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급하게 가? 넘어지면 어쩌려고?”이 자식 알면서 일부러 묻는 게 뻔하다.그녀가 이렇게 급히 가는 건 다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연아는 입술을 문지르며 아무렇게나 핑계를 댔다.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해.”민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나 때문이야 아니면 회사 때문이야?”연아는 정확한 그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당연히 그를 피하기 위해 이렇게 급히 가는 거라고 인정하지 않았다.“지훈 도련님 너무 자만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때, 민씨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와 말했다. “지훈이 때문이 아니라니, 그럼 연아 여기서 저녁 먹고 가!우리 산수마을 음식 진짜 맛있어. 밥 먹고 나서 후식으로 디저트도 해줄 수 있고,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야!”“어르신, 벌써 베이비 슈 3개랑 푸딩 한 그릇 다 드셨잖아요.”페이버는 민씨 어르신에게 최선을 다해 얘기했지만 그의 디저트 사랑은 막을 수 없었다.“어어, 알겠어, 잔소리 좀 그만해. 연아가 나랑 밥 같이 먹어주면 나도 후식 디저트 안 먹을게!”민씨 어르신은 얘기하면서 연아를 보며 갈망하는 눈빛을 보냈다.“할아버님, 회사에 정말 일이 생겼어요……”연아의 거짓말 실력은 그저 그랬고, 사실 그녀는 민씨 어르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예전부터 민씨 집안에서 그가 어떻게 그녀를 지켜왔는지 연아는 절대 잊지 않았지만,정말 진심으로 민지훈과 같은 지붕 아래 있고 싶지 않았다.민씨 어르신은 “흠흠” 소리를 내더니 정곡을 찔렀다.“연아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 할아비 마음에 상처를 주는구나. 회사에 얼마나 큰일이 생겼다고, 굳이 주말에 해야겠니?방금 분명 지훈이가 온다고 하니까 그제야 급히 가려고 했잖니! 지금 이 늙은이가 멍청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 아직 멀쩡해!”민씨 어르신의 말을 들은 민지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떠올랐고,그는 스스럼없이 연아를 품
“연아 아가씨, 남아서 밥 먹고 가지 그래요. 어르신께서 아가씨가 오는 걸 보시고, 제게 큰 주방에 가서 음식 7, 8개를 추가하라고 하셨어요. 만약 아가씨가 그냥 가시면 모든 음식들을 낭비하게 될 거에요.”페이버는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이라 낭비를 싫어했다.“나랑 같이 밥 안 먹으면 내일부터 단식투쟁 할 거야!” 민씨 어르신은 지팡이를 짚고 쓸쓸한 뒷모습으로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할아버지는 디저트를 안 드시는 게 제일 좋아요!”연아의 말에 민씨 어르신은 순식간에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중얼거렸다.“양심 없는 계집애, 양심이 없어......”“먹기 싫으면 먹지 마. 어차피 너처럼 양심 없는 계집애 때문에 이미 화났어. 조연아는 양심도 없고,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효심도 없고......”입술을 오므린 조연아는 속이 상한 민씨 어르신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그녀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일부러 주방에 음식을 더 하라고 말했다니......머리를 숙이고 있는 민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나 때문에 도망가겠다고?”민지훈 때문에? 도망간다고?그럴 리가?조연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앞에 있는 민지훈을 노려보며 말했다.“할아버지, 같이 밥 먹을 게요! 그러니 기분 푸세요!”민씨 어르신은 조연아가 남겠다고 말 하자, 즉시 투덜거림을 멈추고 기뻐했다.조연아는 그 모습을 보며 같이 웃었다. 이어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옆에 있던 민지훈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를 위해 여기 있는 거지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조연아는 또 한 번 민지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남아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말했기에, 설령 칼로 그의 가슴을 수만 번 찌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할아버지, 조심하세요.” 조연아는 민씨 어르신을 매우 걱정했다. 할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지팡이를 손에서 놓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페이버는 재빨리
그녀를 아끼며 자신의 친손녀처럼 대해주신 민씨 어르신의 상황에 조연아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고칠 수 없대?” 조연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물었다. “응, 가끔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실 때도 있어.” 본인이 누구인지도 기억을 못 한다고? 순간, 조연아가 재빨리 민씨 어르신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이따가 쿠키 만들어 드릴까요? 달지는 않지만 입 심심 하실 때 드시면 좋으실 거예요.” “정말? 쿠키가 있어?” 민씨 어르신이 크게 미소를 지었다. 조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제가 계속 만들어 드릴게요!” “그건 안 돼.” 민씨 어르신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계속 만들어 줄 수 있어? 너랑 지훈이는 아기 안 낳을 거야? 아이가 생기면 피곤할 텐데, 어떻게 계속 만들어 줄 수 있어.” 민씨 어르신의 말에 조연아는 방금 민지훈이 한 말처럼 할아버지의 기억은 좋았다 나빴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씨 어르신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조연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연아야, 너와 지훈이는 언제 내게 증손자를 안겨줄 거야?” “우리 집에 일하는 사람들의 손자들은 이미 다 컸어. 페이버의 손녀는 매일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젊은 사람들이 할 일도 많고 바쁜 것도 알지만, 결혼 한지 오래됐으니 이젠 아이도 낳아야지.” “내가 계속 지훈이에게 돈 버는 일은 끝도 없고, 우리 집 재산은 몇 대가 놀고먹으며 써도 다 쓸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어서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도 모르겠고, 몸도 하루하루 더 안 좋아지고...... 정말 내가 증손자를 만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민씨 어르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조연아는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하지만 조연아는 민씨 어르신에게 자신과 민지훈은 이미 1년여 전에 이혼했고 이제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이이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연아는
“입 닥쳐!” 민씨 어르신은 페이버를 못 마땅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내가 몰랐다 해도 네가 매일 내 귀에 대고 중얼거려서 나도 알고 있다고!” “네.” 페이버는 민씨 어르신의 이 어린애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페이버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조연아는 곧바로 페이버를 위해 말을 거들었다. 민씨 어르신은 조연아의 말을 듣고 페이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날 걱정하는 거 알아.” 민씨 어르신이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페이버가 웃었다. 그런 다음 민씨 어르신은 젓가락으로 참마를 집어 민지훈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자, 지훈아. 이 참마 많이 먹어. 정력에 좋아!” 민씨 어르신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많이 먹어라, 이건 활력에 좋아” “이거 해삼도 먹어. 이건 보양식이야. 양기를 북돋워 줘!” 민지훈은 자신의 그릇 위에 올려진 음식을 보고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손자 능력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조연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웃었다. 민지훈은 조연아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 그가 민씨 어르신을 크게 불렀다. “왜?” 민씨 어르신은 대답하며 그의 그릇에 토마토를 올려주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하시면 연아가 힘들어요.” 그는 차분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민지훈의 말을 들은 조연아는 사레 들여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인가? 이 남자가 정말 그녀가 기억하는 민지훈이 맞나? 민지훈은 매번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놀라게 했고, 그가 정말 뻔뻔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여보, 괜찮아?”민지훈은 걱정하는 말투로 말하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조연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
민지훈이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거야? 조연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조연아의 눈빛을 느낀 민지훈은 그녀를 향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은 뒤, 민씨 어르신 앞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애정을 표현했다. “부끄러워하지 마, 할아버지도 다 경험해 보신 일이야.” 완전히 멍해진 조연아는 마음속으로 민지훈을 수천번이나 욕했다. 이 나쁜 놈아! 할아버지가 아픈 틈을 타서 이런다고? 이 나쁜 놈! 정말 동물만도 못한 놈! 조연아는 과일 주스를 몇 모금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후, 조연아는 민씨 어르신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여기서 집까지 멀지 않아요. 여기에 머무르고 페이버와 일하시는 분들께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민씨 어르신은 말했다. “안 귀찮아, 안 귀찮아, 페이버도 다른 사람들도 귀찮다고 생각 안 해.” 그리고 페이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페이버, 귀찮아?” 질문하는 민씨 어르신의 그 눈빛은 파이버에게 네가 감히 귀찮다고 말하면 넌 끝장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연아는 희망에 찬 눈으로 페이버를 바라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핑계 삼아 그곳에서 잠을 자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씨 어르신의 눈빛 경고가 있는데, 페이버가 어찌 감히 귀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연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페이버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화해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민지훈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조연아의 간곡한 눈초리를 완전히 무시했다. “어르신께서 귀찮지 않으시다고 하셨으면 귀찮지 않으신 거예요.” 페이버가 웃으며 말했다. 민씨 어르신은 손뼉을 치며 조연아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연아야, 들었어? 페이버가 귀찮지 않다고 했어. 가족끼리 귀찮은 게 어디 있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지훈이랑 여기서 하룻밤
저녁 식사 후, 조연아는 부엌에서 쿠키를 굽느라 바빴다.밤이 되자 산수 마을 전체에 조명이 켜지면서 강가와 정자 테라스는 더욱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게 했다.민씨 어르신은 강남 정원을 매우 좋아해서 산수 마을의 정원은 강남 정원의 스타일로 설계되었다.밤이 되자 산장전체에 어르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강남의 정원과 같은 산수 마을에 운치가 더해졌다.민씨 어르신은 갓 구운 쿠키를 먹으며 음악 가사를 이따금 흥얼거리며 듣고 있었다.민지훈은 긴 손가락으로 태블릿pc를 만지며 최근 받은 이메일을 훑어보고 있었다.메일을 보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그 메일은 최근 오민이 보낸 것이었다.-지훈 도련님, 연아 씨가 인조이 엔터 인수작업에 들어갔습니다.조사한 바로는 스타 엔터의 인수인계팀, 법무팀 등 임시로 구성된 팀이 이미 인조이 엔터에 합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연아 씨는 인조이 엔터를 인수하기 위해 이미 여러 방면에서 손을 쓰기 시작했고, 고주혁과 같은 최우수 변호사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인조이 엔터를 인수할 것같습니다.—하지만 인조이는 발전 전망이 없습니다. 스타 엔터가 인조이를 인수할 가능성과 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상 비슷합니다. 나중에 제가 조사해보니, 연아씨의 여동생은 인조이 엔터와 계약을 맺었는데, 거의 종신 계약인 데다가 계약을 파기하면 엄청난 위약금을 내야 하는 상황입니다.인조이 엔터에서 하율 씨는 거의 가망성이 없습니다. 모두 하율 씨의 노력과 행운에 달려있는 실정입니다. 아마 연아 씨가 인조이를 인수하려고 하는 이유는 하율 씨를 위한 것 같습니다.메일에 첨부된 사진에는 스타 엔터 직원들이 규모가 작은 인조이 엔터에 출입하는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또한 인수 사항과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오민은 이 모든 내용을 철저하게 조사했다.메일을 다 읽은 민지훈은 태블릿pc를 끄고 휴대전화를 들고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정원으로 들어선 그는 오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오민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
지금 이게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인가?전화를 끊고 민지훈은 뒤돌아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트로트 소리는 계속 들렸고 민씨 어르신은 기분 이 좋은지 접시에 있던 쿠키도 다 드셨다.“우리 손자며느리 음식 솜씨 참 좋아. 만든 쿠키도 이렇게 맛있다니까. 좀 더 줘!”페이버는 빈 접시를 받고 민씨 어르신을 향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르신, 오늘 너무 많이 드셨으니 더는 안됩니다. 이러면 위장에도 좋지 않아 내일 다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방금 연아 아가씨께서 포장한 걸 봤습니다.”“나 지금 쿠키 먹을 거야!”지금 민씨 어르신은 마치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다.이때 페이버는 너무 난감했다. 마침 거실로 돌아온 민지훈을 보고 재빨리 도움을 요청했다. “지훈 도련님, 어르신께서 또 쿠키를 드신다고 하는데요. 오늘 이미 많이 드셨으니 더는 안됩니다. 이러다 위장이 불편할 수 있으니 안됩니다.”민씨 어르신은 페이버가 민지훈한테 고자질하는 걸 보고 마치 표정이 안 좋았다. 마치 사탕 잃은 아이처럼 불쌍해 보였다.“할아버지, 더 드실 건가요?” 민지훈은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민씨 어르신도 자기 손자의 이런 표정을 보고 너무 분해 고개를 돌려 더 이상 민지훈한테 눈길을 주지 않았다.그리고 어르신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같은 남자가 연아가 왜 좋다고 그랬을까? 이 세상 깔린 게 남자인데 너처럼 이렇게 사나운 남자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안가네. 지금 자기 할아버지한테도 이렇게 무섭게 대하고. 내가 좋아하는 쿠키도 못 먹게 하고 이거 분명히 노인 학대인 거 몰라?”민씨 어르신은 말발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다. 이 상황을 쉽게 자기한테 유리하게끔 만든 거다. 이때 마침 주방에서 나온 연아가 이 상황을 보게 되었다. 딱 보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어쩔 줄 몰랐다.그래서 바고 페이버한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상황이죠?”그녀의 말에 페이버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민씨 어르신처럼 먹기 좋아하고 간식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리고 민씨 어르신은 바로 말했다. “내가 증손자가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너희 두 사람 여기서 두 눈 뜨고 뭐 하고 있는 거야?”“할아버지, 트로트 같이 들어요 .” 연아는 재빨리 이유를 데고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민씨 어르신은 막 부은 차를 연아한테 건넸다. “물 좀 마셔. 오늘 바쁘게 일하느라 물 마실 시간도 없었지?”연아는 순간 의아했다. 갑자기 자기한테 차를 건네는 게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얼른 마셔. 페이버 솜씨 괜찮아.”연아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차를 건네받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향이 너무 좋네요. 역시 페이버 솜씨 너무 좋네요.” 연아는 페이버를 향해 엄지를 보냈고 환하게 웃었다.페이버는 어색한 듯 표정이 굳었고 재빨리 웃음을 지으며 연아한테 고개를 끄덕이었다. “연아 아가씨가 좋다니 다행이네요. 좋아하시면 자주 오세요. 그러면 페이버가 차 맛있게 타 드릴게요.”“네 좋아요.”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민씨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둘이서 트로트를 듣고 있었다.“지금 이게 진주탑 아니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데. 할아버지 혼자 들으면 외롭잖아요. 제가 같이 있어줄게요. 같이 들어요.”연아는 정말 민지훈과 같은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두 남녀가 같은 방에 있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두 사람은 이미 이혼한 상태라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민씨 어르신 마음속에서는 이미 증손자를 원하고 있기에 연아랑 같이 트로트 들을 리가 없다.“페이버랑 같이 들으면 돼. 너희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야지. 두 사람 오랜만에 같이 시간 보내는데 이번 기회 놓치면 안되지. 차도 다 마셨으니까 얼른 올라가서 편하게 쉬어라.”민씨 어르신의 말에 연아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더는 안되니 어르신이 재빨리 일어나 지팡이로 두 사람을 쫓으려 했다. 그러자 마치 화난 듯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