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재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네 명의 여자의 시선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하는 시선에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됐어요.”그는 떠나기 전에 진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그가 자리를 뜨자 주변의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홍주영은 감격의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 같은 여자끼리 서로 도와야죠.”진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홍주영이 이만 떠나려고 할 때 박민정이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같이 돌아다닐래요?”박민정은 하민재가 다시 나타날까 봐 걱정됐다. 홍주영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녀들은 같이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음식을 먹으면서 구경했다.박민정 말대로 하민재는 정말 떠나지 않았고 멀리서 홍주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민재의 부하들도 이 상황이 살짝 어이없었다.“형님, 이렇게 한 여자를 몰래 감시하는 게 좀 아닌 것 같아요.”부하는 그들이 살짝 변태 같다고 생각해서 말을 꺼내자 하민재가 차에 올라타면서 반박했다.“네가 뭘 알아? 남자는 얼굴이 두꺼워야 해.”그의 뻔뻔스러운 말에 부하는 할 말을 잃었다.“왜 같이 돌아다니는 거지?”하민재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골치가 아팠고 여자들은 쇼핑하면 정말 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박민정이 홍주영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자 그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그저 돌아가기로 했다.한편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은 유다혜는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고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것일 수 있었다.“어떻게 이런 일이...”정수미는 믿을 수 없었고 윤소현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녀는 그 남자들한테 그런 병이 있고 자신의 딸한테까지 유전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 아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절대 낳지 않았을 거예요.”정수미는 독한 말을 내뱉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위로했다.“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이때 박민정도 진서연과 민수아와 같이 저택으로 돌아왔고 마침 가만히 서 있는 정수미를 보게 되었다.진서연은 의혹스러운 듯 물었다.“왜 또 왔을까요?”“민정이 보러 왔을 거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먼저 들어가게 하고 홀로 정수미를 향해 걸어갔다. 정수미는 멍하니 서서 박민정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정 대표님.”박민정이 소리를 내자 정수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정아.”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별로 없고 그냥... 그냥 와본 거야.”그 말을 듣고 박민정이 막 떠나려는데 정수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민정아, 나랑 같이 걸으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박민정은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거절하기가 어려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정수미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다가가 나란히 걸으며 마치 평범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안부 묻듯 입을 열었다.“오늘 어디 갔었어?”“그냥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친구가 내일 결혼하거든요.”박민정이 답했다.“그랬구나.”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럼 나도 내일 참석해도 될까?”그녀는 엄마로서 박민정의 친구들을 당연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민정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그게...”“곤란하면 됐어. 괜찮아.”정수미는 서둘러 말하며 박민정이 자신을 더 꺼릴까 봐 걱정됐는데 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친구 결혼식이라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박민정이 특별히 그녀에게 설명하자 정수미는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다.“그래. 알겠어. 네 친구니까 내일 따로 축의금을 보내줄게.”기대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수미는 묵묵히 이 일을 마음속에 새겼다.얘기를 나
“다행이에요.” 박민정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녀의 오른쪽 뺨에 난 흉터를 바라보며 목구멍이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난 이만 갈게.”“네.” 박민정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고 정수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욱 아파졌다.그녀는 감정을 억누른 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택시에 올라탄 후 그녀는 박민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뒤를 돌아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결혼 축의금을 준비해 줘.”비서는 약간 의아했다.“고객 가족 중 최근에 결혼하는 분이 없는데요.”“민정이의 친구가 결혼한대. 반드시 가장 중요한 고객 기준에 맞춰 준비해 줘.” 정수미가 말했다.“알겠어요.”비서는 대답한 후 즉시 준비하러 갔다.비서는 박민정한테 정 대표님 같은 친엄마가 있다는 게 부러웠고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낸 게 안타까웠지만 만약 박민정이 버림받지 않고 입양되지 않았다면 분명 정 대표님은 박민정을 굉장히 귀하게 키웠을 거였다....박씨 가문 옛 저택.박민정은 돌아온 후 민수아와 함께 결혼 준비를 하러 갔다.민수아의 고향은 이곳이 아니어서 원래는 호텔에서 신부맞이를 하려고 했지만 박민정은 박씨 가문 옛 저택이 충분히 크고 호텔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옛 저택에서 하기로 했다.서다희가 고용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모두 도와주러 왔다.“민정아, 나 너무 긴장돼.” 민수아가 침대에 앉아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괜찮아. 내일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푹 쉬고 내일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돼야지.”그 말을 마치자 그녀의 머리가 은은하게 아파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벽에 기대어 있는데 갑자기 결혼 전날이 떠올랐다.박형식도 자신한테 가장 아름다운 신부라고 똑같이 위로해 줬었다.박민정의 눈앞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이 떠올랐는데 박형식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병상에 누워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이었다.“민정아
박민정은 좀 내키지 않았다.“나 이미 수아랑 약속했어요.”“내가 민수아에게 전화할게. 이해해 줄 거야.” 유남준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하자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은 박민정은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 마요. 전화하지 마요.”유남준은 그녀보다 한 뼘이나 더 컸기 때문에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박민정은 도저히 그의 핸드폰을 빼앗을 수 없었다.그녀는 발끝을 들어 올린 채 두 손을 들어 빼앗으려고 애를 썼다.막 도착한 김인우는 그 광경을 보고 참지 못하고 기침을 두 번 했다.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거의 유남준에게 안길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진 채급히 몇 걸음 뒤로했다.김인우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걸어왔다. “형, 다른 일 없으면 나 먼저 갈게. 안심해. 형수님 정말 괜찮아. 가끔 두통이 있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따라 말했다.“인우 씨가 괜찮다고 하잖아요. 날 돌아가게 해줘요. 수아에게 전화하지 말고요.”김인우도 내일이 서다희와 민수아의 결혼식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도 이미 축의금을 준비해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가 박민정을 도와 말하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인우는 박민정으로부터 이런 눈빛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예전에 그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서 박민정이 그에게 고마움은커녕 좋은 감정조차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계속 고집을 부리고 김인우 또한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그의 손이 막 떨어지자 박민정은 즉시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손에 꽉 쥐었다.다른 여자가 유남준의 핸드폰을 건드리려 했다면 그는 정색하고 화를 냈을 거였지만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애틋함으로 가득했다.“알았어. 전화하지 않을게.”“고마워요.”박민정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데 왜 유남준의 동의가 필요한 거지? 그리고 내가 왜
아침 7시, 서다희는 신랑 들러리들과 함께 도착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많은 진주시 유명 인사들이 참석해 그의 체면이 서는 듯했다.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박씨 가문 옛 저택을 보며 감탄했다.“서 비서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일반 부자들의 결혼식보다 더 좋아 보이는데요.”“유남준 씨의 오른팔이잖아요. 일반 부자는 비교도 안 돼요.”그들은 옛 저택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박민정과 진서연은 신부방 문을 막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신랑 들러리들에게 온갖 장애물을 설계했고 분위기는 매우 뜨거웠다.방 안에 앉아 있는 민수아는 매우 긴장됐지만 그녀들에게 잊지 않고 당부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다희한테 술 먹이지 마. 걔 술을 잘 못 마셔.”“알겠어요.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벌써 서다희편에 서고 친구보다 남편이 더 중요한가 봐요.” 진서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민수아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지금은 고생 좀 시켜야 해. 너무 쉽게 내 귀한 딸을 데려가면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야.”민수아 어머니가 그의 손을 때리며 말했다.“당신이 날 데려갈 때는 왜 몰래 친척들에게 봐달라고 했어요?”전형적인 사랑꾼인 민수아 아버지는 아내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민수아 어머니는 서다희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딸은 모든 면에서 평범했지만 서다희는 달랐고 그녀는 십억대 연봉을 받는 서다희가 회사 대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그런 민수아의 부모님을 바라보며 갑자기 자신이 결혼했을 때 박형식과 한수민이 대화했던 장면이 떠올랐다.그 당시 박형식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결혼 후 억울한 일이 있으면 꼭 아빠한테 말해. 아빠는 영원히 네 편이야.”그의 말을 듣고 한수민이 입을 열었다.“시골에서는 딸을 시집보낼 때 지참금도 없는데 당신은 딸을 시집보내면서 오히려 돈을 더 얹어주다니, 정말 처음 보는 상황이에요.”박형식이 비꼬며 말했다.“지금은 옛날과 달라. 우리는 딸을 시집보내는 거지, 딸을
“좋아.”민수아가 말했다.“부탁할게.”박민정은 핸드폰을 들어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정수미는 회사에 있었고 박민정이 전화 온 걸 보자 흥분하며 서둘러 받았다. “민정아, 무슨 일이니?”“그게 제 친구가 대표님의 선물을 받고 결혼식에 참석할 시간이 되시면 오시라고 해요.”박민정은 말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정수미는 어제 자신이 거절당한 줄 알고 오늘 내내 바쁘게 일하고 있었는데 박민정의 말을 듣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물론 시간 있지. 민정아, 주소를 보내줘. 곧 갈게.”“알겠어요.”박민정은 서다희와 민수아의 결혼식 주소를 정수미에게 바로 보냈고 그녀는 주소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비서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정 대표님, 잠시 후 고객과의 약속이 있어요.”“이후 일정은 모두 취소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급한 일이 생겼어.”정수미가 말했다.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어 회사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알겠어요.”비서는 이해가 안 갔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정수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정수미가 떠나자마자 윤소현이 찾아왔고 그녀는 비서에게 물었다.“엄마가 급하게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비서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둘째 아가씨의 친구가 결혼해서 정 대표님이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윤소현은 질투심이 섞인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는 정말 동생을 많이 아끼고 챙기시네요.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말이에요.”비서는 그녀의 비꼬는 듯한 말을 듣고 설명했다.“정 대표님은 아마 둘째 아가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일 거예요.”“물론 알고 있어요.”윤소현은 바로 받아 말한 후 다시 비서에게 물었다.“다혜는 어때요?”유다혜는 결국 그녀의 친딸이고 자신이 아무리 냉혈적이라 해도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의사 말로는 상태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싫어요. 안 가요.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정들어서 나중에 헤어지기 힘들 것 같아요.”그녀의 말에 정수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엄마, 얼른 가요. 우리 같이 들어가요. 이렇게 북적거리는 결혼식은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윤소현이 말했다.“그래.”정수미는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안쪽 로비에 도착하자 정수미는 바로 박민정을 발견했다.오늘 박민정은 신부 들러리로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은 가볍게 했지만 여전히 주위를 압도할 만큼 아름다웠다.정수미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윤소현이 막아섰다.“엄마, 동생이 바쁜 것 같은데 우리 방해하지 말고 옆으로 가서 앉을까요?”윤소현은 지금 정수미가 박민정과 계속 접촉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두 사람이 별로 접촉하지 않았는데도 정수미는 유언을 수정했고 만약 나중에 두 사람이 더 많이 접촉하게 되면 정수미가 모든 유산을 박민정에게 넘겨주는 건 아닌지 윤소현은 걱정됐고 그때 가서 자신한테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그래.”정수미는 별생각 없이 그저 박민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윤소현과 함께 신부 측 손님 자리에 앉았다.결혼식에 참석한 유명 인사들이 대부분 신랑 측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향한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정수미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몇 명의 여성들이 중얼거렸다. “민수아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서다희랑 결혼하다니요.”“서다희가 비록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지만 서씨 가문이 진주시에서도 손꼽히는 집안이고 게다가 서다희는 유남준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잖아요.”“맞아요. 인생이 핀 거죠.”“예전에 어떤 가문의 부잣집 딸이 서다희를 쫓아다녔는데 거절당했대요. 민수아 성격이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아요.”몇 사람은 민수아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녀의 친구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그런데 민수아 옆에 있는 들러리는 누구예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 여성이 박민정을 가리키며 말하자 다
“예쁜 줄 알았는데 얼굴에 저렇게 긴 흉터가 있다니, 누가 저런 흉터가 있는 얼굴을 좋아하겠어요.”한 여성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녀들은 박민정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줄 알고 각자 단정히 앉아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박민정이 그녀들 옆을 지나쳐 정수미 앞으로 다가갔다.“정 대표님, 윤소현 씨,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박민정이 정중히 묻자 정수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앞에 있던 여자들은 박민정이 정수미를 ‘정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정말 정수미였다.‘이 들러리가 정 대표님을 안다고? 괜히 아는 척하는 거 아니야?’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아. 널 방해한 건 아니지?”방금까지 박민정을 무시하던 여자들이 엄마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이 사람이 설마 박민정이에요? 유남준의 아내이자 정수미의 친딸인 박민정이요.”“아, 박민정!”몇 사람이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는데 비록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정수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민정아, 굳이 엄마를 챙기려고 하지 않아도 돼. 편할 대로 해”윤소현도 따라 말했다.“맞아, 동생. 우린 한 가족이니까 편하게 대해.”앞에 있던 여성들은 그제야 방금까지 무시하던 사람이 정수미의 딸이고 돈 많은 남자 찾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박민정이 걸어올 때 그 여자들의 불친절한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고 그들의 경멸하는 눈빛을 느꼈다.그녀는 정수미가 갑자기 이렇게 행동한 것이 자신을 돕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감사했다.“그럼 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가볼게요.”“그래. 가서 일 봐.” 정수미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박민정이 떠난 후, 그녀의 시선은 멀리 있던 여자들에게로 향했고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모든 사람이 당신들과 같은 건 아니에요.”그 여자들은 정수미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급히 자리를 떴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
“설인하...”정보주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설지태가 혹시 네 할아버지 아니야?”그 이름이 나오자 설인하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할아버지를 아세요?”“알다마다! 예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날 자주 불러 같이 놀곤 하셨어. 그때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정보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운 듯 덧붙였다.“다만 안타깝게도 설씨 가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너도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구나?”그녀는 몇 마디 말만으로 순식간에 설인하와의 거리를 좁혔다.처음에는 진서연과 마찬가지로 설인하도 정보주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설인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다 지난 일이에요.”정보주는 깊은 연민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설씨 가문에 일이 생겼을 때 난 아직 힘이 없었어.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설인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운명이었어요.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설인하가 친정 이야기를 꺼내는 걸 처음 보았다.그때, 정보주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설인하에게 내밀었다.“인하야, 무슨 일이든 나를 찾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꼭 도와줄게.”설인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고맙습니다.”그녀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설인하는 정보주의 명함을 받아들고서 잃어버릴까봐 꽉 쥐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을 무렵, 정보주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아침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으면 내가 대접할게.”진서연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아직이요! 아침부터 짐 정리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그럼 가자.”정보주는 자연스럽게 박민정의 팔을 끼며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굴었다.“민정아, 너랑 서연이 그리고 인하가 좋아하는 음식 말해 봐. 이모가 다 사줄게.”박민정은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구는 사람을 처음 봤다. 게다가 그 사람이
“보스,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윤소현을 도와주고 보스를 험담하던 사람이 다름 아닌 보스 친이모라니요.”진서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그렇지만 그때는 이모도 보스가 누군지 몰랐으니 그냥 오해였던 거죠.”그녀가 말을 마칠 즈음,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정보주가 뛰어왔다.“민정아!”정보주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분명 마흔이 넘었을 나이인데 서른 대 초반처럼 보였다.그녀는 또다시 박민정을 껴안으려 했지만 이번엔 박민정이 미리 대비하고 피했다.그러자 정보주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왜 이렇게 야박하게 구니? 이모가 한 번만 안아보자.”그녀는 애교까지 부렸다. 진서연은 대단한 인물로만 알고 있던 정보주가 박민정 앞에서 이러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아줌마, 그러지 마세요.”박민정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러자 정보주는 일부러 삐친 척하며 볼을 부풀렸다.“이모라고 불러주면 안 돼? ‘아줌마’는 너무 늙어 보이고 또 딱딱하잖아.”박민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이모,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모’라고 부르는 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러자 정보주는 한결 기분이 풀린 듯했다.“그냥 너 보러 왔지.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나 혼자 진주시에 왔는데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잖아.”그녀는 말을 하면서 곁에 서 있는 진서연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아가씨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너 친구?”미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진서연은 기분이 살짝 들떠 있었다.이때 박민정이 답했다.“진서연이라고 하고 제 친구이자 예전 직장 동료예요.”“오오~ 진서연, 이름도 참 귀엽네.”정보주는 처음 본 사이임에도 거리낌 없이 진서연의 손을 잡았다.“손금도 괜찮은데? 큰 부귀를 누릴 팔자야. 다만...”정보주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연애운이 좀 순탄치 않겠어.”“연애운이 안 좋다고요?”진서연은 바로 긴장했다.“아줌마, 제 연애운이 왜 안 좋다는 거예
당연히 기뻤다.한 집에서 정민기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감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단둘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진서연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당연히 원하죠.”그러다 문득 설인하가 떠올랐다.“그런데 인하 씨는요?”자신이 떠난다고 해도 집에는 아직 설인하가 남아 있지 않은가.유남준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여러 채의 별장이 있어 공간은 충분했지만 설인하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건 내일 다시 고민해보기로 했다.그날 밤, 박민정은 몹시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자신과 유남준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도저히 말로 옮길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머릿속엔 온통 그 장면이 떠오르며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박민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민정아, 너 왜 이래? 정신 좀 차려!”어제 유남준과 입을 맞추었던 일도, 그 장면을 진서연에게 들킨 일도 떠올라 방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가 밖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나왔다.그런데 거실에서 진서연이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박민정이 당황하며 물었다.“서연아, 뭐 하는 거야? 이사 가려는 거야?”혹시 어제 일 때문인가 싶어 더 난처해졌다.그녀는 황급히 해명했다.“어제 일은 그냥 오해야. 신경 쓰지 마. 제발 가지 마.”하지만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보스, 걱정 마세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뒷채로 옮기는 거예요. 민기 씨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그때 설인하가 방에서 나왔다.“민정 씨, 저도 이사 가려고 해요. 괜찮죠?”박민정이 더 당황했다.“갑자기 왜요?”“방씨 집안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요. 은정이를 자주 보러 가고 싶거든요.”며칠 동안 보지 못한 딸아이가 너무 그리웠다.마침 그날 아침,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와 방성원의 저택 근처에 있는 별장을 하나 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박민정도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홍주영은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냈다.[할머니, 알겠어요. 다시 한 번 민재 씨와 만나 볼게요.]이 메시지를 보내자 할머니는 드디어 조용해졌다.홍주영은 휴대전화를 꺼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고씨 집안에 도착했다.유남우도 눈을 뜨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아까 통화의 내용은 서로 언급하지 않았다.......한편, 박민정과 유남준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앞으로 계속 본가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지금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정이 들었다.“네가 기억을 되찾고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다면 그때 함께 살도록 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박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박민정은 먼저 박윤우를 재우기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가 잠이 들자 방을 나와 자기 방으로 가려 했다.그녀가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유남준이 마치 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깨울까 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유남준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방에서 자자.”박민정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그,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뭐가 불편해?”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부부야. 나를 이렇게 계속 혼자 두는 게 괜찮아?”“혼자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박민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남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넌 이제 정말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구나.”예
유남우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차 안에는 이미 홍주영이 타고 있었고 유남우를 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겁니까?”원래 유남우가 오늘 돌아온 이유는 고영란을 만나 고씨 집안과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러 지그시 마사지하며 말했다. “굳이 어머니와 이야기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항상 우리 형만 편들었어. 차라리 고현문을 찾아가는 게 낫겠지.”홍주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도 유남준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럼에도 유남우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홍주영은 운전사에게 차를 고씨 집안으로 몰라고 지시했다.고현문은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과연 그가 유남우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현문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쉬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박민정과 그녀의 가족이 떠올랐다.본래 그 따뜻하고 화목한 풍경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는데 이제는 유남준에게 그 모든 것이 돌아갔다.유남준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굳이 자신의 여자까지 빼앗으려 하는가?그는 손을 꽉 쥐었고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마침 그때, 홍주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유남우가 자는 줄 알고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유남우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괜찮으니까.”“네.”홍주영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할머니?”“민재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어. 주영아, 너도 이제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애를 다시 받아 줘야지.” 노인의 목소리는 엄격한 듯했지만 속뜻은 애원에 가까웠다.홍주영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답했다. “할머니, 저와 그 사람은 정말 맞지 않아요. 이제 그만 이으세요.”“너는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