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차갑기만 한 연 사장이 어렸을 때 의외로 다른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인하는 인제야 알았다.“또 있을까요?”연지석의 과거가 궁금한 듯 그녀가 질문을 이어가자, 박민정은 연지석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설인하에게 들려주었다.당시 고아였던 연지석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박민정이 실종된 후에 연지석이 사람들을 보내 박민정을 찾으러 다닌 이유를 설인하는 알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박민정은 연지석을 잘 챙겨줬었다.“연 사장이 불쌍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왜 그를 돌보지 않았나요?”설인하가 연지석의 부모를 언급하자, 기억하지 못하는 숨겨진 아픔이 있는 듯 박민정은 두통이 느껴졌다.두통은 기억 상실 때문일 것으로 그녀는 생각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유남준이 내려오자, 식당 내부의 분위기가 바로 다운되었다.진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이 얼음장 같은 사람과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았나요?”박민정이 실종된 후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하여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다행히 박민정이 돌아와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남준은 전보다 화를 적게 내긴 했었다.하지만 그 대신 성격이 많이 변덕스러워졌다.진서연의 말에 박민정은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어?”주위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감지하지 못했다.진서연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입을 다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이나 먹어요.”그제야 유남준이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발견했다.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똑같이 유남준을 쏘아보았다.남들 앞에서 살아있는 염라대왕으로 불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박윤우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박민정이 큰 소리로 모두에게 말하자, 진서연과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늘 차갑기만 한 연 사장이 어렸을 때 의외로 다른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인하는 인제야 알았다.“또 있을까요?”연지석의 과거가 궁금한 듯 그녀가 질문을 이어가자, 박민정은 연지석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설인하에게 들려주었다.당시 고아였던 연지석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박민정이 실종된 후에 연지석이 사람들을 보내 박민정을 찾으러 다닌 이유를 설인하는 알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박민정은 연지석을 잘 챙겨줬었다.“연 사장이 불쌍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왜 그를 돌보지 않았나요?”설인하가 연지석의 부모를 언급하자, 기억하지 못하는 숨겨진 아픔이 있는 듯 박민정은 두통이 느껴졌다.두통은 기억 상실 때문일 것으로 그녀는 생각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유남준이 내려오자, 식당 내부의 분위기가 바로 다운되었다.진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이 얼음장 같은 사람과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았나요?”박민정이 실종된 후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하여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다행히 박민정이 돌아와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남준은 전보다 화를 적게 내긴 했었다.하지만 그 대신 성격이 많이 변덕스러워졌다.진서연의 말에 박민정은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어?”주위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감지하지 못했다.진서연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입을 다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이나 먹어요.”그제야 유남준이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발견했다.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똑같이 유남준을 쏘아보았다.남들 앞에서 살아있는 염라대왕으로 불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박윤우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박민정이 큰 소리로 모두에게 말하자, 진서연과
박민정은 꽉 깨물었던 유남준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남준 씨, 제발 놓아주세요. 과거에 우리의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죠.”그녀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안 놓아주면 화낼 거예요.”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무 의미 없겠다고 박민정은 생각했다.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유남준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알았으니까 화내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를 뜨려고 재빨리 문 입구로 다가갔다.문을 여는 순간, 문 입구에서 엿듣고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윤우와 예찬이 엿듣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박예찬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해하지 마. 우연히 이 앞을 지나가던 중이었어.”박윤우도 따라 말했다.“맞아. 쓰레기 아빠가 엄마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그녀는 애들과 승강이하고 싶지 않았다.“둘 다 얌전히 있어야 해.”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거실로 내려갔다.조하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느냐고 묻자, 박민정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가야 하니 일 있으면 전화해.”조하랑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사람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낸 후, 박민정과 진서연만 남게 되었다.유남준이 내려올 때 박민정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음이 착잡한 것을 뒤로 하고 유남준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의 옆에 앉으려 하자, 박민정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졸리니까 먼저 잘 게.”“네. 그러세요.”진서연이 말했다.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문부터 잠갔다.씻고 침대에 누우니 유남준이 자신을 껴안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잠을 이루지 못했던 박민정은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을 보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인터넷에는 자신에 관한 뉴스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박민정은 하나하나 확인하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가물가물했다.무의식적으로 잠이 든 박민정은 한수민의 꿈을
서다희도 속수무책이었다.“이건 다 돈으로 만든 거니까 돈에 현혹되면 안 돼.”“흥!”민수아는 콧방귀를 뀌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솔직히 서다희는 사장과 함께 일하기 싫었다.박민정과 친구가 된 후, 서다희가 사장처럼 돈을 많이 쓰기를 민수아는 바랐지만, 그것은 허황한 꿈에 불과했다.비록 유남준의 전담 비서였던 서다희가 돈이 부족하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조하랑이 김인우에게 말했다.“전 개인적으로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꽃은 그래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네요. 김씨 가문에 이 꽃을 좀 심어줄 수 있나요?”그러자 김인우가 말했다.“저는 그럴 시간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알았어요. 제가 직접 심을게요.”조하랑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모르게 김인우는 사람들을 보내 꽃을 심게 했다.하지만 김인우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이 꽃을 거의 다 꺾어 박씨 가문의 별장에 심은 탓에 꽃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한쪽에서 설인하가 딸을 안고 꽃을 꺾고 있었다.방성원이 그 모습을 보고 집에다 꽃을 심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꽃 감상을 마친 후, 하나둘씩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우리 방에도 뭐가 있으니 들어가서 볼래?”“뭐가 있는데요?”박민정은 의아해했다.“가보면 알아.”유남준의 말에 홀려 박민정은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 들어가자, 온갖 종류의 선물이 쌓여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게 다 뭐예요?”“널 위해 산 것이니 어서 열어 봐.”평소 박민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유남준이 사람 시켜 선물을 준비하게 했던 것이었다.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란 사실을 박민정은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선물을 열어보지 않았다.“고맙긴 한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아무
역시 맞아보지 않으니 고통이 뭔지 모르는 법이다.세 명의 남자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에리는 늘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며 살아왔고 남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에도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눈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초대한 거야?” 방성원이 묻자 서다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에리 씨가 꼭 와야 한다고 수아가 거듭 강조를 하면서 주소도 줬어요.”김인우는 그 말을 듣고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건 집에 늑대를 들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서 비서 아내랑만 놀게 해요. 우리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방성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서다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에리가 이번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박민정을 보기 위해서였다.그는 틈만 나면 박민정에게 물을 건네주고 음식을 가져다주며 그녀를 극진히 챙겼다.유남준도 박민정을 잘 챙겨주고 싶었지만 매번 에리보다 한발 늦었다.이를 지켜보던 박윤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빠, 이렇게 해서 엄마 마음을 얻을 순 없어요.”유남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박윤우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여자들은 꽃과 예쁜 장신구, 옷 같은 선물을 좋아해요. 그런 걸 많이 준비해 보세요.”사실 박민정의 집에는 이미 꽃이 가득했고 장신구나 옷도 놓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들어 준비를 지시했다.그날 모임은 늦게까지 이어졌고 끝날 무렵 에리는 박민정과 함께 집으로 가겠다며 따라가려고 했지만 유남준은 강제로 그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에리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민정아, 다음 주에 봐.”“응, 다음 주에 봐.” 박민정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에리를 보내고 나서야 유남준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부하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잠시 후 부하에게서 답변이 왔다.“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유남준은
박민정은 에리가 여기까지 온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남이 보여준 호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워 그녀는 에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갑자기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박민정은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은근히 자신의 주권을 과시했다.박민정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남준 씨...”‘자중하세요’라는 말을 끝내기 전에 유남준은 재빨리 손을 놓았고 박민정은 그의 곁에서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그녀는 비록 유남준을 조금은 신뢰하게 되었지만 감정 문제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손이 텅 빈 유남준은 속으로 답답함이 가득했다.왜 방금 박민정을 그렇게 무서워했던 걸까?박민정은 빠르게 그의 옆을 지나가 모두가 모인 자리로 향했고 그때 에리가 그녀를 향해 환히 웃으며 손짓했다.“여기, 내 옆에 앉아.”박민정은 그의 옆에 앉기가 민망해 망설이고 있던 찰나 다행히 아들 박윤우과 박예찬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끝냈다.“엄마, 여기로 오세요! 우리 쪽엔 자리가 넉넉해요.”박민정은 그제야 에리에게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난 아이들 옆에 앉을게.”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아이들 쪽으로 향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에리가 뻔뻔하게 따라오며 말했다.“여기 공간이 정말 넓네. 나도 여기 앉아야겠다.”그는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곧 뒤에서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에 빛이 가려졌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유남준의 깊고 어두운 눈빛과 마주쳤다.박윤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에리 아저씨, 여긴 우리 가족 자리예요. 다른 데 가서 앉아 주실래요?”박윤우는 에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빨리 화해하고 가족이 화목해지기를 더 바랐다.“윤우야, 너도 참 매정하구나. 예전에 해외에서 넌 날 보고 ‘에리 아빠’라고 불렀잖아. 그런데 이제 아저씨라니?”에리는 장난스레 대꾸했다.“에리 아빠
유남준은 방성원의 말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동생은 정말 한시도 조용히 있질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알겠어. 계속 철저히 감시해.”“그래.”방성원과 유남준은 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뒤 자연스레 집안 사정을 화제로 삼았다.방성원의 상황은 유남준보다 훨씬 심각했다.설인하가 이혼을 요구하며 딸까지 데려가겠다고 나선 상태였다.“남준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인하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떠나려고 하는 걸까?”유남준은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결국 간단히 말했다.“무슨 일이든 분명히 설명하고 넘어가. 후회만 남기지 않도록 해.”유남준은 과거 자신과 박민정 사이의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때 미리 솔직히 대화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한편, 객실에서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조하랑은 참지 못하고 박민정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민정아,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좋은지 알아?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거야.”그녀가 말하는 죄책감은 예전에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박민정이 실종된 일을 가리켰다.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바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조하랑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며 지난 1년 동안의 괴로움을 떠올렸다.“응, 이제부터는 정말 무사하게 지내야 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하랑아, 넌 내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조하랑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해?”“그냥... 예전에 속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믿기가 힘들어졌어.”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고 조하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솔직히 나도 네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할지 확신은 없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어. 만약 네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네 선택은 분명 그 사람을 믿는 거였을 거
방성원이 별장에 도착하자 집 안은 더더욱 활기가 넘쳤다.그는 유남준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기 바빴다. 오늘은 김인우도 찾아와 두 친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은 아들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딸이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다.김인우는 문득 할아버지가 말했던 ‘고독한 인생’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조하랑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하지만 김인우는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딩크족으로 사는 게 나은 거지.”유남준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채 서류를 한 장 꺼내 김인우에게 건넸다.“이 안에 있는 걸 철저히 조사해 봐.”그것은 몇 가지 약물 목록이었다.김인우는 즉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이게 민정이가 복용했던 약이야?”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래. 바로 조사할게.”이 약물 리스트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몰래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따로 사람을 시켜 확인한 결과였다.김인우는 약물 목록을 사진으로 찍어 부하에게 전송했다.“민정이는 요즘 상태가 좀 나아졌어?” 친구의 물음에 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을 피하고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오늘도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완전히 외면했다.김인우는 그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위로했다.“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있겠어. 너무 마음 쓰지 마.”그러나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박민정이 기억을 되찾고 무엇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시간이 늦어졌지만 김인우와 방성원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유남준은 차갑게 말했다.“이제 밤도 깊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대답했다.“아니, 이제 겨우 열 시인데 뭘. 천천히 가도 돼.”열 시인데도 느긋하다니, 유남준은 점점 인내심
에리는 연지석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당장 쫓아내고 악보를 되찾아야겠어.’“연 사장님이 곡을 쓴 적이 있던가요?”에리가 비꼬듯 물었으나 연지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곡을 쓸 줄 몰라도 볼 줄은 알지 않을까요?”그는 에리의 악보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내가 보기에 이 곡은 엉망이네요. 민정이 시간 좀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말에 이어 연지석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민정아, 인하 씨도 이제 퇴근할 시간이 됐을 거야. 찾아가 봐.”뜻밖의 구원에 박민정은 감사한 눈길을 연지석에게 보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사실 박민정은 에리의 과한 열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악보를 보여주겠다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자신의 복근 여덟 개를 자랑하겠다고 나섰던 그였다.‘내가 이런 활기 넘치는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민정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에리는 얼굴에서 웃음을 싹 거둔 채 연지석을 노려보았다.“뭐예요, 사장님은 유 대표한테 직접 맞서지도 못하면서 저까지 막으려는 거예요?”과거 같았으면 연지석은 그의 도발에 휘둘렸을 것이지만 이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난 내 얼굴이 이미 충분히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에리 씨가 더하군요.”연지석이 태연하게 말하자 에리는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이건 얼굴이 두꺼운 게 아니라 내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데요? 난 민정이를 좋아해요. 예전부터 좋아했고요. 사장님처럼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요.”에리는 연지석을 경쟁 상대로 여겨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연지석은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했다.설인하는 그의 옆에서 퇴근을 도왔다.“사장님, 이번 계약도 성공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잘했어요.”연지석이 칭찬하자 설인하는 머쓱한 듯 말했다.“다 사장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에요.”연지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혼자서 일을 잘 해내지 못
유남우는 차 안에서 홍주영이 낯선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도련님, 저 남자는 하민재라고 합니다. 하씨 집안의 장남이자 연지석의 친구입니다.”하민재?유남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깨달았다.‘어쩐지 어디선가 본 얼굴 같더니 정말 아는 사람이었군.’홍주영의 가정환경을 이미 알고 있던 유남우는 그녀가 하씨 집안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녀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가정이었으니까.유남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문득 홍주영이 하민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쯤 운전기사에게 차를 몰고 떠나라고 지시했다.식사 후 홍주영은 원래 식사 값을 내려고 했으나 하민재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인 것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얼마였어요? 제가 송금할게요.”비서의 월급으로 식사비를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식사는 그녀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하민재는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약간 놀라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다음에 밥 먹을 때 사면 돼요. 이제 나한테 두 끼 빚진 거네요.”홍주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녀는 하민재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번엔 꼭 제가 살게요.”“좋아요.”하민재는 그녀가 이렇게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워 보낸 후에야 자신의 전용 차량을 불렀다.하민재는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고 그의 할머니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홍주영이었다.“이 여자는 참 괜찮다. 전혀 속물적이지 않아.”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하민재는 오늘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테스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 간단한 테스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