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씻고 나서는 조연아와 방금 전까지 뒷담화를 하던 여직원들이 마침 마주치고...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직원들이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대, 대표님.”고개를 끄덕인 조연아가 직원들 중 한 명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어린 여자애가 뭐 어때서요? 본인도 어린 여성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자기비하는 좀 아니지 않나요?”말을 마친 조연아는 직원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 여유까지 보여주며 화장실을 나섰다.잠시 후, 18층.회의실에 들어선 조연아가 주주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역시나 그녀의 지각에 주주들은 너도나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첫 주주총회부터 지각이라니. 아주 대단하시구만.”“이제 우리는 뒷방 늙은이라 이거지.”“스타엔터 미래가 어둡다, 어두워...”꽤 높은 데시벨의 혼잣말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왔지만 조연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수군거림 속에서 자리에 앉은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가 주주들을 쭉 훑어보았다.“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제겐 삼촌뻘, 아버지뻘이시죠. 그런 차원에서 저도 여러분들께 지나치게 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디 선은 지켜주세요.”“...”잠깐의 침묵 끝에 주주들의 비아냥거림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아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선을 지키라니요!”“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다들 사회적으로 한 자리 차지하고 계시는 분들이니 공금 횡령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수백억이나 되는 돈이 장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사태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10분 정도 지각한 건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아니, 수백억이라니? 재무팀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유상진이 팀장이 되고 나서 아주 엉망이야, 엉망...”“그런데 오늘 추건 대표는 왜 참석하지 않은 건가? 이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추 대표 아닌가?”잔뜩 흥분한 주주들의 질문들이 이어졌다.“삼촌께선 제게 스타엔터의 지
짝짝짝.주주들 중 누군가 먼저 박수를 치고 곧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그 뒤로 장장 2시간이나 이어진 회의가 끝나고 주주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뜰 무렵, 조연아가 심석호를 불러세웠다.“심석호 이사님.”“네, 대표님. 무슨 일이신지?”“방금 전에... 유상진 팀장이 재무팀 팀장을 맡고 나서 회사 재무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하셨죠? 전 재무팀 팀장은 하지석 씨던가요?”이에 심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죠. 애초에 높은 연봉으로 겨우 스카우트해 온 사람인데 그렇게 회사를 떠나게 될 줄은.”“지금 하지석 씨는 어디 있죠?”“추건 대표가 회사를 이어받고 나선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백지수표까지 마다하고 스타엔터에 묶여있은 건 어디까지나 추 회장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이 회사에 남아있을 의미가 없다고 느낀 거죠.”“엄마...”조연아가 중얼거렸다.“대표님, 혹시 하지석 씨를 다시 스타엔터로 불러들일 생각이신 겁니까?”조연아는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니까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글쎄...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심석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세요.”똑똑똑.이때 다가온 만두가 검사결과지를 건넸다.“건강검진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 추건 대표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우울증을 앓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다.”확신에 찬 만두의 말투에 조연아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대표님. 자살 이유에 우울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거 하나로 타살이라고 결정짓는 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닐지...”“네, 만두 씨 말이 맞아요. 어머니는 미리 유서까지 준비해 두셨어요. 아무리 봐도 자살 같긴 한데...”‘오히려 너무 자살 같아서 의심스럽단 말이야. 이 모든 상황이.’“하지만 2년 전, 제가 받았던 검사지에는 분명 우울증으로 인한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적혀있었어요. 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알아내야 해요. 정말 엄마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거라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요.”조연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제 시련 같은 건 두렵지 않아. 내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엄마가 왜 돌아가셨는지 무조건 밝혀낼 거야. 우리 엄마... 저승에서라도 편히 눈 감을 수 있게... 내가 무조건 알아낼 거야.”“네, 대표님. 그 길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만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괜히 만두 씨까지 휘말리게 될지도 몰라요...”“에이, 대표님도 이렇게 용기를 내주셨는데 남자인 제가 겁 먹고 물러선다면... 2미터 되는 제 키가 너무 부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만두가 자신의 탄탄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조연아가 눈물을 글썽였다.“대표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아니셨다면 전 지금쯤 아마 백수, 아니지. 노숙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대표님은 제 은인과도 같은 분인데 제가 이 정도도 못할 까봐요?”“그럼 일단... 하지석 씨 행방부터 알아봐 주세요.”‘일단 재무팀부터 바로 잡아야 해. 그래야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어.’“전 재무팀 팀장 하지석 씨 말씀이십니까?”“네.”“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잠시 후, 회의실을 나선 조연아는 꼭대기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향했다.그런데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우르르 모여있는 비서들의 모습이었다.“뭐 하는 거죠?”조연아의 목소리에 비서들이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대표님... 대표님 앞으로 온 거 같은데요.”유리 상자 속에 잠긴 장미꽃들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누가... 보낸 거죠?”“민지훈 대표님께서 보내신 거라고 합니다.”“누구요?”“민하그룹 민지훈 대표님이요.”깜짝 놀라 되묻는 그녀의 질문에 비서가 다시 대답했다.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미 앞에서도 조연아는 미소 한줄기 지을 수 없었다.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1년 전이라면 길 걷다 꺾은
“안 만날 거니까 알아서 거절하세요.”“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조연아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민하그룹 대표 사무실.“꽃은 배송됐겠죠?”파일을 덮은 민지훈이 물었다.“네.”오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아가 직접 확인했답니까?”“아, 그게... 네.”오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그런데 아무 반응도 없다던가요?”집요한 민지훈의 질문에 오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게... 조연아 대표가 받은 장미꽃은 전부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답니다. 저희 회사에 꽃 값까지 보내셨고요...”“하.”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민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준 선물을 직원들에게 나눠준 것도 모자라서 회사 계좌로 돈까지 보내? 이렇게 선을 긋겠다 이거지?’민지훈의 기분이 언짢아진 걸 느낀 오민은 고개를 더 푹 숙였다.‘꽃 선물은 아마 처음 하는 것일 텐데... 그 성의를 이렇게 짓밟으시다니. 조연아 씨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빠각.다음 순간 펜촉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오민이 화들짞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그렇게 오민이 도망치 듯 사무실을 나서고 약 몇 시간 뒤.스타엔터.조연아가 이미 결재한 파일을 비서에게 건넸다.“수고하셨습니다. 이만 퇴근하세요.”“네, 대표님도 수고하셨습니다.”잠시 후, 지하주차장.조연아의 차가 주차장을 나서려던 그때,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차량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급정거로 겨우 사고는 막은 조연아가 짜증스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차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차림의 송진희가 모습을 드러냈다.‘뭐야... 왜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하긴.’조연아가 픽 웃었다.‘평생 사모님 소리만 듣고 살던 사람이 거절이라는 걸 당했으니 짜증이 날 법도 하지.’역시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송진희가 정신없이 차문을 두드렸다.“너 뭐야! 네가 뭔데 날 안 만나겠다고 말해! 당장 안 내려? 안 내려?”“당신과 할 얘기 없습니다, 비기세요!”하지만 이런 말 한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는 조연아의 여유로움이 옆에서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송진희의 모습이 더 우습게 보였다.“넌 양심도 없니? 죄책감 같은 거 못 느껴?”“사모님. 지금 죄책감이라고 하셨어요? 사모님이 제 아이 죽이셨잖아요. 그때는 죄책감 같은 거 안 느끼셨나 봐요?”너무나 침착한 표정에 당황한 송진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지금 보내는 일상들, 소중하게 보내세요. 앞으로 당신에게 이렇게 편한 날 따윈 없을 테니까.”말을 마친 조연아는 거칠게 엑셀을 밟아 앞을 막은 차를 그대로 받아버린 뒤 주차장을 나섰다.백미러로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송진희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저딴 사람한테 난 왜 그 동안 당하고만 살았던 걸까?”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며 조연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내 아이 정도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그 누군가는 그녀에게 새로 시작하는 바에 과거의 나쁜 일들은 전부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게 어떠냐며 말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못이 박힌 나무판은 못을 빼버려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법.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흉터로 남았을 뿐, 적어도 1년이라는 시간 안에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그러니까... 난 복수할 거야. 내게 상처준 사람들에게 복수... 하고 말 거야.’핸들을 부여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15분 뒤. 추연의 집 앞에 도착한 조연아는 혹시나 운 티가 나지 않을까 얼굴을 살펴본 뒤에야 계단을 올랐다.익숙하게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 보니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추연의 모습이 보였다.“이모.”“왔어? 어머, 너 눈이 왜 그래?”주방에서 한달음에 달려나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수습하느라고 했는데 그래도 운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눈이요?”조연아가 짐짓 모르는 척 얼굴을 만졌다.“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가?”“연아야, 그룹 일도 중요하지만 뭐든지 건강이 최고야. 안 되겠다. 너 얼른 가서 쉬어. 밥 다 되면 이모
“대표님! 하지석 씨 찾았습니다!”잔뜩 흥분한 만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어디 있는데요?”“매화마을이라고. 작은 마을에서 수학선생님으로 있답니다.”“오늘 밤 바로 도착할 수 있게 티켓 좀 예매해 줘요.”“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치자 분주하게 밥상을 차리던 추연이 물어왔다.“너 어디 가려고?”“네, 저 매화마을에 갔다 오려고요.”조연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매화마을?”영문을 모르는 추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꽤 먼 곳인데 굳이 오늘 가야겠어?”“전에 스타엔터 재무팀 팀장이 거기 계신다네요. 지금 회사엔 그분이 필요해요.”“누나, 그 사람을 다시 회사로 스카우트 하려고?”“그래. 솔직히 지금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아. 일단 재무팀부터 다시 꾸리려고. 실적을 내야 주주들 불안도 사라질 거야.”“그래.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야. 우리 집에 네 옷 몇 벌 있으니까 바로 여기서 출발하면 되겠다.”말을 마친 추연이 바로 안방으로 향했다.“이모, 제가 해도 돼요...”“얘는. 지금 이모랑 내외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쉬라고 했지! 얼른 가서 좀 앉아있어. 이제 국만 끓으면 끝이니까 얼른 밥부터 먹자.”...잠시 후, 출장 준비까지 마치고 세 가족이 식탁 주위에 둘러앉았다.“자, 연아야. 이 닭다리 좀 먹어봐. 너 어렸을 때부터 닭고기 좋아했잖아.”추연이 백숙 닭다리부분을 뜯어 조연아의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이모, 제 거는요? 저도 챙겨주셔야죠!”이에 바로 밥그릇을 내민 조연준이 수화로 불평을 호소했다.“으이구, 한 사람 하나씩 사이좋게 먹으면 되지. 이모가 설마 우리 연준이 빼놓을까 봐?”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는 계속 되고...잠깐 망설이던 추연이 입을 열었다.“연아야.”“네, 이모.”“그게... 이런 거 물어도 될지 이모도 고민 많이 했는데... 그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추연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었다.“그날 민지훈 대표랑 너 같이 나갔다면서... 두 사람... 지금은 무슨
옆에 앉은 조연준의 표정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1년 전 조연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그러게요. 하긴, 애초에 임천시에서 민지훈 몰래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긴 하지만요.”조연아가 어깨를 으쓱했다.그렇기에 송진희, 민지아를 미리 부른 거기도 했고 말이다.“누나 말이 맞아요. 민지훈 대표가 적어도 임천시는 꽉 잡고 있잖아요. 아니. 이 대한민국에서 민지훈 대표를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요.”두 남매의 말에 추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 좀 더 미룰 걸 그랬어. 네가 그 화재에서 살아남은 게 아직도 꿈만 같은데. 또 네가 그 불구덩이에 다시 뛰어들까 봐... 이모 너무 걱정돼.”“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 들켰을 거예요. 차라리 제 의지대로 나타나는 게 맞아요.”조연아의 머릿속에 요즘 어딘가 이상하던 민지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그렇게나 차갑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는 걸까? ‘아니야.’조연아가 고개를 저었다.‘민지훈이 왜 바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이젠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다시 그 지옥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한편,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추연이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걱정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민지훈은 달라. 그 사람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다치는 건 결국 네가 될 거야.”추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조연아는 더 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모. 저 바보 아니에요. 다시 그 사람이랑 엮일 일 없어요.”그 화재에서 벗어나 새 삶을 얻게 된 그 순간부터 과거의 나약했던 자신과 영원히 이별하기로 마음 먹은 조연아다.그제야 안심한 듯한 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좀 놓이네. 자, 이
“젠장!”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민지훈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오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조연아 씨가 나타난 뒤로 술과 담배는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알아내세요. 지금 어디 있는지.”“알겠습니다.”그리고 잠시 후, 다시 차에 탄 오민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지금 조연아 대표 매화마을에 있답니다.”“매화마을?”“네.”“지금 당장 티켓 예매해 줘요.”“아, 그게...”오민이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지금은 시간이 워낙 늦어서 KTX도 기차도 다 끊겼을 텐데요.”“그럼 내가 직접 운전이라도 해서 가는 수밖에요.”“대표님, 지금 당장 출발해도 3, 4시간은 걸릴 겁니다. 차라리 내일 아침 일찍 떠나시는...”“지금 출발합니다.”민지훈이 망설임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알겠습니다.”대답을 마친 민지훈이 다시 차에 타고 이렇게 또다시 보스에게 버려진 오민이 어색하게 밤거리를 채웠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밤.빗소리를 BGM 삼아 조연아는 마을의 유일한 모텔에 도착했다.지잉.‘참, 시간 계산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짐을 풀자마자 만두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조연아가 픽 웃었다.“대표님, 도착하셨습니까?”“네.”“제가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하석진은 고아원 출신입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천재적인 두뇌로 장학금 루트만 쭉 걸어왔던 거죠.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졸업하고 나선 바로 대기업에 입사했고요.”“스카우트 제의가 많았을 텐데 굳이 스타엔터로 오게 된 이유가 뭐죠?”“과거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추 회장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두 분 다 희귀 혈액형이거든요.”“아, 그리고.”만두가 말을 이어갔다.“지금 매화마을에서 굉장히 인기있는 수학선생님이라고 합니다. 1년 동안 수많은 기업들이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전부 거절했고요. 삼고초려 작전을 벌이다 떨어져나간 헤드헌터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제가 파일 보내드릴게요.”만두에게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