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손을 잡고 IM 그룹의 모든 사업을 전면 봉쇄 하기로 결심했다.유남준은 이 소식을 듣고도 전혀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서다희 역시 유남준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오며 큰 위기들을 수도 없이 겪어봤던 탓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그에게는 보고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이었다.“대표님, 에리가 위약금 전액을 모두 지불했습니다.”유남준은 한껏 찌푸린 미간으로 서다희를 바라보았다.“전 재산이랑 부모님 재정 상태까지 조사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 정도 돈을 마련할 수 있을 리 없다고 했잖아.”서다희 역시 그 점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 부분은 제 실수입니다. 저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유남준은 오늘따라 좋았던 기분 덕에 서다희를 굳이 탓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만 얘기하고 넘어갔다.“잘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알겠습니다.”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다희가 대표실을 빠져나왔다....한편, 윤소현은 최근 신경이 몹시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첫 번째로는 정수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박민정이 자신의 눈앞에서 윤씨 가문의 사업을 하나씩 뺏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지난번의 그 일은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유남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회사 하나 없는 사람이 무슨 힘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벌벌 떠는 거야?”윤소현이 화를 내며 말했다.곁에 있던 그녀의 비서가 윤소현을 위로해 주었다.“유남준은 과거 진주시에 있을 때도 영향력이 아주 컸습니다. 아마 그때의 여파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윤소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요즘 남우 씨는 뭐 하면서 지낸대?”그녀는 결혼 후,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유남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놀라움’을 안겨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지난번에는 자신의 프로젝트 하나를 뺏어가더니 이번에는 회사의 간판스타까지 뺏어가 버렸다.서다희는 아무 말 없는 유남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사모님께 IM 그룹이 사실은 대표님 소유라는 걸 말씀드려야 할까요?”“생각 좀 해볼게.”유남준이 서다희를 보며 말했다.“일단 나가 봐.”“네.”드디어 살벌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서다희는 후련한 마음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말해 박민정은 이제 자신이 경외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존재로만 여겨졌다.대표님과 정면 승부를 펼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던 판에 정면으로 붙어 이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대체 누가 박민정이 에리와 몰래 계약을 성사시켰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XS 그룹 내부.회사는 지금 에리가 입사한 것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만삭에 가까운 몸이 되어버린 박민정은 오랜 시간을 회사에 머물 수 없었던 탓에 잠시만 앉아 있다가 자리를 뜰 예정이었다.그런 박민정을 발견한 에리가 그녀를 따라 나왔다.“오늘 회사 처음 왔는데, 회사 규정이나 향후 방향에 대해서는 얘기도 안 해주고 그냥 갈 거야?”박민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런 건 서연이한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잘 알려줄 거야. 난 지금이 상태로 오래 서 있는 것도 힘들거든.”에리는 그 말에 박민정을 더 붙잡지도 못했다. 하지만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가 질문을 던졌다.“지금 만삭이라 배도 이렇게나 나왔는데 일하러 나오고. 남편이 뭐라 안 해?”그는 만삭의 임산부가 출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박민정이 자신의 여인이었다면 임신 초기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일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남편?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민정은 그제야 에리가 가리키는 사람이 유남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내가 일하고 싶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어?”박민정도 에
어이가 없어진 박민정이 일부러 유남준을 놀리며 말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해본 적도 없는데.”순간 그녀를 안고 있던 유남준의 팔이 굳어졌다.“해보고 싶다는 거야?”박민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물었잖아요?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해요?”유남준은 그녀가 장난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됐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듣고 싶지 않아.”“정말 변덕스럽네요. 나는 당신이 꽤 그 사람과 겨뤄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요. 근데 에리는 나보다도 젊잖아요. 젊은 사람 체력은 무시할 수 없죠. 우리는 아이까지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이니 젊은이들과 체력을 비교하는 건 무리예요.”박민정은 일부러 유남준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었다.유남준은 자부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내가 일흔, 여든이 되더라도 체력은 걔보다 좋을걸? 믿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다시 비겨보자고?”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본능적으로 차의 차단막을 내렸다.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과 사모님 사이가 안 좋을 때는 매일 싸우시더니 사이가 좋아지니 또 이렇게 싱글을 괴롭게 만드네.’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는 중에 유남준이 불쑥 물었다.“왜 갑자기 에리를 영입하려고 한 거야?”정상적인 남자라면 질투가 나기 마련이었다.“에리는 요즘 인기 많은 아이돌이잖아요. 모든 면에서 뛰어나니 계약하기만 하면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거예요. 게다가 친구 사이이기도 하고요.”박민정은 말하며 뭔가 떠올랐는지 유남준에게 불만을 토로했다.“아마 모를 텐데 에리는 전에 IM 그룹이랑 3년 계약을 했었거든요? 근데 그 사장이 완전 또라이더라고요.”‘또라이?’입가가 떨린 유남준이 참을성을 발휘하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었대?”“보통 잘나가는 연예인을 영입하면 최대한 회사를 위한 가치를 창출하게 하고 더 유명해지게 도와주잖아요. 그런데 IM 그룹 대표는 에리를
“오빠, 제발 나 좀 도와줘.”추경은이 손을 들어 유남준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유남준은 불쾌한 듯 피했다.추경은의 손은 공중에서 멈췄고 멍투성이인 얼굴은 한층 더 불쌍해 보였다.그녀는 다시 박민정과 그녀의 임신한 배를 바라보았다.‘이 년은 뭐야. 배는 언제 이렇게 큰 거야? 그때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유남준의 아내가 된 건 나였을 텐데... 하, 이 여자 좋은 일만 해줬네.’“남준 오빠, 새언니. 제발 나 좀 구해줘. 고현문은 사람도 아니야.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 겨우겨우 도망쳐 나왔어. 나 좀 봐.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야.”추경은은 말하며 두 사람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그러면서도 유남준에게 자기 몸 일부를 의도적으로 보이려는 은밀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채고 속으로 혐오감을 느꼈다.“이런 일을 겪었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한테 부탁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박민정은 말을 마치고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가 신고해주는 거 어때요?”유남준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추경은에게 건넸다“핸드폰 빌려줄게.”얼굴이 굳어진 추경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정말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라고?”추경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할아버지가 알면 분명히...”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끊었다.“내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연락해 줘?”추경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뒤돌아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가자. 배고프지? 얼른 들어가자.”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조금 배고프긴 하네요.”두 사람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추경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로 가득 찼다.그녀는 두 사람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몇 발짝도 못 가 경비에게 막혔다.결국 그녀는 대문 앞에 앉아 큰 소리로 외쳤다.“오빠! 새언니! 정말 저를 이대로 방치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죽을 거예요!”추경은 지금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추경은은 순간 숨이 막혔다.고문현에게 들어 올려진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그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흔들며 그의 손을 두드렸지만 그녀의 힘은 고현문의 눈에 웃음거리일 뿐이었다.“우리 고씨 집안에서는 배은망덕한 고양이는 기르지 않아.”추경은은 점점 더 숨이 막혔다.바로 그때 고현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추경은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전화를 받았다.추경은 숨을 헐떡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아무리 도망치고 숨어도 고씨 집안에서 그녀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알고 있기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지금 그의 눈앞에서 도망갔다간 비참하게 죽을 게 뻔했다.고현문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얼른 데리고 가. 여기 더럽히지 말고.”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유남준의 목소리였다.고현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추경은을 바라보았다.“차에 타.”“네. 네...”추경은 고현문이 이번은 넘어간다고 착각하며 순순히 차에 올랐지만 이것이 그녀의 비참한 시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박씨 가문의 옛 저택.저녁때 박민정이 경비원에게 물었다.“밖에 아직 있나요?”“이미 갔습니다.”경비원이 답했다.‘갔다고?’박민정은 조금 의외였다.‘추경은 같은 끈질긴 사람이 이렇게 쉽게 떠났다고?’“언제 간 건가요? 혼자 갔나요?”“약 30분 전에 고급 차 한 대가 데리러 온 것 같았습니다.”경비원의 말에 박민정은 바로 상황을 눈치챘다.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유남준에게 물었다.“고현문은 어떤 사람이에요?”추경은처럼 끈질긴 여자를 쉽게 제압한 사람이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 박민정이었다.겨우 박민정과 함께 누워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던 유남준은 그녀가 갑자기 다른 남자에 관해 묻자 기분이 상했다.“그 사람은 왜?”유남준은 변태적인 성향을 지닌 고현문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냥 단순히 궁금해서요. 이름만 들어봤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라서요.”박민정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유남준은 마음이 답답
더욱 기분이 나빠진 유남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얼굴을 감쌌다.박민정은 잠든 상태에서 얼굴에 뭔가 닿는 느낌에 유남준의 손을 한 손으로 쳐내고 다시 잠들었다.유남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그녀를 품에 안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민수아는 뉴스를 보고 있었고 박민정도 함께 보고 있었다.뉴스에서는 강변에서 익사한 여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나왔다.“세상이 너무 무섭네. 우리 앞으로는 밤에 일찍 돌아다니자.”민수아가 말했다.진서연이 다가오며 뉴스를 한눈 보더니 말했다.“제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요? 제가 지켜줄게요.”하지만 진서연은 곧 뉴스에 나온 흐릿한 사진에 주목했다.“어제 밖에 있던 그 여자 아니에요?”“뭐라고?”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고 체형만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박민정도 놀란 듯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진서연이 차분히 말했다.“체형이 비슷하고 몸에 난 상처들을 보세요.”과거에 훈련을 받은 적 있는 진서연은 타인의 신체 특징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정말 그러네. 정말 추경은인가?”민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 역시 진서연의 설명에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추경은과 닮아 있었다.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박민정은 뉴스를 계속 보는 대신 유남준을 찾아갔다.막 세수를 끝내고 내려오던 유남준은 박민정이 자신에게 달려오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왜 그래?”유남준이 부드럽게 물었다.“추경은 말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 아니에요? 아까 뉴스에서 피해 입은 여성을 봤는데 추경은 같아 보였어요.”추경은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그저 물어보는 박민정이었다.‘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죽은 거야?’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확인해 볼게.”“네.”유남준이 고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문은 유남준의 연락에 의외라는 듯 느긋하게 물었다.“형? 저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아침부
박민정은 그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요즘 너무 바빴어.”박민정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이었다.“어서 앉아. 건강은 좀 괜찮아졌어?”연지석은 천천히 다가오며 무심결에 박민정의 배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답했다.“많이 좋아졌어.”그의 시선은 다시 박민정의 얼굴로 옮겨졌고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는 그의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옆에 있던 설인하는 그제야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대표님, 두 분 아는 사이였어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회사와 외부 사람들 앞에서 설인하는 박민정을 대표님이라고 불렀다.“그래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인하가 나간 뒤 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연지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연지석이 건강을 회복하고 집안에서 그를 이곳으로 보내 사업을 확장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정말 다행이다. 이제 자주 볼 수 있겠네.”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어떻게 지냈어?”“그냥 전과 같지 뭐. 나름 잘 지냈어.”“그렇다면 다행이야.”박민정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나 유남준이랑 다시 시작하려고.”연지석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물잔을 들어 흔들리는 표정을 숨기며 답했다.“그렇게 결정한 거야?”“응.”박민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지석은 물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평소와 다름없는 물이었지만 목을 넘어가자 유독 쓰게 느껴졌다.“네 마음이 확고하다면 잘된 일이지.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네 편이야.”“고마워.”박민정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제 계약 이야기를 해볼까?”연지석이 이번에 찾아온 이유가 사업 제안을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박민정은 그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좋아.”두 사람은 사무실 안에서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에리는 홍보 촬영 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그는 박민정의 사무실에 들렀으나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설인하에게 물었다.“대표님은요?”“대표님은 업무 중
서다희는 민수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로 유남준에게 전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에리와 계약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적 있으신가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서류를 넘기다 말고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얘기하기는커녕 혹시라도 화내게 할까 봐 어제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는데.’마음속 깊은 감정을 서다희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유남준이 바로 물었다.“민수아 씨가 또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고요 그냥 에리가 사모님한테 평범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서다희가 답하자 유남준 주위의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 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유남준이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한가하지?”서다희는 유남준의 말에 당황했다.“근무 중에 여자 친구랑 수다 떨 시간도 있고 아주 한가한 가 보네.”서다희는 말문이 막혔다.서다희는 억울했지만 유남준의 잔소리를 듣고 결국 풀이 죽은 채로 사무실을 나갔다‘다시는 대표님한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냉정하고 무정해!’...PMJ 그룹.아침 촬영을 마친 에리가 박민정이 아직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고 주변을 서성이며 진서연 쪽으로 가 물었다.“대표님 이번 프로젝트 미팅은 꽤 오래 걸리네요. 아직 안 끝났어요?”설인하가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온 큰 클라이언트인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는 분이라고 하시니 오래 걸릴 만도 하죠.”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과 연지석이 함께 나왔다.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에리는 그 장면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본능적인 경계심인지 아니면 같은 감정을 품은 대상을 알아본 것인지 에리는 연지석을 보며 그 어떠한 호감도 느끼지 못했다.연지석의 예리한 시선도 에리를 발견하고는 설인하와 다른 여자들을 훑은 후 에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에리 씨! 명성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연지석이 에리에게로 곧장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에리도 예의 바르게 연지석의 손을 맞잡았다.연
윤소현은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내일 아침 듣게 될 정수미의 사망 소식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하지만 이튿날에도 집안은 너무 고요했고 일어날 때가 됐지만 정수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슬 조바심이 났다.“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어?”그러나 도우미의 대답은 단번에 그녀를 소름 돋게 했다.“정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깨면 병원에 오라고 전하셨습니다.”“뭐라고?”순간 윤소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제 탄 약을 다 마셨다면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윤소현이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무렵 차는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그리고 병실 안에 들어가 보니 길연서 외에 장 변호사도 같이 와 있었다.정수미는 침대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안색은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엄마, 왜 저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병원에 오셨어요?”윤소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그녀에게 물었다.사실 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왠지 안 좋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정수미는 그녀의 물음에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소현아, 너를 오늘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단 하나야. 잘 들어, 이 시간 이후부터 우리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야.”‘뭐라고?’윤소현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엄마, 농담이 너무 심한데요? 더 이상 모녀 사이가 아니라니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혹시 그 뉴스 때문에 그러세요?”그러다가 문득 이모 정보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엄마, 화 풀어요. 제가 공개적으로 사과해서 지엔 그룹에 최대한 영향 끼치지 않게 할게요. 그리고 그 세 사람한테도 사과해서 꼭 양해를 구할 거고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정수미의 눈치를 살폈다.그러나 지금까지의 그 따뜻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앞으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너같이 양심 없는 딸은 둔 적이 없으니까.”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그제야 정수미가 그저 한 말이
“나 왔다.”“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주방에 갔다.“엄마, 제가 우유 한 잔을 타드릴 테니까 마시고 자요.”정수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답했다.“그래.”그리고 윤소현은 우유에 어마어마한 약을 타기 시작했다.‘설마 이걸 마시고도 안 죽는 거 아니겠지?’만약 오늘 저녁에 정수미가 죽게 되면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박민정을 대표직에서 끌어내릴 속셈이었다.그러다가 살짝 방심해서 손이 엇나간 바람에 하마터면 약을 바닥에 쏟을 뻔했지만 다행히 손이 빨랐다.윤소현은 따뜻한 우유를 정수미 앞에 가져갔다.“엄마, 여기요.”정수미는 우유를 건네받은 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답했다.“지금 안 졸리는데 이따 마실게.”“이따 마시면 다 식잖아요. 그냥 지금 마셔요.”윤소현은 자기 계획이 틀어질까 조바심이 났다.“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지.”말을 마친 뒤 컵을 한쪽에 내려놨다.“나랑 얘기 좀 하자.”윤소현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도 오늘 저에 관련된 뉴스 기사 보셨죠? 지금 인터넷에서 가루가 되도록 사람들한테 까이고 있는데 엄마랑 가만히 앉아 얘기할 기분이 나겠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이 너무 기가 막혔다.애초에 윤소현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런 뉴스가 날일도 없고 괜히 그 일로 회사까지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이만 가서 쉬어.”정수미의 말에 윤소현은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설득했다.“엄마가 이 우유를 다 마시면 그때 가서 잘게요.”정수미는 끈질긴 윤소현의 모습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마시려고 컵을 들었다가 문득 윤소현에게 물었다.“소현아, 진짜로 엄마가 이 우유 마시길 바라는 거야?”윤소현은 순간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걸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네, 마시면 이따 잠이 잘 올 거예요.”정수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단번에 우유 한 잔을 다 들이켰고 윤소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
“네가 사과하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구나.”정보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정이에게 연락해서 홍보팀을 동원해 대신 사과문을 발표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넌 당분간 회사에 나오지 마라.”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네티즌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윤소현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었다.윤소현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모,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스스로 잘 생각해 봐라. 내일까지 답을 줘.”정보주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녀는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박민정은 이미 인터넷에서 떠들썩한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지금 최선의 해결책은 명백했다.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해고된 세 명의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그러나 정보주는 잠시 기다려 보자고 했고 박민정은 이에 동의했다.그 후, 그녀는 곧장 인사 과장을 호출했다.과장은 긴장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대표님,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까지 파장이 클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박민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은 인사과장으로서 해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에 따르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걸 몰라요?”“당신,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하지 않았나요?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윤소현 씨가 시킨 일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화낼까 봐 두려웠습니다.”박민정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럼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어요?”과장은 머리를 숙였다. 사실 그는 박민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회사의 실질적인 결정권은 여전히 윤소현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짐을 정리하세요. 퇴사 준비하죠.”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하자 과장은 충격에 휩싸였다.“대표님, 저는 이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우리는 계약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박민정은 냉정하게 말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인사과장을 해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자신은 이 회사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지엔 그룹의 직원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여성 직원은 무려 백만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 인플루언서였다.그녀는 그날 바로 녹취를 남겨 윤소현이 했던 말들을 모두 인터넷에 공개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라이브 방송을 켰다.“저희는 근무 시간에 잡담한 게 아닙니다. 점심시간에 이야기한 것뿐이에요.”“저와 제 동료들은 평범한 직원들일 뿐이지 노예가 아닙니다. 설마 대화할 자유조차 없는 겁니까?”“지금의 자본가는 정말 무섭군요.”함께 해고된 두 명의 동료도 각자의 계정에 영상을 올렸고 그 안에는 윤소현의 폭언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했다.[이렇게 큰 기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근로계약을 체결했다면서? 도대체 무슨 권리로 멋대로 해고하는 거야?][법을 무시하는 인간들! 당장 노동청에 신고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해!]그녀는 댓글을 확인한 후 답장을 남겼다.[이미 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저희 같은 노동자들도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겠죠. 그러니 여러분도 이 회사를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이 사건은 삽시간에 온라인에서 퍼졌고 급기야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까지 치솟았다.네티즌들은 윤소현의 거만한 태도와 독선적인 발언을 빠르게 공유했고 곧 많은 이들이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저 사람, 원래 무용가 아니었어? 저런 인성이었다니, 정말 실망이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돈 벌기도 힘든데.][그러게. 자기 마음대로 해고 해놓고 노동법은 완전히 무시하네. 설마 계약이 장식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현실이 원래 그렇지 뭐.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는 건 순식간이지만 직원이 퇴사하려면 한 달 전부터 통보해야 하잖아. 너무 불공평해!]SNS가 들끓기 시작하자 네티즌들은 윤소현의 개인 SNS로 몰려가 댓글을 남겼다.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수없이 쏟아지는 비난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그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문제는 여
“소현아, 엄마 퇴원 수속 밟아줘.”정수미가 말했다.오랜 세월 함께한 딸이었다. 비록 친딸은 아닐지라도 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인하고 싶었다. 윤소현이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지.윤소현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좋아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비서님, 저야말로 엄마의 건강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엄마가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훨씬 빨리 회복하실 거예요.”비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가 거만하게 병실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윤소현이 사라지자 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절대 집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왠지 모르게 정수미가 집으로 돌아가면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최상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의사는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정수미는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조용히 손을 토닥였다.“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나는 안심할 수 없어.”비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표님의 몸을 담보로 삼아선 안 됩니다.”“괜찮아.”정수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만약 정말로 소현이가 그랬다면 내가 괜한 정을 준 거겠지.”윤소현은 곧바로 퇴원 수속을 마쳤고 정수미를 집으로 데려갔다.하지만 첫날 밤 그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한편, 지엔 그룹은 박민정이 취임한 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직원들은 모두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모았다.“다행히 새 대표가 박민정이지, 윤소현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제야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겠어.”“그러게 말이야. 윤소현이 대표였다면 우리 보너스는 커녕, 회사 분위기도 엉망이 됐을걸? 게다가 윤소현은 마치
정민기가 가져온 녹음 파일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윤소현이 외부 세력과 손잡고 정씨 가문을 와해시키려 한다는 것, 심지어 지엔의 주식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사실까지.박민정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배은망덕할 줄이야.이 일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마침 정호철의 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회사 내에서 오래된 경영진들에게 박민정이 휘둘릴까 걱정되어 틈틈이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묻곤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과거 그가 자신과 박예찬에게 가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서늘하게 대했다.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업무뿐이었다.정호철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아직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순전히 박민정이 그를 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정수미와 그녀의 가족을 지켜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병원에서 정수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혼수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틈틈이 윤소현의 딸을 찾아가 보곤 했는데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였다.“소현이는 한 번이라도 와서 아이를 봤어?”그녀가 묻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께서 요즘 많이 바쁘신 듯합니다. 한 번도 다혜를 보러 오신 적이 없습니다.”아이의 이름이 무색하게 윤소현은 한 번도 진심으로 이 아이를 아껴준 적이 없었다.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짊어진 아이구나.”비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병실로 돌아가 쉬셔야 합니다, 대표님. 너무 오래 밖에 계시면 안 됩니다.”“그래.”병실로 돌아온 정수미는 문득 물었다.“민정이는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나?”“정 매니저님께서 도와주고 계셔서 작은 아가씨께서는 큰 문제 없이 지내고 계십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군.”정수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소현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도록 해. 그 아이의 성격을 내가 잘 알잖아. 민정이의 아래에 머물고 있을 인물이 아니야.”비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은 이상했다. 진서연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변비라도 걸린 걸까?그녀는 여전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정민기를 보며 진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연아,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진서연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민기 씨... 갔어요?”박민정은 의아했다.“아니, 안 갔는데? 왜?”“그럼 전 계속 화장실에 있을래요.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나갈게요.”진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박민정은 그제야 그녀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서연아, 민기 씨는 널 기다리려고 여기 있는 거야. 그냥 나와.”“절 기다린다고요?”진서연은 이해하지 못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그냥 가라고 해 주세요.”그녀는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네 생각 안 들어보고 싶어? 대체 무슨 일로 널 찾아온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진서연은 한숨을 쉬며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박민정은 어제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내가 대신 물어봐 줄까?”박민정은 정민기가 진서연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는 않았다.진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말 가능해요? 그럼... 도와주세요.”“알았어.”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다가갔다.“서연이가 속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서연이를 찾은 이유가 뭐예요? 내가 대신 전해줄까요?”정민기는 그녀가 배가 아프다는 말에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혹시 뭘 잘못 먹었어요? 약이라도 가져다줄까요?”박민정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그는 역시 진서연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아니었으면 그녀가 배가 아픈 것보다 자신을 왜 피하는지 먼저 물었을 테니까.정민기가 약을 가지러 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를 붙잡았다.“어젯밤에 서연이한테 한 말, 거짓말이었죠? 난 알아요. 민기 씨가 서연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요.”정민기의 걸음이 멈췄다.“그리고... 서연이와 에리의 관계, 진짜인
정민기는 박윤우의 말에 흥미가 동했다.“서연이 아줌마가 왜?”박윤우는 입을 삐죽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서연이 아줌마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귀엽고 싸움도 잘하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많죠.”그는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정민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운전 속도도 들쭉날쭉해졌다.“그래?”“당연하죠. 예전에 엄마랑 같이 일할 때도 고객들이 줄줄이 서연이 아줌마한테 관심을 보였어요.”박윤우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했다.“솔직히 아저씨도 좀 분발해야 해요. 맨날 저런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니까 여자들이 다 도망가는 거잖아요.”“아저씨도 이제 제법 나이가 많으신데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안 하셔요?”부모 얘기가 나오자 정민기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딱 굳어졌다. 그는 박윤우가 계속 말하는 걸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숙제는 다 했어? 안 했으면 빨리 해.”박윤우는 더 놀리고 싶었지만 숙제 얘기가 나오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정민기는 박윤우를 유치원에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 그는 다른 남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자신이 에리나 진서연의 과거 남자들과 비교하면 어떤지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차는 지엔 그룹 앞에 멈춰 서 있었다.정민기는 지엔 그룹 외부에서 진서연이 쉴 때쯤 이야기를 나누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눈에 띄는 한 차량이 있었다. 그는 직업적 감각으로 이상함을 느꼈고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자 곧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한 사람은 윤소현,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윤석후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잠시 기다리자 최현아와 그녀의 시아버지 유석진까지 차에서 내렸다.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모두 같은 차에 올라탔다.정민기는 이들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직감하고 즉시 차를 몰아 뒤를 밟았다.차는 한 호텔 앞에 멈춰섰고 정민기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안 중요하다고요?”진서연은 더욱 서러워졌다.“어디가 안 중요해요? 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대답해 봐요.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그녀의 손에 쥐어진 정민기의 옷이 구겨질 정도였다. 정민기는 눈빛을 잠시 깔며 살짝 짜증이 섞인 기색을 보였다.“안 좋아해요.”그는 한때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진서연 역시 과거의 약혼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진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가득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정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제 나가줄래요?”정민기의 냉정한 한마디에 진서연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처음에 나랑 연애를 시작했어요?”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 연애를 하면 꼭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요? 사귀기 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우리는 안 맞아요.”정민기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방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에리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나로는 부족해요?”“네?”그 한마디에 진서연의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정민기에게 날렸다.사실, 정민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꽂혔다.“그, 그게... 왜 안 피한 거예요?”그녀의 주먹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순간, 정민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짙푸른 멍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정민기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제 됐어요?”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진서연은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래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 당장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