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돈다발이었다. 대충 봐도 50만 원은 넘을 것 같았다.나는 빗자루를 꼭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이 깊숙이 파고들었다.‘참 관대하기도 하지. 밀크티 한 잔에 이 정도 돈이라니.’그리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가장 위쪽 몇 장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이건 내가 어젯밤, 출근하기 전에 그에게 남긴 돈이었다. 고깃집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온 날이었다.급여를 받기 직전, 나는 깨진 술병에 손을 베였다. 피가 흘렀고, 강태섭에게 돈을 건넬 때도 피가 제대로 멎지 않았다.하지만 강태섭이 걱정할까 봐 대충 밴드로 감고 장갑을 낀 채 돌아왔다.그는 내 손의 상처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생일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는 자기 생활비가 부족하다며 나에게 넌지시 운을 뗐을 뿐이다.그리고 지금, 그 돈은 강태섭 ‘여자친구’의 밀크티값이 되었다.‘그래, 이 여자가 여자친구면, 나는 뭐지?’‘아, 맞다. 난 그저 장난감이었지.’내 가슴이 뭉툭한 칼에 도려내는 듯 아팠다.그러면서도 나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밖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길을 나섰다. 아니, 있어도 소용없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 우산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젖은 몸으로 밀크티를 사서 다시 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완전히 초라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그리고 젖은 손으로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쉰 목소리가 힘겹게 나왔다.“주문하신 밀크티입니다.”강태섭이 순간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확신은 없는 듯했다.강태섭의 ‘첫사랑’ 유하늘은 젖어 있는 컵을 흘깃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좀 식었네. 그리고 빗물에 젖어서 더러워졌어. 안 마실래.”강태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안 마시면 되지.”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내게 시선 한 번 던지곤 손을 휘저었다.“나가봐.”나는 마지막으로 강태섭을 바라보며 조용히 돌아섰다.
주연경이 가볍게 비웃었다. 목소리에는 조소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고작 그런 놈한테 휘둘려? 그렇게 오래 바깥에서 굴러다니더니 결국 저급한 인간들이랑 어울려서 이용당하는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 사람은 애초부터 강태섭과 내 관계를 알고 있었어?’하지만, 내가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했다. ‘같은 상류층이라면 정보가 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겠지.’‘그렇다면 주연경은 그동안 지켜보면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야?’남자의 차갑기만 한 눈을 바라보자, 나는 조금 전보다 더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 보는 걸 즐겼겠지.’‘어쩌면 주연경은 나도 우리 엄마처럼 돈 많은 남자에게 기대려고 발버둥 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설마 내가 강태섭의 정체를 알고 일부러 들러붙었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주연경을 비난할 자격조차 없었다.왜냐하면, 애초에 주연경은 내 인생을 간섭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제가 바보 같은 짓을 하든 말든, 그건 제 일이죠.”나는 차갑게 내뱉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주 대표님이 날 보러 오신 이유가 단순히 비웃으려고 온 거라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연경이 성큼 다가왔다.나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는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네 꼴을 보고 웃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남자의 저음이 가까이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그냥, 네가 이렇게 처참한 꼴로 사는 거 보니까 오빠로서 창피할 뿐이야. 이렇게 초라하게 사느니, 차라리 집으로 돌아와. 최소한 이렇게 조롱당하진 않을 거 아냐.”나는 순간적으로 남자의 손목을 뿌리쳤다. 그리고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제가 어떻게 살든, 주 대표님이랑은 상관없어요.”주연경은 비어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눈빛을 더욱 차갑게 가라앉혔다.“아직도 그렇게 버틸 거야?”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 분, 대체 뭐 하는 거예요?”택시 기사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태섭을 바라봤다.“기사님, 우린 안 갈 겁니다.”강태섭은 기사에게 손짓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현금 두 장을 꺼내 건넸다. 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를 몰고 떠났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태섭 도련님, 이 게임은 이미 끝났어.”“지윤아, 나...”강태섭의 눈가가 붉어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거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를 기만해서는 안 됐는데, 그냥... 잠깐 재미있을 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줄 수 있어?”나는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내 말, 다 진심이야.”강태섭은 내가 여전히 화가 난 줄 알고, 더욱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제발 가지 마. 내일 너랑 쇼핑 갈게. 네가 사고 싶어 했던 가방 있잖아. 그거 사줄게. 미안하니까.”나는 그때의 기억이 스쳤다. 그날, 나는 백화점에서 가격표를 보고 포기했던 가방이 떠올랐다. 정말 갖고 싶었지만, 강태섭을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해서 단념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가방이 갖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강태섭은 그때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었던 거네. 하지만 날 위해 애쓰고 싶진 않았던 거야.’그 순간, 강태섭이 정말로 후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용서받고 싶다는 말, 진심이야?”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강태섭은 내가 마음을 돌린 줄 알고,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당연하지, 지윤아. 우리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어? 이런 작은 일 때문에 헤어지는 건 너무 아쉽잖아.”‘작은 일? 날 몇 년 동안 기만한 게 작은 일이라니.’나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안 헤어질 수도 있어.”나는 팔짱을 끼고 강태섭을 똑바로 바라봤다.“하지만 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유하늘이랑 완전히 정리해. 그러면 다시 생
“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데!”나는 빗속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퍼붓는 빗줄기가 온몸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울고, 마음껏 분노하고 싶었다.‘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새로운 서지윤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한참 울고 나니,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눈물을 훔치고, 나는 캐리어를 다시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제 어디든 가서 몸을 말리고, 쉴 곳을 찾아야 했다.그때, 돌아선 내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낯익은 실루엣, 차가운 눈빛. 주연경이었다.그는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나와 불과 몇 걸음 거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런 가장 처참한 모습을 주연경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캐리어를 끌며 그를 지나쳤다.‘이 사람도 알아서 못 본 척하겠지.’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내가 지나가려는 순간,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정말 한심하군.”남자의 목소리에는 씹어 삼킬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 망가져야 했어?”나는 피식 웃으며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창피하다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지 그랬어요?”하지만 주연경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에 나를 당겨 우산 안으로 끌어들였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중심을 잃고, 거의 남자의 품에 안길 뻔했다.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려 했지만, 주연경의 손이 내 팔을 단단히 잡았다.“가만히 있어.”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날카로운 경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너, 지금 열나는 거 모르겠어?”그는 내 이마를 짚어 보았다. 남자의 손끝이 차가웠지만, 내 뺨에 스치는 그 감촉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이렇게 뜨겁다고?”주연경이 인상을 찌푸렸다.“이 정도면 거의 불덩이인데, 강씨 집안 그 자식은 네가 이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나 보지? 그런 놈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받을 필요가 있어?”주
강태섭은 예전에도 단호하게 말했었다.“쇼핑 가면 돈 쓰게 되잖아. 그냥 가지 말자. 아껴야지. 나중에 새 운동화 사고 싶어.”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씁쓸하고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나를 발견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내 쪽으로 걸어왔다.나는 강태섭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필 여기서 마주칠 게 뭐람!’그러고는 곧장 시계 수리점으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이 시계 좀 수리해주세요.”가게 주인은 시계를 받아들고 한참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공손한 태도로 다가와서 이야기했다.“이 모델은 꽤 오래된 한정판이라 부품을 따로 주문해야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예상보다 복잡한 수리 과정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직원이 차와 간단한 다과를 차려 조심스럽게 가져왔다.“손님, 편하게 드세요.”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 강태섭이 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서지윤.”그는 눈에 띄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심하게 한 번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강태섭은 순간 당황한 듯하다가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이 가게, VIP들만 받는 곳인데,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나는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내가 여기 있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강태섭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 직원들의 시선이 이상해지자, 그는 당황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네가 여기 있는 건, 그 시계 주인 때문이지?”나는 가볍게 눈썹을 올렸다. 제법 눈치는 빠른 모양이다.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확신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남자 누구야? 서지윤, 너는 상류층 남자들에게 그렇게 쉽게 속냐? 정신 차려. 현실 좀 똑바로 봐.”나는 더 이상 그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인간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직원이 분위기를 살피고 다가왔다.“손님, 이분이 손님의 지인인가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노은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노은서가 화가 나서 소리쳤던 말이 딱 들어맞았다.“강태섭, 그놈은 쓰레기야. 나중에 너 틀림없이 후회할 거야.”나는 노은서의 그 말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줄 몰랐다.노은서에게 딱히 악의가 없었던 걸 확인한 나는,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은서야, 네 말이 맞았어. 강태섭, 진짜 최악이었어.”그동안 강태섭에게 바쳤던 시간과 노력이 하나둘 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노은서는 잠시 놀란 듯 나를 바라보더니,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무슨 일이야?”그녀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 따뜻한 시선에 마음이 놓였는지, 나는 그동안 쌓아둔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렸다.나는 흐느끼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노은서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다 들은 노은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강태섭, 진짜 쓰레기네.”그녀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불타오르는 듯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일어나, 당장 가서 따지자.”나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은서야, 나 이제 그냥 강태섭이랑 완전히 끝내고 싶어.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아.”노은서는 아픈 손을 쓰다듬듯 나를 안아 주었다.“하지만 넌 이렇게 많은 걸 참고 상처받았잖아.”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솔직히, 서러움과 분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내가 아무리 분노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강태섭과의 시간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했지만, 그에게는 나와의 연애가 그저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다.나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노은서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됐어, 이제 울지 마. 우리 지윤이만큼 예쁜 여자가 어디 있다고! 솔직히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좋
강태섭의 말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주연경이었다.오늘은 드물게 캐주얼한 옷차림이었지만, 이 남자의 기운은 거기에 가려지지 않았다. 상위 포식자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이 주변의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주연경은 천천히 걸어와 내 옆에 섰다. 그리고 강태섭이 들고 있는 목걸이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H시 강씨 가문... 이렇게까지 궁색해진 건가?”가볍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강태섭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그는 늘 학교에서 자신의 가정 환경을 철저히 숨겼다. 명품을 걸치면서도 자신이 대단한 재벌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없었고, 동정심을 유도하며 착한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하지만 주연경의 말에, H시 출신의 몇몇 학생들이 눈을 크게 떴다.“강씨 가문? 전자산업 쪽 그 강씨 가문?”강태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일반 학생이라면 티파니 목걸이가 충분히 값비싼 선물이겠지만, 강씨 가문의 황태자가 내밀기에는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액수였다.“서지윤.”강태섭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그... 그 남자가 네 스폰서야? 네가 나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게, 그 사람이 있어서였어?”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강태섭, 네 더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마. 네가 그렇게 산다고, 모두가 너처럼 사는 건 아니니까.”“아니야.”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넌 분명히 이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린 거야. 대체 누구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태섭이 주연경을 모른다고?’하지만 곧 이해가 갔다.주연경은 성인이 되자마자 회사를 맡아 경영했고, 강태섭의 아버지와 같은 급이었다. 애초에 강태섭처럼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놈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아까 내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군.”주연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자기소개부터 하지. 나는 서지윤의 오빠이자, SP그룹의 대표다.”“SP그룹?”주변 학생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 수업 들어가야 해요.”나는 눈살을 찌푸렸다.학교 정문 앞에는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 앞뒤로 번쩍이는 번호판이 이 차가 얼마나 고가의 물건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이 차는 분명 주연경의 것이었다.그는 내 손목을 잡아차 차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멈춰서 나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너 예전에 강씨 가문의 그놈을 위해서는 매일 수업 빼먹고 아르바이트 뛰더니, 내가 한 번 부른 것에는 갑자기 바빠지고 학업이 중요해진 거야?”남자의 직설적인 말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차에 타.”주연경은 단호하게 차 문을 열고 내 머리를 살짝 눌러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나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어이.”그는 운전석에 앉아 내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설마 그놈이 네게 목걸이 바치던 거 끊어놓은 거 때문에 삐친 거야?”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야만 이 남자 때문에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왜... 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나는 주연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진 순간, 남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주씨 가문의 딸이라는 게... 네가 쓰레기 같은 놈한테 휘둘리는 것보다 더 창피한 일이야?”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오래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그냥 저는 제 주제를 알 뿐이에요.”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주씨 가문이 저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 저도 주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나는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아직도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내 어머니 기혜림 여사가 주씨 가문의 새 안주인이 되었을 때, 주연경이 얼마나 나를 밀어내고 배척했는지. 그리고 저택의 고용인들이 나를 얼마나 깔보았는지.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오랜 침묵 끝에, 주연경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겨우 강씨 가문 그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주연경이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일 줄은. 그래서 잠깐 당황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주연경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담담하고, 감정이 없었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아마 내가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 자기한테 불필요한 골칫거리가 될까 봐 그러는 거겠지.’ ‘어쨌든 주연경 같은 이런 대기업 대표이사니까 시간이 돈일 테고, 내 사소한 일들까지 계속 신경 쓸 여유는 없으니까.’“아니에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출퇴근 길 조심하면 돼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순간, 주연경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 아주 잠깐. 내가 제대로 확인할 틈도 없이, 그는 곧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그럼 주 대표님은 왜 본가로 돌아가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돌아가기 싫어.” 내가 거절하자, 주연경의 표정은 한층 더 불쾌해졌다. 솔직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주연경 기분이 나쁘면, 전체 경제 규모의 절반이 휘청이는 수준의 거물인데, 그런 사람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거절당했으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따라갈 이유도 없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지!’ “주 대표님이 굳이 밖에서 혼자 사는 이유, 저도 알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본가가 주 대표님의 직장과 더 가깝잖아요. 그런데도 그곳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그곳에도 주 대표님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 말에, 주연경은 대놓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난 해야 해.’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주 회장님만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주연경이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주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대립각을 세우면, 결국 회장님만 힘들어질 뿐이에요.”
나는 웃으며 노은서의 외투를 집어 들고 돌려주었다. 순간 내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딩딩딩-나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확인했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주연경이었다. “누군데?” 노은서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목을 길게 빼더니, 화면을 보자마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노은서와 눈을 마주쳤다. “받아야지.” 노은서는 내 팔을 툭 치며 재촉했다. “얼른 받아.” “그냥 안 받을까 봐.” 나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 무슨 소리야?” 노은서가 버럭 소리쳤다. “주연경이 이번에 얼마나 도와줬는데! 걔 없었으면 너 지금 여기 앉아 있기는커녕,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르지!” 그 말에 나는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그래, 주연경이 없었으면, 이번 일 해결 못 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자,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야... 나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상대방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 옆에서는 손짓, 발짓, 입 모양까지 하면서 온몸으로 말하라고 재촉하는 노은서가 있었다. 결국 나는 억지로 입을 뗐다. “여보세요.” [너 벙어리 된 줄 알았다.]주연경의 직설적인 말투가 들려왔다. 나는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노은서를 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 좀 따로 이야기할까?]여전히 담담하면서도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나 지금 네 학교 앞이야.] 그 한마디가, 천둥처럼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라고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기 좀 하자고.] 주연경은 여전히 차분했다. 나는 순간 거절하려고 했다. “저...” 하지만, 망설이는 동안 머릿속에 주 회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나는 결국 말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알겠어요. 금방 나갈게요.” ...밖으
노은서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야, 카페 알바는 이제 그만두자. 언니가 돈 벌어서 널 먹여 살릴게. 뭐하러 일하면서 이런 꼴을 당해?” 나는 순간 머릿속에 주씨 가문 본가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내가 본 현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다짐했던 것.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우리 엄마를 데리고 주씨 가문을 떠날 거야.’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페 사장님은 되게 이해심 많고, 시급도 높고, 시간도 자유롭잖아. 은서야, 나 진짜 이 알바 필요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노은서는 설득을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야 뭐 더 할 말 없네. 그럼 내일 하루는 내가 대신 일할게. 넌 좀 쉬어.” 나는 감동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은서야...” 그러더니 노은서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고마워. 다음 월급 들어오면, 네가 먹고 싶은 거 제일 비싼 걸로 사 줄게!” “됐거든?” 노은서는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야, 너 생각해 봐. 지규현, 내일 출근할까?”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 반, 재미 반이 가득했다. 나도 그 질문에 살짝 고민하다가, 노은서와 눈을 맞췄다. “우리, 셋 셀 때 동시에 대답하자.” 노은서의 눈빛이 장난기 가득해졌다. “하나, 둘, 셋.” “온다.” “온다.” 우리는 동시에 같은 대답을 내뱉었고, 순간 서로를 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넌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노은서를 바라보며 핸드폰을 살짝 흔들었다. “난 그 녀석의 약점을 쥐고 있잖아?” “에이!” 노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눈을 굴렸다. “네가 ‘배후를 밝히면 더는 추궁 안 하겠다’고 했으니까 걔는 더 이상 겁낼 필요 없잖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지금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몸을 겨우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노은서가 보였다. 내가 풍기는 찌들어버린 불운한 기운이 너무나 강렬했던 걸까? 노은서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뭐야?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는 침대에 털썩 누우며 눈을 감았다. ‘그냥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 조용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야, 일어나!” 노은서는 성큼 다가오더니 내 팔을 붙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거짓말하지 마. 너한테서 풍기는 이 원한의 기운, 웬만한 귀신도 도로 되살릴 수 있을 정돈데?” 나는 친구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결국 삶의 끈을 놓는 것을 포기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나도 속에 쌓인 게 많았다. 화, 분노, 모욕감. 그 모든 걸 쏟아낼 창구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노은서가 내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노은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뭐야, 이 쓰레기들?! 지윤아, 넌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어?! 이번에도 주연경이 없었으면...!” 그녀는 말하다가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나는 노은서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됐어, 은서야. 나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하지만 내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노은서는 오히려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흑, 으흑...!” 나는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진짜... 이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나 걱정해 주는 친구 하나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
“그래서, 누가 시킨 건데?” 나는 팔짱을 끼고 지규현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덧붙였다. “말했지? 원한이 있으면 제대로 된 상대를 찾아야지. 난 네 사과 따윈 필요 없어.” 지규현은 이를 악물더니, 결국 유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야. 이 여자가 나한테 돈을 주고 사진을 조작하라고 시켰어.” “뭐...?” 유하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무슨 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그녀는 급히 부정하며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지윤아,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 둘이 짜고 나를 모함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뭐? 이제 내가 모함했다고?’ 나는 순간 황당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지규현을 바라봤다.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지규현.” 나는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말했다. “지금 유하늘 씨는 내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하는데... 결국 그 말은 네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뜻이겠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가볍게 흔들었다. “네가 증거를 못 내면,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거 같아?” 지규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퇴로는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오히려 분노를 품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하늘,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그는 비꼬듯 웃으며 덧붙였다. “미안한데, 전 그렇게까지 호구는 아니야. 죄를 뒤집어쓸 생각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들이밀었다. “여기, 이게 내가 카페 출근하기 전 받은 이체 내역이고. 유하늘이 돈을 보냈다는 증거지.” 나는 지규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려 했
유하늘은 급하게 뛰어온 게 분명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였으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른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유하늘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나 봐?’ 유하늘이 등장한 이후, 지규현의 시선이 슬쩍슬쩍 그녀에게로 향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지규현, 역시, 유하늘이 사주해서 움직였군.’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지규현을 쳐다봤다. 지규현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눈을 피했다. ‘지규현, 그런 시선 회피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태섭아, 지윤이에게 남자친구가 있잖아. 우리도 축하해 줘야지.” 유하늘은 강태섭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런 유하늘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말도 안 돼.” 강태섭은 이를 악물며 지규현을 노려봤다. “네가 무슨 수로 지윤이 남자친구야?” “왜 난 안 돼?” 지규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네 여자친구는 예쁘고 품위 있어 보이는데, 넌 왜 지윤이가 나 같은 사람을 못 만나게 막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자기를 사주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 떠는 건 알겠는데, 왜 굳이 날 깎아내리는 거야?’ ‘지윤이 같은 사람? 내가 이런 놈한테나 어울릴 법한 사람이란 뜻인가?’ 나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규현이 다시 한번 내 어깨를 감싸려 하자, 나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했다. 동시에 손을 들어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그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지규현도 놀라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네가... 감히 나를 때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맞은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때릴 거면 미리 너에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해?” 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나, 우리 사진을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도 있어.” 지규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핸드폰을 살짝
‘뭐야, 대체? 분명 우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로 연애했는데, 강태섭은 왜 항상 자기 마음대로 날 판단하고 시험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커피숍 안을 힐끗 바라봤다. 지규현은 눈썹을 찌푸린 채 밖을 살피면서도,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빠르게 입력하고 있었다. ‘걸려들었네.’ “결과적으로 보면, 넌 그런 속물은 아니었어.” 강태섭은 내가 되묻자, 내가 마음을 돌린 줄 알고 금방이라도 얼굴에 꽃이라도 피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윤아, 너만 좋다면,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하자.” 그는 조심스레 반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완벽하게 컷팅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강태섭을 바라보면서도 시선을 은근슬쩍 커피숍 안에 있는 지규현에게 두었다. 그 순간, 강태섭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윤아, 나랑 결혼해 줘!” 그리고 동시에, 지규현이 마침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떤 신호를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결혼?”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랑 결혼하면, 유하늘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강태섭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널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네 계획은, 결혼은 나랑 하고, 연애는 유하늘과 계속하는 거야?”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태섭에게 집중됐다. “그게...” 강태섭은 주위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강태섭.”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지금이 고대사회도 아니고,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꿈꾸는 거야? 넌 완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야.” 나는 강태섭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불렀다. “지윤아!!”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경호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그 깡패들은 새 떼처럼 흩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다섯 모두 한 놈도 빠짐없이 주연경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경찰서로 넘겨.” 주연경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주연경은 내 팔을 잡고 차로 이끌어 조수석에 태웠다. “놀랐지?” 주연경은 드물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내 얼굴에 묻은 얼룩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찔한 위기까지 겹쳤다고 생각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흥!” 내가 진정한 걸 확인한 듯, 조금 전까지 다정했던 남자의 모습은 싹 사라졌다. “내가 왜 여기 있냐고?” 주연경은 비웃듯이 혀를 찼다. “내가 안 왔으면, 너 오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아?” “그건...”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대체 왜 그 남자를 미행한 거야?” 주연경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꾸짖음이 섞여 있었다. “설마 새 남자친구라도 생겼어? 또 부잣집 도련님한테 속을까 봐 직접 조사라도 해보려고?” “그게 아니라...” 나는 괜히 주눅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결과적으로는 도둑 소굴에 발을 들여놓고도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는 거지?” 주연경은 냉소적인 어투로 덧붙였다. “그냥... 동료일 뿐이에요.”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변명했다. 잠시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서지윤.” 주연경은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 요청할 생각을 안 하지?”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말이죠?” 주연경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집어 들고 맸다. “내 이름은 서지윤이야.”나는 일부러 무심한 듯 말하면서도 지규현의 반응을 살폈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잠깐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나는 지규현.”하루 종일 일하면서 느낀 것은, 지규현이 나에게 유독 친절하다는 것이었다.친절의 수준이 보통 이상이었다.“지윤아.” 소하민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지규현 걔도 너한테 빠져든 거 아니야?”나는 지규현의 등을 슬쩍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너는 진짜 그 예쁜 얼굴이 문제야.”소하민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카페에 왔다 갔다 하는 알바생들, 대부분 너 때문에 남아있는 거 몰라?”“농담 그만하고 진지하게 좀 굴어.”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리 카페는 건전한 장소고, 손님과 직원이 머물러 있는 건 네가 운영을 잘해서 그런 거야.”“알겠어, 알겠어.” 소하민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아무튼 아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나는 다시 지규현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히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치 이성에 대한 호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며 나에게 접근했다.그리고 매일 아침 간식, 오후에는 커피와 디저트, 그리고 퇴근 후에는 저녁까지 나한테 함께 하자고 계속 권했다.기숙사에 돌아오면, 노은서는 매번 나를 기다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오늘은 뭐 했어? 지규현이 또 뭐래?”그러다 한 번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쓰러졌다. “야, 서지윤. 저 지규현, 꼭 옛날 첩보물에 나오는 스파이 같지 않아? 근데 너 절대 걔랑 밥 먹으러 가면 안 돼. 그리고 그가 주는 음식이나 음료도 절대 먹지 마!”“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사람, 대체 뭘 노리는 걸까? 영 찜찜해.”“그러니까 말이야. 빨리 방법을 찾아서 제압하는 게 좋겠어.”노은서는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더니 몇 장을 넘겼다. “지규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