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기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 이슬기였다. 그녀는 오늘 화장은 하지 않고 청바지에 흰 셔츠만 입었다. 그리고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머리는 포니 테일로 묶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섹시하고 요염해 보였다. 순수하면서도 섹시한 두 가지의 모습이 동시에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슬기가 나타나자 홀 안은 적막해졌다. 다들 놀라면서도 뭔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설마 슬기가 하엔 그룹을 대표해서 죄를 물으러 온 건가? 이와 동시에 적지 않은 설씨네 사내들의 슬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정말 섹시한 매력이 있다. 정말 아름답다. 몸매도 섹시하다. 옛날 같았으면 이 설씨 집안 사람들은 감히 슬기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설씨네 집안은 바로 남원의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 이런 여자들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설민혁의 눈빛이 가장 거침이 없었다. 그는 이미 다 생각해 놓았다. 남원의 일이 결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는 반드시 이 여자를 얻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슬기 아가씨 어서 오세요. 얼른 앉아요!”설씨 어르신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역시 세상 물정에 훤한 지라 공손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으며 주스를 대접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비록 지금 설씨 집안은 하엔 그룹과 합작을 깨려고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엔 그룹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슬기가 온 이상 설씨 가문도 감히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 슬기가 온 것을 보자, 설은아도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그녀는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 투자하는 일로 슬기가 자신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설씨 집안이 하엔 그룹의 동의도 없이 쇼핑몰 프로젝트를 팔려고 했다. 그래서 이 말이 입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설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기는 지금 앉지 않고 하이힐을 신고 설씨 어르신 곁으로 걸어갔다
설씨 어르신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지금 슬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서님, 당신…… 그게 무슨 말입니까?”슬기는 가볍게 웃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설민혁에게 시선이 갔다. 이 순간 설민혁은 온몸이 살짝 흔들렸고 일순간 얼굴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설 회장님은 계약서를 꼼꼼히 보셨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아마 당신이 본 것은 어떤 사람이 개정한 계약서 같네요.”“설 회장님이 계약서의 진짜 내용이 무엇인 지를 모르니 제가 오늘 서울 변호사 협회의 여 회장을 특별히 불러 계약서에 있는 내용과 계약서를 위반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 지 그 결과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슬기는 말을 마친 뒤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잠시 후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을 보자 설씨 어르신은 머리가 ‘핑’도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서울변호사협회의 여 회장으로, 신분이 꽤 높았다. 웬만한 가족과 기업은 그를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평일 낮에는 더 없이 어려웠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 슬기의 수행원처럼 지금 여기에 나타났다. “여 회장님, 설 회장님의 가족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슬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후에 지체 없이 한쪽으로 가서 서 있었다. 동시에 아무런 기색 없이 하현이 있는 쪽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슬기의 지시에 따라 여 회장은 고개를 들어올리며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설씨 어르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설 회장님, 오래간만입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설씨 집안에 큰 일이 생겼다고요……”“무슨 큰 일이요?” 설씨 어르신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그 당시 당신들과 하엔 그룹이 투자를 합의하고 서명한 계약서의 사본입니다. 먼저 한 번 보시죠……”여 회장은 서류 한 부를 꺼내 내밀어 설씨 어르신에게 건네주었다. 설씨 어르
뭐?이 땅이 하엔 그룹 소유일 뿐만 아니라, 게다가 지금 하엔 그룹에게 6천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이 말을 듣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회장을 쳐다보는 눈빛이 침체되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며칠 전에도 계약서를 꺼내서 훑어봤는데! 이렇지 않았어! 민혁아 빨리 계약서 좀 꺼내봐!”설씨 어르신은 지금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약 일찍 이런 조항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섣불리 쇼핑몰 프로젝트를 팔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할아버지……”설민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전에 설씨 어르신께 보여준 계약서는 그 당시 설은아가 서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조작한 것이었다. 그는 너무 남원에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남원의 프로젝트는 이미 그의 손에 들어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서 설은아의 손에 속박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남원에 가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계약서를 조작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하엔 그룹의 몇 명 고위층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처리하도록 했다. 원래 설민혁의 계획대로라면 설씨 집안은 하엔 그룹에 찾아갈 필요도 없고 설씨 집안 쪽에서 돈을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여러 가지로 다 계산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엔 그룹의 그 고위직 임원들이 한 말은 쓸모 없는 것이었는가? 슬기가 갑자기 찾아왔다. 책상을 뒤엎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설민혁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이 비서님, 우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닌가요? 이 일을 하기 전에 저는 특별히 하엔 그룹과 그 고위직 임원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모두 대답하기를……”슬기는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설씨 집안은 회장이 한 말이 보증이 됩니까? 아니면 고위직 임원이 한 말이 보증이 됩니까?”“당연히 회장님 말이죠……”설민혁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회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하엔 그룹의 첫 번째
여회장이 떠나가는 걸 빤히 바라보던 설씨 어르신의 두 눈은 이미 실신한 듯했고, 철 왕좌 위에 ‘털썩’ 주저앉아 끊임없이 생각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우리 설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아마 6천억 원은 못 모으겠지?”“근데 이 계약이 어떻게 가짜일 수가 있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적지 않은 설씨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모든 시선이 설민혁에게로 쏠렸고 원망으로 가득 찼다. 만약 이번에 설씨 가문이 망해서 그들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한다면 이건 모두 설민혁의 책임이었다. 설씨 어르신은 깊이 심호흡을 하고 겨우 진정을 하고 나서야 손가락으로 설민혁을 가리키면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민혁아…… 나한테 말해봐…… 너…… 너…… 너 왜 그런 거야!?”“설마 너 이렇게 하면 우리 설씨 집안이 망한다는 걸 몰랐던 거야?”설민혁은 입을 벌리고는 전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정말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를 몰랐다. 한편 설은아는 이 장면을 지켜보며 마음이 착잡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할아버지, 민혁이도 우리 집안을 위한다고 했을 거에요. 고의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손해를 끼치려고 하진 않았을 거에요. 결국 이 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당시 계약에 서명을 했던 것이 문제에요.”설지연은 이순간 설민혁과 이해관계가 있으니 자연히 그의 편에 섰다. “당시 그 계약은 민혁이가 한 게 아니라 설은아가 한 거잖아요! 설은아가 계약을 할 때 이렇게 큰 함정이 있었다는 걸 어떻게 보지 못할 수가 있었겠어요?”“할아버지, 저는 설은아가 하엔 그룹과 손을 잡고 우리 설씨 가문의 재산을 챙기려고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요!”이 말이 나오자 그곳에 있던 설씨 집안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설지연을 한 번 봤다가 다시 설은아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이 말은 딱 들어도 너무 억지스러웠다. 분명 설민혁이 이 계약서를 조작해서 이 재
“인정할건 그냥 인정해! 말을 할 줄 모르면 하지를 말고! 말을 안 한다고 너 벙어리 취급하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이 데릴사위야, 누가 너한테 우리 설씨 집안에서 쫑알댈 자격을 줬니?”설지연은 괴상야릇하게 입을 열었다. 하현은 차갑게 말했다.“이런 핑계까지 찾아낸 마당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지 두렵다. 그 당시에 계약서를 받지 못하고 왔을 때 우리 아내한테 계약서 받아오라고 누가 울면서 소리쳤는지 모르겠네!”“결국 지금 가짜 계약서를 만들고 자기를 기만하면서까지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 이것마저 부인하려고 하는 거야!?” “너희 두 사람 다 똑같아. 그런 말을 하다니, 너희는 할아버지가 바본 줄 알아? 할아버지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아는거야? 너희들을 믿으실 수 있겠니?”상석에 앉아 있던 설씨 어르신은 눈꼬리를 올렸다. 특히 나는 믿지! 내 친손자인데! 내가 왜 안 믿겠어?그러나 문제는 이 데릴사위가 이런 말까지 한 마당에 자신이 믿는다고 하면 분명 어리석게 보일 거라는 것이다. 설씨 어르신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킨 뒤 탁자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됐어! 지금 우리 설씨 집안의 사활이 걸린 마당에 여기서 이렇게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오늘 내가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누가 우리 설씨 집안을 음해하고 있는지 계속 책임을 추궁해봤자 소용이 없어!”“생사존망이 걸린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 설씨 가문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서로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여기서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게 아니라! 다 하나같이 어른인데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뭐가 시급하고 시급하지 않은지도 구분 못해?”설씨 어르신은 정의롭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설민혁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맞는 말은 이 시점에서 계속 책임을 따진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하현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큰소리로 반대했다. 내가 간다. 또 네 데릴사위다! 무슨 일이든 다 각자의 몫이 있다!설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적대시하며 하현을 노려보았는데, 혹시 하현이 미쳐버리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동의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럼 너는 무슨 생각이 있어?”설씨 어르신은 차갑게 하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현은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석고대죄의 고전을 아세요?”“그 다음은?”설씨 어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 생각엔 하엔 그룹 회장은 돈이 부족하진 않을 거에요. 하엔 그룹이 말하길 그들은 화가 많이 났다고 했는데 분명 계약서를 취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일 거에요.”하현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설씨 어르신은 관심을 가졌다.“그럼 하엔 그룹이 신경 쓰는 게 뭔데?”“체면이요.”하현은 단호하게 말했다.“하엔 그룹에 돈이 부족하겠어요? 부족할 리가 없죠!” “하엔 그룹은 하씨 가문의 지원을 받고 있어요. 이런 회사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수단으로 설씨 가문의 기초 산업을 빼앗으려고 하겠어요?”“그런데 우리 설씨 집안 사람들이 계속 그들을 도발하고, 그들의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는데 가만히 생각해 봤을 때 당신들이 하엔 그룹의 회장이라면 당신들은 화가 안 나겠어요?”이 말을 들은 설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잠시 후 모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이 일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증상에 맞게 약을 처방하는 거에요. 하엔 그룹의 체면을 먼저 세워주고 나서 다시 말을 꺼내야 해요. 그렇지 않고 은아가 가서 그들에게 자비를 구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하현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엔 그룹의 체면을 세워주나?” 지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였고 설씨 어르신도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현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효과가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설씨 집안의 태도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요?”“내 생각엔 하엔 그룹 회장이 말은 안해도 설씨 집안의 부사장이 와서 그 문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데 화를 풀지 않겠어요?”“하지만 만에 하나 이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되면 어떻게 하지?” 설씨 어르신은 눈썹을 찡그렸다.“그럼 우리 설씨 가문이 반대로 망신을 당하는 게 되잖아.”“어르신.”하현은 고심하는 얼굴로 말했다.“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해도 하씨 집안에게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는 거잖아요!”“해결이 안되더라도 우리는 시간을 얻어낼 수 있어요. 며칠 시간을 더 벌어 다같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렇죠?”“더구나, 안씨 집안의 골동품 품평회에서 무릎을 꿇었었던 사람이 한 번 꿇으나 두 번 꿇으나 차이가 없잖아요?”설씨 어르신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머뭇거렸다. “물론 만약에 설씨 집안의 회장이 직접 나선다면 더 효과가 좋겠죠.”하현은 뜨거울 때를 이용해서 철을 두드렸다. “만약 제가 가는 게 도움이 될 거 같으면 저는 두말 않고 지금 하씨 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을 거예요.”“하지만 문제는 저는 설씨 집안의 보잘것없는 데릴사위 일 뿐이잖아요? 내가 설씨 집안을 대표할 수 없으니 무릎을 꿇어도 소용이 없을 거에요!”하현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씨 어르신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이 나이에 게다가 그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해 온 사람이다.그에게 가서 개구쟁이에게 무릎을 꿇게 한다면 차라리 직접 목을 매게 하는 편이 더 나았다.하지만 문제는 하현의 말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씨 집안의 태도를 증명하려면 일정한 신분이 있는 사람이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했다. 아무나 마음대로 골라서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마 하엔 그룹이 이것을 설씨 집안의 도발로 여기면 오히려 역효과가
설은아는 착잡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설씨 집안 사람이니 설씨 집안이 잘되기를 바랐다. 설씨 집안의 생사존망의 위기에 설민혁이 사과하고, 게다가 할아버지도 입을 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기 어려웠다. 하현은 몰래 탄식하고 있었다. 원래 이 기회를 틈타 설은아는 설씨 집안에서 더 권한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은아는 성격이 그렇듯 가족애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럴 때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서 얻어낸다 해도 그녀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설은아의 안색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고 설씨 어르신은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민혁아, 이미 결정된 일이니 미루지 말아라. 오후에 사과하러 갈 때 후한 선물을 준비해 가는 것도 잊지 말고.”설민혁은 독촉을 받아 어떻든지 간에 하씨에게로 가야 했다. 설민혁은 예측할 수 없는 얼굴로 설지연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씨의 장래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이 여인은 지금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결국 그녀는 왕씨 가문과 실제로 결혼하지 못했고, 왕정민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이럴 때 그녀는 멍청하게 뛰어들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이렇게 되면 자신은 ‘끝장’이다. 왕씨에게 시집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설지연은 지금 엄청 몸을 사리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일이 결정되자 설씨 어르신은 손을 흔들었고 설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떠난 후에야 설민혁은 비로소 어두운 눈빛으로 설씨 어르신에게 다가가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할아버지, 저 정말 가야 돼요? 저……”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가야 해.”설씨 어르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엔 원래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설은아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 거잖아.”“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심각해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이번
나천우는 주광록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형님, 사양하지 마세요.”“하현, 이 형님 좀 봐줘!”“이 형님이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그래!”주광록은 어쩔 수 없이 나천우의 체면을 생각해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알았어. 자, 그럼 하 대사 좀 봐 보세요!”방금 두 사람이 악수를 했을 때 하현은 주광록의 몸에 죽음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죽음의 기운이 무엇을 뜻하는가?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운이 극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겉으로 보기에 그의 몸은 여전히 건강한 듯했지만 사람 전체에 생기가 뚝 떨어진 것이다.죽음의 기운은 보통 임종을 앞둔 노인에게만 나타난다.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염라대왕이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바로 이런 불길한 기운이 죽음의 기운인 것이다.하현이 자세히 주광록의 얼굴을 보니 역시나 온몸이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만약 그가 관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미 열흘이나 보름 전에 죽었을 것이다.관운이 그를 그나마 비호해 주었기 때문이다.다만 관운이 그를 지켜주었다고 하더라도 일단 죽음의 기운이 퍼지면 결국 주광록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한참을 주광록에게 시선을 깊숙이 고정했던 하현은 그의 손에 차량 열쇠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아우디 A8인 것 같았다.하현의 눈에는 바로 이 열쇠가 불길한 기운의 집합체로 보였다.지금 이 순간도 죽음의 기운이 계속 퍼져 주광록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하현은 잠시 눈초리를 가늘게 뽑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 부장님,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제가 보기엔 부장님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아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게다가 이 불길한 기운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 잦은 사고가 발생했거나 심각한 병이 덮쳤을 겁니다.”“
나천우의 말을 들은 주광록은 다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어르신도 참 강경한 스타일이시지.”“예전에는 나한테도 방법을 좀 생각해 봐 달라고 하셨었지. 아는 명의들 좀 소개해 달라고.”“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당신이 아는 사람들이었어.”분명 주광록은 은둔가 나 씨 가문과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천우의 아버지가 그에게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임단은 주광록에게 손수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많이 애써 주신 거 다 알아요.”주광록은 자리에 앉은 뒤 나천우 부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그런데 두 분이 이렇게 느긋하게 차도 마시러 나올 기분이 되었다니, 아마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지?”“하하하! 확실히 해결되긴 했죠!””안 그랬으면 주 부장님의 혜안이 밝았다고 할 수 없죠, 안 그래요?”“그리고 이 모든 게 다 하 대사 덕분입니다.”“주 부장님, 제가 소개해 드리죠.”“이분은 저와 형제나 다름없고 저의 귀인이자 뛰어난 풍수지리사, 하현입니다!”“또한 우리 부부의 오랜 골치거리였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나천우는 하현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하현, 이분은 금정 관청 주택건설부 부장님이신 주광록, 내 형님이나 마찬가지야.”“앞으로 금정개발에 무슨 어려움이 있거나 누군가 집복당을 괴롭히는 일이 있다면.”“언제든지 주 부장님한테 전화해. 그러면 그가 모든 걸 책임지고 해결해 줄 거야! 장담해!”하현은 나천우가 자신을 위해 금정의 인맥을 소개해 준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다지 탐탁지는 않았지만 오른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주 부장님, 안녕하세요.”주광록도 하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했다.두 사람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하현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주광록을 바라보았다.죽음의 기운?한창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주광록의 몸에서 죽음의
하현의 말에 임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원래 이 일을 몰래 진행하려고 했었다.그런데 하현의 조언을 듣고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몰래 땅을 취하려고 하면 상대는 이 땅에 뭔가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훼방을 놓으려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정개발이 이여웅과 경쟁하기 위해 완전히 악수를 두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손가락질하며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최소한의 대가로 이 쓰레기 매립장을 차지할 수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충분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금정 화원 유적지를 찾는 순간 이 프로젝트는 홍보도 없이 단숨에 유명해질 수 있다.임단의 눈에 감격에 겨운 빛이 가득 흘러넘쳤다.그녀는 하현이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다.그런데 그는 진작부터 그녀를 도울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임단으로서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양측 사이에 일어난 약간의 오해가 풀렸을 즈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웅웅웅!”식사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 나천우의 핸드폰이 갑자기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는 잠시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은 뒤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하현, 잠시 후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올 거야.”“당신이 이래저래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하지만 이 사람은 알고 있으면 당신의 풍수관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만약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앞으로 당신은 금정에서 훨씬 운신의 폭이 커질 거야.”하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천우를 힐끔 쳐다보았다.은둔가의 나 씨 가문 나천우가 이렇게 진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상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누군데?”나천우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약 30분이 지나자 노크 소리가 들렸고 임단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나천우, 아, 제수씨도 계셨네요? 이제 두 분의 사업이 크게
”무덤에 가서 단련을 해요?”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사님, 저는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옆에 있는 공원에 가는 거예요. 무덤에 가지 않습니다!”“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가장 꺼리는 거예요!”노인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무덤에 가 본 적이 없는 그가 왜?하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그럼 길에서 현금을 주운 적이 있습니까? 그 안에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가 있어서 혹시 그 종이를 들고 장수를 빌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하현은 노인을 자세히 응시했지만 음기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어딘가에서 음기에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니 돌아가셔서 계속 조심하세요. 어르신의 체질로 봤을 때 해가 뜨기 전에는 외출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하현의 말을 들은 노인 부부는 삼만 원을 남기고 떠났다.하현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가 아직 남아 있는 손님들의 문제를 해결했다.다행히 이 손님들은 기본적인 택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도 않았다.거의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하현은 나박하에게 전화를 걸어 금정 남쪽 편에 있는 금공관으로 갔다.두 사람이 예약한 방에 막 도착하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나천우와 임단이 일어섰다.임단은 직접 하현에게 차를 따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당신이 금정개발을 위해 방법을 강구해 주었는데 내가 별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어!”“게다가 당신이 써 준 종이에 물까지 묻혀 망가뜨리다니!”“다 내 잘못이야.”나천우도 미안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당신이 한 말이 자꾸 떠올랐어. 젊은 나이에 풍수지리술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금정의 지맥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지금까지 금정의 그 수많은 대사들은 좋은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결국 당신이 발견했어!”“당신한테 정말
”다만...”화성봉은 종이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 지맥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물이 묻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이곳은 공중 정원의 유적지가 있었던 곳입니다.”“그런데 이곳의 좌표가 없으면 우리는 그 지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금정 화원의 진위 여부를 세상에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안타까워하는 화성봉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임원들의 시선이 갑자기 임단에게 쏠렸다.은연중에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의 기색이 슬몃슬몃 떠올랐다.“우선, 내가 전화해서 하현에게 물어보겠습니다...”임단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다음 날 아침.일찍부터 집복당에서 인테리어를 지켜보던 하현은 나천우와 임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그들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현에게 청했다.하현은 금정개발에 관련한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거절하지 않았다.서둘러 황보정에게 자신의 일들을 맡긴 뒤 그는 떠날 채비를 했다.그러나 하현이 문을 나서기도 전에 장용호가 당황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대사님, 큰일 났습니다. 누가 쓰러졌어요.”“우리 집복당 앞에서 사람이 쓰러졌어요.”“그는 최근 며칠 동안 밤마다 유령을 보고 잠을 이루지 못해서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어요.”“줄을 서라고 했더니 결국 기절해서 입에 거품까지 물었어요...”장용호는 은근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손을 쓰는 도중에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자신에게 오명이 씌였을 터였기 때문이다.하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로비에는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회색 가운을 입은 노인을 둘러싸고 있었다.노인은 완전히 기절한 채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입가에 흰 거품을 물고 있었다.그의 옆에는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안 죽는다고 버티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요?”“진작에 집복당에 가자고 했건만 괜찮다고 그렇게 버티더니 이게 뭐예요? 시간만 끌었잖아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아 몰고 간 뒤 화성봉은 벌벌 떨며 말했다.“임 사장님, 이거 누가 그려준 거죠?”“이 그림을 그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보통 대단한 분이 아닙니다.”“혜안이 아주 깊은 분이 틀림없습니다.”“이분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했던 금정의 지맥을 간단하게 그려낸 분입니다.”“게다가 공중 정원이 있는 곳도 정확히 지목했어요!”“이 땅을 점령하고 그 증거만 찾을 수 있다면!”“우리 금정개발은 단연코 이 업계를 휩쓸 것입니다!”“임 사장님, 이분이 누군지 말해 주십시오! 그를 좀 만나야겠습니다!”“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평생 무료로 그분 밑에서 일을 할 겁니다.”지금 이 순간 화성봉은 대가의 풍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마치 어린아이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상기된 그의 얼굴과 감격에 겨운 그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금정개발의 고위 임원들은 하나같이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다들 어리둥절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임단이 아무렇게나 꺼낸 종이에 그렇게 대단한 정보가 들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의 지맥?만약 이것이 금정 부동산 업계에 알려진다면 모두가 미쳐 날뛸 것이다.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대하는 예로부터 풍수를 중시해 왔다.명당자리에서 계속 살면 당연히 건강하고 인재가 끊이지 않아 집안이 번창한다고 믿었다!부동산 개발 회사가 이런 곳에 주택을 개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성공이 없었다.그런 주택을 개발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금정의 지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그래야 명당자리를 제대로 보고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금정땅의 지맥이 그려진 종이가 지금 임단의 손에 있었다.방금 전까지 금정개발은 거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는데 한순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이제는 창창한 앞날이 펼쳐진 성공적인 미래가 눈에 그려졌다.이 안에
확신에 찬 화성봉의 말을 듣고 임단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금정개발이 파산하지 않고 번창할 수만 있다면 금정개발을 하현에게 넘겨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나천우도 이 일로 인해 상류사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아마도 후방에서 뛰어난 책략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룬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임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여웅 그놈이 이 일로 득의양양해할 것을 생각하니 이 또한 달갑지 않았다.그놈은 어릴 때부터 임단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언젠간 임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다.만약 몰아치는 그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다면 그놈은 더더욱 기고만장해질지도 모른다.아니면 소남 임 씨 가문을 직접 앞세워 이여웅을 직접 짓밟아 버릴까?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사소한 일에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임 씨 가문이 나서서 이여웅을 제압한다면 가문 쪽에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을까?은둔가 나 씨 가문을 이용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 방법이었다.은둔가가 은둔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쉽게 말하자면 은둔가는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을 좋아한다.이렇게 직접 앞에 나서서 싸우는 일은 은둔가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임단은 자신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졌다.정말 이대로 이여웅 그 개자식의 오만한 얼굴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심난해져서 찻잔을 들어 단숨에 차를 들이켰지만 그만 찻물을 옷에 살짝 흘리고 말았다.순간 정신을 다잡은 임단은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종이 한 장을 꺼내 흘린 찻물을 닦았다.“잠깐만요.”그때 가만히 있던 화성봉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임 사장님, 움직이지 마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얼른 임단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는 방금 어렴풋이 명당자리를
임단에게 있어 금정개발은 그리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자신의 실패로 인해 나천우가 상류사회에서 두고두고 입방아에 올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사업체를 향한 이여웅의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야 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임단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심장이 살짝 오그라 붙었다.그들은 나서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임단은 약간 실망한 듯 십여 명의 임원들을 쳐다보았다.평소에 높은 연봉과 보너스를 받으며 지내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입을 닫아 버린 것이다.정말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들일 줄은 몰랐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임단의 시선은 회사에서 새로 고용한 고문 풍수지리사 화성봉에게로 향했다.화성봉은 금정에서 명성이 매우 높았고 장천준과 황보동에 견줄 만한 풍수지리사였다.그는 자신의 이런 높은 지위로 일 년에 몇 번씩만 고위 관직들의 풍수를 봐주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다.그가 금정개발의 수석 풍수지리사가 된 이유는 전임 수석 풍수지리사가 퇴직한 이후 아무도 대신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은둔가 나 씨 가문의 많은 인맥을 동원해 겨우 화성봉을 데려온 것이다.이런 까닭으로 그는 비록 금정개발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위만은 상당히 높았다.임단은 공손한 얼굴로 화성봉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화 대사님, 방법이 없을까요?”“임 사장님, 제가 돕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다...”“금정에서 시장에 나온 핵심 요지는 모두 진화개발이 가격을 올려놓았습니다.”“정말로 진퇴양난입니다.”“대체 부지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렵게 되었군요.”“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침반만 들고 금정을 몇 바퀴나 걸었습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땅을 찾지 못했습니다.”말을 마치며 화성봉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실제로도 그는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쓰레기 매립장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이 땅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우리 금정개발은 앞으로 분명히 번창해서 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게 될 거야.”하현이 이곳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천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하현이 풍수 관상에 대해서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땅을 보는 눈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이 땅은 이미 많은 풍수 대가들이 가 봤지만 쓰레기 매립지였기 때문에 풍수가 완전히 뒤틀리고 망가진 곳이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하현이 대충 위치만 보고 이곳을 개발한다면 분명 금정 부동산 업계의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하지만 하현이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가 깊기 때문에 나천우도 털어놓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하면 하현의 체면을 구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게 될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개발하는 주택 외에는 다른 어떤 집도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거야!”“다른 어떤 집도 팔리지 않는다고?”이 말을 듣고 나천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하현이 아무리 기고만장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땅을 선정할 수 있는가?금정 부동산 업계를 휩쓸려면 쓰레기 매립장 부지 하나로 될 수 있겠는가?“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겠다니?! 하현, 야망이 너무 큰 것 같은데...”임단도 나천우와 마찬가지로 살짝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어이가 없는 듯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하현이 너무 허무맹랑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아무리 뛰어난 해외 개발업자가 지은 주택이라도 금정 부동산 업계를 휩쓸지는 못할 것이다.하현의 말은 너무도 순진하게 들렸다.순간 그녀는 하현에게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어쨌든 그녀가 이번에 하현을 찾아온 것은 그가 은둔가 형 씨 가