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이지원의 말을 단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특히 김인우는 이지원이 괘씸하게 느껴졌다.“우리가 네 말을 믿을 것 같니? 뒤지기 싫으면 꺼져.”김인우는 그녀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지원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오빠도 절 못 믿나요?”유남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약 민정의 사고가 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에 이지원은 등골이 오싹했다.박민정이 기억을 되찾는 것이 두려웠던 이지원은 박민정이 병원 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제가 민정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니깐요. 단지 그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을 뿐이니 제발 만나게 해 주세요.”복도에서 다투는 소리는 병실 안에 누워 있던 박민정에게까지 들렸다.의심스러운 느낌이 들어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가 입구로 다가가 병실 문을 열자, 뒤돌아보던 이지원의 눈과 마주쳤다.이지원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민정 씨, 괜찮나요?”그녀가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물었다.“혹시 기억나는 건 있나요?”그렇게 말한 후 유남준이 의심할까 봐 설명을 보탰다.“제가 과거에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자 이렇게 특별히 시간 내서 민정 씨를 찾아온 거예요.”이지원이 순박하고 해맑은 모습을 보였지만 박민정은 넘어가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에 이지원은 잠시 멈칫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내려놓고는 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나와 절친이라고 예전에 민정 씨가 계속 얘기했었잖아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서 친자매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물론 박민정은 자신이 어렸을 때 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기억을 되찾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지원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이지원이 잡고 있던 자기 손을 뺐다.“그런데 왜 저한테 상처 주는 짓을 한 거예요?”이지원이 저지른 짓에 대해 박
박민정이 정반대의 말을 한다고 생각한 이지원의 뻔뻔스러움은 극치에 달했다.“어쨌거나 저는 무난하게 살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없어요.”당연히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었다.많은 고통을 겪다 보니 너무 괴로워서 쓸데없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더구나 올해 들어 유남우의 도움으로 연예계에서 꽤 잘나간 탓에 이제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이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박민정의 물음에 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용서해 준다면 앞으로는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할게요. 물론 민정 씨의 말도 잘 들을 거고요.”“저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으니 이만 가보세요.”박민정은 차갑게 대답했다.이지원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용서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박민정이 여전히 예전처럼 마음이 여리다고 생각한 이지원은 바닥에서 일어났다.“민정 씨, 저는 그러면 가볼게요.”“그러세요.”박민정은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이지원이 나가자, 박민정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유남준은 서둘러 병실로 들어갔다.“이지원이 뭐라 한 거야?”유남준이 다짜고짜 물었다.“널 때린 건 아니지?”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아직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지원이 조금 전에 한 말을 그녀는 유남준에게 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에게 얘기해. 이지원은 겉과 속이 달라. 넌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 그녀의 말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저도 알아요.”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왔다.이지원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자, 박민정은 당시 사건을 파헤치려고 정민기를 찾아갔다.“제 사건은 윤소현과 이지원, 그리고 유남우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민기 씨가 좀 더 깊게 조사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 하지만…”정민기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빠른 기간 내 알아내기는 어려울 거예요.”“괜찮아
박민정이 박예찬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하랑이 박민정에게 전화했다.“민정아, 요즘은 예전과 달라. 애 엄마들은 하나같이 속물이야. 다들 최현아 쪽에 붙었어.”‘최현아?’박민정이 묻기도 전에 조하랑이 물었다.“참. 최현아가 누군지 기억하지?”박민정은 조금 당황했다.“모르겠는데.”조하랑은 피가 거꾸로 솟을 뻔했다.‘어휴.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네.’“누구냐면… 그녀는 유남준 사촌 형의 아내야. 어쨌든 좋은 사람은 아니야. 예전에 너를 많이 괴롭혔어.”“알았어.”‘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학부모 회의에서는 간계를 부리지 않겠지.’박민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이 증명하듯 그녀의 생각은 짧았다.박민정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조하랑은 심히 걱정되었다.“내가 내일에 다른 일이 있어서 너와 함께 가지 못하겠어. 아니면 거절하고 가지 마.”“안돼. 다른 애 엄마들은 다 가는데 나만 안 간다면 예찬이 너무 불쌍하잖아.”박민정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좀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박민정에게 말하는 것 외에 조하랑도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물론 여자들의 기싸움을 조심하라는 말을 보태는 것을 잊지 않았다만.“알았어.”박민정은 아무 생각 없이 답한 후,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까지 했다.저녁이 되자, 박윤우가 박민정에게 졸랐다.“엄마, 형의 학부모 회의에 다녀온 후 나의 학부모 회의에도 와줘.”“알았어.”박민정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자, 박윤우는 그제야 흡족해했다.이때, 민수아가 서프라이즈를 하려는 듯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모두가 의아해하자, 민수아는 감추고 있던 청첩장을 그들에게 보여줬다.“여러분, 다희와 제가 드디어 결혼 날짜를 잡았어요. 이달 15일에 결혼할 예정이니 꼭 참석해 주세요.”이미 알고 있던 유남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와! 이렇게나 빨리요? 축하해요.”모두의 축하에 민수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
유남준이 흔쾌히 승낙하는 것을 본 몇몇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도 전에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지만 유남준은 회사가 연애하는 곳이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었다.유남준이 박민정을 많이 무서워하는 것이 확실했다.한편, 정민기의 방 앞까지 찾아간 진서연은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더니 바로 열렸다.“왜 문이 열려 있지? 어디 갔나?”진서연은 조금 당황했다.그녀가 다시 나가려고 문을 닫으려던 순간, 타올을 걸친 정민기가 화장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민기의 튼튼하고 강한 근육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저… 문이 안 잠겼길래… 일부로 들어온 건 아니고. 샤워하는 줄 몰랐어요.”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던 진서연은 나가려고 뒤돌아섰다.다행히 정민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 그렇구나. 옷 갈아입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네.”진서연은 그를 등진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그제야 심호흡하며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혔다.‘낮에 뭔 얼어 죽을 샤워야. 망측해서 원. 하여튼 부끄러움은 내 몫이라니까. 그나저나 몸매는 정말 끝내주네. 어떻게 운동했기에 이 정도로 관리가 잘 된 걸까?’진서연이 얼마나 오만가지 잡생각에 사로잡혔으면 정민기가 옷을 다 갈아입고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정민기가 진서연의 어깨를 툭툭 치자, 진서연은 화들짝 놀랐다.“무슨 생각 해요?”정민기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진서연이 뒤돌아섰다.그가 옷을 입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건넸다.“이건 이달 15일에 있을 수아 씨와 다희 씨의 결혼식 청첩장이에요.”진서연이 청첩장을 정민기에게 건네고 나가려고 할 때 정민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요. 서연 씨도 결혼식에 갈 거죠?”사실 정민기는 시끌벅적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아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서연아, 어디 가?”“밥 먹으러요.”진서연이 대답했다.“밥 먹으러 간다고? 너 밥 먹었잖아.”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민수아의 말에 진서연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보다 못한 설인하가 민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수아 씨, 바보예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내뱉었으니, 바보가 맞았다.민수아는 그제야 알아차린 듯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아까 밥을 많이 안 먹었지? 민기 씨와 함께 밖에서 많이 먹어.”‘내가 돼지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민기 씨가 싫어하지는 않겠지?’쓸데없는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정작 그녀가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정민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면 불고기 먹으러 갈까요? 남으면 가져와서 배고플 때 먹어도 되고.”그의 말을 듣고서야 빨개졌던 진서연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네. 그렇게 해요.”진서연은 여장부의 모습을 거두려고 일부러 작은 발걸음으로 걸었다.박민정이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둘이 정말 잘 어울리네.”“그러게. 빨리 연인 사이로 발전하여 결혼하면 좋을 텐데. 다들 결혼하니까 얼마나 좋아.”설인하는 민수아의 말을 그저 웃어넘겼다.그녀는 방성원과 이혼하려 했지만, 방성원이 이혼을 거부하고 있었다.물론 이혼소송을 할 수도 있었으나, 방은정의 양육권이 방성원에 넘어갈 게 뻔해서 설인하에게 불리했다.진서연이 나간 후 박민정은 산책 좀 하다가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유남준은 박민정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탓에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당연히 노크도 해봤지만, 그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일 있으면 내일 얘기하고 이만 쉬세요.”문 너머에 있던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알았어.”이때,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다가왔다.“쓰레기 아빠, 아직도 엄마의 마음을 얻지 못했구나.”유남준은 박윤우에게 도움을 청했
번화한 거리에서 걷고 있던 세 식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사람들의 시선은 그들 쪽으로 향했다.“와! 저 아이 너무 귀엽네요. 엄마 아빠도 잘생기고.”“그렇네요. 저 아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인터넷 스타 같네요.”기분이 들떠있던 박윤우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려 하자 재빨리 마스크를 썼다.“엄마, 빨리 가.”박민정은 의아했다.“왜 그래?”“나중에 말해줄게.”박윤우가 박민정의 손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도망가려 하자, 유남준이 박윤우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아이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일렀거늘. 너 때문에 나와 네 엄마도 숨어야 하잖아. 차라리 그냥 너 혼자 숨는 게 낫겠다.”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이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 박윤우는 유남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쓰레기 아빠, 앞으로는 제 도움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흥!”말은 그렇게 해도 박윤우의 마음속에는 유남준 생각뿐이었다.불고기 맛집에 도착한 세 사람은 VIP룸에 들어갔다.그제야 박윤우는 유남준의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드러냈다.“아이고.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잖아.”“대체 무슨 일인데?”박민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박윤우는 인터넷 라이브 방송한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놨다.“엄마, 내가 라이브 방송해도 괜찮지?”돈을 주겠으니 라이브 방송을 그만두라고 고영란은 입이 닳도록 박윤우에게 말했었다.“괜찮고말고. 어린 나이에 라이브 방송까지 했다니. 너무 훌륭한데.”당근을 주고 나서 박민정은 채찍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렇지만 아직 어리니까 공부에 집중해야 해.”‘공부’라는 말에 박윤우는 머리가 아팠다.“알았어요. 엄마.”불고기가 나오자마자 다들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박민정이 박윤우의 그릇에 불고기를 담아주면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집어주었다.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배불리 먹고 나자, 박윤우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그 말에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
하민재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눈치챘지만 박민정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어렸을 때의 일들을 대부분 기억해요.”“그렇구나.”하민재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홍주영은 이 소개팅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연지석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하민재가 계속해서 말했다.“그런데 왜 혼자 있어요? 유남준은 같이 안 왔나요? 민정 씨가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박민정은 하민재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한마디 내뱉었다.“화장실 갔으니 곧 올 거예요. 저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박민정이 자리를 뜨려고 돌아서자, 하민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나 보네.”그는 재빨리 뒤쫓아가 박민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민정 씨, 어디를 그리 급히 가려고요? 저는 지석 형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은데.”하민재가 갑자기 자기 손목을 잡자, 박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할 얘기가 더 남았나요?”“지석 형을 받아들였다가 거절한 이유, 그리고 그를 기억에서 지운 이유를 설명하시죠.”하민재는 자신의 롤모델인 연지석이 박민정에게 현혹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그에게 움켜잡힌 손목 부위가 박민정은 너무나 아팠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오해?”하민재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지석 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좋아한 적이 있긴 했었나요?”하민재의 말을 통 알아듣지 못했던 박민정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하민재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보다 못한 홍주영이 하민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장 민정 씨를 놔주세요.”박민정을 어렵게 만났기 때문에 하민재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연지석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해서 더욱 그러했다.바로 그때, 유남준이 박윤우와 함께 화장실 안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이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그는 잡고 있던 박윤우의 손을 놓은 후, 즉시
하민재가 반응하기도 전에 홍주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씨 가문의 장남?”조금 전 하민재와 유남준이 다투고 있을 때 홍주영이 하민재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는 사실 부잣집 아들이었다.그제야 하민재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신분 위장하고 소개팅하러 나온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홍주영은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하씨 가문의 도련님과 소개팅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네요.”하민재는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어차피 재미도 좀 봤으니, 그녀를 이만 잊는 것도 나쁘지 않아.’홍주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산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홍주영이 떠나든 말든 하민재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듯하여 숨쉬기가 힘들었다.이때, 할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민재야, 주영과는 잘 돼가고 있는 거야? 괜찮다면 집에 와서 혼사를 논하자꾸나. 연말에 결혼하는 걸로 하고.”대부분 가문의 풍습은 늘 이런 식이었다.소개팅한 뒤 한두 달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민재는 고민하고 있었다.“할머니, 좀 더 얘기해 봐야 하니 조급해하지 마세요.”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후회했다.‘아참, 그녀와 이제 끝이라고 말해야 했는데.’그의 말에 하민재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주영의 마음을 얻도록 노력 많이 해. 이 할미가 점을 보니 주영이 너와 아주 잘 맞더라. 게다가 점쟁이 말로는 그녀가 우리 하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다던데.”“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앞으로는 점 보러 좀 다니지 마세요.”하민재가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홍주영을 뒤쫓아나갔을 때는 그녀가 사라진 뒤였다.“걸음이 왜 그렇게 빨라?”하민재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모든 것이 내 잘못이구나. 신분을 숨기지 말아야 했는데.”그는 홍주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미안해요. 주영 씨.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