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민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많이 슬펐어.”‘뭐?’왜 이렇게 그녀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주는 걸까? 1년 동안 왜 이렇게 많이 변한 걸까?그녀라면 치를 떨던 민지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연아도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한편, 충격을 받은 건 송진희 역시 마찬가지였다.“지훈아...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오빠! 지금 오빠 약혼녀는 나야.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적어도... 적어도 변명 한 마디쯤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당당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던 민지아가 결국 호텔방을 뛰쳐나갔다.“어머, 지아야! 지아야!”송진희 역시 그 뒤를 따르고...어느새 그의 품에서 민지훈이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엄마와 약혼녀에게 바람 현장을 잡힌 기분, 어때?”“복잡미묘하네?”‘하, 미친 자식.’“뭐 오늘 일로 잘나신 어머니에 약혼녀까지 많이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일단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서 두 사람 마음부터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 만나서 기분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호텔방을 나서는 그녀의 뒤편으로 민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과거의 조연아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처음 들어보는 단호한 목소리에 민지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과거의 조연아라면... 내가 잡을 필요도 없었겠지. 내 곁으로 올 수만 있다면 그게 함정이라고 해도 무조건 뛰어들었을 테니까. 정말... 달라진 건가?”“오늘 이 판, 잘 짰어. 연기도 좋았고.”핸드백을 잡은 조연아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뭐야. 다 알고 있다는 저 재수없는 말투는.’“칭찬 고마워.”말을 마친 조연아는 부랴부랴 방을 나섰다.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무표정한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정말 다시 빠져버릴
“제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어머니 아들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 복수, 연아가 원한다면 하게 해줄 겁니다. 제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줄 거예요.”‘그래, 복수... 당연히 해야겠지. 나도, 우리 집안도... 연아한테 모든 걸 많이 빚졌으니까.”“미쳤어... 미쳤어.”민지훈의 말에 단단히 충격을 받은 송진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도대체 조연아 그 계집애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너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조연아 그 계집애 겉으로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추잡한 짓은 다 저지르던 애야. 그런데 그딴 애한테... 목숨까지 내주겠다고? 너 미쳤어?”송진희의 절규에 민지훈은 대답 대신 옆에 있는 경호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사모님, 댁으로 모시세요.”“네, 대표님.”“지훈아, 거기 서! 거기 서라고!”송진희의 외침에도 민지훈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한편,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탄 조연아는 여전히 쿵쾅대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솔직히 방금 전 그 상황에서 당연히 민지훈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화는커녕 그녀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주다니.그리고...슬펐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심처럼 느껴져 순간 흔들릴 뻔한 조연아였다.‘뭐지? 이것마저 민지훈의 전략인 건가?’온갖 생각들이 얽히며 머리가 웅웅대던 그때.“연아아!”오피스텔 근처에 멈춘 택시 앞에 고주혁이 서 있었다.“오빠.”웃으며 차에서 내린 조연아가 고주혁에게 다가갔다.“연아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고주혁이 조연아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진정해, 오빠. 이것 봐. 나 괜찮잖아.”조연아는 자신이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 듯 빙글 한 바퀴 돌아보기까지 했다.“아까... 민지아가 울면서 호텔에서 나오는 걸 봤어.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그제야 안심한 고주혁이 빙긋 웃었다.“뭐, 송진희, 민지아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에피타이저 같은 거랄까?”1년 동안 비즈니스의 여제라고
“오늘 충분히 도와줬어.”말을 마친 조연아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역시나 오늘 기자회견장에서의 소란은 기사로 업로드 되어 인터넷을 후끈 달구고 있었다.“저런 사람이 아버지라고. 진짜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네.”“백장미 같은 저딴 사람 때문에 착한 새엄마들도 오해받고 그러는 거야. 저런 사람은 폭행죄로 감옥에서 콩밥 좀 먹어봐야 해.”“그런데 조연우가 청각장애인이었어?”댓글을 읽던 조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조연우는 자존심이 워낙 강한 아이었다. 청각장애인이라는 현실 때문에 동정받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자신의 결함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것도 꺼리는 사람이라는 걸 누나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지만.‘오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이야.’“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고주혁이 살짝 굳은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고 걱정스레 물어왔다.“아, 아니야.”짧게 대답한 조연아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팀장님, 저 조연아입니다.”“네, 대표님.”“우리 연우에 대한 댓글, 기사 전부 지워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대신 저에 대한 기사 올려주세요.”“정말요? 지금 대표님께서 스타엔터 대표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홍보팀 한시연 팀장이 재차 확인했다.“네. 지금 당장요.”“알겠습니다.”그리고 1분 후, 스타엔터 공식 SNS에 조연아가 새로운 대표로 취임했다는 메시지가 업로드되었다.1년 동안 실종되었던 조연아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스타엔터 대표로 취임했다는 소식에 대중들의 시선은 다시 조연아에게로 쏠리게 되었다.한편, 밤거리를 달리는 고급스러운 외제차 안.조수석에 앉은 오민이 태블릿을 건넸다.“대표님, 조연아 씨가 스타엔터 대표이사 직에 취임했다는 기사입니다.”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은 민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에 업로드 된 사진 속 심플한 정장에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묶은 조연아는 꽤 그럴 듯한 CEO의 모습이었다.“왜 이렇게 큰
“무작정 댓글만 지우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대중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다른 기사거리가 필요했던 거죠.”‘조연아,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네...’그제야 조연아의 뜻을 이해한 오민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조연아 씨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는 사실이 조연우 씨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매리트 있으니까요.”“보다시피.”민지훈이 싱긋 웃었다.이때 오민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수락 버튼을 누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요? 장씨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그 목소리에 민지훈의 표정 역시 차갑게 굳었다.잠시 후, 통화를 마친 오민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1년 전, 조연아 씨의 식사를 담당했던 장씨 아주머니를 찾았는데... 아쉽게도 한발 늦은 상태로 월세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경찰 검사 결과 자살로 판명되었다고 합니다.”“자살? 꼬리 자르기를 당한 거겠죠.”탁.거칠게 파일을 덮은 민지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반 년을 찾아헤맨 사람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자 오민은 숨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민지훈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저... 대표님. 조연아 씨의 새로운 거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린 민지훈이 물었다.“거기가 어딥니까?”“저희 그룹에서 새로 분양을 시작한 우여청 빌라입니다.”“차 세워요.”잠시 후, 차가 멈춰 서고 민지훈이 다시 말했다.“김 기사님, 내리세요.”“네, 대표님.”“오 비서님도 내리세요.”민지훈의 시선이 조수석에 앉은 오민에게로 향했다.“알겠습니다.”잠시 후, 운전석에 탄 민지훈이 도로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은 오민과 김 기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잠시 후, 우여청 빌라 앞.고주혁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데려다줘서 고마워.”“오늘 많이 피곤했지. 내일 취임식인데 오늘 밤은 푹 쉬어.”조연아를 위해 벨트까지 풀어준 고주혁이 부드러운
“오빠, 오빠도 이제 나이 꽉 찬 거 알고 있지? 주변에 좋은 여자 있으면 내가 소개해 줄게.”은인과도 같은 고주혁에게 조연아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젠틀한 거절이었다.“그럼 나 먼저 올라가 볼게. 조심해서 가.”차에서 내린 조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빌라를 향해 달려갔다.도망치 듯 다급하게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주혁의 미소가 점차 옅어졌다.“알아. 네가 사랑 때문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엔... 아직 망설여지는 점이 많겠지. 그러니까 내가 더 노력할게. 연아 넌 그냥 가만히 있어.”애써 감정을 추스른 고주혁은 조연아의 집이 불을 밝힌 뒤에야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한편,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조연아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무지막지한 힘에 집안으로 끌려들어간 조연아는 바로 벽에 밀쳐진 채 움직임을 제압당하고 만다.“살려주세요!”본능적인 외침과 함께 조연아의 손은 현관 서랍장 위에 놓인 꽃병으로 향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집안의 불이 켜지고...어둠속에 가려진 잘생긴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자 잠깐 멈칫하던 조연아의 표정이 공포에서 경멸로 바뀌었다.“하, 뭐 범죄자 코스프레라도 하는 건가?”비아냥거림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민지훈은 개의치 않았다.“그 남자랑 무슨 사이야?”“그 남자? 누구?”“몰라서 물어?”민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고주혁이랑 무슨 사이냐고!”“내가 주혁 오빠랑 무슨 사이인지 당신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해? 무슨 자격으로 지금 내게 이렇게 따져묻는 거지? 또 무슨 자격으로 내 집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온 거고? 민하그룹 민지훈 대표가 이딴 식으로 전 와이프 집에 들락거린다는 게 기자들한테 알려지면 당신한테도 좋을 거 없잖아?”“마음껏 찍으라고 해. 난 상관없으니까.”‘미친 자식.’지금 당장이라도 유리병으로 민지훈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커다란 손에 꽉 잡힌 상황이 한스러울 뿐이었다.“나랑 주혁 오빠가 무슨 사이
“그래. 남았어, 미련.”이 질문만을 기다렸던 민지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조연아, 넌 영원히 내 거야. 내게서 도망칠 생각 따위 하지 마.’묵직한 소유욕이 조연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차라리 예전처럼 차갑게, 매정하게 굴 것이지.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다시 날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그래도 10년간 그의 곁을 지키며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민지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선 것이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내가 다시 임천시로 돌아온 게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이 맞긴 한 걸까?’디옹.바로 그대,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이모 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아야, 집에 있어? 이모야. 네가 저번에 부탁했던 거 알아냈어. 연아야? 연아야?”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리자 오히려 집 주인인 조연아가 당황하기 시작했다.‘진정해... 침착해.’민지훈을 힘껏 밀어낸 조연아가 창문쪽을 가리켰다.“나가.”“여기 12층이야.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내일 아침 기사로 조연아 대표 전 남편 살해하다 이런 타이틀도 나쁘지 않겠네.”이 급박한 와중에 농담이라니.가능하다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다급하게 그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간 조연아가 옷장 문을 열었다.“들어가.”딩동.“연아야? 안에 있는 거 맞아?”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리고...“민지훈, 지금 당신이랑 농담 따먹기 할 기분 아니야. 들어갈 거야, 말 거야.”“들어갈게.”조연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 민지훈의 큰 손이 그녀의 가녀린 목을 확 잡아당겼다.“대신 대가는 받아야겠지?”‘대가?’무슨 대가를 원하는 것인지 결론에 이르기도 전에 두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미쳤어?”겨우 1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렇게 뻔뻔하게 변해 버린 걸까?하지만 그녀가 화를 내든 말든 어깨를 으쓱하던 민지훈은 얌전하게 옷장 속에 몸을 숨겼다.턱없이
추연과 조연준이 동시에 그녀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이모, 그나저나 장부 조사는 끝내셨어요?”삼촌 추건이 스타엔터를 이어받은 뒤로 회사는 말 그대로 일낙천장, 3대 엔터회사 자리를 내준 것은 물론 해마다 적자를 이어오고 있었다.그리고 새로운 대표로 취임하게 된 조연아가 장부를 확인하던 중, 미심쩍은 점을 발견해 추연에게 조사를 부탁했던 것이었다.이에 추연이 두터운 파일 꾸러미를 건넸다.“그럼. 언니가 세상을 뜨고 나서 재무팀 하 팀장은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떠나고 자기 사람인 유상진을 새로운 팀장으로 내세웠어. 살펴봤는데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더라. 1년 사이에 출처 불명의 자금 이동만 수백억이 넘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몇 년 사이에 파산이야.”“장부를 확인했던 회계사는 믿을만한 사람인 거 맞죠?”어디까지나 가족 기업, 사람들이 알아봤자 의미없는 가족들 사이의 세력 싸움으로 비춰질 게 뻔했으니 더 조심스러웠다.“으이그, 너 이모 못 믿어? 특별히 신경 써서 임천시가 아닌 다른 지역 회계법인 회계사로 선임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장부를 바라보는 조연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감히 회사 돈 횡령을 해? 전부 다시 뱉어내게 만들 거야.’쿵!이때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당황한 조연아가 최대한 티나지 않게 안방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이게 무슨 소리야?”추연의 시선 역시 굳게 닫힌 안방 쪽으로 향했다.“뭐 떨어졌나 보죠.”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하는 조연아의 손바닥이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다.다행히 추연도 조연준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래? 그럼 나랑 연준이는 이만 가볼게. 너, 여자 혼자 사는 거 쉽지 않다? 항상 문 조심하고, 알겠지?”“내가 애인가. 알겠어요, 이모.”“누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조연준이 그녀를 향해 수화를 해보였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조연아가 두 사람을 배웅해 주려던 그때.쿵!안방쪽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소리가 들려오
말릴 틈도 없이 벌컥 문을 연 추연이 안방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작은 스피커와 충전기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제외하곤 멀쩡한 방안.민지훈이 아니라는 걸 발견한 조연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 다행이다...’“별거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뭐 떨어진 거라니까.”“그래. 뭐, 별일 없으니 다행이고. 난 또 도둑이라도 몰래 숨어들었나 했지.”어딘가 찜찜하긴 했지만 딱히 물증이 없으니 추연과 조연준은 다시 돌아섰다.“그래, 연준이 말이 맞아. 너... 그냥 이모랑 같이 사는 건 안 되겠니?”“이모, 저 괜찮아요. 여기 나름 고급빌라예요. 외부인들은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한다고요. 괜찮을 거예요.”‘차라리 도둑이었으면 좋겠네. 옷장속에 이혼한 전남편이 있다는 걸 들켜봐. 어휴, 골치 아퍼.’그 뒤로도 두 사람의 잔소리 세례를 한참 동안 들은 뒤에야 조연아는 겨우 둘을 배웅하는 데 성공했다.“조심히 가세요, 이모.”이 인삿말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현관문이 닫히고...이제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에 조연아는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겨우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돌아서려던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로 조연아를 벽으로 제압했다.“들키는 게 그렇게 무서워?”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럼.”조연아가 민지훈의 가슴팍을 퍽 밀쳐냈다.“우리 두 사람 이혼한 사이잖아. 전 남편이 내 집 안방에 있다는 걸 들켜봐. 내 해명 따윈 먹히지도 않겠지.”“왜? 왜 그렇게 나랑 선 긋고 싶어서 안달인 건데.”불쾌함이 깃든 표정의 민지훈이 그녀의 턱을 부여잡았다.“당신이 원하는 거 아니었어? 이제야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하, 마음이 바뀌었어. 이제 나한테서 벗어날 생각하지도 마.”‘도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그리고 다음 순간, 묘한 표정을 짓던 그의 입술이 내려앉고...뜨거운 키스에 잠잠한 호수면 같던 그녀의 마음에 다시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잠시 후,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