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노은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노은서가 화가 나서 소리쳤던 말이 딱 들어맞았다.“강태섭, 그놈은 쓰레기야. 나중에 너 틀림없이 후회할 거야.”나는 노은서의 그 말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줄 몰랐다.노은서에게 딱히 악의가 없었던 걸 확인한 나는,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은서야, 네 말이 맞았어. 강태섭, 진짜 최악이었어.”그동안 강태섭에게 바쳤던 시간과 노력이 하나둘 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노은서는 잠시 놀란 듯 나를 바라보더니,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무슨 일이야?”그녀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 따뜻한 시선에 마음이 놓였는지, 나는 그동안 쌓아둔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렸다.나는 흐느끼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노은서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다 들은 노은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강태섭, 진짜 쓰레기네.”그녀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불타오르는 듯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일어나, 당장 가서 따지자.”나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은서야, 나 이제 그냥 강태섭이랑 완전히 끝내고 싶어.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아.”노은서는 아픈 손을 쓰다듬듯 나를 안아 주었다.“하지만 넌 이렇게 많은 걸 참고 상처받았잖아.”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솔직히, 서러움과 분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내가 아무리 분노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강태섭과의 시간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했지만, 그에게는 나와의 연애가 그저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다.나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노은서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됐어, 이제 울지 마. 우리 지윤이만큼 예쁜 여자가 어디 있다고! 솔직히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좋
강태섭의 말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주연경이었다.오늘은 드물게 캐주얼한 옷차림이었지만, 이 남자의 기운은 거기에 가려지지 않았다. 상위 포식자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이 주변의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주연경은 천천히 걸어와 내 옆에 섰다. 그리고 강태섭이 들고 있는 목걸이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H시 강씨 가문... 이렇게까지 궁색해진 건가?”가볍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강태섭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그는 늘 학교에서 자신의 가정 환경을 철저히 숨겼다. 명품을 걸치면서도 자신이 대단한 재벌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없었고, 동정심을 유도하며 착한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하지만 주연경의 말에, H시 출신의 몇몇 학생들이 눈을 크게 떴다.“강씨 가문? 전자산업 쪽 그 강씨 가문?”강태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일반 학생이라면 티파니 목걸이가 충분히 값비싼 선물이겠지만, 강씨 가문의 황태자가 내밀기에는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액수였다.“서지윤.”강태섭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그... 그 남자가 네 스폰서야? 네가 나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게, 그 사람이 있어서였어?”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강태섭, 네 더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마. 네가 그렇게 산다고, 모두가 너처럼 사는 건 아니니까.”“아니야.”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넌 분명히 이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린 거야. 대체 누구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태섭이 주연경을 모른다고?’하지만 곧 이해가 갔다.주연경은 성인이 되자마자 회사를 맡아 경영했고, 강태섭의 아버지와 같은 급이었다. 애초에 강태섭처럼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놈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아까 내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군.”주연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자기소개부터 하지. 나는 서지윤의 오빠이자, SP그룹의 대표다.”“SP그룹?”주변 학생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 수업 들어가야 해요.”나는 눈살을 찌푸렸다.학교 정문 앞에는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 앞뒤로 번쩍이는 번호판이 이 차가 얼마나 고가의 물건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이 차는 분명 주연경의 것이었다.그는 내 손목을 잡아차 차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멈춰서 나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너 예전에 강씨 가문의 그놈을 위해서는 매일 수업 빼먹고 아르바이트 뛰더니, 내가 한 번 부른 것에는 갑자기 바빠지고 학업이 중요해진 거야?”남자의 직설적인 말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차에 타.”주연경은 단호하게 차 문을 열고 내 머리를 살짝 눌러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나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어이.”그는 운전석에 앉아 내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설마 그놈이 네게 목걸이 바치던 거 끊어놓은 거 때문에 삐친 거야?”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야만 이 남자 때문에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왜... 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나는 주연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진 순간, 남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주씨 가문의 딸이라는 게... 네가 쓰레기 같은 놈한테 휘둘리는 것보다 더 창피한 일이야?”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오래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그냥 저는 제 주제를 알 뿐이에요.”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주씨 가문이 저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 저도 주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나는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아직도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내 어머니 기혜림 여사가 주씨 가문의 새 안주인이 되었을 때, 주연경이 얼마나 나를 밀어내고 배척했는지. 그리고 저택의 고용인들이 나를 얼마나 깔보았는지.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오랜 침묵 끝에, 주연경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겨우 강씨 가문 그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마침 신호가 걸리자, 주연경이 차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본가에 가는 게 아니라, 본가로 돌아가는 거야. 네가 가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나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야.”그가 한번 결심한 일은 번복되는 법이 없었다. 이 남자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차는 주씨 가문의 본가 앞에 멈춰 섰다. 하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한 발짝이라도 들이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예전에 여기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거 제일 좋아했지.”주연경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나도 자연스럽게 앞쪽의 푸른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주연경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법률상 아버지는 이런 것들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잔디밭도 항상 완벽하게 관리되었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더욱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차창 너머로 어린 시절의 나와 주연경이 보이는 듯했다.말썽꾸러기 소년 주연경. 그리고 그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소녀였던 나.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하지만 이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요.”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그때 나는 주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었다. 단지 가정부 기혜림의 딸이었다.“도련님, 드디어 오셨군요.”주씨 가문 본가의 집사, 정철수였다. 나에겐 여전히 익숙한 얼굴이었다.정철수는 차창 너머로 나를 보더니, 순간 표정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가씨도 오셨군요.”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철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주연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회장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너 먼저 올라가.”주연경은 차 키를 뽑아 들고 문을 열었다.“네 방은 예전 그대로야. 네 어머니 보고 나면 내가 데려다줄게.”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주연경은 정철수와 함께 성큼성큼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안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인사 소리를 들었다.오랜만에 들리는, 그러나 여전히 익숙한 목소리들이
기 여사의 눈가에 점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그때 그 일... 내 잘못도 있었어. 그래서 주씨 가문에 남기로 한 거야. 내 잘못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엄마.”나는 목소리를 높였다.“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 집안에서 엄마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긴 해요?”“회장님께서 나한테 잘해 주시고, 숙정 언니도 잘 챙겨줘.”그러나 기 여사의 눈물이 끝내 흘러내렸다.“지윤아, 너랑... 연경이는 아직도 예전 같니?”나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 여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 여사가 이곳에서 편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나랑 주연경은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적 없어요.”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엄마, 몸 잘 챙겨요.”나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지윤아.”기 여사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시간 나면... 가끔이라도 들르렴. 그래도, 우리 가족이잖아.”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주연경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직 서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주연경을 기다리기 위해 차로 향하려 했다.어릴 적, 나는 주씨 가문의 본가를 좋아했다. 식탁 위에는 늘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무엇보다 주연경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이곳이 싫었다.뒤돌아 걸음을 떼려는 순간, 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윤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주지산이었다. 이분은 주연경의 아버지이자, 나의 법률상 새아버지였다.어릴 적, 주씨 가문 본가에 처음 왔을 때 주지산은 나에게 꽤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일이 변했다. 주 회장은 기 여사를 냉대했고, 당연히 나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네 어머니 보러 온 거니?”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나는 마찬가지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
주 회장의 말을 듣고 보니, 주연경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인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어릴 때부터 주연경은 여러 번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 같은 사람이 자기 가족이 되는 게 싫다고 했다.나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회장님, 오해하신 것 같아요. 주 대표님은... 저와 그렇게 가깝지 않아요. 제가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그러나 주 회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도 한 번만 부탁하마. 네가 연경이에게 말해 본다고 해서 꼭 집에 돌아오기를 기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네가 한 번 시도라도 해 줬으면 한다.”나는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순간 멈칫했다.내 기억 속 항상 완벽하고 냉철하던 주 회장은,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철저한 자기 관리로 날카롭게 유지되던 모습이... 이제는 한층 나이 들고 지쳐 보였다.주 회장의 두 눈은 흐려져 있었고, 목소리에는 애절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주 회장은 더 이상 이전의 냉정한 사업가가 아니라, 단지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한 아버지일 뿐이었다.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결국 작게 대답했다.“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야기는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장담은 못 합니다.”주 회장의 눈빛이 한층 밝아졌다.나는 그 기회를 틈타, 기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회장님, 제 어머니도 이제 연세가 있으세요. 이 집안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신경 좀 써 주세요. 만약... 어머니가 힘들어하신다면, 제가 모시고 나가 살 생각도 있습니다.”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주 회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지윤아, 그때 일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네 어머니에 대한 대우는 변함없어. 그 사람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것뿐이야.”나는 뜻밖의 대답에 약간 놀랐다.“하지만 네가 그렇게 걱정한다면, 앞으로 좀 더 신경 쓰도록 하마.”주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주연경은 미간을 더 깊게 찌푸리며, 어딘가 서운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너는 왜 안 들어오는데? 네 어머니도 네 걱정 많이 하고 계셔.”그 말에 나는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그러나 대답은 망설일 것도 없었다.“제가 안 가는 이유는 간단해요. 전 ‘주’ 씨도 아니고, 거긴 제 집이 아니니까...”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학교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었다. 그 순간, 주연경이 나를 불러 세웠다.“네가 성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너도 성을 바꿔서 주지윤 하면 되잖아.”남자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고, 농담도 아니었다.나는 주연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이 사람, 점점 더 한심해지네.’‘이건 성의 문제가 아니냐.’‘왜 언제나 문제의 표면만 보고 판단하는 거야?’ ‘그런 태도로 회사를 운영하다간 금방 망하겠지.’주연경을 속으로 비웃으며 나는 숙소로 향했다.“서지윤! 너 드디어 왔구나!”기숙사 문을 열자마자, 노은서가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왜 그래, 은서?”나는 외투를 벗어 침대 위에 던지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닌 탓에, 말 한마디도 하기 싫었다.“일어나.”노은서는 내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억지로 나를 침대에서 끌어올렸다.“일어나서 똑바로 설명해!”“뭐야, 왜 이래? 뭘 설명하라는 거야?”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주씨 가문의 딸이라고?”노은서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나는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침에 이미 주연경이 내 정체를 까발려버렸고, 이제는 더 이상 숨길 방법도 없었다.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 깨달았다. 은서는 언제나 내 편이라는 것을.내 유일한 친구에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우리 엄마가... 주연경의 새엄마야.”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
주연경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주연경... 요즘 정말 이상해.’ 강태섭과 완전히 끝낸 뒤, 주연경이 뜬금없이 나타나 내 상황을 비웃었고, 시계를 수리하라고 나를 골탕 먹었으며,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주씨 가문의 딸이라고 선언했다.더 이상한 건 어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했던 말이었다.주연경을 떠올릴수록 나는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노은서는 여전히 그 이유를 궁금해하며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가장 타당한 추론을 내놓았다.“그냥... 어디다 머리를 세게 박은 것 같아.”“엥?”노은서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요즘 주연경 뇌가 살짝 맛이 갔어. 아마 곧 정신 차리겠지.”주연경은 원래 나를 싫어했으니, 최근의 기묘한 행동들은 단순 착오일 것이다.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주연경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노은서가 나를 깨웠다.“왜 그래... 아직 수업 시작도 안 했잖아.”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공주님, 용서해 주세요.”노은서는 침대에서 작은 상자를 집어 들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네가 나간 후에, 강태섭이 이걸 사람 시켜 보냈어. 너에게 보내는 선물이래.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얘기하다가 까먹었어.”나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그리고 뚜껑을 열어보니, 꽤 비싼 화장품 세트가 들어 있었다.“지윤아, 이제 어쩔 거야?”노은서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해?”“강태섭은 절대 안 돼. 널 가지고 놀았잖아. 아무리 비싼 걸 줘도 용서하면 안 돼.”나는 상자 속 물건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뚜껑을 닫았다.“수업 가자.”강태섭의 얕은 수작 따위는 나를 움직일 수 없었다.수업이 끝난 뒤, 나는 노은서와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학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하지만 강태섭이라는 쓰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주연경이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일 줄은. 그래서 잠깐 당황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주연경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담담하고, 감정이 없었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아마 내가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 자기한테 불필요한 골칫거리가 될까 봐 그러는 거겠지.’ ‘어쨌든 주연경 같은 이런 대기업 대표이사니까 시간이 돈일 테고, 내 사소한 일들까지 계속 신경 쓸 여유는 없으니까.’“아니에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출퇴근 길 조심하면 돼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순간, 주연경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 아주 잠깐. 내가 제대로 확인할 틈도 없이, 그는 곧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그럼 주 대표님은 왜 본가로 돌아가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돌아가기 싫어.” 내가 거절하자, 주연경의 표정은 한층 더 불쾌해졌다. 솔직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주연경 기분이 나쁘면, 전체 경제 규모의 절반이 휘청이는 수준의 거물인데, 그런 사람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거절당했으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따라갈 이유도 없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지!’ “주 대표님이 굳이 밖에서 혼자 사는 이유, 저도 알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본가가 주 대표님의 직장과 더 가깝잖아요. 그런데도 그곳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그곳에도 주 대표님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 말에, 주연경은 대놓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난 해야 해.’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주 회장님만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주연경이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주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대립각을 세우면, 결국 회장님만 힘들어질 뿐이에요.”
나는 웃으며 노은서의 외투를 집어 들고 돌려주었다. 순간 내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딩딩딩-나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확인했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주연경이었다. “누군데?” 노은서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목을 길게 빼더니, 화면을 보자마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노은서와 눈을 마주쳤다. “받아야지.” 노은서는 내 팔을 툭 치며 재촉했다. “얼른 받아.” “그냥 안 받을까 봐.” 나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 무슨 소리야?” 노은서가 버럭 소리쳤다. “주연경이 이번에 얼마나 도와줬는데! 걔 없었으면 너 지금 여기 앉아 있기는커녕,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르지!” 그 말에 나는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그래, 주연경이 없었으면, 이번 일 해결 못 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자,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야... 나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상대방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 옆에서는 손짓, 발짓, 입 모양까지 하면서 온몸으로 말하라고 재촉하는 노은서가 있었다. 결국 나는 억지로 입을 뗐다. “여보세요.” [너 벙어리 된 줄 알았다.]주연경의 직설적인 말투가 들려왔다. 나는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노은서를 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 좀 따로 이야기할까?]여전히 담담하면서도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나 지금 네 학교 앞이야.] 그 한마디가, 천둥처럼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라고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기 좀 하자고.] 주연경은 여전히 차분했다. 나는 순간 거절하려고 했다. “저...” 하지만, 망설이는 동안 머릿속에 주 회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나는 결국 말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알겠어요. 금방 나갈게요.” ...밖으
노은서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야, 카페 알바는 이제 그만두자. 언니가 돈 벌어서 널 먹여 살릴게. 뭐하러 일하면서 이런 꼴을 당해?” 나는 순간 머릿속에 주씨 가문 본가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내가 본 현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다짐했던 것.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우리 엄마를 데리고 주씨 가문을 떠날 거야.’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페 사장님은 되게 이해심 많고, 시급도 높고, 시간도 자유롭잖아. 은서야, 나 진짜 이 알바 필요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노은서는 설득을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야 뭐 더 할 말 없네. 그럼 내일 하루는 내가 대신 일할게. 넌 좀 쉬어.” 나는 감동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은서야...” 그러더니 노은서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고마워. 다음 월급 들어오면, 네가 먹고 싶은 거 제일 비싼 걸로 사 줄게!” “됐거든?” 노은서는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야, 너 생각해 봐. 지규현, 내일 출근할까?”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 반, 재미 반이 가득했다. 나도 그 질문에 살짝 고민하다가, 노은서와 눈을 맞췄다. “우리, 셋 셀 때 동시에 대답하자.” 노은서의 눈빛이 장난기 가득해졌다. “하나, 둘, 셋.” “온다.” “온다.” 우리는 동시에 같은 대답을 내뱉었고, 순간 서로를 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넌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노은서를 바라보며 핸드폰을 살짝 흔들었다. “난 그 녀석의 약점을 쥐고 있잖아?” “에이!” 노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눈을 굴렸다. “네가 ‘배후를 밝히면 더는 추궁 안 하겠다’고 했으니까 걔는 더 이상 겁낼 필요 없잖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지금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몸을 겨우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노은서가 보였다. 내가 풍기는 찌들어버린 불운한 기운이 너무나 강렬했던 걸까? 노은서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뭐야?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는 침대에 털썩 누우며 눈을 감았다. ‘그냥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 조용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야, 일어나!” 노은서는 성큼 다가오더니 내 팔을 붙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거짓말하지 마. 너한테서 풍기는 이 원한의 기운, 웬만한 귀신도 도로 되살릴 수 있을 정돈데?” 나는 친구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결국 삶의 끈을 놓는 것을 포기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나도 속에 쌓인 게 많았다. 화, 분노, 모욕감. 그 모든 걸 쏟아낼 창구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노은서가 내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노은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뭐야, 이 쓰레기들?! 지윤아, 넌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어?! 이번에도 주연경이 없었으면...!” 그녀는 말하다가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나는 노은서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됐어, 은서야. 나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하지만 내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노은서는 오히려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흑, 으흑...!” 나는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진짜... 이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나 걱정해 주는 친구 하나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
“그래서, 누가 시킨 건데?” 나는 팔짱을 끼고 지규현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덧붙였다. “말했지? 원한이 있으면 제대로 된 상대를 찾아야지. 난 네 사과 따윈 필요 없어.” 지규현은 이를 악물더니, 결국 유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야. 이 여자가 나한테 돈을 주고 사진을 조작하라고 시켰어.” “뭐...?” 유하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무슨 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그녀는 급히 부정하며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지윤아,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 둘이 짜고 나를 모함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뭐? 이제 내가 모함했다고?’ 나는 순간 황당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지규현을 바라봤다.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지규현.” 나는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말했다. “지금 유하늘 씨는 내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하는데... 결국 그 말은 네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뜻이겠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가볍게 흔들었다. “네가 증거를 못 내면,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거 같아?” 지규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퇴로는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오히려 분노를 품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하늘,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그는 비꼬듯 웃으며 덧붙였다. “미안한데, 전 그렇게까지 호구는 아니야. 죄를 뒤집어쓸 생각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들이밀었다. “여기, 이게 내가 카페 출근하기 전 받은 이체 내역이고. 유하늘이 돈을 보냈다는 증거지.” 나는 지규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려 했
유하늘은 급하게 뛰어온 게 분명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였으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른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유하늘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나 봐?’ 유하늘이 등장한 이후, 지규현의 시선이 슬쩍슬쩍 그녀에게로 향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지규현, 역시, 유하늘이 사주해서 움직였군.’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지규현을 쳐다봤다. 지규현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눈을 피했다. ‘지규현, 그런 시선 회피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태섭아, 지윤이에게 남자친구가 있잖아. 우리도 축하해 줘야지.” 유하늘은 강태섭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런 유하늘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말도 안 돼.” 강태섭은 이를 악물며 지규현을 노려봤다. “네가 무슨 수로 지윤이 남자친구야?” “왜 난 안 돼?” 지규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네 여자친구는 예쁘고 품위 있어 보이는데, 넌 왜 지윤이가 나 같은 사람을 못 만나게 막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자기를 사주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 떠는 건 알겠는데, 왜 굳이 날 깎아내리는 거야?’ ‘지윤이 같은 사람? 내가 이런 놈한테나 어울릴 법한 사람이란 뜻인가?’ 나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규현이 다시 한번 내 어깨를 감싸려 하자, 나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했다. 동시에 손을 들어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그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지규현도 놀라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네가... 감히 나를 때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맞은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때릴 거면 미리 너에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해?” 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나, 우리 사진을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도 있어.” 지규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핸드폰을 살짝
‘뭐야, 대체? 분명 우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로 연애했는데, 강태섭은 왜 항상 자기 마음대로 날 판단하고 시험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커피숍 안을 힐끗 바라봤다. 지규현은 눈썹을 찌푸린 채 밖을 살피면서도,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빠르게 입력하고 있었다. ‘걸려들었네.’ “결과적으로 보면, 넌 그런 속물은 아니었어.” 강태섭은 내가 되묻자, 내가 마음을 돌린 줄 알고 금방이라도 얼굴에 꽃이라도 피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윤아, 너만 좋다면,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하자.” 그는 조심스레 반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완벽하게 컷팅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강태섭을 바라보면서도 시선을 은근슬쩍 커피숍 안에 있는 지규현에게 두었다. 그 순간, 강태섭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윤아, 나랑 결혼해 줘!” 그리고 동시에, 지규현이 마침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떤 신호를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결혼?”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랑 결혼하면, 유하늘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강태섭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널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네 계획은, 결혼은 나랑 하고, 연애는 유하늘과 계속하는 거야?”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태섭에게 집중됐다. “그게...” 강태섭은 주위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강태섭.”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지금이 고대사회도 아니고,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꿈꾸는 거야? 넌 완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야.” 나는 강태섭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불렀다. “지윤아!!”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경호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그 깡패들은 새 떼처럼 흩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다섯 모두 한 놈도 빠짐없이 주연경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경찰서로 넘겨.” 주연경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주연경은 내 팔을 잡고 차로 이끌어 조수석에 태웠다. “놀랐지?” 주연경은 드물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내 얼굴에 묻은 얼룩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찔한 위기까지 겹쳤다고 생각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흥!” 내가 진정한 걸 확인한 듯, 조금 전까지 다정했던 남자의 모습은 싹 사라졌다. “내가 왜 여기 있냐고?” 주연경은 비웃듯이 혀를 찼다. “내가 안 왔으면, 너 오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아?” “그건...”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대체 왜 그 남자를 미행한 거야?” 주연경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꾸짖음이 섞여 있었다. “설마 새 남자친구라도 생겼어? 또 부잣집 도련님한테 속을까 봐 직접 조사라도 해보려고?” “그게 아니라...” 나는 괜히 주눅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결과적으로는 도둑 소굴에 발을 들여놓고도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는 거지?” 주연경은 냉소적인 어투로 덧붙였다. “그냥... 동료일 뿐이에요.”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변명했다. 잠시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서지윤.” 주연경은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 요청할 생각을 안 하지?”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말이죠?” 주연경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집어 들고 맸다. “내 이름은 서지윤이야.”나는 일부러 무심한 듯 말하면서도 지규현의 반응을 살폈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잠깐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나는 지규현.”하루 종일 일하면서 느낀 것은, 지규현이 나에게 유독 친절하다는 것이었다.친절의 수준이 보통 이상이었다.“지윤아.” 소하민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지규현 걔도 너한테 빠져든 거 아니야?”나는 지규현의 등을 슬쩍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너는 진짜 그 예쁜 얼굴이 문제야.”소하민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카페에 왔다 갔다 하는 알바생들, 대부분 너 때문에 남아있는 거 몰라?”“농담 그만하고 진지하게 좀 굴어.”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리 카페는 건전한 장소고, 손님과 직원이 머물러 있는 건 네가 운영을 잘해서 그런 거야.”“알겠어, 알겠어.” 소하민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아무튼 아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나는 다시 지규현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히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치 이성에 대한 호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며 나에게 접근했다.그리고 매일 아침 간식, 오후에는 커피와 디저트, 그리고 퇴근 후에는 저녁까지 나한테 함께 하자고 계속 권했다.기숙사에 돌아오면, 노은서는 매번 나를 기다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오늘은 뭐 했어? 지규현이 또 뭐래?”그러다 한 번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쓰러졌다. “야, 서지윤. 저 지규현, 꼭 옛날 첩보물에 나오는 스파이 같지 않아? 근데 너 절대 걔랑 밥 먹으러 가면 안 돼. 그리고 그가 주는 음식이나 음료도 절대 먹지 마!”“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사람, 대체 뭘 노리는 걸까? 영 찜찜해.”“그러니까 말이야. 빨리 방법을 찾아서 제압하는 게 좋겠어.”노은서는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더니 몇 장을 넘겼다. “지규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