고 했지만 박민정은 박씨 가문 옛 저택이 충분히 크고 호텔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옛 저택에서 하기로 했다.서다희가 고용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모두 도와주러 왔다.“민정아, 나 너무 긴장돼.” 민수아가 침대에 앉아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괜찮아. 내일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푹 쉬고 내일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돼야지.”그 말을 마치자 그녀의 머리가 은은하게 아파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벽에 기대어 있는데 갑자기 결혼 전날이 떠올랐다.박형식도 자신한테 가장 아름다운 신부라고 똑같이 위로해 줬었다.박민정의 눈앞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이 떠올랐는데 박형식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병상에 누워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이었다.“민정아
박민정은 좀 내키지 않았다.“나 이미 수아랑 약속했어요.”“내가 민수아에게 전화할게. 이해해 줄 거야.” 유남준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하자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은 박민정은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 마요. 전화하지 마요.”유남준은 그녀보다 한 뼘이나 더 컸기 때문에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박민정은 도저히 그의 핸드폰을 빼앗을 수 없었다.그녀는 발끝을 들어 올린 채 두 손을 들어 빼앗으려고 애를 썼다.막 도착한 김인우는 그 광경을 보고 참지 못하고 기침을 두 번 했다.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거의 유남준에게 안길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진 채급히 몇 걸음 뒤로했다.김인우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걸어왔다. “형, 다른 일 없으면 나 먼저 갈게. 안심해. 형수님 정말 괜찮아. 가끔 두통이 있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따라 말했다.“인우 씨가 괜찮다고 하잖아요. 날 돌아가게 해줘요. 수아에게 전화하지 말고요.”김인우도 내일이 서다희와 민수아의 결혼식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도 이미 축의금을 준비해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가 박민정을 도와 말하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인우는 박민정으로부터 이런 눈빛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예전에 그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서 박민정이 그에게 고마움은커녕 좋은 감정조차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계속 고집을 부리고 김인우 또한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그의 손이 막 떨어지자 박민정은 즉시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손에 꽉 쥐었다.다른 여자가 유남준의 핸드폰을 건드리려 했다면 그는 정색하고 화를 냈을 거였지만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애틋함으로 가득했다.“알았어. 전화하지 않을게.”“고마워요.”박민정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데 왜 유남준의 동의가 필요한 거지? 그리고 내가 왜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
“설인하...”정보주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설지태가 혹시 네 할아버지 아니야?”그 이름이 나오자 설인하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할아버지를 아세요?”“알다마다! 예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날 자주 불러 같이 놀곤 하셨어. 그때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정보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운 듯 덧붙였다.“다만 안타깝게도 설씨 가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너도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구나?”그녀는 몇 마디 말만으로 순식간에 설인하와의 거리를 좁혔다.처음에는 진서연과 마찬가지로 설인하도 정보주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설인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다 지난 일이에요.”정보주는 깊은 연민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설씨 가문에 일이 생겼을 때 난 아직 힘이 없었어.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설인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운명이었어요.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설인하가 친정 이야기를 꺼내는 걸 처음 보았다.그때, 정보주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설인하에게 내밀었다.“인하야, 무슨 일이든 나를 찾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꼭 도와줄게.”설인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고맙습니다.”그녀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설인하는 정보주의 명함을 받아들고서 잃어버릴까봐 꽉 쥐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을 무렵, 정보주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아침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으면 내가 대접할게.”진서연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아직이요! 아침부터 짐 정리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그럼 가자.”정보주는 자연스럽게 박민정의 팔을 끼며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굴었다.“민정아, 너랑 서연이 그리고 인하가 좋아하는 음식 말해 봐. 이모가 다 사줄게.”박민정은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구는 사람을 처음 봤다. 게다가 그 사람이
“보스,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윤소현을 도와주고 보스를 험담하던 사람이 다름 아닌 보스 친이모라니요.”진서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그렇지만 그때는 이모도 보스가 누군지 몰랐으니 그냥 오해였던 거죠.”그녀가 말을 마칠 즈음,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정보주가 뛰어왔다.“민정아!”정보주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분명 마흔이 넘었을 나이인데 서른 대 초반처럼 보였다.그녀는 또다시 박민정을 껴안으려 했지만 이번엔 박민정이 미리 대비하고 피했다.그러자 정보주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왜 이렇게 야박하게 구니? 이모가 한 번만 안아보자.”그녀는 애교까지 부렸다. 진서연은 대단한 인물로만 알고 있던 정보주가 박민정 앞에서 이러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아줌마, 그러지 마세요.”박민정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러자 정보주는 일부러 삐친 척하며 볼을 부풀렸다.“이모라고 불러주면 안 돼? ‘아줌마’는 너무 늙어 보이고 또 딱딱하잖아.”박민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이모,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모’라고 부르는 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러자 정보주는 한결 기분이 풀린 듯했다.“그냥 너 보러 왔지.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나 혼자 진주시에 왔는데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잖아.”그녀는 말을 하면서 곁에 서 있는 진서연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아가씨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너 친구?”미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진서연은 기분이 살짝 들떠 있었다.이때 박민정이 답했다.“진서연이라고 하고 제 친구이자 예전 직장 동료예요.”“오오~ 진서연, 이름도 참 귀엽네.”정보주는 처음 본 사이임에도 거리낌 없이 진서연의 손을 잡았다.“손금도 괜찮은데? 큰 부귀를 누릴 팔자야. 다만...”정보주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연애운이 좀 순탄치 않겠어.”“연애운이 안 좋다고요?”진서연은 바로 긴장했다.“아줌마, 제 연애운이 왜 안 좋다는 거예
당연히 기뻤다.한 집에서 정민기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감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단둘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진서연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당연히 원하죠.”그러다 문득 설인하가 떠올랐다.“그런데 인하 씨는요?”자신이 떠난다고 해도 집에는 아직 설인하가 남아 있지 않은가.유남준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여러 채의 별장이 있어 공간은 충분했지만 설인하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건 내일 다시 고민해보기로 했다.그날 밤, 박민정은 몹시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자신과 유남준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도저히 말로 옮길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머릿속엔 온통 그 장면이 떠오르며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박민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민정아, 너 왜 이래? 정신 좀 차려!”어제 유남준과 입을 맞추었던 일도, 그 장면을 진서연에게 들킨 일도 떠올라 방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가 밖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나왔다.그런데 거실에서 진서연이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박민정이 당황하며 물었다.“서연아, 뭐 하는 거야? 이사 가려는 거야?”혹시 어제 일 때문인가 싶어 더 난처해졌다.그녀는 황급히 해명했다.“어제 일은 그냥 오해야. 신경 쓰지 마. 제발 가지 마.”하지만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보스, 걱정 마세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뒷채로 옮기는 거예요. 민기 씨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그때 설인하가 방에서 나왔다.“민정 씨, 저도 이사 가려고 해요. 괜찮죠?”박민정이 더 당황했다.“갑자기 왜요?”“방씨 집안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요. 은정이를 자주 보러 가고 싶거든요.”며칠 동안 보지 못한 딸아이가 너무 그리웠다.마침 그날 아침,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와 방성원의 저택 근처에 있는 별장을 하나 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박민정도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홍주영은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냈다.[할머니, 알겠어요. 다시 한 번 민재 씨와 만나 볼게요.]이 메시지를 보내자 할머니는 드디어 조용해졌다.홍주영은 휴대전화를 꺼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고씨 집안에 도착했다.유남우도 눈을 뜨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아까 통화의 내용은 서로 언급하지 않았다.......한편, 박민정과 유남준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앞으로 계속 본가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지금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정이 들었다.“네가 기억을 되찾고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다면 그때 함께 살도록 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박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박민정은 먼저 박윤우를 재우기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가 잠이 들자 방을 나와 자기 방으로 가려 했다.그녀가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유남준이 마치 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깨울까 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유남준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방에서 자자.”박민정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그,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뭐가 불편해?”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부부야. 나를 이렇게 계속 혼자 두는 게 괜찮아?”“혼자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박민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남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넌 이제 정말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구나.”예
유남우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차 안에는 이미 홍주영이 타고 있었고 유남우를 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겁니까?”원래 유남우가 오늘 돌아온 이유는 고영란을 만나 고씨 집안과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러 지그시 마사지하며 말했다. “굳이 어머니와 이야기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항상 우리 형만 편들었어. 차라리 고현문을 찾아가는 게 낫겠지.”홍주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도 유남준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럼에도 유남우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홍주영은 운전사에게 차를 고씨 집안으로 몰라고 지시했다.고현문은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과연 그가 유남우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현문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쉬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박민정과 그녀의 가족이 떠올랐다.본래 그 따뜻하고 화목한 풍경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는데 이제는 유남준에게 그 모든 것이 돌아갔다.유남준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굳이 자신의 여자까지 빼앗으려 하는가?그는 손을 꽉 쥐었고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마침 그때, 홍주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유남우가 자는 줄 알고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유남우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괜찮으니까.”“네.”홍주영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할머니?”“민재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어. 주영아, 너도 이제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애를 다시 받아 줘야지.” 노인의 목소리는 엄격한 듯했지만 속뜻은 애원에 가까웠다.홍주영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답했다. “할머니, 저와 그 사람은 정말 맞지 않아요. 이제 그만 이으세요.”“너는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